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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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pisodes

  • 20220807 반석 위에 선 교회 / 마 16:13-28
    마 16:13-28/반석 위에 선 교회
    220807 창립50주년
    1. 교회의 도전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선교학을 전공하신 서정운 총장님은 새학기가 시작할 때면 항상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옛날 아름답지만 암초가 많은 어느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배가 자주 난파되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어느 어부가 쉬는 날이면 바닷가에 앉았다가 배가 난파되는 것을 보고 배를 몰고 가 사람들을 건져주었습니다. 목숨을 건진 이들이 늘어나면서 고맙다며 기부를 하자 어부는 그 돈으로 자그마한 구조센터를 지었습니다.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이들이 찾아와 본격적으로 구조센터는 더 넓은 해안을 관찰하며 구조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배가 매일 난파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저 무료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날이 많았고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서 이 아름다운 해변에 이렇게 좋은 건물이 있으니 배가 난파되지 않을 때는 까페를 운영해 사람들이 와서 쉬게 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까페가 시작되자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사람들이 몰려왔고 까페운영에 바빠 구조활동은 뒷전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까페를 하자는 이들과 구조활동을 하자는 이들이 갈등이 생겨서 구조를 주장하는 이들은 나와서 새로운 구조센터를 지었습니다. 구조센터가 커지자 이렇게 경치좋은 곳의 건물을 놀리지 말고 별장을 만들면 수입이 생기니 그것으로 더욱 구조활동을 더 잘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결국 그 곳도 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구조센터가 까페와 별장으로 바뀌는 일이 반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끝에 총장님은 덧붙이시기를, 교회는 항상 그 본질이 세상을 구원하는 공동체에서 세상을 즐기는 공동체로 변질될 위험을 안고 있으며 참교회는 언제나 그 위기를 극복하고 본질로 돌아가는 개혁을 통해 성장해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편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선진국 교회가 직면한 위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창립 50주년을 맞는 뉴저지장로교회가 다음 반 세기를 달려가기 위해 마음에 새겨야 할 교훈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뉴저지를 대표하는 교회 중 하나로 반 세기를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을 즐기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가 되어 다시 반 세기를 달려가기 위하여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듣습니다. 오늘 본문은 공생애 마지막 시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가이사랴 빌립보에 들러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입니다.
    2. 교회의 기초
    첫째 우리 뉴저지장로교회가 다음 50년을 달려가려면 무엇보다 반석 위에 서야 합니다. 무슨 반석입니까? 본문 18절을 보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성경에서 최초로 교회를 언급하십니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반석)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 카톨릭교회에선 이 반석을 베드로란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부르고 그 후계자인 교황들이 천국의 열쇠를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신도가 천국을 들어갈 지 말 지를 교황이 결정할 권세가 있어서 중세엔 교황이 이 권세를 가지고 왕과 영주들도 출교시키는 방법으로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22-23절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에 베드로가 반대하고 나서자 엄청난 말씀으로 꾸짖습니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카톨릭교회의 주장대로라면 교회가 사탄 위에 서 있는 꼴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반석이란 무엇일까요? 그리스어 페트로스는 바위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의 뜻을 가지고 일종의 언어유희를 하셨습니다. 그 반석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직전에 베드로가 한 신앙고백입니다. 신전이 가득 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믿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답합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메시야, 구원자’란 이 신앙고백, 복음이 바로 교회의 기초 반석이란 뜻입니다. 교회는 이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들의 연합체입니다. 교회는 이 신앙고백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이 신앙고백 위에 서서 2천 년을 달려왔습니다.
    이 신앙고백 위에 서지 않은 채 교회라고 주장하는 모임이 많습니다. 다른 이에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단, 사이비의 교회도 많습니다. 목사의 카리스마나 일부 교인들의 권세 위에 선 교회도 많습니다. 돈 많은 이들의 후원 위에 세운 교회도 많습니다. 외로운 이민자들의 친목의 욕구 위에 세운 교회도 많습니다. 이런 것은 반석이 아닙니다. 이런 것 위에 세운 교회는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이 풍파를 만날 때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헛된 욕구 위에 세운 교회는 풍파에 무너지지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참된 신앙고백 곧 복음 위에 선 교회는 풍파를 만날 때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도 50년을 달려가 100주년을 맞이하고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 나라 건설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 참된 고백 위에 서야 합니다. 다른 권세와 욕구와 주장이 교회의 기초가 되게 하면 무너집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은 오늘 이 시간 무엇때문에 예배에 참석하셨습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으로 무릎 꿇고 그 분의 주 되심에 순종하여 모든 삶을 드리려는 종이 되려고 오셨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주가 되어 욕구와 권세와 주장을 관철시키고  이민생활의 외로움을 달래보려고 오셨습니까? 뉴저지장로교회 모든 성도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참된 신앙고백으로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는 종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교회의 능력
    둘째 뉴저지장로교회가 다음 50년을 달려가려면 교회의 능력을 품어야 합니다. 그 능력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힘이 세고 돈이 많고 교인이 많아서 지역의 정치인, 유명인들이 다 찾아와서 고개 숙이는 것입니까? 중세교회는 그런 방식으로 큰 능력의 교회이긴 했습니다. 지금도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는 그러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참된 능력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18절입니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탄생부터 지금까지 아니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음부의 권세로부터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음부의 권세 즉 사탄이 어떻게 교회를 무너뜨리려 위협하는지가 나옵니다. 먼저는 교회의 존재를 없애버리려 박해를 가합니다. 유대인 공동체와 로마제국 정부는 교회의 존재를 성가시게 여기고 제거하려고 사도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박해에도 교회가 오히려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사탄은 더 위협적인 방식으로 공격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변질시켜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적 공동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전 재산을 교회에 드려 선교와 구제에 쓰고 존경을 얻는 것을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들의 헌신을 부풀려 자랑하여 자신들도 영광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작에 오늘 본문 마 16:6에서 이런 바리새인의 위선이 교회에 침투하는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또한 사탄은 거짓된 가르침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려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이방인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해야 한다는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이 일어나 복음으로 충분하다는 사도 바울 일행과 분열을 일으킵니다.
    34 min
  • 20220731 정결한 마음 / 요 10:22-42
    요 10:22-42/청결한 마음
    220724 주일설교
    1. 소독법
    팬데믹으로 전세계 사람들이 익힌 습관이 있습니다. 손씻기입니다. 우리 손이 온갖 세균을 옮기는, 질병의 매개체란 사실은 오늘날 모르는 이가 없는 상식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이 상식을 받아들이는 데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19세기는 서양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였지만 아직 세균의 존재를 몰랐기에 의사들은 피와 고름으로 범벅이 된 손과 옷, 수술도구로 여러 환자를 오가며 치료와 수술을 하기 일쑤였고 환자들은 의사가 옮긴 세균으로 감염되어 사망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1843년 미국의사 올리버 웬델 홈즈가 보스턴의학회에서 최초로 치료나 수술 후 반드시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미국의사로부터 무시당했습니다. 1847년 헝가리 산부인과의사이자 교수인 이그나즈 제멜바이스 역시 수술 후에는 반드시 염소수로 손을 씻어 감염을 막아야 한다는 논문을 발표했지만 귀기울이는 유럽의사들은 극히 소수였습니다. 오히려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 의해 두 곳의 대학에서 해임되고 의사면허도 박탈되었습니다. 세상의 반응에 충격을 받은 그는 정신질환을 앓다가 패혈증으로 사망했습니다.
    19세기 의사들이 이 두 선구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무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는 편견, 제멜바이스의 출신을 경시했습니다. 명문가 출신도, 명문대학 출신도 아닌 그의 주장을 가문과 학벌을 중시했던 당시 의학풍토에서는 얕잡아 본 것입니다. 셋째가 오만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자신들이 병균의 매개체가 되어 환자를 감염시켜 죽게했다는 주장에 매우 분개했습니다. 아무튼 이 선구자들의 주장을 의학계가 널리 받아들이기까지 반 세기가 더 걸렸고 그 동안 수많은 환자들은 여전히 의사들의 손에 묻어온 세균감염질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 진실을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줍니다. 큐빅을 잔뜩 뿌려놓으면 그 가운데 다이아몬드를 구분하기 어렵듯 평소 가진 무지, 편견, 자만이 결합하면 진실을 가려낼 분별력을 거의 잃고야 마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바이기도 합니다.
    2. 몰이해의 이유
    본문의 배경은 겨울, 수전절의 예루살렘 성전 안 솔로몬 행각입니다. 여기서 논쟁이 벌어집니다. 주제는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이냐입니다. 24절입니다.
    (요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이 말을 들으면 예수님이 당신의 정체를 숨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답답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힙니다. 25절입니다.
    (요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첫째 예수님은 이미 여러 차례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 표적도 이를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이 이미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지 못 합니까? 26절이 가르칩니다.
    (요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문제는 예수님의 정체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정체였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참 메시야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양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놓기 일쑤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런 문제를 주시고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게 정말 맞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온전하십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변덕스럽습니다. 문제를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마땅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자신을 원망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진실을 찾아가라는 의미입니다.
    3. 그릇된 기대
    그러나 유대인들은 분명 항변할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의 양떼가 아니라는 모진 말씀을 하실까요? 그 답은 오늘 본문의 배경에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요 10: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12월에 유대인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면 성탄트리 옆에 커다란 촛대모양을 세워놓은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 촛대를 메노라라고 부르고 이 촛대상징으로 기념하는 절기를 수전절, 히브리어로 하누카라고 합니다. 하누카의 뜻은 ‘봉헌하다’이고 수전절은 닦을 수자를 써서 ‘성전을 닦아서 새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수전절의 유래는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알렉산더대왕이 세운 헬라제국은 그가 죽은 후 크게 4개 나라로 분열되었는데 그 중 하나인 셀리오쿠스 왕국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은 기원전 164년 마카비의 지휘 아래 드디어 독립을 쟁취하고 헬라의 우상으로 더러워진 성전을 청결케 하여 하나님께 새롭게 봉헌했습니다. 이 독립과 성전봉헌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수전절입니다. 이 마카비 왕국은 그러나 약 100년 만에 다시 로마제국에 의해 정복당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마카비 같은 구국의 영웅 곧 메시야가 나타나 자유로운 유대왕국을 건설해 줄 것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렸으면서도 예수님이 메시야인 줄 깨닫지 못 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메시야, 죄와 죽음을 해결할 메시야, 하나님 나라를 세울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카비와 같이 자신들이 대접받고 왕노릇 하는 유대왕국을 세월줄 정치-군사적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어릴 적에 시골외가에 놀러가면 할아버지는 소 먹인 이야기를 하시고 할머니는 뒷산 밭일 이야기를 하시면서 한 시간 동안 대화를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도 없이 한 시간 동안 대화가 오고 갑니다. 지금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가 이렇게 초점이 맞지 않는 주파수처럼 서로 엉뚱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 하는 수준에서 넘어서서 급기야 돌을 들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4. 믿는 마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모르는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인데 우리는 땅의 나라, 우리의 나라를 기대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구원을 가르치시는데 우리는 육적인 구원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지기를 가르치시는데 우리는 욕망, 돈, 직장, 성공을 이루기를 기대합니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요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니고데모는 뛰어난 지성인이었지만 그 역시 시선이 땅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초점이 어긋난 상태에서는 아무리 예배하고 설교듣고 성경공부하고 봉사해도 전혀 주님께 가까이 가지 못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해하고 죽이려 한 유대인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장하고 성숙하기보다 점점 더 경직되고 자기의를 쌓는 종교생활이 되고 마침내 이웃을 죽이는 데까지 이릅니다. 마치 체인이 풀린 자전거의 패달을 열심히 밟듯 헛도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밟아도 자전거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주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 분과 동행하는 영생을 살려는 이는 마음의 모든 무지, 편견, 오만을 내려놓고  청결한 마음으로 주님과 눈을 맞추어야 합니다. 산상설교입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한 마음은 주님의 진리가 잘 보입니다. 헛된 기대와 욕망을 내려놓은 마음은 행복합니다. 창조주의 선한 계획이 이해되고 구원하시는 사랑을 깨닫고 맡기신 사명이 감사하고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이 명료하게 보입니다.
    5. 진리의 창
    어떻게 어디서 그 진리가 보입니까? 첫째 성경을 읽을 때입니다. 34-35절입니다.
    (요 10: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34 min
  • 20220724 약함과 강함 / 딤후 2:1-2
    딤후 2:1-2/약함과 강함
    220724 주일설교
    1. 약함과 강함
    여러분은 강합니까, 약합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여기 이 여인을 보고 다시 한 번 스스로를 평가해 보십시오. 엘리엇 터브먼은 흑인, 노예, 여자, 장애인이란 4중고를 겪으며 살았습니다. 1822년에 메릴랜드주의 한 농장에서 노예로 태어난 그녀는 10대 시절 농장주가 던진 쇳덩이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이 함몰되고 피투성이가 되어 며칠을 사경을 헤매다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그 일로 평생 사라지지 않는 두통과 발작, 기절과 수면과다증에 시달렸습니다. 여러 농장으로 팔려다니며 구타와 채찍질을 일상으로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멸시받고 보잘것 없고 약한 사람 중 하나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녀는 출애굽 이야기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하나님이 모든 이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밤마다 자유인이 되는 꿈을 꾸고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었습니다. 마침내 1849년 27세의 그녀는 목숨을 걸고 필라델피아로 탈출하여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의 용기는 작다 할 수 없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자유로 만족하지 못 했습니다. 노예사냥꾼에 쫓기는 중에도 그녀는 더 안전한 북부로 도망치는대신 메릴랜드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지하철도란 이름의 기독교노예해방운동조직에 가입한 그녀는 퀘이커교도와  메노나이트교도들의 도움을 받아 겨울 밤에만 며칠에 걸쳐 걷고 또 걷는 방식으로 모두 13차례에 걸쳐 70여 명의 가족과 이웃 노예들을 탈출시켜 북부와 캐나다로 이주시켰습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는 간호사와 정찰병으로 자원입대하여 콤바히강 전투에서 700명의 노예들을 구출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1913년 91세로 주님 품에 안기기까지 남은 생애 그녀는 여성참정권 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2. 강하라
    오늘날 수많은 그녀의 전기는 그녀를 흑인들의 모세라고 부릅니다. 미시간주에는 그녀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2016년 미재무장관은 새로 발행되는 20달러 지폐에 그녀의 초상이 실릴 것이라 발표하였습니다. 자, 이제 우리 중 누가 그녀를 약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보다 더 강한 믿음, 강한 용기, 강한 헌신의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진정한 강함이란 무엇입니까? 건강하고 돈많고 지식많고 지위높음과 같은 1차원적 강함과 다른 차원의 강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강한 성도가 되길 바라십니다. 날마다 처하는 고난과 시련을 이기는 진짜 힘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로마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 중인 그의 동역자이자 아들처럼 여기는 젊은 제자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본문 1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강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딤후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왜 ‘강하라’고 권면합니까? 디모데를 둘러싼 척박한 상황 때문입니다. 그는 젊었습니다. 미숙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병약했습니다. 디모데전서를 보면 바울은 디모데의 위장병 때문에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합니다. 그는 바울처럼 기질이 강하거나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도 아닙니다. 바나바처럼 부드러운 기질의 일꾼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가 섬기는 교회는 정반대였습니다. 로마제국 아시아주의 주도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거주민도 많았고 교인도 많았고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고린도교회처럼 온갖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첫째 문제가 23절에 나옵니다.
    3. 다툼과 거짓을 대항하여
    (딤후 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첫째는 다툼이었습니다. 예나지금이나 교회에는 항상 다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민생활에서 받는 무시와 스트레스를 교회와서 풀어야 하는데 모두가 대접을 받고만 싶고 대접하는 이는 많지 않으니 다툼은 생기기 마렵입니다. 2천 년 전 에베소인들 별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명합니다.
    (딤후 2:14)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다툼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천사만 있는 줄 알다가 다툼을 보고 시험이 들어 믿음을 잃습니다. 교회에는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가 마지막날까지 섞여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아직 모릅니다. 디모데는 이런 어리석고 무식한 다툼을 막아야 합니다. 둘째는 거짓입니다. 16-17절입니다.
    (딤후 2: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딤후 2: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암)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망령되고 헛된 말 곧 거짓과 비방입니다. 이런 말은 암처럼 공동체에 빨리 퍼집니다. 항상 좋은 말보다 나쁜 말이 빨리 퍼집니다. 좋은 말은 안 믿지만 나쁜 말은 쉽게 믿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녹음기를 품에 넣고 하루 종일 한 말을 기록해 보십시오. 감사를 많이 합니까, 불평을 많이 합니까? 커피숍에 앉은 동안 감사와 칭찬을 많이 합니까, 불평하고 비난을 합니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민수기 13-14장을 보면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돌아보고 와서 10명이 그 땅을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삽시간에 이들의 불신앙과 비방이 온 회중에 퍼져 그들이 밤새도록 울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2명의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가나안땅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외치지만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런 거짓과 악한 인간의 본성과도 디모데는 싸워야 합니다.
    4. 온유와 진리로
    디모데는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첫째 다툼은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합니다. 24-25절입니다.
    (딤후 2: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다툼에 휘말리지 말고 온유하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고 인내해야 합니다. 당연히 거역하는 이가 있습니다. 거듭 온유하게 훈계해야 합니다. 9명이 회개하지 않아도 1명이 회개할 가능성을 보고 온유하게 훈계해야 합니다.
    둘째 거짓에 대항하여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거짓을 이기는 유일한 능력은 진실입니다. 온갖 이단사설, 거짓과 모략, 비방과 획책의 천적은 진리입니다. 거짓은 어둠이요, 진리는 빛입니다.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해가 뜨면 사라집니다. 방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몽둥이가 아니라 전등입니다. 진리의 전등을 켜면 거짓의 어둠은 사라집니다. 거짓은 진리의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모략은 섭리의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살아계신 진리의 하나님, 섭리의 하나님의 승리를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5. 은혜 안에서 강하라
    이렇게 다툼을 온유한 훈계로, 거짓을 진리의 선포로 이기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강함이 필요합니다. 그 강함은 목소리가 크거나 힘이 세거나 무서운 표정을 지음으로 드러나는 강함이 아닙니다. 은혜 안에서 드러나는 강함입니다.
    (딤후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은혜 안에서 강해야 합니다. 어떤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것입니다. 사함받은 죄인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자신이 500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은혜를 깨닫는 것 외에는 50데나리온 빚진 이웃을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디데모도 사람인데 다투고 대드는 이들에게 어떻게 온유하게 대할 수 있을까요? 유일한 방법은 자신도 죄와 악으로 하나님을 반역하던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늘 되새겨야 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저지른 죄와 악을 깨닫는 사람은 복됩니다. 자신이 누리는 은혜의 크기를 압니다.
    35 min
  • 20220717 죽으시는 우리 목자 / 요 10:11-18
    요 10:11-18/죽으시는 우리 목자
    220717 주일설교
    1. 인간과 동물의 애착관계
    여러분이 플로리다로 휴가를 떠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애완견과 함께 호숫가를 지나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악어가 개를 물고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플로리다에는 약 130만 마리의 악어가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겠지만 안전한 물 밖에 머무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위험을 무릎쓰고 개를 구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전자가 아닐까요? 고민이 된다면 이 영상을 한번 보십시오.
    다행히 작은 악어여서 강아지는 구하였지만 월뱅크스씨의 손이 악어에게 씹히고 말았습니다. 만약 큰 악어였다면, 만약 다른 악어가 물 속에 있었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니, 애완견이 뭐라고 그는 이런 위험을 무릎쓰는 것일까요? 많은 미국인에게 개는 가축이나 애완견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거의 가족에 가깝습니다. 개를 위해 시간과 돈, 애정을 쏟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최근 구찌에서 애완견용 만 불짜리 침대, 천 불짜리 레인코트 등 명품애완견상품이 출시되었는데 이게 잘 팔린다는 겁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벤지라는 애완견을 얼마나 아꼈던지 2009년 16살로 벤지가 죽자 체세포를 복제해 쌍둥이 벤지를 만들어 키웠습니다. 이회장이야 돈걱정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그 복제에 돈이 얼마나 들었겠습니까?
    아무튼 인간과 동물 사이의 특별한 애착관계는 사실 그리 낯선 것이 아닙니다. 목축업을 하던 예수님 당시 목자들 중 양들과 이런 특별한 애착관계를 맺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목자가 자신이 돌보던 양을 어떻게 사랑했는지는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와 들려준 비유의 한 대목에도 이렇게 소개됩니다.
    (삼하 12:3)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이런 목자는 양을 자녀처럼 사랑하고 심지어 그 양을 지키고 구하기 위해 위험을 기꺼이 무릎쓰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제자의 관계를 바로 이런 목자와 양에게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2. 양을 사랑하는 목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목자와 양의 비유 중 후반부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목자의 음성이 강도의 음성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의 하는 일이 삯꾼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십니다. 삯꾼은 돈을 받고 고용되어 양을 치는 이를 말합니다. 목자는 양의 소유주일 뿐 아니라 양과 깊은 애착관계가 생겨 자녀처럼 사랑하게 된 이들입니다. 목자는 삯꾼과 어떻게 다릅니까?
    첫째 선한 목자는 삯꾼과 달리 양을 깊이 사랑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안다로 번역된 헬라어 기네스코는 히브리어 야다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쓰입니다. 히브리어 야다는 성적으로 친밀한 부부가 서로를 아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헬라어 기네스코도 그저 상대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의미를 넘어서 마치 수십 년 지기 배꼽친구가 서로를 알듯 깊고 친밀하게 아는 상태를 말합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은 우리를 아시되 사람들처럼 겉모습만 알거나 대강대강 알거나 하지 않고 우리의 아픔과 상처와 외로움과 실망감까지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마치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알듯이,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듯이 깊이 아십니다. 그 깊은 앎은 당연히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서로를 경계하던 낯선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상대를 점점 알아가면 갈수록 그에 대한 호감, 연민, 바람이 생기고 그로 인해 위로와 격려를 받고 그 때문에 의미와 기쁨을 느낍니다. 이 모든 경험이 사랑이란 감정으로 승화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창조되었는지, 얼마나 안타까지 타락했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얼마나 자주 실패하고 넘어지고 외롭고 지치고 아픈지를 속속들이 아십니다. 사랑의 주님은 그렇게 아시는 우리를 도저히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혹 여러분 중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다고 자학한 적이 있는 분들은 이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누구보다 깊이 아시고 사랑하시고 신경쓰시고 우리를 위해 탄식까지 간절히 기도하는 목자입니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이 누군가가 바로 주 예수님입니다. 성도의 외로움과 괴로움은 이 주님을 만날 때 해결됩니다. 이 주님을 만나지 못 해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돈으로부터, 지위로부터, 명예로부터 목마름을 해결하려니 외로움과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욱 알아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를 따라갈 때 양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받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초장과 물가에서 쉼을 누리고 계신지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십시오. 주님만 바라보고 따라가십시오. 주님을 깊이 알고 그 안에 풍성한 영생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3. 양을 위해 죽는 목자
    둘째 선한 목자는 삯꾼과 달리 양을 위해 죽기까지 희생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요 10: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scatters the flock).”
    삯꾼은 들짐승이 덤비면 양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돈 몇 푼 때문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습니다. 삯꾼은 우리에게 행복과 성공을 보장하겠노라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세상의 주인들입니다. 돈과 명예와 지위와 인기 등 온갖 것들이 자신을 섬기라고 요구하지만 정작 이리가 우리를 삼키려 덤벼들 때면 우리를 내팽개치고 달아납니다. 진정 우리를 염려하고 지켜주고 끝까지 함께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세상 주인들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치면 이리는 마음껏 양떼를 유린합니다. 양을 물어갑니다. 또 양떼를 헤칩니다. 헤친다는 말은 죽인다는 뜻이 아니라 흩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이리는 무엇입니까? 성도의 생명을 삼키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세상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의 영혼을 삼킵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를 흩어버립니다. 마귀의 계략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마귀는 공동체를 흩고 나누고 무너뜨리고 갈라지게 만듭니다.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낭비하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가정도 흔들고 다투고 갈라지게 하고 분열시킵니다. 국가도 분열하고 갈라지고 싸우고 전쟁하게 만듭니다.
    모든 방향이 하나님의 역사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살리고 세우고 연합하고 일치시키고 쌓고 일으키고 하나되게 만드십니다. 이를 위해 목자이신 주님은 양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11절 이하입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요 10:15)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주님은 끝까지 양떼를 지키십니다. 당신의 목숨을 버려서까지 성도와 교회를 지키십니다. 주님은 십자가 희생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죄와 악으로 우리를 삼키려는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영원히 죽을 우리가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죄와 악의 골짜기를 방황치 않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의와 초장, 진리의 물가로 인도받습니다. 이 모든 은혜가 양을 위해 기꺼이 죽는 목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이 은혜를 바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매일매일 누리며 감사하며 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4. 다른 양도 인도하는 목자
    셋째 선한 목자는 우리 밖에서 방황하는 다른 양들도 우리로 인도하십니다. 16절입니다.
    (요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34 min
  • 20220710 목자의 음성 / 요 10:1-10
    요 10:1-10/목자의 음성
    220710 주일설교
    1. 양을 부르는 음성
    산 이곳저곳에 흩어져 보이지도 않는 양을 모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 영상에 답이 있습니다. 답은 바로 목자의 음성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을 읽고 온라인에 관련영상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방금 보신 영상과 더불어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지 실험한 영상이 여럿 있었습니다. 낯선 이가 부를 때는 가까이 있는 양들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부르자 멀리 있는 양들도 알아 듣고 달려오더니 목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10장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양과 목자의 비유입니다. 언듯 보면 이 본문부터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 듯 하지만 사실 10장은 우리가 계속 읽어온 9장의 시각장애인 치유사건과 연결된 해설입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의 이 장, 절 구분은 16세기에 붙인 겁니다. 9장의 시각장애인 치유사건과 이 10장의 해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2. 양이 듣는 음성 
    시각장애인 치유사건은 한 가지 의문을 남깁니다. 이 시각장애인은 가난하고 배우지도 못 했고 종교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은, 내세울 것도, 존경받을 만한 것도 없는 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정통하고 열정적인 종교생활을 하고 존경받는 이들이었는데 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도, 믿지도 못 했을까요? 우리 주변에서도 어떤 이는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신실하게 순종하는데 왜 똑같은 말씀을 어떤 이는 듣고도 깨닫지도, 돌이키지도 못 하고 교만을 버리지 못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3절입니다.
    (요 10: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그 이유는 이 시각장애인이 참 주님의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참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습니다. 참 양은 목자를 따라갑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고 불러서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그럼 이 목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고 계시고 부르시고 생명의 나라로 이끄십니다. 9-10절입니다.
    (요 10:9)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요 10:10) …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그러므로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고 그 뒤를 따르는 이들, 참 생명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가는 참 양들은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습니다. 참 목자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복이 여러분에게 넘쳐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양이 듣지 않는 음성
    그러나 세상에는 참 목자의 음성만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가득한 시장, 쇼핑몰이나 음악이 시끄러운 파티에 가면 곁에 있는 친구의 말을 듣는 것도 무척 어렵습니다. ‘뭐라고? 뭘 가져오라고?’ 세상에는 강도의 음성이 소란스럽게 주님의 음성을 가리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요 10: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특별히 강조하십니다. 생명을 앗아가려는 도둑과 강도가 있습니다. 이 강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요 10: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이 강도의 음성은 생명을 빼앗습니다. 달콤하고 매력적이고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지만 죽음의 음성입니다. 이런 음성을 듣는 이는 참 목자의 양이 아닙니다. 참 양은 그 음성을 가려 내어 듣지 않습니다. 15절입니다.
    (요 10:5)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강도와 목자의 음성
    제가 LA에서 청년부 사역을 할 때입니다. 어느 저녁 청년들이 운동하는 곳에 4살 쯤 된 평화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운동장 한 쪽에서 평화를 놀리려니까 근처에 꼭 평화 또래의 아이를 데리고 온 아빠가 있었습니다. 제가 평화에게 ‘가서 허그하고 같이 놀아’하고 보내니까 그 아빠도 아이를 보내면서 그러는 겁니다. ‘야, 가서 누가 쎈가 맞짱 떠 봐. 지면 안 된다.’ 깜짝 놀랐습니다. 4살 짜리 아이들이 누가 쎈가 가리는 것이 왜 중요하고 맞짱을 어떻게 뜹니까? 그 아이는 4살부터 낯선 이들을 만나면 긴장하고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음성을 듣고 자랄 겁니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할까요? 하늘의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을 듣고 자란 아이와 얼마나 다를까요? 그는 어쩌면 평생 자신보다 쎈 이를 두려워하고 약한 이를 무시하며 멸망의 길을 가지 않을까요?
    정치공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군주는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 왜냐하면 원래 인간은 은혜도 모르고 변덕이 심하며 위선자인데다 뻔뻔스럽기 때문이다.”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선언하는데 마키아 벨리는 똑같은 이유로 군주에게 두려움으로 인간을 통제하라고 가르칩니다. 군주는 자신의 안위와 성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것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마라. 그리고 나쁜 일은 가급적이면 부하를 시켜라. 그리고 자신은 뒤에 숨어라”
    이런 음성을 듣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길을 갑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고 뺏고 더 가지고 움켜쥐어야 살아남는 세상이라는 철학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음성이 자신을 죽여 양들을 살리시는 참 목자의 가르침과 얼마나 다른지 보십시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주님은 당신을 죽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군주이십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군주이신지요? 얼마나 자비로운 왕이십니까? 세상 어디에서 이런 목자를 찾아볼 수 있을까요? 이 참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우리는 삽니다. 이 목자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불러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를 헤멜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찾아내시고 부르십니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아시고 부르십니다. 그 음성을 듣는 이는 얼마나 복된지요.
    주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긍휼히 여기고 청결하고 화평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의를 위해 박해받기를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 길은 좁은 길이지만 생명의 길입니다.
    반면 강도의 음성은 우리에게 교만하고 분내고 다투라고 합니다. 거짓을 퍼뜨리고 불의와 모략을 꾸미라고 합니다. 불의에 가담하여 의인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 길은 욕심대로 될 것 같지만 멸망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귀에는 누구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강도의 음성을 뿌리치고 참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이 음성을 듣고 생명길 가는 천국백성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The post 20220710 목자의 음성 / 요 10:1-10 first appeared on 뉴저지장로교회.
    23 min
  • 20220703 사랑과 공의의 법 / 마 5:17-19
    마 5:17-19/사랑과 공의의 법
    220703 주일설교
    1. 성령과 법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가 성령의 역사를 지속하기 위해 한 일이 있는데 법을 만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법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설교에 무슨 법 이야기야, 하실 수 있지만 오늘 본문말씀처럼 법은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성령이 물이라면 법은 그릇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물이지만, 그릇이 없으면 물을 보관하고 마시기가 어려운 것처럼 법이 없으면 성령의 역사는 지속되거나 보호되기 어렵습니다. 성령님만 계시면 되지 법이 왜 필요해, 하는 말은 물만 있으면 되지, 물그릇이 왜 필요해 하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진 법은 교단헌법과 교회내규입니다. 헌법은 교단 홈피 자료실, 내규는 교회 홈피 자료실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헌법은 교단 내 모든 교회가 지켜야 할 규칙입니다. 이 헌법이 있는데 내규는 왜 필요할까요? 헌법은 모든 교회에 적용할 평균적 규칙이기에 개교회가 가진 개별적 상황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우리 교단교회는 서구문화권 교회도 있고 동양문화권 교회도 있습니다. 도시교회도 있고 시골교회도 있습니다. 큰 교회도 있고 작은 교회도 있습니다. 고유한 교회의 상황을 헌법이 다 반영하지 못 하기에 각 교회는 내규를 만들어 사용하고 이를 헌법도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법과 관련한 오해가 늘어나서 여러 교우들이 놀라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법의 정비와 준수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가 정비하려는 법이 어떤 것인지 여러분께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잘 들어두시면 분명 건강한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2. 내규개정 공동의회
    지난 6월 당회는 3건의 내규 개정을 위한 공동의회를 다음 주에 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난 주간 이에대한 왜곡된 내용의 루머가 여러 카톡방에 퍼져서 많은 교우들이 놀라고 걱정하고 또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회는 일단 공동의회를 잠정 연기하고 교우들의 오해와 걱정을 덜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당회가 개정논의한 내규는 3가지입니다. 담임목사 임기규정, 시무장로 임기규정 그리고 선거관리규정이 그것입니다. 공동의회에서 교우들은 이 세 가지 안건에 대해 각각 찬반의사를 밝히시면 됩니다. 이 세 가지를 패키지로 묶어 모두의 찬반을 한 번에 선택해야 한다는 루머가 있던데 완전한 오해입니다. 그렇게 하면 교우들의 정확한 의사가 반영되기 당연히 어렵겠지요.
    또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왜 제직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공동의회에 바로 상정하느냐 주장이 있었습니다. 이는 제직회와 공동의회 그리고 당회의 역할에 무지한 주장입니다. 헌법은 제직회의 성격을 재정에 관한 결의를 한다고 정해두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구제물품을 분배하는 직책을 맡기기 위해 일곱 집사를 세운 것에 근거합니다. 임기, 선거 그리고 내규는 애초 제직회의 결의내용이 아닙니다. 이런 주장도 있더군요. ‘하지만 지금까지 교회의 모든 중요한 일은 제직회에서 의논한 전통이 있지 않습니까?’ 죄송하지만 그런 전통은 없습니다. 이 내규집에 있는 어떤 규정도 제직회에서 의논한 것도, 만든 것도 없습니다. 모두 당회에서 만들었고 그 중 당회원 임기제 규정은 당회에서 만들어 공동의회에서 결의하였습니다.
    왜입니까? 헌법은 공동의회가 분명히 직분자 선거에 관해 결의토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공동의회야말로 당회가 제시하는 임기와 선거에 관한 결의를 할 수 있는 합당한 기관입니다.
    제직회와 공동의회에 안건을 상정하는 것은 당회의 역할입니다. 당회는 대의정치제도를 가진 장로교회의 치리기관으로 교인총회를 대표합니다. 당회의 구성원인 당회장과 시무장로는 교인총회인 공동의회가 선출하여 위임한 기관입니다.  교회 내에 이보다 큰 권위를 가진 기관이 없습니다. 당회가 법을 따라 집행하는 결정에는 헌법적 권위와 영적 권위가 함께 합니다. 일부 교우들의 도를 넘는 선동과 비방은 심히 우려한 만한 일입니다.
    자, 그럼 당회가 공동의회에 상정한 내규 세 가지는 무슨 내용이며, 왜 개정논의를 하는 겁니까?
    3. 담임목사 임기규정
    첫째 담임목사 임기규정입니다. 지난 2014년 당회는 을 공동의회에 상정하여 승인받아 내규로 정했습니다. 이 내규에 의하면, 담임목사의 임기는 7년으로 끝나며, 6년째 되는 해에 재신임투표를 하여 다시 7년의 임기를 연장합니다. 이런 내규를 만든 이유는 담임목사가 목회를 지속할 수 없는 결격사유가 생겨서 교회가 부득이 담임목사와 결별해야 할 때 필요한 절차가 당시 헌법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가 끝까지 사임을 거부하면 합법적인 결별절차가 없었기에 지리한 다툼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을 주변에서 종종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적어도 7년에 한 번씩 재신임투표를 통해 합법적이면서도 은혜롭게 결별케 하려는 안전장치였습니다. 저는 2009년 부임, 2010년 위임목사가 되었고 지난 2016년 교우들께서 감사하게도 재신임을 투표로 해 주셔서 두 번째 임기를 수행 중이고 내년 말 두 번째 재신임투표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16년 우리 해외한인장로회 교단은 헌법개정을 하며 우리 교회 내규보다 훨씬 강력한 안전장치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입니다. 이 규정에 의하면 이제 교회는 매 7년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언제든 목사와 결별해야 할 때 당회원 3분의 2, 공동의회 과반의 결의로 사임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 헌법과 내규는 서로 충돌하지 않으므로 우리 교회는 이 두 가지 규정 모두의 적용을 받습니다. 7년마다 재신임 투표를 하는 동시에 언제든 권고사임을 시킬 수도 있는 것이지요.
    최근 당회의 두어 장로님께서 제안하시기를, 훨씬 강력한 헌법의 안전장치가 생겼으니 재신임투표규정을 폐지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굳이 왜 그래야 하느냐고 반문하자 저를 반대하는 분들이 재신임투표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우들이 원치 않으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제가 떠나야지요라고 답하자 ‘목사님이 떠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목사님을 내보내려는 이들과 지키려는 이들로 교회가 갈라질 수 있습니다.’ 하고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회에서 의논해 보기로 하였는데 당회가 만장일치로 교회의 분열을 피할 수 있도록 공동의회에 상정키로 결정하였습니다.
    카톡방에서는 담임목사가 독단으로 이 모든 일을 밀어붙였다는데, 당회의 구조상 그럴 수가 없습니다. 투표로 결정하는 당회에서 저도 한 표를 행사하는 N분의 1입니다. 실제 이 세 안건 모두 장로님들이 제안하신 것이고 제가 내놓은 것은 단 한 건도, 밀어붙인 것도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오해를 푸시기 바랍니다.
    4. 시무장로 임기규정
    둘째 시무장로 임기규정입니다. 위의 내규에는 시무장로의 임기를 휴무 1년 포함 7년으로 정하였습니다. 이는 교단헌법이 규정한 13년의 절반이고 재신임을 받을 경우 26년을 섬기니 4분의 1입니다. 왜 임기를 이렇게 줄였습니까? 교회가 작아서 일꾼이 부족하면 가능한 시무장로가 오래 사역하는 것이 교회에 도움이 됩니다. 반대로 교회가 커서 일꾼이 많으면 시무장로 임기가 짧을수록 더 많은 일꾼들이 당회에 들어가 섬길 기회를 얻는 유익이 있습니다. 또한 당회원 교체가 빨리 되면 평균연령이 떨어져 당회원이 젊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한인교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다음 세대를 선교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젊은 당회원일수록 당연히 젊은 세대를 더 이해하고 소통도 쉽고 변화하는 세대에 대응도 빠릅니다. 이런 이유로 같은 교단에 속한 초대교회도 시무장로의 임기가 7년이고 우리 교단과 자매교단인 미국장로교회는 임기가 3년이며 재신임으로 1회에 한해 3년을 더 섬길 수 있습니다. 재신임을 받아도 6년이면 끝이 납니다.
    그런데 최근 은퇴장로님 몇 분이 시무장로의 임기가 짧아 사역의 연속성이 떨어진다는 문제점을 제기하시며 7년 임기 내규를 폐지하고 13년 임기의 헌법을 따르라는 권고를 여러 차례 해오셨습니다. 당회가 이에 대해 논의를 많이 했지만 결론을 얻기 힘들어 공동의회에서 교우들의 뜻을 물어 결정키로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시무장
    34 min
  • 20220626 숨은 뱀 찾기 / 요 9:24-41
    요 9:24-41/숨은 뱀 찾기
    220626 주일설교
    1. 바야돌리드 논쟁
    누군가를 피부색이 다르다고 다른 언어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법정으로 끌고가 같은 인간이 맞는지 확인해 보겠다고 하는 일은 당연히 오늘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실제 역사에서 그리 드물지 않게 벌어진 일입니다. 16세기 스페인령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서 원주민 인디오를 학살하고 노예로 삼아 학대하는 등 잔혹한 통치가 계속 되자 도미니크 수도회 등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이토록 잔혹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반면 인디오를 노예로 삼아 막대한 이익을 거두던 스페인 귀족들은 인디오가 이성이 없는 당나귀 같은 동물로서 자신들과 같은 수준의 신의 피조물일 리 없다며 노예정책을 옹호했습니다. 이에 스페인왕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실제 식민지에서 끌고온 4명의 인디오를 가운데 세워놓고 벌어진 이 논쟁의 결과 인디오를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고 학대하지 못 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다행스러운 결과이긴 하지만 막대한 이익을 잃게 된 귀족들이 크게 반발하자 왕과 교황청은 대신 아프리카의 흑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결국 아메리카 인디오 대신 아프리카 흑인들이 대규모로 끌려와 노예노동에 혹사당하다가 죽어갔습니다. 비극이 새로운 비극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2. 야만과 문명
    오늘날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리석고 잔혹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오늘날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오늘날 인권과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문명화된 세계를 건설했고 야만과 무지에 갇혀있던 16세기와 다르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16세기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당시 사람들도 자신들이 문명화된 세계에서 살며 이전의 야만의 시기보다 크게 진보하였다고 여겼습니다. 16세기는 유럽의 르네상스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시대가 아닙니까? 그런 시대의 판단과 행위를 오늘날 야만으로 여긴다면 오늘 우리의 일부 판단, 선택도 언젠가 야만으로 평가받을 때가 오지 않을까요? 그 증거로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야만스러운 침략전쟁과 내전, 환경파괴, 독재와 압제, 착취와 불평등, 폭력과 살인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역시 야만과 무지의 눈꺼풀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 했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바로 잡고 싶은 흑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지 않습니까? 자다가 이불킥을 하며 후회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실수하고 오해하고 고집부리고 사랑하는 이에게조차 상처주고 다투고 고통을 겪습니다. 무지와 편견의 눈꺼풀이 벗겨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과거야 어찌할 수 없더라도 앞으로 그런 실수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마 저뿐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바람이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3. 숨은 뱀 찾기
    집안에 뱀이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뱀이 있어, 조심해. 잡아야 해. 잡고서야 평안히 잡니다. 귀찮아, 힘들어, 몰라, 그럴 리 없어.. 그러면 숨어 있던 뱀에 물립니다.
    첫걸음은 우리 마음에 야만의 뱀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짐승처럼 여기고 착취하고 심지어 학살하는 야만이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있습니다. 인정해야 그 야만을 찾아냅니다. 찾아내어야 버릴 수 있습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숨어있다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야만에 물립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시각장애인을 고치신 후 벌어진 사건의 결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고침받은 이와 그 부모에게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기를 요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 하자 그를 다시 불러 압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정죄하기를 거부하자 결국 그를 출교시킵니다. 이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와 당신을 메시야로 알려주시고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그 후에 믿은 시각장애인과 믿지 못 하는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요 9:39)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당신의 오심으로 구원과 심판의 갈림길이 드러났습니다. 못 보는 사람이 보게 된 것은 시각장애인이 육의 눈을 뜬 것뿐 아니라 영의 눈을 뜨고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은 사건을 가리킵니다. 보는 사람이 못 보게 된 것은 육의 눈으로 잘 보는 바리새인들이 영의 눈도 밝아서 스스로 가장 진리를 잘 본다고 자부하지만 사실은 영적 시각장애인이어서 진리되신 주님을 믿지 못 함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이 영의 눈이 먼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스스로 눈이 밝아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모세의 제자요, 율법의 전문가라고 여겼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난 시각장애인 따위의 경험과 증언을 믿지 못 했습니다. 이 자부심 때문에 자신들 안에 숨은 무지와 편견과 미련과 악함의 뱀무리를 보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그 뱀들이 튀어나와 자신들을 죄로 물고 시각장애인과 그 부모를 위협과 폭력의 악으로 무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40절 이하에서 바로 이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요 9:40)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말하였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요 9:4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의 많은 문제가 자신만이 제대로 본다는 이 자부심에서 비롯됩니다. 총회 서기로 일하다보니 여러 교회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중재할 책임을 종종 맡습니다. 누가 봐도 객관적인 잘못이 있는 쪽을 만나 설득합니다.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 끝날 일입니다. 잘못했다는 사람을 교회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의 언행이 상대와 교회에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옳다고만 반복해 주장합니다. 끝까지 싸워서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겠다고 주장합니다. 결과는 그 한 사람의 징계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싸움 내내 교회는 만신창이가 되고 둘, 셋으로 갈라지고 많은 믿음이 연약한 이들이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납니다. 10년 전도한 영혼을 1년 만에 다 잃습니다.
    이런 일을 볼 때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일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나니, 라는 주님의 말씀이 늘 생각납니다. 참 성도, 참 일꾼은 교회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잘못이 없어도 교회를 살리려고 죽는 것이 마땅한데 잘못이 있는대도 절대 자신은 죽을 수 없노라며 교회를 죽이는 이를 보면 기독교인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는 주님의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우리 모두 안에는 야만의 뱀이 숨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경계하고 잡아내지 않으면 뱀이 갑자기 튀어나와 우리 자신뿐 아니라 가족을 물고 이웃을 물어 독을 세상에 퍼뜨립니다.
    4. 엎드려 절하기
    우리 안에 야만의 뱀이 있음을 인정하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무지와 오만의 뱀을 찾아내어 죽이고 생명나무를 우리 안에 심으시는 분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고침받은 이가 출교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그를 찾아오셔서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 9:35)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출교시켰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물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 길은 바로 믿음의 길입니다. 여행 가면 가이드를 믿어야 안전하고 학교 가면 선생님을 믿어야 성장하고 병원 가면 의사를 믿어야 고침을 받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이 예언한 오실 메시야 인자를 신뢰하고 따라야 생명을 얻습니다. 고침받은 이는 자신이 본다고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애초 육의 눈이 어두웠으니 자신의 영의 눈이 어둡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요 9:36) 그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요 9:37)
    44 min
  • 20220612 입으로 시인하는 신앙 / 요 9:13-23
    요 9:13-23/입으로 시인하는 신앙
    220605 주일설교
    1. 박해받는 기독교인
    여러분의 배가 난파되어 망망대해에 떠있는 조그만 보트에 올라탔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살 길은 어떻게 하든지 이 작고 위태로운 보트에서 끝까지 버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보트 위의 사람 대부분이 극단적 무슬림이고 그들은 보트를 가볍게 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바다에 던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을 가려내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 노려보며 예수를 저주하라고 시킵니다. 자, 여러분은 예수를 저주하고 배에 남겠습니까,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바다에 던져지겠습니까? 생각할 시간을 드려야겠지요? 있을 법하지도 않은, 그런 살떨리는 예를 드냐고요?
    CNN 보도에 따르면 지난 2015년 4월 15일 리비아에서 이탈리아로 밀입국하던 고무보트 위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슬림 난민들은 배에 탄 기독교인 난민을 가려내어서 모두 12명을 바다에 던져 살해했습니다. 그들의 만행은 보트가 이탈리아 해양경찰에 발견된 후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받는 일은 초대교회 때의 역사 속 사건이 아닙니다.
    전 세계의 박해받는 기독교인을 돕는 Open Doors 선교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2022년 현재 세계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는 시대입니다. 북한,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등과 같이 가장 극심한 박해가 벌어지는 나라에서 살해위협 속에 사는 기독교인은 3억 6천만 명으로 전 세계 기독교인 7명 중 1명에 이릅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신자 10명 중 2명이 아시아 신자 10명 중 4명이 이런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2021년 한 해 전세계 순교자는 5,898명으로 전년보다 1,000명 이상 증가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오늘도 예외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이 고백의 무게를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 고백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2. 신앙고백의 위협
    지난 주에 이어 요한복음 9장의 시각장애인 치유사건을 읽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치유하신 시각장애인의 이웃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습니다. 제정일치사회였던 구약시대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종교지도자일 뿐 아니라 공무원, 경찰, 판사  경우에 따라 의사의 역할까지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를 구성했던 바리새인들도 사두개인들과 이런 역할을 맡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는 노동을 한 것을 문제삼으며 죄인으로 규정하고 이 치유받은 이에게도 그를 죄인으로 규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바람과 달리 치유받은 그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답하자 이번에는 그의 치유사건을 믿지 못 하고 그의 부모를 불러 자초지종을 따집니다. 그의 부모들은 증언을 거부하고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합니다. 그 이유를 22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미 예수님 당시부터 시작된 기독교인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는 AD90 얌니아 회의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이 회당예배에서 낭독하는 19개의 기도문에 ‘이교도 저주문’을 넣음으로 공식화되었습니다.
    “유대교를 떠나간 배교자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게하라… 기독교인들과 이교도들은 즉시 멸망할 지어다. 그들은 생명책에서 지워질 것이다…”
    이렇게 회당에서 쫓겨나고 유대교에서 출교되는 것은 오늘 우리가 단순히 다니던 교회를 더 못 다니는 수준이 아닙니다. 우리야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에서 살기에 다른 교회를 가도 되고 교회를 안 가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와 완전히 결합되었던 유대사회에서 출교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매장된다는 뜻입니다. 가족에게서 쫓겨납니다. 그를 쫓아내지 않으면 가족 전체가 사회에서 쫓겨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곧 어떤 경제적 수단을 소유하거나 상속받지 못 한다는 의미입니다. 회당에 참여할 수 없으면 사회적인 신분, 직업, 지위를 모두 박탈당합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가족과 직장에서 쫓겨난 후 가진 모든 동산, 부동산을 압류당하고 신분을 빼앗겨 미국에서 추방당하는 정도와 유사합니다. 그런 일을 당한 유대교 사회에서 이 기독교인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독교 공동체의 보호를 받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음과 동시에 공동생활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행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물론 이런 공동생활이 전에 누리던 안락과 풍요를 결코 보장해 주지 못 했습니다. 그들은 신분과 삶의 질의 추락, 가족과 이전 공동체 상실의 고통을 직면했습니다. 이는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시련 중 하나입니다. 이런 시련으로 많은 사람들의 삶이 무너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은 예수님과 그 분이 주시는 생명이 그들이 잃을 모든 것보다 더 귀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희생과 상실을 무릎쓰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노라는 확신과 헌신 끝에 나온 것이 예수님을 입술로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입니다.
    3. 구원에 이르는 믿음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아,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도 시인해. 됐지? 이 풍요롭고 안전한 땅에서의 우리 믿음과 고백이 틀린 것은 아니나 성경이 말하는 그 깊이와 무게를 제대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순간 의지하던 모든 것에 미련을 내려놓는 것이요, 입으로 시인하는 순간 북한과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서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고백의 엄중함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으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이 풍요롭고 안전한 미국땅에서 하는 고백에 무슨 희생과 포기가 필요합니까? 믿음이 필요합니까? 깃털처럼 가벼운 것 아닙니까? 이렇게 가볍고 희생없고 무책임한 고백에 대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다같은 신앙고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얼마 전 한 교우가 질문했습니다. 우리는 행함의 열매 없이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나요? C.S.루이스는 ‘행함으로 천국에 이를 수 없지만 행함없이 이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믿는다면 생명은 고사하고 하루 아침의 골프/즐거움/안전함/재정적 손해/체면손상도 감수 못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과연 저 보트 위에 있다면, 북한과 아프간에 살아야 한다면 과연 우리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있을까요? 오늘 여러분의 신앙고백은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4. 소망의 주 예수님
    참되고 온전한 믿음에서 한참 멀기만 한 우리들의 소망은 어디 있습니까? 본문의 주인공 눈을 뜬 이를 보십시오. 그는 육의 눈도 멀었지만 영의 눈 역시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짓이긴 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 씻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느꼈을 심정을 요한복음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엿볼 수 있는 비슷한 사건이 있습니다. 엘리사를 찾아온 한센씨병환자였던 아람 장군 나아만을 엘리사는 만나주지도 않은 채 요단강에 가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고 보냅니다. VIP로 대접받는데 익숙했던 그는 화가 나서 훨씬 크고 깨끗한 강이 얼마나 많은데 흙탕물이 흐르는 요단강 따위에서 씻으라고 하느냐고 격분합니다. 그냥 떠나려는 그를 종들이 만류해서 속는 셈 치고 들어
    48 min
  • 20220529 눈을 열어주소서 / 요 9:1-12
    요 9:1-12/눈을 열어주소서
    210529 주일설교
    1. 누구의 잘못인가
    한국 통영에서 목회하는 김진성 목사 부부는 자폐증을 앓는 딸 한나를 양육하는 과정으로 영상을 제작하는 유투버로서 많은 자폐증 가족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하는 목사겸 유투버입니다. 그가 통영교회에 부임한 첫 날 설교 중에 딸 이야기를 하자 집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교인이 말하기를, ‘목사님이 딸을 기도원에 데려가서 기도받아서 고치라’고 했습니다. 김목사는 염려해 주어서 고맙고 당연히 딸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자폐는 그렇게 고치는 것이 아니라고 정중하게 답을 했는데 그 교인이 기분이 상했는지 막말을 쏟아놓았습니다. ‘목사가 회개를 안 해서 딸이 자폐에 걸렸다, 목사가 얼마나 영성이 없으면 딸이 저 지경이 되었겠느냐…’ 마구 퍼붓고 전화를 끊어버리는데 얼마나 화가 나는지 전화기를 붙들고 부들부들 떨었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가 어린 아들의 백혈병으로 병원에 오래 드나들다보니 소아병동에 있는 다른 아이들 보호자들과 친해졌습니다. 한 젊은 엄마가 그 목사를 조용히 부르더니 눈물을 흘리며 묻더랍니다. ‘목사님, 제 아이가 아픈 것이 저의 죄 때문입니까? 시어머니도 네가 무슨 죄를 지어서 아이가 그 죄값을 치르냐고 하고 어떤 교인은 엄마가 기도원 가서 부르짖고 회개해서 죄문제 다 해결하면 하나님이 고쳐주시는데 왜 믿음없이 병원만 다니냐고 합니다. 제가 아무리 회개하고 눈물을 흘려도 하나님이 안 고쳐주시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회개해야 되나요?’ 그 목사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아이의 병은 엄마의 죄 때문도 아니고 엄마의 회개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위로해 주었답니다.
    이런 무지한 이들의 말에 상처받는 이가 김목사나 이 엄마만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죄와 고난을 일대일로 연결하여 이해하며 너무나 단순하고 무책임하게 타인의 고난에 섣부른 훈수를 두는지 모릅니다. 그런 말과 시선에 그렇잖아도 고난에 상한 이들의 마음이 더 갈기갈기 찢어지고 부서집니다. 성도는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자신과 타인의 고난을 대하는 바른 자세는 무엇일까요? 고난의 때에 우리는 어디서 소망을 발견할까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 답을 주십니다.
    2. 빛이신 예수님
    오랜 만에 요한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9장에서 벌어진 사건의 정확한 시점은 모릅니다. 성경은 기계적으로 시간대별로 사건을 배열하지 않고 큰 시간대 안에서 주제별로 배열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시각장애인을 만나자 제자들이 그의 불행이 자신의 죄때문인지 부모의 죄때문인지를 묻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의문을 가진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등 율법을 해석하는 종교지도자들은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는데 골몰했기에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일반 대중도 고난을 만나면 자동적으로 이 질문부터 던지는 것이 익숙했던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예수님의 대답은 ‘둘 다 아니다’였습니다. 그럼 왜 이 사람은 죄도 없이 이런 고난을 당했단 말입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답하십니다.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을 세상에 퍼뜨리는 것입니다. 즉 고통받는 자를 긍휼히 여기고 고치고 마침내 구원하는 그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일을 예수님은 직접 행함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민간요법의 하나로 침을 진흙에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러려면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부르던 그를 만지셔야 했습니다. 경건한 랍비는 부정한 죄인과 접촉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뿐 아니라 그와 접촉하시면서 그가 무죄하다고 선언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를 고치셨습니다. 37-38절을 보면 또한 그를 믿음으로 인도하여 구원하셨습니다.
    (요 9: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 9: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이 모든 일을 행하시며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세상의 빛이시며 보지 못 하는 이들의 눈을 열어 빛을 보게 하는 이십니다.
    3. 어둠에 갇힌 이
    이 사건에서 고난을 대하는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태도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바리새인들과 대중과 제자들의 자세로 고난의 이유를 밝히려는 태도입니다. 고난의 이유를 알고자 하는 시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의도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그들의 영향을 받은 대중이나 한결같이 고난의 이유를 알고자 하는 진짜 의도는 고난의 책임을 물을 누군가를 찾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항상 누군가를 탓합니다. 비난할 대상을 찾습니다. 자신의 문제든, 공동체의 문제든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늘 그 희생양은 그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약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데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고난이 자신의 탓이니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짐을 모두 그들에게 지우려 할 뿐입니다. 심지어 강자들의 잘못까지 약자들에게 지우고 눈을 감습니다.
    9장 중반부로 넘어가면 이 시각장애인이 눈을 떴다는 사실을 들은 바리새인들 중 누구도 기뻐하는 이가 없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도 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안식일에 눈 뜬 사실을 문제 삼고 그 과정에 이상한 일이 없었는지를 문제삼으며 그 눈 뜬 이와 부모를 협박하고 취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까지 죄인으로 몰아붙여 새로운 희생양을 만들려 합니다.
    요한복음은 이들이야말로 육의 눈은 떴으나 영의 눈을 감은 영적 시각장애인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도, 놀라운 섭리도, 선하신 뜻도, 사랑과 긍휼도, 그 나라와 의도 모른 채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탐욕만을 추구하며 사는 영적 시각장애인입니다. 그들은 늘 남들은 모르는 문제의 원인을 자신만은 안다고 주장하며 누군가를 탓하고 비난하고 다투고 분열시킵니다.
    4. 빛을 보는 이
    고난을 대하는 둘째 태도는 예수님의 그것으로, 고난 당하는 이를 긍휼히 여기고 살리려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 즉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려는 섭리에 쓰임받는 고난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과 뜻과 섭리를 드러내는 진리의 말씀이기도 한 동시에 그 시각장애인을 위로하고 치유하시는 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시각장애인의 입장이 한 번 되어보십시다. 평생 시각장애란 엄청난 고난을 겪는 것도 서럽고 괴로운데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들끼리 쑥떡쑥떡거립니다. 눈이 안 보이면 귀가 발달합니다. 자기들끼리 속삭여도 다 들려요. 무지하고 무례한 이는 아예 대놓고 묻습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꼴을 당해? 부모가 뭘 잘못한 거야? 왜 회개 안 해? 하나님이 고쳐주실텐데? 억장이 무너지고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예수님이란 젊은 랍비가 그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감당하는 고난이라고 선언해 주었으니 얼마나 위로가 되고 얼마나 아픈 마음이 치유되고 얼마나 가슴이 뿌듯해졌겠습니까?
    곽경희 작가는 남편의 자살을 겪고 쓴 책에서 자신의 썩어문드러졌다고 할 만한 마음이 어떻게 치유되었는지 고백합니다. 네 아이를 키우며 알콜중독과 도박중독, 우울증으로 폐인처럼 살아가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워 이혼했다가 다시 결합했지만 결국 중독과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 한 남편이 차 안에서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그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충격으로 버티기 힘든데 주변의 냉소적 시선이 정말 죽기보다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렇지않아도 내가 좀 더 잘 했으면 남편이 괜찮았으려나 하는 자책으로 고개를 들고 살 수가 없는데 시댁과 주변인이 도대체 아내가 어떻게 했길래 남편이 자살하나, 좀 잘 하지 아픈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나, 신앙인이 왜 기도와 믿음으로 남편을 변화시키지 못 했나 하고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헤집어 놓았습니다. 사춘기의 아들마저 ‘엄마 때문에 아빠가
    1 hr 13 min
  • 20220522 천재성의 비밀 / 삿 2:6-15
    삿 2:6-15/천재성의 비밀
    220522 교사감사주일
    1. 천재성의 비밀
    질문입니다. 파라마운트, 워너, 폭스, MGM, 컬럼비아, 유니버설 등 미국 메이저 영화 회사 설립자들, AP와 로이터, AFP,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NBC, ABC, CBS, CNN 등 거대언론과 방송사 설립자들,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구글 등 세계적 IT기업 창업자 등 세계 최고의 혁신가요, 부호인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모두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은 전 세계인구의 0.2%에 불과하지만 노벨상의 3분의 1, 아이비리그학생의 3분의 1, 아이비리그 재직교수의 2분의 1을 차지하고, 포춘선정 100대 기업의 40%를 소유, 뉴욕과 워싱턴의 주요로펌변호사의 40%를 차지합니다.
    유대인의 천재성에 대해 익히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뛰어난 성과를 거두는 것일까요? 태어날 때부터 IQ가 뛰어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실제 학생들 IQ테스트의 1위는 평균 107점인 홍콩이고 2위가 106점인 한국입니다. 이스라엘은 94점으로 45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선천적 자질이 아니라 후천적 교육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평범한 유대인 학생들을 탁월한 인재로 만드는 유대인들의 교육을 통칭 쉐마교육이라고 부릅니다. 쉐마는 히브리어로 ‘들으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들으라는 말씀일까요? 이 들으라, 쉐마란 히브리어는 바로 신명기 6:4이하에서 나옵니다.
    2. 쉐마교육
    (신 6:4) 들으라(쉐마:שמע), 이스라엘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들으라! 무엇을? 한 분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이 명령을 듣고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듣고 지킵니까? 첫째는 이스라엘의 기성세대입니다. 6절입니다.
    (신 6: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둘째는 자녀들이 듣고 지키게 해야 합니다.
    (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모든 이스라엘의 부모는 아이가 엄마, 아빠하는 처음 말을 배울 때가 되면 반드시 이 말씀을 암송케 해야 합니다. 우리는 돌잔치에서 연필, 축구공, 돈을 놓고 자녀들이 박사가 될 지, 손흥민이처럼 운동선수가 될 지, 돈 많이 버는 사업가가 될 지 알아보며 즐거워합니다만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암송케 하고 신실한 하나님 백성 되기를 기도합니다. 바로 이것이 쉐마교육의 핵심입니다.
    아니, 그런데 하나님 사랑만 가르친다고 아이들이 뛰어난 인재가 됩니까? 쉐마교육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의 교육은 자녀들의 삶의 목적과 방식을 설정합니다. 이것이 사실 가장 중요한 교육입니다. SAT 점수 올리는 식의 교육은 요령과 재주를 익히는 것일 뿐입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 사랑이 삶의 목적임을 배웁니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삶을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공부를 왜 하나? 몰라, 좋은 대학가려고? 돈 많이 벌려고? 엄마가 하라고 하니까…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동기부여가 안 됩니다. 기껏해야 대학가는 공부, 취업하는 공부를 하고 나면 동기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니 먹고 살기는 하나 탁월한 성과를 거두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목적임을 배운 아이들은 크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인지 자신의 삶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공부를 해서 학문의 성과를 거두는 것인지, 의료인이 되어 고통받는 이를 돕는 것인지, 사업가가 되어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것인지, 예술가가 되어 창의적인 작품으로 인류에 기여할 것인지… 하나님 사랑이란 큰 목적 아래 각자의 삶에서 작은 목적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목적을 발견하면 어떤 대학을 갔나, 연봉을 얼마 받나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멈추지 않고 목적을 위해 달려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삶의 방식임도 배웁니다. 하나님의 법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편법과 반칙, 요령을 멀리 하도록 가르칩니다. 100m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인 인생에서 편법은 우선 빨리 갈지 모르지만 결국은 정도를 지킨 이가 승리한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쉐마교육은 목적과 방식을 가르침으로써 좋은 대학 가고 높은 연봉 받는 인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상에 기여하는 진짜 인재를 길러냅니다. 쉐마교육은 평범한 이스라엘 자녀들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로 만드는 교육입니다.
    3. 교육선교사의 중요성
    이 교훈은 우리 한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인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2021년 한국사회 합계출산율은 0.81명입니다. 한 가정이 평생 낳는 자녀의 수가 1명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이가 적게 태어나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5천만 명을 정점으로 인구감소가 시작되어 2100년에는 3,700만으로 줄어듭니다. 한국사회인구가 줄어드는 것과 연동에 미국내 한인사회의 규모도 성장세가 꺾여 정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과거에도 중국계나 인도계처럼 규모를 자랑할 순 없었지만 앞으로도 소수그룹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한국사회도, 한인사회도 확실히 규모가 아닌 인재의 질로 승부하지 않으면 발전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처럼 소수지만 뛰어난 인재를 배출해서 각 분야를 선도하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 사랑을 먼저 가르치지 않습니다. 한인사회에 기독교인 규모도 작지만 기독교인들도 자녀에게 하나님 사랑을 가르치기보다 아이비리그, 높은 연봉을 노래하기 일쑤입니다. 아이비리그와 높은 연봉은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과 성과일 뿐입니다. 목적과 방식을 배우지도 못 한 아이들에게 과정과 성과를 노래하니 들어갈 항구는 없는데 부지런히 노젖는 유령선처럼 방황하는 인생만 양산합니다.
    자녀들에게 지금이라도 삶의 목적과 방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이며 이웃 사랑입니다. 참된 교회교육이며 기독교교육입니다. 우리 교회 주일학교 교사들은 바로 이 신앙교육의 최전선에 선 교육선교사들입니다. 이들의 중요성은 해외선교지의 선교사들에 비해 조금도 덜 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들의 수고와 헌신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신앙교육에 실패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그 답 즉 신앙교육에 실패한 사회의 불행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사사기 말씀입니다.
    4. 신앙교육실패의 대가
    사사기는 다른 말로 이스라엘의 암흑기라고 불러도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도대체 어디까지 타락하고 추락할 수 있는가를 생생히 보여주는 책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에 묘사되는 사건은 소위 막장드라마 그 이상입니다. 입에 담기도 추하고 떠올리기도 끔찍한 일이 계속 벌어집니다. 도대체 거룩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토록 타락하고 병들고 쇠락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를 본문 7절과 10절이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삿 2:7)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모세로부터 율법을 받고 들은 여호수아 세대는 열심히 그 법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하였고 하나님의 법에 기초하여 복되고 건강한 하나님 나라를 세웠습니다. 주변 어떤 국가도 감히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그 복은 오래 가지 못 했습니다. 그 세대가 결정적으로 잘못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삿 2: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자녀세대에게 여호와 신앙을 전수하지 못 했습니다. 여호와 신앙을 전수받지 못 한 세대는 당연히 율법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타락했고 병들었고 쇠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의 꼴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삿 2: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삿 2: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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