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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한으로 완성된 반세기의 기록
텍사스 출신의 아방가르드 펑크 밴드 버트홀 서퍼스(Butthole Surfers)의 45년 역사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홀 트루스 앤 나씽 벗(The Hole Truth and Nothing Butt)》이 최근 미국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 시네마(Alamo Drafthouse Cinema) 체인을 통해 개봉했습니다. 배급사 없는 독립 영화를 지원하는 '알라모 익스클루시브' 프로그램의 첫 작품으로 선정된 이 영화는 시작부터 파격적인 경고 문구를 내세웁니다. 섬광 조명과 약물 사용, 인형 폭력, 그리고 '회한'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문구는 이 밴드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파격의 이면에 감춰진 회한
1970년대 후반 프론트맨 기비 헤인즈(Gibby Haynes)와 기타리스트 폴 리어리(Paul Leary)의 만남으로 시작된 이 그룹은 강력한 섬광 조명과 기괴한 영상 투사, 충격적인 무대 연출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연출을 맡은 탐 스턴(Tom Stern) 감독은 이러한 충격적인 겉모습 아래에 수많은 감정의 층위가 존재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밴드는 1991년 제1회 롤라팔루자 투어 참가와 1996년 "Pepper"의 빌보드 모던 록 차트 1위 등 대중적 성공을 거두는 동시에, 구성원 각자의 개인사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시련을 겪어 왔습니다.
성공과 중독, 그리고 이별
"Pepper"의 성공 이후 소속 레이블은 후속 히트곡을 요구했고, 당시 헤인즈는 헤로인 중독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드러머 킹 코피(King Coffey)는 이 시기를 밴드의 가장 어두운 국면으로 회고했습니다. 헤인즈는 현재 약 12년째 약물을 끊은 상태라고 밝혔으며, 밴드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편 오랫동안 밴드와 함께한 드러머 테레사 테일러(Teresa Taylor)는 2023년 6월 폐기종으로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코피는 그녀가 사실상 작별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이라고 전했습니다.
유년의 상처와 가족이라는 답
영화에서 가장 무겁게 다가오는 장면은 헤인즈가 네 살 무렵 이웃으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고백하는 대목입니다. 그는 이 사건을 밴드 동료들에게조차 오랫동안 밝히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올해 66세인 헤인즈는 현재 변호사인 아내, 11세 아들과 함께 브루클린에 거주하며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극단적인 무대 연출로 사회적 존중을 받지 못했다고 토로하던 그가, 이제는 가정을 지키며 자신의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모습은 이 다큐멘터리가 전하는 또 하나의 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대를 넘어 전하는 메시지
리어리는 9·11 테러 이후 무대 위 광기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며 투어 재개를 거부하고 있으나, 밴드는 2025년 9월 할리우드 상영회에서 8년 만에 다시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젊은 시절의 방종이 결국 가족과의 화해, 정직한 자기 고백으로 귀결되는 이 서사는 이제 시니어 세대에 접어든 예술가들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어떻게 정리하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파격적인 표현의 자유는 존중받아야 하나, 그 자유에는 반드시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과 가족에 대한 도리가 함께 따라야 한다는 점을 이 다큐멘터리는 우회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성공 이면의 중독과 상실을 냉정하게 되짚는 태도야말로, 질서와 균형을 중시하는 사회가 예술적 파격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전제 조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재까지 이 다큐멘터리의 국내 개봉이나 스트리밍 서비스 제공 일정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관심 있는 독자께서는 해외 영화 배급 소식과 국내 OTT 서비스 편성표를 통해 개별적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오지브웨 작가 데이비드 트루어가 프린스턴에서 발견한 역설
미국 미네소타주 리치 레이크(Leech Lake) 인디언 보호구역 출신의 작가 데이비드 트루어(David Treuer)가 최근 뉴욕타임스 인터내셔널 에디션에 기고한 개인적 회고는, 소수자에게 사회가 오랫동안 강요해 온 '고통의 서사'라는 관행을 정면으로 되짚어 보게 합니다. 오지브웨(Ojibwe) 부족 출신인 그는 1985년 봄 프린스턴 대학교 합격 통지를 받고, 그해 가을 어머니의 승합차를 타고 뉴저지로 향하면서 가난과 편견으로 얼룩진 과거를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현실은 기대와 전혀 달랐습니다.
트루어는 백인 아버지를 두었다는 이유로 정작 고향 보호구역에서조차 '진짜 인디언'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프린스턴 캠퍼스에서는 인디언이라는 사실만으로 동정 어린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그의 집에 전기와 수돗물이 들어오고 알코올 중독 문제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에게 쏠렸던 관심은 순식간에 식어버렸습니다. 그는 동정받을 이유가 없는 평범한 존재가 되는 순간 오히려 주변에서 소외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고백합니다. 한 백인 교수는 그에게 학자와 전통 치료사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는데, 이는 명문 대학의 지식사회조차 소수자를 정형화된 틀 안에서만 이해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트루어로 하여금 한동안 자신의 출신 배경을 실제보다 훨씬 비참하게 과장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나 자동차를 처음 본 순간의 두려움 같은 이야기를 지어낼수록,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더욱 진실로 받아들였다고 그는 전합니다. 그는 미국의 건국 문서에서 인디언이 한때 '무자비한 야만인'이라는 표현으로만 잠시 언급되었다가 본문에서 제외되었던 역사를 함께 짚으며, 이러한 법적·역사적 배제가 소수자를 결핍과 고통으로만 규정해 온 뿌리 깊은 인식과 맞닿아 있다고 지적합니다. 공교롭게도 1980년대 들어 다수의 보호구역에 카지노 산업이 들어서며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고, 리치 레이크 역시 생활 수준이 다소 개선되고 있었습니다. 트루어는 그제야 자신이 거짓 서사를 지어냈을 뿐 아니라, 그 거짓 서사를 소비하는 사회 전체의 일부였음을 깨달았다고 회고합니다.
주목할 대목은 트루어가 결국 '고통받는 인디언'이라는 서사도, 그 반대편에 놓인 '역경을 극복한 특별한 인디언'이라는 서사도 함께 거부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대학원 과정을 중도에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냥과 낚시, 자작나무 공예 같은 화려하지 않은 생업을 이어가며 평범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택했습니다. 그는 보호구역 사람들의 삶이 결핍과 비극이 아니라 이혼, 자동차 대출, 소소한 성취와 실패로 채워진 지극히 평범하고 복잡한 인간의 삶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서, 첫 소설의 출간 제안을 전화 자동응답기로 확인했던 순간의 벅찬 기쁨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확인했다고 담담히 글을 맺습니다.
이 회고가 시사하는 바는 특정 소수민족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어떤 집단이든 사회가 정해 놓은 단일한 틀, 즉 동정받아야 할 약자이거나 혹은 역경을 극복한 영웅이어야 한다는 이분법에 갇히는 순간, 그 구성원 개개인이 지닌 평범하고 온전한 삶의 존엄은 오히려 지워지기 쉽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시니어 세대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줍니다. 시니어를 일방적인 돌봄의 대상으로만 규정하거나, 반대로 특별한 성공 사례로만 조명하는 방식 모두, 정작 대다수 시니어가 살아가는 평범하고 존엄한 일상의 가치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회고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어떤 집단에 대한 연민이나 배려도, 그 집단을 정해진 서사 안에 가두는 순간 또 다른 형태의 편견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존중은 특정한 이야기를 요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평범한 삶과 그 삶이 뿌리내린 공동체적 유대, 그리고 개인의 성실한 노력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감상적인 동정도, 무비판적인 영웅화도 아닌,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합리적 기준이야말로 소수자와 시니어를 비롯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를 대하는 데 있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 할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넘어지는 로봇, 새로운 오락이 되다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는 시대에, 오히려 인간을 가장 크게 웃게 만드는 영상은 따로 있습니다. 두 발로 걷고 뛰도록 설계된 로봇이 벽에 정면으로 부딪히거나,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 쓰러지는 장면입니다. 최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러한 '로봇 실패 영상'은 순수한 신체적 희극과 더불어 죄책감 없는 고소해함(Schadenfreude), 그리고 '아직은 인간이 낫다'는 은근한 우월감을 동시에 안겨주며 새로운 오락 장르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베이징 로봇대회가 보여준 두 얼굴
지난달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휴머노이드 로봇대회는 이러한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두 다리로 달리는 로봇들의 트랙 경기에서 일부는 우사인 볼트의 100미터 기록을 뛰어넘는 놀라운 성과를 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로봇들은 장벽에 그대로 돌진해 무너지거나, 만화처럼 불꽃을 튀기며 뒤로 자빠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역도 종목에서는 바벨을 놓친 로봇이 얼굴부터 바닥에 넘어지자, 무표정한 진행 요원들이 이를 들것에 실어 나르는 장면이 관중의 폭소를 자아냈다고 전해집니다. 높이뛰기와 권투, 치어리딩까지 선보이며 로봇공학의 비약적 발전을 과시하려던 이 대회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가장 즐겨 찾는 '실패 로봇' 콘텐츠의 산실이 된 셈입니다.
웃음 뒤에 숨어 있는 불안
미국 UCLA의 로봇공학 교수이자 로봇 메카트로닉스 연구소(RoMeLa) 소장인 데니스 홍은, 세탁기가 고장 나는 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지만 배달 로봇이 부두 아래로 떨어지거나 휴머노이드가 춤 동작 중 고꾸라지는 모습에는 사람들이 단순한 슬랩스틱 이상의 반응을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로봇을 개선하는 데 매진하는 그 자신조차 남의 로봇이 실패하는 영상을 보며 즐거움을 느낀다고 인정했습니다. 카네기멜론 대학교의 류창류 교수 역시 학생들에게 로봇 실패 영상 모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실제 환경에서 벌어질 수 있는 더 큰 위험을 점검하는 교육 자료로 활용됩니다. 그는 로봇이 무대를 벗어나 예측 불가능한 인파 속으로 들어갈 때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고 지적하며, 인증 기준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무대를 벗어난 로봇, 커지는 우려
문제는 이러한 실패가 통제된 무대를 벗어나 실제 대중 앞에서 벌어질 때입니다. 로봇을 비교적 저렴하게 제작해 곳곳에 배치하는 일부 국가에서는, 회전 동작을 자랑하던 로봇이 실수로 어린아이를 가격하거나, 사무용 로봇이 갑자기 위협적인 동작을 취해 동료들이 놀라 도망치는 사례까지 보고되고 있습니다. 홍 교수는 과거 로봇이 호기심의 대상이자 미래의 집사로 기대를 모았다면, 이제는 일자리를 빼앗거나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로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이는 재난 대응처럼 유익한 로봇 기술을 개발하는 이들에게는 안타까운 변화라는 것입니다.
균형 잡힌 시선이 필요하다
로봇의 실패를 보며 웃는 인간의 심리에는, 거대 언어 모델(LLM)과 자동화 기술이 인간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해 가는 데 대한 깊은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웃음은 그 불안을 잠시 잊게 해주는 위안일 뿐, 근본적인 해법은 아닙니다. 따라서 로봇 기술의 발전을 무조건 예찬하거나 반대로 막연히 경계하는 태도 모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혁신을 지원하되,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에 로봇을 배치할 때는 엄격한 안전 인증과 책임 기준을 함께 요구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합니다. 기술은 결국 인간의 존엄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해야 하며, 그 원칙이 흔들리지 않을 때 비로소 로봇의 발전도 시니어를 포함한 모든 세대에게 신뢰받는 진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남긴 질문
최근 미국 사회에서는 정부 효율화라는 명분 아래 대대적인 공공 부문 인력 감축이 추진되면서, 정작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최전선 인력까지 감축 대상에 오르는 사례가 잇달아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미국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저출생·고령화 속에서 공공서비스 효율화를 고민해야 하는 한국 사회 역시, 숙련된 경력자의 경험을 어떻게 평가하고 대우할 것인가라는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The New Yorker)가 심층 취재한 미국 산불 진화 특수부대 '스모크점퍼(Smokejumper)'의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한 유의미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87년 역사, 낙하산으로 산불에 뛰어드는 사람들
스모크점퍼는 도로가 없는 험준한 오지에서 산불이 발생했을 때, 수송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는 소방대원을 말합니다. 미국 알래스카를 비롯해 서부 지역 아홉 곳의 기지에 소속되어 있으며, 1939년 워싱턴주에서 하나의 실험으로 시작된 이래 87년 동안 약 6,000명이 이 직업을 거쳐 갔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훗날 외교관, 대학교수, 우주비행 관계자로 성장한 이들도 있을 만큼, 혹독한 훈련과 실전 경험이 만들어 내는 인재의 폭은 넓습니다.
신참 대원은 오십 킬로그램에 가까운 배낭을 메고 장거리를 주파하는 등 5~6주에 걸친 극한 훈련을 거치며, 그중 3분의 1가량이 중도에 탈락합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이들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현장 판단력을 쌓아 갑니다. 32년의 경력을 지닌 78세의 시니어 베테랑 로드 다우(Rod Dow)는 은퇴한 뒤에도 여전히 알래스카 기지를 찾아 후배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37년 차 베테랑이자 정년퇴직을 앞둔 빌 크레이머(Bill Cramer) 대장은 산불 현장에서 신참들에게 지휘권을 넘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조직은 경력에 따른 서열이 아니라, 그날 가장 준비된 사람이 지휘를 맡는 구조를 87년째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효율화의 이름 아래 흔들린 안전망
그런데 2025년, 미국의 정부효율성부(DOGE)가 예산 절감을 이유로 연방 인력 감축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화재 감시원과 스모크점퍼를 포함하는 '산림 기술자' 범주 전체가 한때 감축 명단에 오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내무부 산하 토지관리국의 소방 지도부가 공공안전 인력은 감축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반발한 끝에 스모크점퍼들은 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웃한 몬태나주에서는 산림청 소속 산림 기술자 약 360명에 대한 해고 지시가 그대로 집행되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화재 진화 대원으로도 근무하는 인력으로, 스모크점퍼의 초임 시급은 약 25달러(약 3만5,000원), 초과 근무 수당은 시간당 약 38달러(약 5만3,000원) 수준에 그친다는 사실이 함께 알려지며 논란을 키웠습니다. 이 감축에 항의했던 4년 차 대원 샘 포스태그는 결국 소속 기관으로부터 사실상의 인사 보복을 겪었고, 이후 정치에 투신해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경험은 비용이 아니라 자산입니다
이 사건이 보여 주는 구조적 문제는 명확합니다. 효율화 정책이 인력을 단순한 숫자와 직급명으로만 분류할 때,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위기 대응 판단력이라는, 결코 예산 항목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를 놓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스모크점퍼 조직이 87년간 유지해 온 힘은 다름 아닌 베테랑에서 신참으로 이어지는 경험의 전수 체계였습니다. 이 체계를 정교하게 들여다보지 않은 채 일률적인 잣대로 인력을 재단한다면, 정작 위기의 순간 그 공백을 메울 방법이 없습니다.
한국 사회를 향한 시사점
이는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시니어 세대를 단순한 복지 수혜자나 인건비 부담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은, 정작 이들이 오랜 세월 축적해 온 위기 대응 능력과 조직 운영의 지혜라는 자산을 사장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독일 사회정책에서 강조되어 온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의 균형 원리는 여기서도 유효합니다. 정부는 숙련된 인력에게 정당한 지원과 예우를 제공하는 동시에, 합리적인 성과 기준과 책임을 요구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만을 앞세운 정책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습니다.
전통과 안전을 지키는 합리적 기준이 필요합니다
산불 앞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이들의 이야기는 결국 한 사회가 안전과 질서를 어떻게 지켜 낼 것인가에 관한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무분별한 감정적 감축도, 무비판적인 조직 존속도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검증되어 온 경험과 질서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시대 변화에 걸맞은 합리적 기준으로 공공서비스를 재정비하는 균형 잡힌 개혁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입니다. 시니어 세대의 경험을 사회적 자산으로 존중하는 문화가 뿌리내릴 때, 우리 사회의 안전망 역시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말을 잃은 손이 세상과 나눈 대화
뉴질랜드 출신의 화가 수잔 테 카후랑기 킹(Susan Te Kahurangi King)은 올해 일흔다섯을 맞은 시니어 예술가입니다. 그녀는 세 살 무렵 갑자기 언어를 잃고 자폐 스펙트럼(Autism Spectrum) 특유의 세계 속으로 침잠했지만, 연필을 쥔 손끝만큼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습니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과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그녀의 드로잉을 영구 소장품으로 등재했고, 뉴욕의 저명한 미술평론가는 그녀를 20세기 거장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에 견주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고국 뉴질랜드에서조차 그녀를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The New Yorker, 2026년 9월 7일 자)가 그녀의 삶을 심층 보도하면서, 한 시니어의 늦은 재능이 세상에 다시 드러나기까지의 과정이 새삼 주목받고 있습니다.
마흔 살의 절필, 그리고 열여섯 해의 침묵
킹은 1950년대부터 30여 년간 쉼 없이 그림을 그렸으나, 마흔 살 무렵 돌연 붓을 놓았습니다.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 16년 동안 그녀는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1973년, 지적장애 아동을 돕기 위한 한 자선 전시에 그녀의 드로잉 두 점이 출품되어 단 3파운드(현재 환율 기준 약 5,900원, 2026년 9월 5일 서울 외환시장 기준)에 팔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녀의 재능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던 시절의 단면입니다. 그러다 2008년, 가족들이 다시 그림 도구를 손에 쥐여준 것을 계기로 창작이 재개되었고, 이듬해 58세의 나이로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한 점당 수천 달러에 이르는 수표를 받는 작가로 거듭났습니다. 2013년 파리에서 열린 아웃사이더 아트 페어(Outsider Art Fair)에서는 출품작 전량이 팔려나가는 성과도 거두었습니다.
가족이 지켜낸 70년의 기록
킹의 재기를 가능케 한 것은 다름 아닌 가족의 헌신이었습니다. 그녀의 외조모는 손녀가 말 대신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챈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평생 딸의 상태를 세세히 기록했습니다. 여동생은 지난 20년간 언니가 남긴 약 2만 장의 드로잉을 손수 정리하고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왔습니다. 반면 1965년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을 당시에는, 스스로 의사를 말로 표현하도록 유도한다는 명분 아래 목욕과 식사는 물론 그림 도구까지 박탈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녀를 지켜낸 것은 제도가 아니라 가족의 곁이었다는 사실이 이 보도의 핵심입니다.
아웃사이더라는 이름의 두 얼굴
미술계는 킹과 같이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의 작품을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r Art)라 부릅니다. 이는 1940년대 프랑스 작가 장 뒤뷔페(Jean Dubuffet)가 창안한 아르 브뤼(art brut, 가공되지 않은 예술)라는 개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큐레이터들 사이에서조차 이 명칭이 예술 그 자체가 아니라 제작자의 사회적 지위만을 지칭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됩니다. 킹을 대변하는 갤러리스트 역시 그녀의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이 작품 평가의 본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재능은 재능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이 원칙은, 시니어의 능력을 나이나 질환이라는 틀로만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우리 사회의 과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한국 역시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시니어와 발달장애를 지닌 가족 구성원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킹의 사례는 국가·시설의 역할과 가족의 역할이 상호 보완적이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지원(Fördern)이라는 이름 아래 제도가 개입하더라도, 그 방식이 인격을 무시한 획일적 통제로 흐를 경우 오히려 당사자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사례가 증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부담을 가족의 헌신에만 지우는 것 또한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가족의 곁을 국가가 합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기준, 즉 요구(Fordern)와 지원의 균형입니다. 전통적인 가족 질서를 존중하되, 그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합리적인 사회적 안전망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늦게 핀 꽃이 전하는 메시지
킹의 이야기는 나이가 들어서도 인생의 절정이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녀는 58세에 첫 전시를 열었고, 64세에 정식 진단을 받았으며, 지금 75세에도 세계 유수의 갤러리에서 신작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시니어를 은퇴 이후 소진된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성장하고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적 자산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시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전통적인 가족의 유대와 합리적인 사회적 지원이 함께할 때, 시니어의 잠재력은 나이와 무관하게 다시 꽃필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노년의 화가는 붓으로, 그리고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79세 사운드 아티스트가 들려준 범고래와의 13년 협연, '평생 현역'을 증명하다
지난 8월 어느 저녁, 미국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한 호텔 옥상에는 200여 명의 문화 애호가가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새 음반 '범고래의 최대 히트곡(Orcas' Greatest Hits)'의 발매를 축하하고, 그 음반을 만든 79세의 사운드 아티스트 짐 놀먼(Jim Nollman)의 오랜만의 뉴욕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백발에 흰 수염을 기른 그는 범고래가 그려진 티셔츠 차림으로 행사에 등장해 함께 소리를 나눈 범고래들에게 먼저 고마움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날 발매된 음반에는 놀먼과 동료들이 수중 마이크와 신중하게 배치한 보트를 이용해 야생 범고래와 즉흥 합주를 펼친 13년간의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놀먼의 이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매사추세츠에서 성장해 터프츠 대학교(Tufts University)에 다니던 시절부터 실험적 무대 연출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이후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점토 피리로 이웃집 칠면조를 울게 하거나, 샌프란시스코 인근 농장에서 300마리의 칠면조와 함께 민요를 녹음하는 등 수십 년에 걸쳐 다양한 동물과의 음악적 교감을 시도해 왔습니다. 이후 그의 실험은 캥거루쥐와 늑대를 거쳐 하와이의 돌고래로 확장되었으나, 정작 바다에서 돌고래의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해 좌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대중과 후원자들의 관심은 계속 이어졌고, 그는 마침내 직접 큰 배 위에 세계 최초의 수중 녹음 스튜디오를 만들어 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 도전이 어떤 거대한 제도적 지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오르카난다(Orcananda)'라 이름 붙인 이 작은 만의 스튜디오는, 범고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들이 스스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전기기타 연주로 범고래의 호기심을 유도하고, 노래가 시작될 때만 녹음 버튼을 눌렀다는 그의 방식에는 카디시(유대교 기도문)를 읊는 한 시니어부터 티베트 라마승, 신시사이저 연주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이 동참했습니다. 놀먼은 범고래가 인간의 기교보다 강한 리듬, 즉 그루브(groove)에 반응한다는 점을 일찍이 깨달았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제임스 브라운 풍의 리프를 연주하자 범고래 무리가 함께 춤을 추듯 반응했고, 인도 음악 양식인 라가(raga)를 바탕으로 47마리의 범고래 한가운데서 즉흥 연주를 펼친 사례, 12마디 블루스 진행에서 범고래가 코드 변화를 함께 만들어 낸 사례 등은 그의 예술적 통찰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13년간 쌓인 약 60시간 분량의 테이프는 오랫동안 창고에 잠들어 있다가, 최근 미국의 저명한 음반 아카이브인 스미소니언 포크웨이스(Smithsonian Folkways)와 연이 닿으면서 비로소 정식 음반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날 행사에서는 곤충과 혹등고래의 소리와도 협연해 온 재즈 음악가 데이비드 로텐버그(David Rothenberg)가 향유고래와 혹등고래의 녹음에 맞춰 클라리넷을 연주하며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가 시니어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79세라는 나이는 흔히 은퇴 이후의 정적인 삶을 떠올리게 하지만, 놀먼의 사례는 오랜 세월 축적된 경험과 전문성이 새로운 도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욱 눈여겨볼 대목은, 그가 먼저 제도적 지원을 요구하기보다 스스로 도구를 만들고 방법을 개척한 뒤에야 비로소 스미소니언과 같은 권위 있는 기관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무조건적인 지원이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 노력과 검증된 성과에 상응하는 합리적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금 확인시켜 줍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우리 사회에서도 시니어를 복지의 수동적 수혜자로만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오랜 경험과 축적된 통찰을 지닌 사회적 자산으로 재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재평가가 막연한 이상화에 그치지 않으려면, 개인의 자립적 도전 정신을 존중하는 전통적 가치와 더불어 객관적 성과에 기반한 합리적 지원 기준이 함께 자리 잡아야 할 것입니다. 평생을 실험과 도전으로 채운 한 시니어 예술가의 이야기는, 나이가 창조와 기여의 한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스위스 취리히주 의회, 찬성 92 반대 82로 개인기기 전면 금지 가결
스위스 취리히주에서 날아온 소식 한 토막이 교육 현장의 오래된 질문을 다시 소환했습니다. 아이들 손에서 스마트폰을 떼어놓는 일이 과연 국가가 나설 사안인가, 아니면 가정과 학교의 자율에 맡길 문제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손주 세대의 학습과 정서 건강을 지켜보아 온 시니어 독자라면 결코 낯설지 않은 고민일 것입니다.
지난 9월 1일 자 스위스 유력지 노이에취르허차이퉁(Neue Zürcher Zeitung, NZZ) 보도에 따르면, 취리히주 의회는 우파 정당인 스위스 국민당(Schweizerische Volkspartei, SVP)이 발의한 학교 내 개인 디지털기기 사용 전면 금지 포스툴라트(Postulat, 주 정부에 정책 검토를 요구하는 구속력 있는 건의안)를 찬성 92표, 반대 82표로 가결했습니다. 이 규정은 유치원부터 9학년, 우리로 치면 중학교 과정까지의 학생들에게 적용되며, 수업 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방과 후 돌봄 교실을 포함한 학교 전 구역에서 스마트폰과 태블릿, 노트북 등 개인 소유 기기 사용을 금지합니다. 다만 교사가 수업 목적으로 명시적으로 활용하도록 지시한 기기는 예외로 인정됩니다.
찬성 진영을 이끈 SVP 의원단 대표 토비아스 바이드만(Tobias Weidmann)은 미국의 관련 연구를 근거로 스마트폰 과다 노출이 우울감과 수면 부족, 비만 등 청소년 건강 문제와 연관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학교 안에서만이라도 모든 아이에게 이른바 디지털 휴식을 보장해야 한다며, 학습 환경에 대한 책임은 결국 정치의 몫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아르가우, 발레, 바젤슈타트, 니트발덴 등 스위스의 다른 여러 주는 이미 유사한 금지 조치를 시행하고 있어, 이번 결정이 고립된 사례는 아닙니다.
반면 반대 진영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안진보당(Alternative Liste, AL) 소속 다비드 가르시아 누녜스(David Garcia Nuñez) 의원은 이번 조치를 온정주의적(paternalistisch) 발상이라 비판하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률적 금지가 아니라 스스로 절제하고 활용할 줄 아는 디지털 역량(Digitalkompetenz)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많은 학교가 이미 자체 규정으로 문제를 관리하고 있는 만큼 주 차원의 획일적 통제는 불필요하며, 진짜 규제 대상은 학생이 아니라 거대 플랫폼이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자유민주당(FDP)과 녹색자유당(GLP), 복음국민당(EVP) 역시 대체로 이 입장에 동조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사회민주당(SP)과 녹색당(Grüne)은 당론이 갈렸는데, SP는 명확한 규칙이 모두의 부담을 덜어준다며 찬성한 반면 녹색당은 학교 자율성 침해를 우려하며 반대했습니다.
이번 논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SVP 소속 마르쿠스 보프(Markus Bopp) 의원의 발언입니다. 그는 이 사안이 전통적인 좌우 진영 논리를 벗어난다는 점을 정확히 짚어내며, 학교에서 술과 담배를 금지하듯 중독성 높은 스마트폰 역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화면 대신 탁구와 축구를 즐기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는 사례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학교가 최근 다시 아날로그적 접근으로 돌아서고 있다는 사례도 함께 언급되었습니다.
표결 이후 실비아 슈타이너(Silvia Steiner) 취리히주 교육장관은 이 건의안을 검토해 보고서를 작성하겠다고 밝히면서도, 스마트폰 문제의 일차적 책임은 어디까지나 학부모에게 있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발언은 이번 논쟁의 균형점을 시사합니다. 국가와 학교가 최소한의 울타리를 세우되, 가정의 교육적 책임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안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은 작지 않습니다. 국내에서도 학교별로 스마트폰 소지 및 사용에 관한 자율 규정을 운영하고 있으나, 지역과 학교마다 기준이 제각각이어서 혼선이 빚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시니어 세대는 활자와 대면 소통을 중심으로 집중력과 절제를 체득해 온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손주 세대에게 옛 시절의 향수가 아니라, 화면에 잠식된 학습 환경을 되돌아보게 하는 실질적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세대 간 갈등의 구도가 아니라, 시니어의 축적된 지혜와 학부모 세대의 실천이 맞물릴 때 비로소 실효성 있는 대안이 마련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번 취리히주의 결정은 규제 만능주의로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수업 목적 기기는 예외로 두고, 궁극적 책임은 가정에 두는 균형 잡힌 설계이기 때문입니다. 학교라는 공간이 최소한의 절제와 집중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는 원칙은 존중받아 마땅하되, 그 실행은 획일적 금지가 아니라 합리적 예외와 부모의 책임을 함께 아우르는 방향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 역시 감정적 찬반이 아닌, 이러한 균형 잡힌 기준 마련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독일의 최신 소설이 던지는 질문
최근 독일 문단에서 고령화 시대의 가장 예민한 화두인 치매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 한 편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시니어 세대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기억이 흐려지고 자아가 조금씩 흩어지는 순간에도, 인간은 여전히 존엄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독일의 유력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Süddeutsche Zeitung)은 지난 9월 2일자 문화면에서 미국 작가 엠마 클라인(Emma Cline)의 세 번째 장편소설 《스위스로(In die Schweiz)》를 비중 있게 조명했습니다. 니콜라스 프로인트(Nicolas Freund) 기자가 집필한 이 서평은 소설을 "끔찍하도록 아름답다"는 표현으로 극찬하며 마무리됩니다. 소설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중증 치매를 앓고 있는 고령의 남성으로, 조수와 함께 런던을 거쳐 스위스 취리히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조직적으로 시행되는 조력사(Sterbehilfe), 즉 존엄사의 일종인 스스로의 삶을 마감하는 절차입니다. 병이 자신의 정신을 완전히 앗아가기 전, 그는 런던의 딸과 손자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오래전 소원해진 학창 시절 친구를 찾아가 사과하려 합니다.
이 작품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소재 자체보다 서술 방식에 있습니다. 올해 37세의 젊은 작가인 클라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 이상 많고 인지 기능이 쇠퇴해가는 인물의 내면을 3인칭 시점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소설은 짧은 문단과 파편화된 장면들로 구성되어, 독자 스스로가 주인공처럼 기억의 공백과 혼란을 함께 체험하도록 이끕니다. 평론가들은 이러한 서술 기법이 치매를 앓는 이의 의식 세계를 관음증적 시선 없이, 그러나 어떠한 미화도 없이 담아낸 드문 문학적 성취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영미권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후보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2016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이른바 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하여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스위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 국가처럼 본인의 의사에 따라 적극적으로 삶을 마감하는 조력사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국내 65세 이상 치매 환자 수는 이미 상당한 규모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정확한 최신 통계는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우리 사회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본지는 이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선택권 확대라는 관점만으로 바라보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는 존중받아 마땅하나, 그 결정이 온전히 자유로운 것이 되려면 무엇보다 가족과 공동체의 돌봄, 그리고 국가의 촘촘한 사회안전망이 먼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돌봄의 부담이나 경제적 곤궁이 죽음을 앞당기는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사회의 책무일 것입니다. 소설 속 데이비드가 삶을 정리하기에 앞서 딸과 옛 친구를 마지막으로 찾아가듯, 존엄한 마무리의 출발점은 제도의 확대에 앞서 관계의 회복과 곁을 지키는 이들의 존재에 있음을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억이 흐려지는 순간에도 인간의 존엄은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존엄을 지키는 길이 삶을 끝내는 제도의 확대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의 가치와 촘촘한 돌봄 체계 안에서 그 답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자수성가 신화, 다시 짚어볼 때가 되었습니다
홀로 역경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른 인물의 서사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혼자 힘으로 일어섰다"는 표현은 성공한 인물을 수식하는 가장 흔한 찬사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최근 미국 학계의 연구는 이러한 통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독자적인 능력만으로 성과를 완성한 사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뛰어난 성취 뒤에는 예외 없이 촘촘한 조력의 관계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크워스 교수가 밝힌 고성과자의 공통 습관
심리학자이자 저술가인 앤절라 더크워스(Angela Duckworth)는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기고를 통해 이 같은 연구 결과를 소개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고성과자들은 자신의 성취를 스스로의 재능이나 노력만으로 돌리지 않고, 곁에서 힘을 보탠 조력자들에게 공을 돌리는 공통된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울러 이들은 필요한 순간 주저 없이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목표 달성을 위한 실질적이고 전략적인 행동 양식이라는 것이 더크워스 교수의 분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구하는 행위를 자신의 약점이나 능력 부족의 증거로 여기고 이를 꺼립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보여줍니다. 적절한 시점에 정확히 필요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고도의 자기 인식과 전략적 판단력을 요구하는 역량이며, 오히려 성취를 가늠하는 핵심 지표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도움 요청을 가로막는 심리적 장벽
그렇다면 왜 많은 이들이 도움을 청하기를 주저하는 것일까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을 곧 실패로 받아들이는 심리적 저항에 있습니다. 그러나 더크워스 교수가 관찰한 고성과자들은 이와 정반대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이를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주변 전문가와 동료의 경험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이러한 겸손하면서도 능동적인 태도는 개인의 역량을 여러 방향으로 확장시키는 동력이 되었으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더 높은 목표에 다다르게 하는 실질적인 자산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우리 시니어 사회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집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오랜 세월 "자식이나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온 문화적 전통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다스리는 절제와 책임의 정신으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가치입니다. 그러나 그 정신이 지나쳐 은퇴 이후의 새로운 도전이나 재취업, 사회 참여의 문턱에서조차 도움을 청하기를 꺼리는 태도로 이어진다면, 이는 오히려 시니어 세대가 보유한 경험과 지혜가 사회 속에서 온전히 발휘되는 길을 스스로 가로막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시니어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무분별한 의존이 아니라, 공식적이고 검증된 채널을 통한 합리적인 도움 요청입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중장년 재취업 지원 기관, 평생학습 프로그램, 그리고 동년배 간의 재능 나눔과 멘토링 네트워크는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마련된 제도적 장치입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결코 자존심을 굽히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남은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통의 자립 정신과 합리적 도움 요청의 균형
물론 도움을 청하는 태도가 모든 상황에서 무조건 미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까지 습관적으로 타인에게 의탁하는 것은 개인의 존엄과 사회의 건강한 질서를 동시에 훼손할 위험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립의 정신을 굳건히 지키되, 자신의 한계를 냉정하게 인식하고 필요한 순간에는 검증된 통로를 통해 도움을 구하는 균형 감각입니다.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책임과 절제의 가치와, 시대가 요구하는 합리적이고 전략적인 협력의 자세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 시니어 세대는 비로소 후반생의 무대에서 더욱 당당한 주체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정작 인재가 없다 — 대졸 청년을 애타게 찾는 중소기업들의 역설
인공지능(AI) 기술의 확산과 경기 둔화로 청년 취업난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산업 현장에서는 정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빠르게 성장하는 중소기업들이 정작 필요한 대졸 신입 인재를 구하지 못해 사업 확장에 발목이 잡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영국 유력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가 보도한 내용은 이러한 역설적 현실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히트펌프 설치 전문 중소기업 히트 기크(Heat Geek)는 올여름에만 여덟 개 직무를 새로 열어 전체 인력을 25퍼센트 이상 늘릴 계획입니다. 그러나 운영, 엔지니어링, 마케팅 등 신입 직무에 곧바로 투입할 수 있는 야심 찬 대졸 인재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회사 측은 이러한 인재들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통계가 보여주는 역설
영국 통계청(ONS)에 따르면 올여름 구인 공고는 지속적으로 감소했으며, 특히 소규모 기업과 청년층이 선호하는 업종에서 감소폭이 두드러졌습니다. 학생고용주협회(ISE) 조사에서는 구인 직무가 8퍼센트 줄어들면서 대졸 신입직 한 자리를 두고 평균 140명이 경쟁하는 역대 최고 수준의 경쟁률이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대학협회(Universities UK)가 지난 6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구인 중인 고용주의 절반이 대졸 신입 직무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고 답해, 전체 직급 가운데 가장 높은 미충원율을 기록했습니다. 국립대학기업센터(NCUB)가 정부 통계를 분석한 자료 역시, 소기업이 대기업보다 채용 규모를 더 빠르게 줄였음에도 특정 역량을 갖춘 인력을 구하지 못해 채우지 못하는 이른바 기술 부족 구인의 비율이 신입급에서 여전히 높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왜 중소기업은 인재를 놓치는가
업계 관계자들은 그 원인을 여러 갈래로 짚고 있습니다. 첫째, 대학 취업지원 프로그램이 대기업 위주로 운영되면서, 채용 박람회나 홍보 자리에서 중소기업이 소외되는 이른바 인지도 격차가 존재합니다. 둘째, 제조업 등 일부 업종에 대해 청년들이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 즉 열악한 근무 환경과 낮은 보수를 떠올리는 편견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업계 단체 메이크 UK(Make UK)는 제조업 구인 직무 약 5만 개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이러한 이유로 채워지지 못하고 있다고 추산합니다. 셋째, 대기업과 달리 체계적인 신입 교육 프로그램을 갖추기 어려운 중소기업의 현실도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넷째, 채용 광고와 헤드헌팅에 드는 비용 부담 역시 인력난에 허덕이는 성장기업에는 만만치 않은 부담입니다.
극복한 기업들의 공통점
반면 이러한 난관을 극복한 사례도 있습니다. 알루미늄 주조업체 그레인저 앤 워럴(Grainger & Worrall)은 대도시가 아닌 지역 출신 대졸자에게 눈을 돌려 채용 방식을 전환한 결과, 최근 채용에서 목표보다 많은 인재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의료기기 제조업체 유로플라즈(Europlaz) 역시 대학과 직접 접촉하며 적극적으로 인재를 발굴한 끝에 우수한 신입 사원들을 채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유연 근무, 빠른 직무 성장 기회, 최고경영자(CEO)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수평적 조직문화 등 대기업과는 다른 강점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한국 중소기업에 주는 시사점
이러한 현상은 결코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 역시 청년 취업난과 중소기업 구인난이 동시에 존재하는 구조적 모순을 오랫동안 안고 있습니다. 대기업과 공공부문 쏠림 현상, 중소기업에 대한 낮은 인지도와 처우 격차, 지역 소재 기업에 대한 기피 현상 등은 영국의 사례와 상당 부분 겹칩니다. 여기서 시니어 세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십 년간 산업 현장에서 조직을 운영하고 신입 인력을 길러낸 경험을 가진 시니어들은, 체계적인 온보딩 프로그램을 갖추기 어려운 중소기업에 실질적인 멘토링과 자문을 제공할 수 있는 자산입니다. 시니어를 단순한 재취업 대상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청년 인재를 잇는 가교로 활용하는 정책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물론 이 문제를 기업의 노력만으로 풀 수는 없습니다. 정부와 지역사회가 중소기업의 채용 홍보를 지원하고, 대학이 대기업 편중 취업지원 구조를 개선하는 등 제도적 뒷받침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청년들에게도 성실함과 주도성이라는 기본적 직업윤리에 대한 요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기업이 유연근무와 성장기회로 지원하고, 청년이 역량과 책임감으로 화답하는 균형이야말로 이 역설을 풀어가는 합리적 해법일 것입니다. 성실과 신뢰라는 전통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변화하는 노동시장의 합리적 기준을 함께 세워가는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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