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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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pisodes

  • 20220515 세미한 음성 붙들기 / 고전 14:12
    고전 14:12/세미한 음성 붙들기
    220515 주일설교
    1. 왜 못 듣는가
    최근 성경공부 중 한 교우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최근 부흥회를 인도하신 이은상 선교사님께서 설교 중 말씀하시기를, 작년에 친척인 우리 교회 부목사님의 전화를 받았는데 ‘하나님이 너 뉴저지장로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게 될 거다.’라고 하셨잖아요. 선교사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우리는 왜 못 듣나요? 하나님이 그 선교사님께만 특별히 말씀하시고 우리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사실은 우리도 그 분처럼 다 듣고 있습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자녀에게 인자한 음성으로 말을 거십니다. 우리는 듣고도 들은 줄을 모른 것입니다. 새들백교릭회 릭 워렌 목사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 교사, 환경 그리고 느낌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목사의 설교나 교사의 성경공부를 들을 때 혹은 주변상황이 나 사람들의 권면이 우리를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느낌에는 이미지, 잔상, 아이디어, 깨달음, 확신이 포함됩니다.
    앞서 소개한 선교사님들은 바로 이 느낌을 붙들어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듯 귀에 대고 음파를 일으켜 고막을 진동시켜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신비한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예외적입니다. 대부분은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에 감정의 파동을 일으켜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은상 선교사님이 그러셨지요? 전화통화 중 하나님이 ‘뉴장에 가서 말씀을 전하게 될 거다’고 하셨는데 이걸 말할까 말까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면 내가 말 안 해도 다시 연락이 오겠지’ 하고 말하지 않았더니 정말 전화가 오더라고 말입니다. 만약 귀에 그 말씀이 고막을 울리는 음성으로 들렸다면 뭣하러 연락이 오는 것을 기다려 확인하려 할까요? 귀에 들리는 음성이 아니라 마음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느낌, 이미지,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을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호렙산에서 그 음성을 기다릴 때 크고 강한 바람이 불었지만 하나님은 그 중에 안 계셨고 큰 지진이 있었지만 안 계셨고 큰 불이 있었지만 역시 안 계셨습니다. 그 후 세미한 소리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다리는 우리 마음에 세미한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사사기를 보면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할테니 미디안 진영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겠다고 양털 위에만 이슬이 내리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해달라고 또 기도하여 확인합니다. 왜 확인할까요? 우리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큰 바람과 지진과 불처럼 똑똑히 들리면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그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세미한 느낌, 통찰, 아이디어로 들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모두의 마음에 세미한 음성으로 계속 말씀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똑같이 세미한 음성을 듣고도 선교사님들은 그것을 잘 캐치해서 분별해 내는데 우리는 왜 잘 못 합니까? 우리가 다 거듭난 성도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전제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열심히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귀를 기울이도록 교회가 많이 격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첫째 귀를 기울이기 않기 때문에 잘 못 듣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는 마치 노래와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노래를 할 수 있지만 더 잘 하는 이와 덜 잘하는 이가 있습니다. 왜 어떤 이는 노래를 더 잘 합니까? 첫째 타고난 이들이 있습니다. 이건 우리의 선택이 아니니 어쩔 수 없습니다. 둘째 연습하여 실력을 키운 이들입니다. 좋은 선생에게 배우고 부지런히 연습하면 할수록 점점 노래를 잘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모두가 들을 수 있지만 더 잘 듣는 이가 있습니다. 왜인가요? 첫째 영적 감수성이 더 뛰어난 이들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논리적인 사람, 기억력이 더 좋은 사람, 힘이 더 센 사람이 있는 것처럼 영적 감수성이 더 뛰어난 이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단풍숲을 보고도 우리 대부분은 ‘와, 정말 아름답다’하는 탄성이 전부인 반면 시인은 ‘창조주의 붓이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메마른 땅에 촉촉히 그려놓았다’는 노래를 부릅니다. 똑같이 굶주리는 아이들을 보고도 우리 대부분은 ‘아, 정말 마음이 아프다’하고 끝나는 반면 ‘주께서 저들에게 내가 가진 오병이어를 나누어 주라고 하신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영적 감수성이 뛰어난 이들입니다.
    둘째는 듣기를 원하여 계속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하면 분명 더 잘 듣습니다. 선교지에서는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하나하나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사역도 생활도 쉽지 않습니다. 주님을 더 의지하고 주목하고 간구하고 응답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인도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되기에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 애씁니다. 그러니 마음에 떠오르는 작은 느낌 하나도 놓칠 수가 없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는 이가 어떻게 무신경하게 세미한 음성을 흘려버립니까? 그렇게 듣기 시작하면 점점 더 세미한 음성이 뚜렷하게 들립니다. 점점 더 잘, 자주, 편안히 듣습니다. 초보자는 조그만 탁구공을 라켓에 맞추기도 힘들지만 반복해서 연습하면 저 구석에 정확히 드라이브를 꽂아넣듯이 말입니다.
    반면 한국과 미국, 이 번영한 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배고프면 사먹고 아프면 병원가고 다리 아프면 차타고 심심하면 TV보고 더 심심하면 골프치러 가면 됩니다. 직장이나 사업 뿐 아니라 교회사역도 매뉴얼이 다 있어서 매번 하나님께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설교와 성경공부와 유투브와 기독교컨텐츠가 쏟아져 나와 하나님 음성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굳이 세미한 음성에 귀기울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의 음성듣는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10년 동안 라켓을 잡지 않으면 공을 맞추기도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미국 사는 우리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풍요와 안락의 거센 바람소리에 귀가 멀어 주님의 음성 듣는 감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3. 격려하지 않았기 때문
    하나님의 음성을 잘 못 듣는다고 느끼는 둘째 이유는 음성듣기를 교회가 적극적으로 격려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장로교파 중 보수적 교단은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으로 종결되었기에 오늘날 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적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단은 다소 중도적이어서 개인적 음성듣기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성경과 그 해석의 권위를 넘어설 수 없다고 믿습니다. 장로교단이 이처럼 개인적 음성듣기에 부정적이거나 한계를 명확히 두는 이유는 종종 그런 음성듣기가 주관적이고 신비적으로 흘러서 교회의 덕과 질서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느낌은 객관화가 안 됩니다. 성경처럼 기록으로 모두가 공유할 수도 없고 설교처럼 성경과 신학으로 검증할 수도 없습니다. 그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오직 그것을 설명하는 이의 해석과 표현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러다보니 건강하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는 의도적 왜곡 혹은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 혹은 자신의 욕망을 구분하지 못 해서 생기는 비의도적 왜곡을 걸러내지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제가 예전에 섬기던 청년부에서 한 형제는 제가 아는 경우만 네 번에 걸쳐 다른 자매에게 각각 하나님이 그 자매와 결혼하라고 명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사색이 되어 저를 찾아온 자매의 말을 듣고 형제의 말을 들어보니 하나님께 배우자를 간절히 기도하던 중 꿈에 그 자매와 결혼식을 올렸고 자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예이지만 이런 일이 종종 교회에서 발생합니다. 예배당 증축을 놓고 기도했는데 한 교인이 하나님이 증축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답하고 다른 교인이 증축하지 말라고 하셨다 답한다면 누구 말을 들어야 합니까? 두 사람의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십니까
    45 min
  • 20220508 사랑스러운 자녀 / 눅 2:41-52
    눅 2:41-52/사랑스러운 자녀
    220508 어버이주일
    1. 어버이주일
    시트콤PD와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알린 윤학렬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인권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젊은이들을 복음을 깨우는 운동에 헌신한 신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간증을 통해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겪은 힘겨운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아버지는 늘 장기출장 중이었고 가끔 집에 오시면 자신을 그렇게 야단을 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 놈의 자식은 왜 저 모양이야?’ 항상 아버지 앞에서 주눅이 들었고 실수를 했습니다. 자존감이 낮았고 말도 심하게 더듬고 몽유병도 앓았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왜 자신에게 그토록 가혹했는지를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유부남인 채로 처녀였던 어머니를 속이고 새살림을 차렸고 그 사이에선 난 아이가 자신의 치부라 생각했기에 그토록 가혹했던 것입니다. 출생의 비밀을 안 후 어머니와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를 향해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크면 반드시 복수하리라. 그러면서도 여전히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그리워서 아버지가 자신을 안아주지 않나 기다렸고 어쩌다 살이 맞닿으면 그 포근함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리워하는 양가감정을 가진 채 자랐습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되새기고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부모공경에는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는 복도 약속하십니다. 인자한 부모님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란 이에게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만 앞서 소개한 윤학렬 감독처럼 부모에게 상처받고 실망한 자녀들은 어떻게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부모공경과 순종의 가르침은 사랑받고 자란 자녀에게만 해당되는 가르침은 아닐까요?
    2. 예수님과 부모
    오늘 본문은 열두살 된 예수님의 가족이 당시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사건을 다룹니다. 유월절 축제를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오다가 하룻길이 지난 후에야 예수님이 무리 중에 없는 것을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깨달았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은 약 120km로 3일길 정도입니다. 어떻게 하루나 아이가 없는 것을 몰랐을까 싶겠지만  보통 유월절과 같은 축제에는 친족과 이웃과 함께 큰 무리를 지어 올라가고 내려왔습니다.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함께 내려왔으려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급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보니 성전의 율법선생들 사이에 앉아 율법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서 마리아가 어린 예수님을 꾸짖습니다.
    (눅 2: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야, 이 놈아. 말도 없이 혼자 여기 남으면 어떡하냐? 엄마, 아빠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이런 뜻입니다. 그러나 어린 예수님은 그 부모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눅 2: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예수님은 당신이 육신의 아버지가 아닌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이제 그 부름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의미로 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눅 2: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 부모가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당연히 글을 읽지 못 했을 것이고 율법교육도 받지 못 했을 것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당시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부르던 그 죄인들 중 하나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 하니 철저히 지키지 못 할테고 당연히 죄인이란 뜻입니다. 당시 여인은 보통 14살이 되기 전에 결혼했습니다. 물론 여성이 교육을 받고 글을 읽던 시절이 아닙니다. 14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기 시작한 마리아 역시 율법을 알고 이해할 리 만무했습니다. 그러니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사들과 나누던 토론내용을 이해하지 못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아들이 말도없이 예루살렘에 남은 것보다 율법사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토론을 하고 있던 것에 더 놀랐음이 틀림없습니다. 거기에 더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는 말씀은 더더욱 이해가 불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해도 못 한 채 자신을 탓하는 요셉과 마리아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우리도 비슷하게 겪는 일이 아닙니까? 식민지와 6.25전쟁, 전후의 절대가난을 겪으며 생존을 위해 발버둥쳤던 부모님 세대와 달리 경제발전의 열매를 따먹기 시작하며 자란 자녀들은 대부분 부모가 받지못한 교육을 받고 부모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 한 서구문화, 첨단기술의 혜택을 받으며 삽니다. 그런 자녀의 삶의 방식과 경험을 부모는 대부분 이해하지 못 합니다. 그런 부모가 자녀는 답답합니다. ‘엄마는 알지도 못 하면서 왜 저리 고집이 세?’ ‘아빠는 왜 이렇게 고지식하고 꽉 막혔어?’ 그런 부모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일도 빈번히 벌어지지 않습니까? 그런 부모에게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옳을까요?
    3. 압살롬과 다윗
    성경에는 부모에 대한 불만을 잘못 터뜨린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의 칼을 들고 그 왕좌를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왜 압살롬은 그런 악한 짓을 저질렀을까요? 물론 그 자신의 악한 됨됨이가 이유겠지만 그에게도 할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아버지 다윗에게 받은 상처입니다.
    아버지 다윗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부하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어린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습니다. 다윗은 최소 8명 이상의 아내에게서 20명 이상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많은 아들을 낳아 서로 권력을 위해 질시하며 다투게 하여놓고 정작 왕좌는 부정하게 낳은 솔로몬에게 물려주려 하니 재능이 뛰어나고 야심이 컸던 압살롬이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요? 게다가 배다른 큰 형 암논이 자신의 누이 다말을 욕보였는데 다윗은 화만 냈을 뿐 그 암논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무책임한 처사는 압살롬을 크게 분노케 했고 아버지의 왕좌를 빼앗을 명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봐. 제대로 된 왕이라고 할 수 있어? 내가 왕이 되어 모든 것을 바로 잡겠어.’ 결국 반란을 일으키고 아버지의 후궁을 취하는 반인륜적인 짓을 합니다. 그 압살롬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투 중 비참하게 목숨을 잃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다윗이 비록 부모로서 그릇된 모범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압살롬이 다윗을 부모로서 공경치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4. 주 안에서 순종하라
    성경은 부모를 순종하기를 주님 안에서 하라고 합니다.
    (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주 안에서 하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헬라어 전치사 엔에는 ‘무엇무엇의 힘으로’란 의미가 있습니다. 곧 ‘주님의 힘으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옳습니다. 우리 힘으로 부모님을 공경하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에게 상처받고 실망하고 심지어 학대당한 이들에게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힘으로는 가능합니다. 주님은 그런 힘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웃사랑도 어려운데 원수사랑이라니요? 이 역시 우리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주님의 힘으로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의 힘으로는 그 일이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힘으로는 상처를 주는 부모, 실망스러운 부모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5. 예수님의 공경
    요셉과 마리아의 몰이해가 예수님에게 답답하고 실망스러웠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들의 꾸중은 예수님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 하는 몰이해에 틀림없습니다. 인간 부모는 무지합니다. 그릇된 판단도 많이 하고 실수도 많이 하여 자녀에게 상처와 아픔
    33 min
  • 20220501 은혜와 진리가 기르는 자녀 / 엡 6:4
    엡 6:4/은혜와 진리가 기르는 자녀
    220501 어린이주일
    1. 대를 잇는 상처와 아픔
    고인이 된 이어령 박사의 딸 이민아 목사의 가슴 아픈 이야기는 그들의 간증집에 잘 나와 있습니다. 어린 시절 너무나 바쁜 아버지 이어령 박사의 뒷모습만 보고 자란 이민아 목사는 어떻게든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심에 하기도 싫은 공부와 유학생활을 이를 악물고 감당했습니다. 자신이 겪은 애정결핍의 상처가 너무 커서 자녀에게는 그런 고통을 주지 않으리라 마음 먹고 온 힘을 다해 사랑으로 아들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사춘기의 방황하던 아들이 자신의 꾸지람을 듣고는 공허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엄마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 마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마침내 주님의 은혜로 아들의 상처도, 이목사 자신의 상처도 그리고 사랑을 주는 법을 몰랐던 아버지 이어령 박사의 상처도 모두 치유받고 회복되었습니다만 그 때까지 모두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아프게 지냈는지 모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세상살이가 다 힘들지만 그 중 제일 힘든 것이 부모되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부모는 어렵습니다. 좋은 아빠 되기도, 좋은 엄마 되기도 어렵고 홀로 양육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정말 두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두려운 부모되기를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2. 상처와 깨진 마음
    오늘은 우리 교단에서 지키는 어린이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모가 저지르기 가장 쉬운 잘못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엡 6:4입니다.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어 보면, 부모들아, 자녀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라가 됩겠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어린 자녀들이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 대상이 바로 부모입니다. 사실 어린 시절엔 부모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사랑도 많이 받지만 반면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골로새서도 비슷한 교훈을 줍니다.
    (골로새서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
    다시 현대어로 해석해 보면, 부모들아, 자녀에게 상처를 주면 마음이 깨질 수 있다 가 되겠습니다. 마음은 꽃병과 같습니다. 잘못 때리면 금이 가고 더 세게 때리면 깨집니다. 깨진 꽃병엔 물도 담지 못 하고 꽃도 꽂지 못 하듯 깨진 마음은 사랑을 담고 행복을 꽂지 못 합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로 깨진 마음으로 살아가느라 성인이 되어서도 온전한 사랑도, 행복도 알지 못 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성인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대부분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린 시절 겪은 육체적, 정서적, 언어적 학대, 애정결핍, 방임, 부모의 집착과 소유욕, 갈등, 이별, 재난 등은 성인이 되어서도 우울증, 두려움증, 신경증, 강박장애 등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건강하고 행복한 성인의 삶은 어린 시절의 상처와 깨진 마음을 치유하고 극복하지 않고서는 누리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왜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상처를 줄까요? 도대체 왜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에서 아이들은 상처를 받을까요? 이미 이런 상처로 깨진 우리의 마음, 우리 자녀들의 마음은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3. 어리석은 양육
    먼저 왜 행복해야 할 가정에서 사랑하는 부모로부터 자녀가 상처를 받는지 원인부터 생각해 봅니다. 본문이 그 답을 이렇게 알려줍니다.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양육합니까? 자신의 욕심과 경험과 지혜로 양육합니다. 이것으로는 자녀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양육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부모가 자녀를 욕심으로 양육하는지요? 무슨 욕심입니까? 자신이 누리고픈 성공을 대신 누리게 함으로써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욕심입니다. 혹은 자녀를 성공적으로 양육함으로써, 대개는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것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고 희생을 보상받으려는 욕심입니다. 그래서 자녀의 적성이나 능력, 행복, 소명보다 아이비리그대학이나 높은 연봉의 직업을 목표로 자녀들을 다그치다가 상처를 주고 마음을 깨뜨리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자신의 경험으로 자녀를 양육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양육에 관련된 경험이라고 해봐야 무엇이 전부입니까? 우리가 자라면서 본 부모님의 양육방식이 답니다. 그 부모님의 양육방식은 어디서 배운 것입니까? 또 그 부모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까지 갈까요? 자신을 건들면 죽여버리겠다는 가인과 라멕의 방식이 아닙니까? 그러니 학대받으며 자란 사람은 부모를 원망하면서도 자녀에게 똑같이 가혹한 부모가 됩니다. 방임당하며 자란 부모는 자녀도 방임합니다. 비난받으며 자란 부모는 자녀도 비난합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키웁니다. 왜입니까? 그것밖에는 양육의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잘 해주고 싶긴 한데 잘 하는 법을 모릅니다. 본 적도, 배운 적도, 경험한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지혜로 자녀를 양육합니다. 그 지혜는 어떻게 얻은 것입니까? 병든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꾀와 잔머리와 계략을 다 써가며 체득한 것입니다. 사실 지혜라 부르기도 민망한, 한 치 앞도 못 보는 얄팍한 수입니다. 마땅히 지혜라고 부르려면 십 년, 이십 년 더 나아가 평생에 걸쳐 마침내 유익이 되는, 멀리 내다보는 수여야 하는데 우리는 일 년 후는 고사하고 당장 오늘 내 손에 얻는 것이 없으면 못 기다리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지혜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의 욕심과 경험과 지혜로 자녀를 양육하면 원치 않아도 자녀에게 결국 상처를 주고 마음을 깨뜨리고야 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 자신의 욕심과 경험과 지혜를 버리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권합니다.
    4. 은혜의 교훈으로
    그럼 주의 교훈과 훈계는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요한복음을 보십시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은혜와 진리로 양육해야 합니다. 은혜로 양육한다는 것은 우리의 가정이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덧칠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날 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심판의 천사가 그냥 지나가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여러분 가정의 현관에 발라야 합니다. 아빠와 엄마의 영혼에 보혈을 발라야 합니다. 자녀들의 영혼에 보혈을 발라야 합니다. 그래야 상처를 치유하고 깨진 마음을 고칩니다.
    아빠가 된 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요, 엄마가 된 것이 은혜요, 자녀를 주신 것이 은혜요, 가족을 이룬 것이 은혜요, 전쟁과 재난과 기아와 범죄가 가득한 세상에 이토록 안전하고 복된 가정을 이룬 것이 은혜임을 고백케 하는 보혈이 우리 영혼에 묻어 있어야 우리는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치유와 자유를 받습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상처 주려고 작정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고슴도치는 찌르려고 찌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가가면 누구든 찔립니다. 우리 영혼은 죄와 악과 상처와 고통의 가시가 잔뜩 박혀 있어서 누구든 다가가면 찌르는 고슴도치와 같습니다. 원치 않는데 자녀들의 보드라운 영혼을 찌릅니다. 은혜의 보혈이 우리에게 박힌 가시를 다 뽑아내주셔야 비로소 찌르지 않고 자녀를 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의 보혈을 여러분 영혼과 가정에 발라 치유하고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5. 진리의 훈계로
    진리로 양육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녀를 양육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양육은 목표와 기준이 있습니다. 목표와 기준이 없으면 양육이 아닙니다. 우리의 양육이 실패하는 이유는 목표와 기준이 없거나 잘못된 목표와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어떤 목표와 기준을 주십니까?
    (딤후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47 min
  • 20220417 빈무덤의 증인 / 요 20:1-18
    요 20:1-18/빈무덤의 증인
    220417 부활주일
    1. 부활의 기쁨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이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신 날, 부활주일입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자녀들에게도 부활의 선물을 주시는 우리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 부활의 주님을 경배하는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일터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부활절은 우리 기독교인의 가장 큰 절기입니다. 성탄절을 더 성대하게 지킵니다만 사실 예수님의 탄생일은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의 부활의 날짜는 모를 수가 없습니다. 유대교의 유월절 직후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은 우리 기독교인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저는 부활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믿으시는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믿는 것이 다 헛것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진리이신 것을 당신은 부활로 증명하셨습니다. 부활을 빼면 복음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닙니다. 이 부활을 믿고 소망하고 미리 경험하는 이들은 놀라운 기쁨 가운데 삽니다.
    물론 여러분이 부활을 생각해도 맹숭맹숭하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한 교우께서 상담하시기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머리로는 믿는데 가슴은 뜨거워지지 않는데 자신이 주님을 진짜 만난 것일까요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무기력하고 무덤덤한 삶의 권태를 벗어버리고 부활의 기쁨과 능력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주인공 마리아를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십시다.
    2. 첫 증인 마리아
    오늘 본문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한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모든 제자들 중 최초로 빈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또 천사들의 말을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18절을 보면 주님은 그녀에게 주님의 부활을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는 임무를 또 맡기셨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이며 얼마나 그녀는 기뻤을까요? 주님의 많고 많은 제자 중 왜 그녀였을까요?
    먼저 확실한 것은 이 상황이 결코 꾸며낸 것일리 없다는 점입니다. 고대세계에서 여자는 사람의 수를 계산하는데 들지도 못 하는 남자의 소유물이었습니다. 법정에서 여자의 증언을 아예 채택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누가복음에 의하면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 즉 미친 여자였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꾸며내려고 했다면 절대로 이런 처지의 여자를 첫 증인으로 내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듣자마자 그런 여자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고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실제로 첫 증인이었다는 것 외에는 이 기록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녀를 왜 첫 증인으로 택하셨을까요? 분명 빈 무덤에 대한 그녀의 증언을 들은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까지 왔었는데 주님은 왜 그들이 가고 난 후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의 증언을 하도록 명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그녀가 보여준 뜨거운 사랑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두가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던 안식 후 첫 날 새벽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무덤에 왔습니다. 공관복음은 향품을 시체에 바르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베드로와 요한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녀는 남아 무덤을 떠나지 않고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시체를 잃어버린 것 때문입니다. 그녀의 태도가 무엇을 보여줍니까? 주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죄 많은 여인이 비싼 향료로 당신의 발을 닦았을 때 말씀하시기를, 많이 용서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에 사로잡혔다가 주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었기에 주님을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잠언은 가르치십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돈과 쾌락과 허영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헛된 즐거움을 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만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곁을 찾아가고 떠나지 않고 그 분을 사랑하는 이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삽니다. 물론 이 사랑의 마음조차도 주님의 은혜로 허락받습니다. 겸손히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의지하는 자에게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또 허락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합니까? 헛된 영광을 사랑하지 말고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여 부활의 기쁨과 능력으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 동산지기
    다음으로 본문은 주님의 부활로 시작된 일을 가르쳐줍니다. 그 일은 마리아의 착각이 준 교훈입니다. 15절입니다.
    (요 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시체를)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오해한 예수님의 모습 동산지기(Gardener)는 태초의 인류가 부여받은 사명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를 동산지기로 명하셨습니다.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그러나 그는 불순종의 죄로 동산을 관리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이 세상은 죄의 가시와 악의 엉겅퀴로 가득한 불모지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새 일을 맡으셨습니다. 그것은 이 불모지에 가득한 죄의 가시와 악의 엉겅퀴를 모두 뽑아내고 사랑의 꽃과 의의 나무를 가득 심어 아름답고 풍요로운 동산을 만드는 겁니다. 이사야는 메시야가 오셔서 만드실 그 나라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 (사 65: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사명을 위해 모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성령님과 교회를 통해 남은 사명을 지금도 이루고 계십니다. 교회는 복음의 삽과 진리의 곡괭이를 들고 이 땅을 경작하여 아름다운 동산을 일구어 갑니다. 마침내 주님은 이 땅을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된 동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실 겁니다. 그 때 주님은 다시 오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동산지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으로 생명의 복음으로 이 척박한 땅을 경작하고 영혼을 추수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를 복되고 아름답운 동산으로 가꾸는 동산지기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새로운 관계
    다음으로 본문은 주님이 부활로 우리가 누리게 된 은혜를 가르쳐 줍니다. 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쓰지 않으신 표현입니다. 지금까지는 제자, 종 혹은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관계임에 틀림없습니다만 형제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제자, 종, 친구가 아무리 가깝다한들 형제, 자매에 비하겠습니까? 왜 이제와서야 이렇게 부르시는 걸까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는 주님을 따름으로 제자가 되고 섬김으로 종이 되었는데 더 가까워지다보니 친구까지 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친밀도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지만 하나의 범위 안에 있는 관계입니다. 모두 피를 나누지 않은 이들이 맺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형제는 혈통으로 맺은 관계입니다. 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흘림으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씻으시고 드디어 주님과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40 min
  • 20220410 주님의 마지막 소원 / 요 17:17-26
    요 17:17-26/주님의 마지막 소원
    220410 종려주일
    1. 분열된 몸
    20세기의 사도 바울이란 별명을 가진 변증가 C.S.루이스가 한번은 친구인 카톨릭 사제에게 농담으로 이렇게 놀렸다고 합니다. “이보게, 성경 어디에 마리아를 숭배하란 가르침이 있단 말인나? 있다면 좀 가르쳐 주게나.” 그러자 그 사제도 웃으며 이렇게 대응하더랍니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궁금한 게 있다네. 성경 어디에 그리스도의 몸을 그토록 많이 나누라는 가르침이 있단 말인나? 나도 좀 배우세.” 그의 뼈있는 농담에 루이스도 수긍할 수밖에 없더랍니다. 전 세계 카톨릭이 하나의 시스템 아래 통일되어 있는 반면 개신교는 수많은 교파와 교단으로 나뉘었습니다. 주요교파만 장로교와 감리교, 침례교 등 10여 개가 넘고 교파는 다시 수많은 교단으로 나뉘어 약 33,000여 개가 넘습니다. 한국에만 400여 개에 이르는 교단이 있습니다. 개신교회의 이러한 분열은 분명 주님이 원하시는 바는 아닙니다. 어떤 부모가 자녀들이 연합하지 못 하고 나뉘기를 원하겠습니까? 이 사실은 주님이 이 땅에서 제자들을 위해 드리신 마지막 기도에도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2. 주님의 마지막 소원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이 주일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고난의 한 주간을 보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주민들이 당신을 환영하며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길에 깔았던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을 지내고 월요일부터 일주일간 고난주간을 지킨 후 부활주일을 맞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저녁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신 후 그들을 위해 하신 기도입니다. 스승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고 또 부활한 스승이 승천한 후 세상에 남을 제자들을 향해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이 간절한 기도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구하셨습니까? 21절입니다.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하나가 되신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과도 하나게 되게 하옵소서. 연합하게 하옵소서. 연합이 왜 중요합니까? 그 연합을 세상이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합한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드러내고 마귀를 물리칩니다. 반면 분열된 교회는 이런 능력을 드러내지 못 하고 마귀를 물리치지도 못 합니다. 국가축구팀이 타국대표와 싸울 때 얼마나 큰 응원을 받습니까? 그런데 우리 선수들끼리 싸운다면 상대팀은 얼마나 비웃을 것이며 국민은 또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사이가 좋지 않은 세 아들을 불러서 막대기를 하나씩 나누어 주고 부러뜨려 보라고 했습니다. 건장한 아들들이 모두 가볍게 부러뜨리자 이번에는 세 개의 막대기를 큰 아들에게 부러뜨리라고 주었습니다. 첫째는 물론 둘째, 셋째 아들도 모두 부러뜨리지 못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당부하기를, ‘이것만 기억해라. 너희가 서로 싸우면 고난 앞에 판판이 부러지고 말 것이지만 서로 연합하여 힘을 모으면 어떤 고난도 너희를 부러뜨리지 못 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심정으로 이 아버지가 당부한 바를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일깨우셨습니다. 하나 된 교회라야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마귀를 싸워 이깁니다. 이것은 예수님 앞에 있던 사도들 뿐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당부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요 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사도)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교회)도 위함이니
    3. 하나되는 길
    오늘 우리도 하나로 연합해야 합니다. 그럼 수많은 교파와 교단으로 나뉜 우리가 카톨릭처럼 하나의 교파와 교단으로 연합운동, 에큐메니칼 운동을 해야 합니까? 그것이 가능할까요? 언듯 생각하면 불가능할 것 같지만 하나됨이 무엇인지 이해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됨이란 어떤 상태를 가리킵니까? 먼저 하나됨이란 똑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는 결혼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성별이 같아집니까? 생김새가 같아집니까? 기질이 같아집니까? 다 다른 상태로 남는데 하나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같아집니까? 첫째는 그들은 한 가정에 속합니다. 둘째는 사랑으로 교제하여 연합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첫째 우리는 한 교회에 속합니다. 그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파와 교단에 속한 어느 교회가 아닙니다. 초대교회 교부 어거스틴은 그의 책 신국론에서 교회는 눈에 보이는 제도로서의 수많은 지역교회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단 하나의 우주적 교회로 나뉜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지역교회에는 참 성도도 있지만 거짓 성도도 있습니다. 각 지역의 교회마다 있는 참 성도를 서로 연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네트워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의 우주적 교회가 있습니다. 이 우주적 교회에 소속됨으로써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4. 진리의 말씀을 받음으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교파와 교단이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도록 애써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결국 교파와 교단이 카톨릭처럼 완전히 통합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단 하나의 우주적 교회에 속함으로써 말입니다. 이 교회에 속한 이는 개신교인일수도, 카톨릭교인일수도 혹은 정교회교인일수도 있습니다. 장로교인일수도, 감리교인일수도 혹은 침례교인일수도 있습니다. 어느 교파, 교단에 속했느냐와 상관없이 이 교회에 속할 수 있습니다. 교파와 교단이 아니라면 무슨 기준으로 이 참 교회에 속할 수 있습니까? 그 답을 예수님은 당신의 기도에서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6-8절입니다.
    (요 17:6) …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 17: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말씀)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요 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게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줄 알고 받고 지킨 이들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속한 이들입니다. 이 말씀은 순종하는 이들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17절입니다.
    (요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말씀은 듣고 믿고 지키는 이의 신분을 거룩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행위를 거룩하게 변화시킵니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하나님 나라에 소속시킵니다. 우리는 교파나 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나 직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만 참 교회에 소속되어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의 몸된 참 교회에 속하였습니까? 주님의 모든 말씀을 듣고 믿고 지킴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참 교회의 성도로 드러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 서로 사랑함으로
    둘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가 됩니다. 이 비밀을 예수님이 기도 중 가르쳐 주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요 17: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7:26) …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의역하면 ‘아버지와 내가 사랑으로 하나가 된 것처럼 그들도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입니다.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의 참 교회에 속하듯 서로 사랑하는 이들도 하나가 되어 참 교회에 속합니다. 이 모델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하나됨입니다.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심으로 완전히 연합하셨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서로 교제하
    42 min
  • 20220403 복이 흐르는 시내 / 민 6:22-27
    민 6:22-27/복이 흐르는 시내
    220403 사순절5주
    1. 자리가 중요하다
    오늘날 북반구의 유라시아 선진국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남반구 국가를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모든 면에서 압도합니다. 왜 이렇게 된 걸까요? 과거 한 때는 인종의 우열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스테디셀러 는 이렇게 답합니다. 자리를 잘 잡았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해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곳은 한결같이 기후와 식생이 야생식물의 작물화, 야생동물의 가축화를 하기에 최적의 지역이었습니다. 작물화와 가축화는 식량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고 이는 사람들을 모으고 문명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니 균, 세균으로 인한 전염병이 발생해 면역력이 생겼고 기술발달로 다른 지역보다 철, 철기문명을 빨리 일으켜 총, 총기를 비롯한 각종 도구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기온차가 심한 남북보다는 같은 기후대의 동서로의 기술문명전파가 쉬웠기에 유라시아 대륙은 빠른 시간에 발전하였습니다. 총, 균, 쇠의 환경결정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리를 잘 잡아야 된다’가 되겠습니다. 아무튼 유라시아 대륙은 조상들이 자리를 잘 잡은 덕분에 오늘날 후손들은 훨씬 발전된 정치, 경제, 사회적 여건에서 엄청난 혜택을 누리며 인생을 시작합니다.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일상에서도 어렵잖게 경험합니다. 비지니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왜 인적이 드문 산골이 아닌 유동인구가 강처럼 흐르는 맨하탄에서 비지니스를 합니까? 젊은이들은 왜 다방에 가지 않고 까페와 클럽에 갑니까? 또래들이 강 흐르듯 몰리는 곳으로 가야 친구도, 애인을 만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 아닙니까? 낚시하는 이들은 왜 물고기가 몰려다니는 곳을 찾아다닙니까? 자리가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하게 사는데도 자리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도 풍수지리설을 그토록 신봉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답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2. 생명력으로서의 복
    오늘 본문은 출애굽 후 시내산 아래 광야에 머물며 척박한 광야길로 나서려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복,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복을 싫어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매년 기원합니다. 불행을 피하고 행복하기 위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정작 행복하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요?
    먼저 복이란 단어의 용법을 정리합니다. 축복은 ‘복을 빈다’는 의미입니다. 복을 비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복을 빌지 않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복을 주실 뿐 그 누구에게도 복을 빌 이유가 없으시기에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들을 축복하옵소서’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옵소서.’가 맞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을 축복하고 하나님은 백성에게 복을 주십니다.
    다음으로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을 차례로 살펴봅니다. 구약에서 복은 창세기 1장의 창조사건부터 쓰입니다. 즉 복은 창조의 목적이고 인간은 행복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창조의 목적인 그 복이 어떤 것인지 창 1:28이 알려줍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복은 곧 ‘생육하여’ 즉 자녀를 많이 낳아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은 곧 육체에 깃드는 ‘생명력’을 가리킵니다. 태어나고 건강하고 자녀를 낳고 가족이 늘어나는 것이 다 복입니다. 이 모든 일은 육체에 깃드는 생명력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구약의 복은 곧 육체에 깃드는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 이르러서도 복은 역시 생명력인데 그 영역이 달라집니다. 육체의 생명력이 아닌 영의 생명력입니다. 산상설교의 팔복을 보십시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 복은 이 땅을 차지하는 힘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힘입니다. 이 힘, 생명력으로 충만한 상태를 성령충만이라 묘사합니다. 육체의 생명력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듯 영의 생명력도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참된 생명력입니까? 영의 생명력입니다. 왜입니까?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육체의 생명력은 쇠하지만 영의 생명력은 오히려 새로워집니다. 육체의 생명력은 오래 가지 않지만 영의 생명력은 영원합니다. 이 영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옵니까? 바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서 옵니다.
    (고후 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런 참되고 영원한 생명력, 참된 복이 여러분에게 흘러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3.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이제 중요한 것은 이 복을 누리는 자리가 어디냐입니다. 시 1편은 행복한 사람의 자리를 보여줍니다.
    (시 1:1) 복 있는(행복한)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행복한 사람의 자리는 바로 시냇가입니다. 이 시냇가가 어디입니까? 그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말씀의 강, 진리의 강, 성령의 강, 은혜의 강이 흐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나는 생수를 마시리라’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몸,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가로질러 흐르는 말씀의 강에서 진리의 생수를 퍼마시고 성령의 강에서 은혜의 생수를 퍼마시는 성도는 사시사철 푸르른 생명나무로 자랍니다. 이 강가에서 멀면 진리와 은혜의 생수를 빨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강가에 있어도 뿌리가 얕으면 생수도 얕게 빨아들입니다. 뿌리가 깊으면 풍요롭게 빨아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얼마나 깊이 뿌리 내리고 계시는지요? 시냇가에 심지 않았다면 다른 어딘가에 뿌리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이가 안타깝게도 물 한 방울 없는 광야에 뿌리내립니다. 돌과 먼지와 가시만 가득한 곳에 뿌리내립니다. 그러면서 왜 자신이 바짝 마른 나무처럼 은혜의 물기가 없는 마음과 얼굴로 살아가는지 궁금해 합니다. ‘하나님, 내 삶은 왜 이렇게 메마릅니까?’ 자리를 잘 못 잡아서 그렇습니다. 시냇가에 심지 않으면 행복한 삶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생수의 강이 흐르는 교회에 뿌리내리고 생명력이 가득한, 행복한 인생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4. 목사를 통해 부으시는 복
    ‘나는 교회 다닙니다. 이 교회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회 안에 흐르는 두 개의 물줄기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주님이 축복의 통로로 세우신 지도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그 아들 즉 제사장의 축복을 통해 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축복의 내용이 24-26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민 6:23)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민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민 6: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민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민 6: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제사장에게 백성을 축복하라고 명하시고 그 축복을 들으시고 백성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왜 제사장의 축복행위를 통해 복을 주십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의 말을
    39 min
  • 20220327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 / 요 8:48-59
    요 8:48-59/믿지 않는 그리스도인
    220327 사순절5
    1. 제퍼슨의 성경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가시면 미국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 토마스 제퍼슨의 성경을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이기도 한 그는 2달러 지폐에 초상화가 나올 만큼 미국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제퍼슨의 성경이라고 이름붙힌 이 성경은 곳곳이 오려져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가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기에 기적에 관련된 모든 구절을 오려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부터 모든 기적, 부활과 승천을 모두 오려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대한 지혜와 도덕의 스승으로 여기고 미국이 그의 지혜와 삶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제퍼슨의 믿음은 오늘날 세속화된 서구사회가 복음을 향해 가진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결한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탁월한 도덕과 깊은 지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 모범을 따라 사는 것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자신들도 필요할 때 그런 지혜와 도덕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다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주저합니다. 이를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훨씬 큰 부담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해야할 의무를 집니다. 부활과 심판과 천국과 지옥의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하고 자신들의 삶이 평가받는 부담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2. 누더기가 된 복음
    그래서 오늘날 일부 교회와 기독교인은 현대인이 받아들일 만한 메시지를 만들고자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성, 부활과 승천, 성도의 부활과 죄인의 심판과 천국과 지옥 등의 메시지를 뺍니다. 그야말로 제퍼슨의 성경처럼 누더기가 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설교는 부부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 직장생활을 활기차게 하는 법, 고난을 이기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법 등의 How to 메시지로 축소되었습니다.
    이것은 현대교회가 직면한 심각한 위기입니다. 설교는 듣기 쉽고 이해하기도 쉽고 따르기도 쉬워졌지만 반면 굳이 교회 오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수많은 세속적 메시지와 비슷해졌습니다. 설교의 무게감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거역할 수 없는 엄중한 부르심에서 말 잘하는 목사가 들려주는 유익한 교훈과 도움되는 지혜 정도로 전락하고야 말았습니다. 영생의 메시지가 주던 깊고 풍성하고 위대한 메시지는 실종되고야 말았습니다. 설교를 듣고 가슴을 치며 죄를 회개하거나 제자로의 부르심 앞에 깊이 고민하거나 삶을 모두 드리노라는 결단과 헌신은 사라지고, 도움이 되었고 위로를 받았고 기분이 좋아졌다는 반응에 만족합니다. 과연 이래도 괜찮을 것일까요? 교회는 제대로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 것일까요?
    3. 돌을 든 유대인
    오늘은 요한복음 8장의 마지막 단락을 읽었습니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대화를 묘사한 8장은 재미있는 구조입니다. 8장의 시작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려던 유대인들의 모습으로 시작하는데 마지막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는 그들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그들은 죄인을 돌로 치려는 의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을 돌로 치려는 죄인일 뿐임이 드러납니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이웃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우리의 모습이 이와같지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8장 중반부에서 예수님이 당신은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을 때 분명 적지않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선지자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태도를 바꾸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을까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두 가지 메시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그들의 죄를 지적한 말씀입니다. 지난 주에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거짓말과 예수님을 해치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 귀신 들린 자라고 비난합니다. 이는 유대사회에서 가장 모욕적인 욕이었고 그들이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검에 찔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십니다! 당연히 아픕니다. 그들은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회개할 것이냐, 분노할 것이냐?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정반대의 반응이 나옵니다.
    (행 7:54) 그들(헬라파 유대인)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스데반)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2:37) 그들(유대인)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전자는 마음이 찔려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고 후자는 마음이 찔려 사도들 앞에서 회개하였습니다. 전자는 마귀의 자식이요, 후자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8장의 유대인들은 마귀의 자식답게 그들은 회개가 아닌 분노를 택했습니다. 그래서 돌을 들었습니다. 가인도 돌을 들었고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들도 돌을 들었고 여인도 죽이려 했고 예수님도 죽이려 했습니다. 말씀의 검에 찔렸을 때 분노하는 마귀의 자식이 되지 마시고 회개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하나님이신 예수님
    둘째 유대인들을 격분케 한 두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이 당신의 신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말씀에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네가 무엇이라고 사람을 죽지 않게 만드느냐’고 도전하였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다음의 권위를 가진 선지자로 일종의 성역입니다. 예수님도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나사로가 죽어서 간 낙원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브라함보다 크신 분일 뿐 아니라 아브라함조차도 당신의 영광을 보기를 기대했고 보고 기뻐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에게 하나님이 영광을 주셨다고도 하셨습니다. 이는 후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영광받으실 사건을 미리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아브라함보다 크신 분 곧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는 선언이요, 이는 당신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던 분이라는 선언에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네,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신 겁니다. 이는 첫 번째 메시지보다 훨씬 더 유대인들을 격분케 하였습니다. 신성모독은 오직 죽음 말고는 씻을 수가 없는 죄였습니다. 그들은 즉시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했던 것입니다.
    5. 불편한 예수님
    예수님의 신성은 유대인 뿐 아니라 오늘날 현대인도 무척 불편하게 만듭니다. 앞서 소개했듯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위대한 삶을 인정하고 본받기까지도 원하지만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첫째 그들의 편협한 이성제일주의 사고방식을 벗어버리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육신도, 기적도, 부활도, 승천도 모두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고 바람과 파도와 귀신을 다스리고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을 교육받은 지성인이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입니까? 이런 태도는 이성을 최고이자 유일한 판단도구로 여기고 이성을 가진 인간을 최후의 판단자 곧 신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인간 스스로 신이 되어 최후의 심판자가 되겠다는 태도로  자신이 이해못하는 것은 일어날 수 없다는 식의 아집의 다름 아닙니다. 신비의 세계, 초월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입니다. 19세기 말 전파를 발견하기 전까지 인류는 전파의 존재도 몰랐고 당연히 오늘날 일상이 된 라디오, TV, 셀폰, 무전기를 쓸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럼 인류 역사 대부분 전파는 존재하지 않은 겁니까? 그 때도 눈으로 볼 수 없었기에 존재하는지도 몰랐지만 전파는 존재했던 것처럼 지금 누군가가 증명할 수 없다고 하여 초월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요?
    둘째 예수님의 신성은 부담스러운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죄인이라 선언하시고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돈과 쾌락과 자랑거리를 구하며 사는 우리에게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34 min
  • 20220320 아버지가 누구냐 / 요 8:37-47
    요 8:37-47/아버지가 누구냐
    220320 사순절3주
    1. 신분제와 선민의식
    한국인과 친한 미국인들과 대화하다 보면 한국인의 라스트네임은 다 김, 이, 박이라고 농담할 때가 있습니다. 실제 한국인 절반이 김씨, 이씨, 박씨, 최씨이고, 한국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김씨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들 가문이 실제로 이렇게 번성했기 때문일까요? 16세기 조선 초만 해도 성씨를 가진 이는 왕족과 양반, 양민 등 10%에 불과했습니다. 조선 후기 광해군이 돈을 받고 신분과 벼슬을 파는 공명첩 제도를 실시하면서 노비와 천민 등이 소위 족보세탁을 하면서 90% 이상이 성씨를 가졌습니다. 이 때 더 비싸도 왕족, 귀족의 성씨를 선호했기에 지금처럼 김씨, 이씨, 박씨 등이 급격히 늘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늘날 족보의 90% 이상이 가짜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족보세탁에 혈안이 되었을까요? 신분에 따라 다른 자질과 권리,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어 그들이 누리는 사회적 특권, 대접, 당하는 차별과 멸시가 하늘과 땅차이의 신분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카스트제도가 남아있는 인도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나 인도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신분에 대한 믿음과 차별이 덜하지 않는 사회가 있다면 바로 1세기 유대사회였습니다.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믿었던 정통 유대인들이 가진 하늘을 찌를듯한 자부심과 반면 율법을 모르는 평민, 혼혈 사마리아인 그리고 타민족에게 가한 멸시와 차별은 상상을 초월하였습니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면전에 대고 개, 돼지 취급을 하는 것이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그들의 이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는 것은 엄청난 반발은 물론이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진 이 삐뚤어진 선민의식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난민들을 위협하고 몰아내는데 큰 몫을 차지합니다. 이 이데올로기에 목숨을 걸고 도전하신 분이 바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이십니다.
    2. 누구의 자손이냐
    요한복음 8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39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강조합니다.
    (요 8: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이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저주를 퍼부으십니다. 44절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는 짓이 마귀의 짓을 그대로 닮았기 때문입니다.
    (요 8:44) “… 그(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39)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요 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8:41) 너희는 너희 아비(마귀)가 행한 일들(살인과 거짓)을 하는도다.” …
    반면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 8: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믿고 주장하는 바가 아니라 행위를 근거로 판단하셨습니다. 이는 열매를 보고 나무의 종류를 판단한다는 당신의 말씀대로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포도나무라고 믿고 주장해도 무화과가 맺힌다면 그 나무는 무화과나무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해치려 하고 거짓을 말하는 것은 그가 마귀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반대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합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인용하며 성도들에게 그 행위로 믿음을 증명하라고 권합니다.
    3. 예수님은 어디에 
    이는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기독교인이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배우고 믿고 또 주장하지만 그 믿음이 참된 것인지는 말로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사기꾼일수록 더 번지르한 거짓말을 하고 이단, 사이비일수록 더 그럴듯하게 성경을 해석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행함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을 죽이고 속인다면 마귀의 자녀입니다. 그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또 죽인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당신이 승천한 후 세상에서 당신을 대신하는 존재 두 가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첫째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막 9장에서 복음전파를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막 9: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행 9장을 보면 그가 교회를 박해하다가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그는 교회를 박해했는데 주님은 이를 당신을 박해하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공격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해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하는 두 번째 존재는 바로 연약한 이웃입니다. 마 25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며 가르치기를,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이라 하였습니다.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그 영혼을 죽이려는 것 곧 살인하는 것이며 이는 곧 예수님을 죽이려는 짓입니다. 거짓으로 비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거짓과 미움을 갖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에게 거짓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그가 마귀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반면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며 곧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4. 살인의역사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했고 실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당신을 향한 그들의 적개심만을 지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선지자들을 살해한 것 뿐 아니라 이후 교회 역사에도 이와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살인을 저질러온 마귀의 역사가 이어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 서구유럽과 아랍세계에 씻을 수 없는 증오와 반목을 심은 11세기 십자군 전쟁은 그 좋은 예입니다. 교황청과 왕들, 도시의 필요가 맞물려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내세운 성지수복이 아닌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 증오만을 남겼습니다. 1950년대 미국에서 시작하여 한국에서 크게 성장한 Campus Crusade for Christ 소위 CCC 대학생선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한 캠퍼스 십자군’이란 뜻입니다. 교황조차도 지난 2000년 교회의 역사적 과오라며 공개사과한 죄목 중 첫째로 꼽은 것이 바로 이 십자군 전쟁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이들이 캠퍼스의 십자군이 되겠다고 하니 과연 아랍인들이 들으면 복음을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1960년 대까지도 공개활동을 마다하지 않았던 쿠 클럭스 클란 즉 KKK단은 개신교 근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흑인과 흑인에 동조하는 이들을 차별과 테러, 살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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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20 천국백성의 윤리 / 마 5:1~12
    마 5:1-12/천국백성의 윤리 191020 주일설교 산상설교1 불가해한 인생의 비밀 2004년에 KBS 인간극장의 PD 김우현 씨가 써서 베스트셀러가 된 ‘맨발천사 최춘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책이 있습니다. 김PD는 지하철에서 맨발에 걸인 같은 행색으로 예수천당과 남북통일을 외치며 전도하던 최춘선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난 후 그의 인생행로를 취재하다가 깜짝 놀랄 인생스토리를 만났습니다.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고 5개 국어를 하던 수재로 젊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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