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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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pisodes

  • 20230108 성장하는 인생 / 엡 4:11-15
    엡 4:11-15/성장하는 인생
    230108 주일 설교
    1. 인생의 목적 
    “우리는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계획을 세워야 한다… 내일까지 살 수 있을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성도는 저절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월은 간혹 우리를 성화시키기보다 죄의 부담만을 키우기도 한다… 자신의 죽음과 매일의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스도인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었다는, 15세기 수도사 토마스 아 캠피스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한 대목입니다.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는 이 책을 가리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천 번을 거듭 읽더라도 끝없는 만족을 준다… 이 책의 영감은 고갈되는 법이 없다.”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런 극찬을 받고 많은 이의 사랑을 받을까요? 이 책의 내용은 제목이 말해 주듯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더 닮아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실천한 수도사 토마스 아 캠피스의 묵상집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하고도 영원한 숙제이자 그리스인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입니다. 지난 주에 교회의 목적이 복음전파 곧 선교라고 말씀드렸는데, 또 다른 교회의 목적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닮음 곧 성화입니다.
    선교가 교회의 사명이라면 성화는 성도의 사명입니다. 선교를 위해 성령님은 은사를 주시고 성화를 위해 성령의 열매를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성화시키시고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본문 12-13절입니다.
    (엡 4:12) (교회의 직분을 세우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두 번이나 거듭 교회의 직분을 세우신 이유를 ‘성도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 합니다. 그 온전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사람입니다. 그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해 배워서 아는 그대로 믿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여러분의 인생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왜 삽니까? 원하지도 않았는데 눈 떠보니 인간으로 태어난 것뿐 아무 목적이 없습니까? 기왕 태어났으니 더 잘 먹고 더 잘 살려고 살아갑니까? 정치, 경제, 문화, 예술에 족적을 남겨보려고 살아갑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적을 주셨습니다. 바로 성화와 선교입니다.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람이 되어 죽음이 가득한 세상에 생명의 복음을 전파함입니다.
    2. 장성한 분량
    예수님처럼 온전해짐, 장성한 분량에 이름은 어떤 것일까요? 14절입니다.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아이들에게 낯선 사람을 좇아가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어린아이 수준의 사람은 거짓과 속임수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 결과는 요동함입니다. 작은 바람에도 쉽게 요동치는 작은 호수처럼 그 마음이 근심, 걱정, 시기, 미움, 불안, 우울의 파도에 이리저리 요동칩니다. 우리가 왜 이토록 근심,걱정 가득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 합니까? 우리 마음이 어린 아이처럼 미성숙하기 때문입니다.
    성숙은 우리가 이렇게 요동하는 삶에서 벗어나도록 돕습니다. 성인은 크고 넓은 바다처럼 생각을 깊고 넓게 합니다.  거짓에 잘 속지 않아서 쉽게 요동치지 않습니다. 거짓을 분별하고 멀리 하여 옳은 것을 합니다. 무엇이 옳습니까? 15절입니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의 동기로 참된 행동을 합니다. 사랑으로 가정을 행복하게 세웁니다. 사랑으로 일터를 튼튼하게 세웁니다. 사랑으로 성도를 건강하게 세웁니다. 사랑으로 교회를 은혜롭게 세웁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성인입니다. 이런 일은 성숙한 성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모든 분야에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행함에서 성장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3. 지속적인 성장
    그런데 이런 예수님 수준의 성숙함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상이지만 동시에 우리로서는 감히 꿈꾸기도 어려운 과제입니다. ‘감히 나로서는 어떻게 저 수준에 도달하지? 포기하자, 그냥 이렇게 살다 죽지 뭐…’ 혹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용기를 내십시오. 그 누구도 하루 아침에 이 수준에 도달하지 못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미션을 주시고 우리가 낙심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실제 믿음의 선배들의 삶을 보면 우리는 용기를 얻습니다. 그 중 하나로 사도 바울을 보십시다. 우리는 흔히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완벽한 믿음과 예수님 수준의 성숙함을 가진 바울을 머리에 그리는데 이는 착각입니다. 바울 역시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간 사람입니다.
    4. 강한 자기애
    바울의 성숙은 그의 편지에 나타난 자기이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이 승천하신 주후 33년 후 약 3년이 지난 36년경 회심한 것으로 봅니다. 약 10년 후인 45년 경부터 전도여행을 시작하고 5년 후인 50년경부터 편지를 씁니다. 바울편지를 기록한 시기를 셋으로 나눕니다. 50-57년까지의 선교여행 중 기록한 초기 편지, 58-64년까지 감옥에 갇힌 시기에 쓴 중기 편지 그리고 65-66년경 두 번째 감옥에 갇혀 기록한 후기 편지입니다. 초기 편지에서는 그의 자기의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고전 15:10) …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덧붙히기는 하나 자신이 얼마나 많이 수고하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말합니다.
    (고후 11:5)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그는 다메섹에서 회심하여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사역했지만 강한 자기의를 하루아침에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사역에 자부심을 가졌고 예루살렘의 지극히 큰 사도 베드로와 요한 등에 비교당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가졌으며 자시이 세운 고린도교인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이렇게 강한 어조로 자신를 변호했습니다.
    (고후 11:22) 그들(바리새파 기독교인)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고후 11: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그는 거듭 자신이 사도이며 그 누구보다 충성되다는 사실을 강변하기에 바빴습니다.
    5.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
    이랬던 바울이 3차례 전도여행을 마치고 로마감옥에 갇혔을 때는 자신에 대한 이해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엡 3:7) …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엡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
    에베소서는 중기 편지 중 하나입니다. 자신이 사도라고 강변하던 바울은 이제 자신을 일꾼이며 성도 중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소개합니다. 후기 편지인 디모데전서로 가면 자신에 대한 이해가 더욱 겸손해집니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은 회심한 직후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다
    39 min
  • 20230101 도약하는 선교적 교회 / 막 16:9-20
    막 16:9-20/도약하는 선교적 교회
    230101 신년주일/표어
    1. 교회를 이끄는 것
    50개 언어로 번역되어 3천 만부가 팔린 세계적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 릭 워렌 목사는 다른 책 ‘목적이 이끄는 교회’에서 교회를 이끄는 동력이 무엇이냐에 따라 여러 유형의 교회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 전통, 재정, 프로그램, 건물 등이 이끄는 교회가 그것입니다. 사람이 이끄는 교회는 카리스마 있는 목회자나 교회를 설립한 설립자, 그 가족, 교인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이끄는 교회를 말합니다. 전통이 이끄는 교회는 ‘과거 우리 교회는 이러이러했었다’는 전통에 대한 미련에 갇혀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재정이 이끄는 교회는 재정을 더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 되거나 혹은 재정규모에 맞추는 사역이 제한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건물이 이끄는 교회는 교회건축이 목적이 되거나 건물관리에 에너지를 다 소모하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어느 경우든 성경적이지 않다고 그는 꼬집습니다. 그럼 성경적인 교회은 어떠할까요? 그의 책제목처럼 성경이 제시하는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는 무엇이 이끄는 교회입니까?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목적 없는 인생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의 마지막 단락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까지의 행적을 요약합니다. 본문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 했던 제자들의 모습이 차례로 그려집니다. 이 제자들을 묘사한 대목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소개되었던 다소 긴 에피소드를 아주 짧게 요약해 두었습니다. 차례로 막달라 마리아가 전한 부활소식을 들은 제자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숨어서 음식먹던 제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목적을 잃어버린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를 몰아내고 승리하실 예수님’을 좇다가 기대와는 달리 십자가에서 달리시고 묻히시자 그만 목적을 잃고 크게 상심하고 방황하였습니다. 그들의 방황하는 모습을 본문은 이렇게 보여줍니다.
    (막 16: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막 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막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
    그들은 슬퍼서 울고, 예루살렘을 떠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두려움에 문을 잠그고 숨어서 배를 채우는데 급급합니다. 모두가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마가복음은 한마디로 불신앙이라고 단언합니다.
    (막 16: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막 16:14) …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즉 목적없음과 불신앙은 같은 말입니다. 삶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 한 이는 육체의 욕구를 채우려 아둥바둥하는 삶에서 한걸음도 더 나가지 못 하고, 헛된 욕망을 구하는 삶을 벗어나지 못 하며, 근심, 걱정, 두려움의 육체의 짐을 벗을 길이 없습니다. 이런 삶은 곧 하나님을 믿지 못 하는 불신앙의 삶에 다름 아닙니다.
    3. 목적을 주시는 예수님
    그런 목적없는 불신앙에 이끌려 살아가는 이들에게 오셔서 예수님은 목적을 주십니다.
    (막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제자들에게는 주님이 의도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목적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애초에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 천하에 전하여 생명을 퍼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 주신 목적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애초 인류의 목적이었다면, 이 세상이 죄와 악으로 병들고 훼손된 후 인류의 사명은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생명을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창조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야말로 제자들이 전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이 사명이 꼭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 수도 있지 않나요? 물론 가능하지만 그 목적의 가치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2004년 12월 남아시아에서 일어난 지진과 쓰나미로 35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170만 명이 집과 모든 것을 잃고 난민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 비참함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당시 인도네시아에 휴가를 갔다가 우연히 1주일 전에 이 재앙을 미리 알게 되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일단 살아야 하니까 높은 산으로 피한다, 쓰나미 전날까지 해변에서 즐기다가 피한다, 1주일 동안 쇼핑을 즐긴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한 온 힘을 다해 사람들에게 재앙을 알리지 않겠습니까? 관공서에 알리고, 지인들을 피신시키고,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까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에게 산으로 피하도록 소리질러 알리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선교인 이유입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이 사명을 주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부활하신 주님의 대속의 은혜와 부활의 선물을 믿지 않은 인생은 죄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심판의 쓰나미를 피할 방법이 없는 그들은 모든 죄값을 다 짊어지고 영원한 정죄를 받습니다. 곧 멸망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이들에게 주시는 사명이 온 천하에 다니며 외치는 것입니다. ‘심판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십자가로 달려가 용서를 구하라!’ 이것이 성도의 목적입니다.
    4. 목적을 발견한 제자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이 목적을 발견한 사람들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 삶에는 목적을 발견한 인생의 증거가 나타납니다. 17절입니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믿는 자, 목적을 발견한 성도,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의 삶은 더 이상 절망하고 세상을 좇고 욕망을 좇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표적 곧 성령이 역사하시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불의를 몰아내고 소망과 축복을 선포하며 마귀의 공격에도 쓰러지지 않고 세상을 치유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이 나타나는 이유는 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5. 목적이 이끄는 선교적 교회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선교의 목적을 발견한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을 좇고 욕망을 좇다가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 현대교회에 문제가 생깁니까? 선교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세상을 좇고 욕망을 좇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으로 인도를 받으며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럴 때 성령의 열매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 교회도 이 목적을 발견하고 순종하여 모든 교인이 선교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을 좇거나 욕망을 좇지 않고 절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선교를 목적으로 삼고 전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첫째, 모든 성도가 선교사란 의미입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생각하기를, 선교란 목회자나 선교사나 선교부원들의 전유물이고, 교인들은 그들을 열심히 응원하고 후원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일부 교인들에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곧 선교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선교사로 여겨야 합니다.
    둘째, 모든 삶의 영역이 선교지란 의미입니다. 나는 선교지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선교사인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선교지입니다. 가정과 일터, 지역사회, 이 시대와 세상이 선
    33 min
  • 20221225 위로와 평안의 샘 / 눅 2:25-35
    눅 2:25-35/위로와 평안의 샘
    221215 성탄주일
    1. 위로가 필요한 때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이 땅에 내려오신 성탄절입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성도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일터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한 중년 여집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어린 아이 둘을 집에 두고 직장을 갔는데 집에 불이 나서 큰 아이는 목숨을 잃고 둘째는 뛰어내리다가 다리가 부러졌다는 것입니다. 큰 아이 장례를 치르고 자신도 죽으려 했습니다. 주변에서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위로를 하는데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고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났습니다. 폐인처럼 지내니까 어느 교우가 수련회 꼭 한 번 같이 가자고 해서 참석했는데 거기서 기가막히게도 화재로 두 아이를 다 잃은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만 잃고도 못 살겠는데 두 아이를 다 잃고 어떻게 살았냐고 하니까, 시간이 약이고 하나님 은혜로 어찌어찌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권사님을 부둥켜안고 한참을 눈물을 펑펑 쏟고 나니까 그제서야 마음에 위로가 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고난을 겪어보지 않은 이는 진정한 위로를 전하기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느 정신과의사의 글을 읽었는데, 환자가 난치병에 걸렸다거나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고 상담을 할 때 자신도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경험상 이런 때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의사로서 무력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정신과의사를 현대인의 사제라고도 합니다. 이는 인간에게는 진정한 위로의 언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지치고 힘들고 위로가 필요합니다. 3년의 팬데믹과 세계적 경제위기, 전쟁과 이상기후에 개인적 고난도 끊이지 않는 우리가 인간의 언어에서 위로를 얻을 수 없다면 진정한 위로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2.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난 지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어머니 마리아의 정결예식을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가 겪은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 가족은 메시야를 기다리던 나이많은 선지자 시므온을 만납니다. 그가 왜 메시야를 기다렸는지 25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기다리던 메시야는 곧 이스라엘에 위로를 주실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위로가 필요하며 메시야는 어떻게 이스라엘에 위로를 주실까요?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위로가 무엇인지 이사야서가 진작 이렇게 예언해 두었습니다.
    (사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은 어떤 위로를 받았으며 또 받을 것입니까?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노역이 끝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을 노역으로 내몬 죄악이 모두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값을 다 치렀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악이 해결되어야 노역이 끝난다는 점입니다. 많은 해결책이 원인인 죄악을 방치한 채 증세만 완화시키기에 근본적인 문제해결, 해방, 참된 위로가 거기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과인 노역을 끝내실 뿐 아니라 원인인 죄악도 해결하심으로 진정한 위로를 주십니다.
    이 위로는 그들이 애굽의 종살이할 때 받았습니다. 430년 만에 해방받은 그들은 가나안땅으로 인도함 받아 하나님의 돌봄 가운데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건설할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런 위로를 그들은 바벨론 포로기가 끝날 때 또 받았습니다. 70년 만에 포로에서 귀한환 그들은 예루살렘에 성전과 성벽을 새로 건설하고 하나님 나라를 장차 건설할 꿈을 꿉니다. 노역의 때가 끝났다는 소식이야말로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위로였으며 당시에도 가장 바라고 기다리던 위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압제 아래 놓였습니다. 당대 최강의 제국 로마의 군대는 무자비하고 가혹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수입에 가혹한 세금을 떼고 부패한 헤롯과 탐욕스러운 대제사장마저 동족을 수탈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한 번 애굽의 노역, 바벨론의 노역을 끝장낼 해방의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 메시야의 오심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위로가 될 것입니다.
    3. 참된 위로의 메시야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위로를 주러 오신 분입니다. 다만 시므온이 기대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만이 아니라 온 세상 인류에게 위로를 주러오셨습니다. 시므온은 로마의 노역 아래 놓인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넘어 죄악의 노역 아래 놓인 모든 인류를 해방하러 오셨습니다. 애굽, 바벨론의 종노릇도 고통스럽고 로마의 종노릇도 비참하지만 인간을 더욱 큰 고통과 비참함에 몰아넣는 것은 죄악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는 우리의 영을 악의 노역 아래 놓습니다. 죄악의 바벨탑을 쌓는데 동원됩니다. 죄악의 압제에 시달립니다. 죄책감과 불안감, 근심과 두려움, 자기비하와 모멸감에 늘 짓눌려 살아갑니다. 마침내 죄의 값으로 영원한 멸망의 구덩이에 빠집니다. 이 압제를 벗어날 길이 없었던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우리를 건져내셨습니까? 바로 성탄에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겪는 죄의 노역을 대신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가 줄 수 없는 참된 위로를 주십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죄악을 해결하셨습니다. 죄악의 결과인 죄의 노역을 끝내셨습니다. 해방된 백성, 구원받은 자녀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이제 영원히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위로를 주십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난치병에 걸릴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를 잃을 수도 있고 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이런 죄의 노역마저도 장차 완전히 소멸되고 극복될 소망을 주셔서 거뜬히 이길 수 있도록 진정한 위로를 주십니다. 사도 요한의 비전입니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담대히 선포합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가 겪을 가장 큰 고난, 우리를 가장 위협하는 원수가 곧 사망입니다. 그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무너졌습니다. 사망은 패배습니다.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도 사망을 이기고 부활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만날 것입니다. 어떤 고난도 거뜬히 이길 것입니다. 매일 매순간 이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위로와 해방을 주시는 메시야 예수님이 이 성탄에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은 이는 진정한 평안을 누립니다.
    4. 평안을 주시는 메시야
    시므온의 노래가 가르쳐 줍니다.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눅 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주님의 구원을 본 사람은 진정한 평안을 누립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만민에게까
    25 min
  • 20221218 최선의 삶과 최악의 삶 / 요 13:21-30
    요 13:21-30/최선의 삶과 최악의 삶
    221218 대강절4주 최후의만찬
    1. 최악의 삶
    사람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일 중 하나는 이단, 사이비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단, 사이비가 공포스릴러영화의 단골소재인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심심찮게 이단, 사이비에 빠진 이들이 패가망신하거나 착취에 시달리거나 범죄에 연루된 뉴스도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간접적으로나마 이런 일을 겪은 이를 보십시오. 신천지 교인을 2019년에 약 20만 명 정도로 추산했는데 3년 만에 얼마 전 10만 명이 새신자교육을 수료했다고 대구에서 행사를 가졌습니다. 최소 30만 명 이상이라는 의미인데, 대부분의 교인이 기성교회 신도였다는 점이 충격적입니다. 영상에 등장한 이는 교회에서 자란 신실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녀는 신천지에 빠졌던 이 기간이 인생에서 최악의 시기였다고 합니다. 신앙인으로 왜 이런 상태로 추락하는 것일까요? 반면 신앙인이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요한복음이 답을 들려줍니다.
    2. 주님을 근심시키는 삶
    다시 요한복음,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교훈을 들려주신 주님은 이제 유다의 배신을 예언하십니다. 유다는 그야말로 신앙인의 최악의 삶의 모델입니다. 이런 삶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신 크게 근심시킵니다. 유다로 인해 괴로워하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21절입니다.
    (요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왜 이렇게 괴로우셨을까요? 당신과 유다 모두로 인해 괴로우십니다. 제자 중 하나에게 배신당하니 얼마나 괴루우셨겠습니까! 동시에 유다가 겪을 운명을 생각하니 또 괴로우셨습니다. 막 14장입니다.
    (막 14: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또한 주님은 유다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마귀에 대해 분개하셨습니다. 비슷한 마음은 예수님은 성전이 대제사장의 탐욕으로 시장으로 바뀐 것을 보시고 분개한 나머지 상인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불의는 괴로움을 낳습니다.
    작년 한국에서 16개월된 아이 정인이가 양부모의 학대로 목숨을 잃은 사건이 터진 뒤 시민들은 빈소에 찾아 눈물을 흘리고 양부모에 대한 엄정한 심판을 요구하며 법정 앞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들은 왜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 때문에 이렇게 슬퍼하고 분개합니까? 불의로 고통받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 때문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는 종종 이런 불의 앞에서 안타까움과 분노를 함께 느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마음의 괴로움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불의를 무너뜨리는 의의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러므로 성도의 위로요, 예수님이 성도의 소망입니다.
    3. 어둠에 갇힌 삶
    열두 제자에 뽑혔던 유다는 도대체 왜 주님을 근심시키고 멸망에 이르는, 불행한 운명에 놓였습니까? 27절입니다.
    (요 13:27) (떡)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사탄이 그 마음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떻게 사탄이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었습니까? 이런 일은 하루 아침에 벌어지지 않습니다. 가랑비에 옷젖듯 오랫동안 조금씩 조금씩 일어납니다. 13:2을 보십시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처음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만 넣었습니다. 이 때 아직 유다는 그 생각을 분별하고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생각을 품고 묵상했습니다. 악한 생각은 뿌리뽑지 않으면 잡초처럼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죄는 자랍니다. 악한 생각도 자랍니다. 생각일 때는 씨름할 수 있지만 싸우지 않으면 어느 새 생각이 의지로 굳어집니다. 그러면 거절할 수 없는 상태 곧 사탄이 들어와 조종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런 상태를 30절은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요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이 밤은 유다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는 빛이 없는 어둠 곧 앞뒤좌우,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갇혀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십니다. 요 11장입니다.
    (요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밤에 다니지 않고 낮에 다니도록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눅 22: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음주운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졸음운전입니다.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의 생명까지 위협합니다. 우리의 영이 잠들어 있으면 마귀가 우리에게 생각을 집어넣는 것도 모르고 마침내 사탄이 마음에 들어와 의지를 장악하는 것도 모릅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최악의 삶입니다. 이단, 사이비에도 넘어가고 형제, 자매를 미워하고 비방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주님을 괴롭게 하는 삶입니다. 이런 어둠에 떨어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고 빛에 거하시길 축복합니다.
    4. 최선의 삶
    반면 최선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판단 말인가 궁금했습니다. 다들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물어보라고 했지만 베드로조차도 예수님의 표정을 보고는 질문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이런 질문도 거리낌없이 할 법한 제자 요한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23-24절입니다.
    (요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3: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요 13: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요한은 제자들 중 가장 어렸고 지위나 영향력도 크지 않았지만 분명히 수제자 베드로보다 예수님과 더 가까웠습니다. 예수님 바로 곁에 앉아서 식사할 만큼 사랑을 받았고, 친밀해서 어떤 질문도 거리낌없이 드릴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신뢰를 받았기에 다음 날 십자가에서 주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바로 이 제자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도에게 최선의 삶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친밀한 삶입니다. 예수님께 무슨 기도든 거리낌없이 드릴 수 있는 친밀함,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는 친밀함, 사탄이 아닌 예수님이 그 안에 있고, 그는 예수님 안에 있는 친밀함, 예수님이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는 친밀함, 마르다처럼 일에 지치지 않고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그 음성 듣기가 제일 행복한 친밀함. 이런 친밀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5. 주님과 친밀한 삶
    이런 친밀함은 절대 하루 아침에 얻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에 만난 이가 수십 년 사귄 친구처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 가능합니까? 오늘부터 친밀하자고 한다고 친밀해 집니까? 친밀함이 깊어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매일 주님을 바라보고 매주 예배를 드리고 매년 주님을 떠나지 않고 동행하며 순종하는 이들에게 허락되는 친밀함입니다. 부부의 친밀함, 부모와 자녀의 친밀함은 그러므로 인생의 엄청난 축복입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은총입니다.
    친밀함은 고난을 겪으며 더 깊어집니다. 힘겨운 시간을 함께 견딘 부부, 친구, 동료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이해하지 못 하는 깊은 친밀함을 누립니다. 고난은 우리의 이기적 본성의 껍질을 깨뜨리고 경계를 너머 타인을 수용하게 만듭니다. 고난을 주님의 은총으로 견딘 이 역시 더욱 친밀함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은총입니다.
    이런 친밀함이야말로 성도의 최고의 복입니다. 요한이 수제자 베드로보다 더 친밀했듯 주님과 친밀한 성도는 목사, 장로, 선교사보다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친구입니다. 선천성 뇌성마비장애를 가진 송명희 시인이 하루는 찬양을 듣다가 문득 너무 억울했습니다. ‘주님, 저도 이 사람들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하고 멋진 춤으로 찬양하고 이웃을 섬기며 전도하고 싶습니다. 왜
    42 min
  • 20221211 포도원 주인의 의도 / 마 20:1-16
    마 20:1-16/포도원 주인의 의도
    221211 대강절3주 포도원주인의비유
    1. 회장의 선물
    어느 자수성가한 부동산 재벌이 자신이 자란 빈민가에 돌아와 홈리스들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언가를 결심한 그는 비서에게 새로 분양할 타운하우스 한 동 전체를 비워두라고 시키고는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선물을 하나씩 드리고 싶습니다. 대신 여러분이 가진 것을 모두 제게 주십시오.” 어떤 이는 자신이 가진 쇼핑카트와 골판지, 텐트를 움켜쥐더니 “미쳤어, 당신이 누군지 알고 내 것을 준단 말이야?” 하고 거절했습니다. 어떤 이는 반신반의했지만 자기 것을 주섬주섬 주워들고 회장의 비서에게 건내주었습니다. 회장은 그의 약속을 믿은 이들을 데리고 타운하우스로 가서 열쇠를 2개씩 건내주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2층 집과 현관 앞마다 있는 차를 드리고 내일부터 우리 회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부디 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을 깜짝 놀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고 회장의 바람대로 새 삶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몇 사람이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잠깐만요, 저 사람들은 겨우 골판지 몇 장을 당신께 줬을 뿐이잖아요. 우리는 쇼핑카트도 주고 텐트도 줬어요. 그럼 우리는 저들보다 더 받아야지요. 집이든 차든 두 배는 주어야지요. 똑같이 받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여러분이라면 무어라 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하고 싶은 그 답을 예수님이 진작에 하셨습니다. 그 답이 바로 오늘 본문의 비유입니다.
    2. 부자 청년과의 대화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고 불리는 이 비유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가르쳐 줍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이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해 불만 가득한 홈리스처럼 원망하고 기쁨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복음이 아닌 종교생활을 하며, 많은 문제를 안고 또 일으키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비유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전문맥인 19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두 개의 대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는 부자 청년과의 대화이고 둘째는 제자들과의 대화입니다. 두 개의 대화와 이 비유 모두 주제는 영생입니다. 곧 ‘인간이 어떻게 영생을 누리는가’ 혹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먼저 부자 청년과의 대화를 살펴봅시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관심이 영생임을 밝혔습니다. 16절입니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먼저 그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고 다음으로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계명을 다 지켰다고 답했지만 소유를 팔아 나누어 줄 결심은 하지 못 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두 가지 요구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계명을 다 지키면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랬다면 부자 청년이 다 지켰다고 자신했을 때 그를 칭찬하고 영생을 약속하셨겠지요. 그럼 소유를 다 팔아 나누어 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부자 청년이 스스로의 힘으로 영생에 이를 자격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은총을 구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물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없어 은총을 구하는 대신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3. 제자들과의 대화 
    제자들과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며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자야말로 하나님의 법을 잘 지켜 복을 받은 것이라고 여겼기에 당연히 1순위로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26절입니다.
    (마 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구원에 이르는 어떤 기여도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이 말씀을 듣고도 이 비밀을 깨닫지 못 했습니다. 여전히 인간의 공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묻기를, ‘자신들이 부자 청년과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으니 무엇을 얻겠느냐’고 묻습니다. 실제 베드로는 배와 일꾼과 가족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랐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두 가지입니다. 영광의 직분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28절입니다.
    (마 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 곁에 앉아 다스리는 영광의 직분입니다. 또 29절입니다.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주님을 전심으로 따른 이들은 넘치는 상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 약속이 여러분 모두의 것이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30절에서 착각을 경고하십니다.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자들의 착각은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불러온다는 말씀입니다. 그 착각을 바로잡기 위해 드디어 오늘 본문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4. 일꾼들의 불만
    1절부터 비유는 천국에 관한 것이라고 명시합니다. 천국은 포도원 주인과 같습니다. 비유의 주인공은 포도원이나 일꾼이 아닌 주인입니다. 곧 이 주인의 행동 혹은 의도를 잘 이해해야 천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오전 6시부터 9시, 낮 12시, 오후 3시 그리고 5시까지 하루 종일 다섯 차례나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불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는 해가 지자 모두에게 일당을 줍니다. 오후 5시에 온 일꾼들이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본 오전 6시, 9시에 온 일꾼들은 자신들이 더 받을 줄로 기대했는데 그들도 똑같이 받자 주인을 원망합니다. 한 시간 일한 이와 하루 종일 일한 자신들이 어떻게 똑같이 받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도 이 일꾼들의 불만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요? 베드로도 우리들과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마 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일찍 주님을 만났고 주를 위해 더 많이 수고하고 희생했으니 주님께 더 큰 상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완벽한 논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바로 포도원 주인의 행동과 말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5. 주인의 의도
    주인은 도대체 오후 3시, 5시에 왜 일꾼을 부르러 나간 것일까요? 5시에 부른 일꾼은 고작 1-2시간 밖에 일하지 못 합니다. 포도원 수익을 고려했다면 그런 일꾼을 부르지 말아야 하고, 그저 조금이라도 노동력이 더 필요했다면 굳이 하루치 임금을 다 주어서 다른 일꾼들의 불만을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다 5시에 부른 일꾼의 상태를 보십시오.
    (마 20:6) 제십일시(오후 5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마 20: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그들은 아무도 품꾼으로 쓰지 않습니다. 몸이 약하거나 미숙하거나 나이가 너무 들었거나 무언가 일꾼으로서 결격사유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게다가 그들은 주인이 오후 3시에 나갔을 때 없었습니다. 3시 이후에 장터에 나왔다는 말이 아닙니까? 일할 의지가 있었던 것일까요? 사실상 오전 6시에 나온 일꾼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할 의지조차 의심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주인의 진짜 의도가 드러납니다. 주인은 포도원에 수익을 낼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
    42 min
  • 20221204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요 13:12-20
    요 13:12-20/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221204 대강절2주 고별설교2
    1. 높아지려는 세상
    앞뒤좌우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축복의 인사를 하십시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16강을 축하합니다! 월드컵이 한창입니다. 여러분 모두 주말에 행복하셨지요? 한국이 16강에 올라가서. 반면 탈락한 우루과이 선수들은 어떻게 하던가요? 그라운드에 쓰러져 울었습니다. 선수도, 국민도 화를 내고 슬퍼도 하고 울기도 하더군요. 왜 올라가면 좋아하고 떨어지면 슬퍼합니까? 그것이 세상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올라가야 돈과 지위와 명예를 거머쥡니다. 못올라가면 얻지 못 합니다. 스포츠 뿐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올라가기를 원하는데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는 이는 소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소수의 올라간 사람들과 다수의 못올라간 사람들의 긴장이 끊이지 않습니다. 올라간 이들은 돈과 권력과 명성을 움켜쥐고 잃을까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못올라간 이들은 불평과 불만, 원망과 시기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 사이의 갈등을 사회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 하면 사회불안이 심화되다가 급기야는 혁명 같은 방식으로 큰 대가를 치릅니다. 이런 세상은 올라간 이도, 못올라간 이도 모두 불행합니다. 모두를 긴장과 갈등에서 해방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방식은 없을까요? 교회에는 이런 세상에 제시할 답이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알려주십니다.
    2. 낮아지려는 공동체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요한복음 13장입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옷을 입고 자리에 앉아 그렇게 하신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14-15절입니다.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발씻음은 가장 낮은 종의 역할입니다. 교회는 서로 올라가려는 세상과 달리 서로 내려가려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보다 훨씬 높으신 주와 선생되신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17절입니다.
    (요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렇게 하면 복이 있다? 어떤 복일까요? 구약에도 이와 비슷한 복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3. 복이 있으리라 
    (신 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이 명령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서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십니까? 흔히 세상이 오해하듯 이스라엘을 괴롭히거나 구속하거나 감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만을 사랑하고 이웃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며 지옥을 만드는 이 세상 모든 나라와 다른 나라, 다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가치를 깨닫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이상국가,  천국 곧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그 나라에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국민이 가난한 이가 없이 충분한 복지와 안전과 자유를 누리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만 누릴 수 있는 그런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서로의 종이 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과 사실상 같은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종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을, 서로의 종이 되라는 말씀은 이웃 사랑을 의미합니다. 서로가 종이 되므로써 천국을 경험하는 공동체를 이 세상에 보여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남의 종이 됨은 우리의 자연적 본성으로 따를 수 없는 요구이므로 주인이신 예수님이 먼저 종이 되어 제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의 권위에 의지해서라도 그렇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임재하시는 복을 경험합니다. 성령이 우리 공동체에서 역사하는 복을 경험합니다. 사랑과 은혜가 우리 사이에서 흘러 넘치는 복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약속하신 복입니다. 천국이 임하는 복, 천국을 누리는 복입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것이 세상 최고의 복입니다. 공감이 안 되시나요? 우리 눈에는 돈과 권력, 명예가 더 큰 복으로 보입니다. 착시현상입니다. 우리 눈이 얼마나 잘 속는지 아시지요? 우리 영의 눈도 그렇습니다. 세상영광이 너무나 큰 복으로 보입니다만 지나고 보면 그것은 정말 작은 복입니다. 그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바로 아래서 보면 한없이 높아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성냥곽만도 못 합니다. 부질없고 손에 쥔 모래와 같고 아침안개 같은 복입니다. 진짜 복은 우리 삶에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공동체에 임하는 하나님의 성령이십니다. 우리 중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런 천국의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곁에 있는 성도들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천국을 누립시다! 제가 먼저 종이 되겠습니다!
    4. 마귀도 일한다
    그런데 현실교회에서는 이런 천국을 누리지 못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왜입니까? 마귀도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하듯 마귀도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부지런히 일합니다. 그래서 유다와 같은 현혹되기 쉬운 이들에게 마귀의 생각을 집어넣어 조종합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조차 낮아지려고 하지 않고 세상처럼 높아지려고 발버둥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가 횡횡하며 율법이 무시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경향을 잘 보여주는 예가 이민교회 장로직에 대한 집착입니다. 전에 설명드렸다시피 원래 감리교나 침례교에는 장로직분이 없습니다. 유독 한국감리교, 한국침례교에만 있습니다. 왜입니까? 장로교에 있는 장로직분이 다른 직분에 비해 더 높은 자리로 인식되면서 감리교인, 침례교인들도 그런 자리에 오르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장로선거를 대비해 보여주기식 봉사하는 집사들이 늘어나고 장로선거에 온갖 청탁과 부정이 개입됩니다. 그렇게 하고도 장로가 못 되면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나거나 앙심을 품고 교회반대세력이 되어 분쟁을 일으킵니다. 일단 장로가 되면 마치 회사의 이사가 된 듯 우월감을 갖고 더이상 궂은 봉사는 하지 않고 다른 교인들을 부리고 훈계하고 심지어 갑질을 합니다. 장로들끼리도 누가 더 높은가 힘겨루기가 쉴새없이 일어납니다.
    이런 부작용을 없애보겠다고 한국의 100주년기념교회에서는 70세가 넘으면 남자는 모두 장로, 여자는 모두 권사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다 되니까 싸우지 말고 섭섭해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뉴저지찬양교회에서는 지난 2012년 남자는 모두 형제, 여자는 모두 자매로 호칭을 통일했습니다. 같은 의도입니다. 우리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도화하기 전에 먼저 자발적으로 한 번 시행해 보십시다. 형제님, 자매님, 얼마나 아름다운 성경적 표현입니까? 섭섭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부터 김도완 형제라고 불러주십시오. 이런 방식이 유익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 분이 권산지, 집산지 모를 때 자매님 하면 해결됩니다.
    5.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이렇게 자리와 지위에 집착하고 높아지고 주도권을 쥐려고 싸우고 비방까지 서슴지않는 모습은 교회와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갖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게 교회인가, 이게 신앙인가, 내가 진리를 믿고 있는 것이 맞는가 회의가 듭니다. 예수님은 현실에서 이런 일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18절입니다.
    (요 13: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열두 제자 중 택함받지 않은 유다가 있고 그는 종이 되기보다 주인이 되려 할 것이다. 시 41편을 인용한 말씀, 내 떡을 먹는 자 곧 너희 제자 중에, 곧 교인 중에 내게 발꿈치를
    45 min
  • 20221127 악에서 구하옵소서 / 요 13:1-11
    요 13:1-11/악에서 구하옵소서
    221127 대강절1주 고별설교1
    1. 예수님의 오신 이유
    오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 첫 주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흘러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한달 반만에 요한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13장은 요한복음의 2부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1부는 1장부터 12장까지 예수님의 공생애를 다루고 2부가 오늘 13장부터 17장까지 예수님의 고별설교를 다룹니다. 마지막 3부가 18장부터 예수님의 수난을 다룹니다. 고별설교의 자리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곧 유월절을 준비하는 최후의 만찬자리이고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제자들을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 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러 이 땅에 오셨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우리의 사명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터에서도 우리의 사명은 동료와 고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사명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말입니다.
    2. 예수님의 사랑, 발씻음
    그럼 어떻게 사랑합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발을 닦는 것이 왜 사랑입니까? 발 닦는 것은 주인이나 손님이 왔을 때 청결과 피로회복을 위해 종들이 하는 섬김이었습니다. 그 섬김을 주인된 예수님이 하시니 큰 섬김이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큰 사랑이 숨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죄씻음을 위해 죽으심입니다. 8절입니다.
    (요 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지 못 하면 구원을 받지 못 한다는 뜻입니다. 그 죽으심이 죄를 씻는다는 사실을 깨우치시려 상징으로 발을 씻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죄씻음입니다. 이 죄씻음은 우리의 신분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우리의 성품도 변화시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베드로가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이런 아리송한 말씀을 하십니다. 10절입니다.
    (요 13: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이미 목욕을 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죄씻음을 이미 받아 그들의 신분이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15장으로 가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예수님이 구주시라는 당신의 말씀을 믿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인 이는 이미 예수님이 앞으로 이루실 십자가의 속죄제사의 효력을 미리 누립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도 않았던 시대의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성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의 능력을 믿음으로 구원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은 과거와 현재, 미래 모든 시대의 죄를 씻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능력으로 우리의 죄가 씻음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목욕한 이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신분이 바뀌었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죄성때문에 거듭난 후에 짓는 죄가 있습니다. 그런 죄는 그 때 그 때 다시 십자가 앞에 나가 고백하고 씻음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자백이 바로 그 발을 씻음입니다. 이런 자백과 돌이킴 곧 회개와 씻음받음을 통해 우리는 죄성을 점차 극복합니다. 보혈의 능력을 계속 우리 마음에 채움으로 성품까지 변화시켜 갑니다. 만일 우리가 이 자백을 거부하면 우리의 성품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바로 전 8절입니다.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구원파가 이단으로 분류되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그 후 짓는 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아니, 죄입니다. 그 죄를 가벼이 여기면 큰일 난다고 이어지는 본문이 경고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목욕과 발씻음은 이처럼 신분의 변화와 성품의 변화를 모두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신분은 한 번에 변합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며 날마다 죄를 자백하고 보혈을 의지할 때 우리의 성품은 평생에 걸쳐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계속 발을 씻으라고 명하십니다. 여러분, 매일 저녁 깨끗한 물로 발을 씻으시지요? 그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내 영혼의 발도 매일 보혈로 씻어야 하는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목욕할 뿐 아니라 매일의 회개로 발도 씻어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3. 무모한 열정
    예수님의 이 사랑은 얼마나 크고 놀랍습니까! 당신을 죽여 죄인을 살리시는 사랑, 우리가 흉내조차 내지못하는, 감히 상상조차 해보지 못 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 죄인을 성도로 만드는 구원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구원의 기적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둘 있습니다. 첫째는 무지한 열정입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기려 하시자 그 영적 의미를 전혀 모르면서도 베드로는 펄쩍 뛰며 예수님을 가로막습니다. 6-7절입니다.
    (요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요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이후 성령이 임하셔야 베드로가 이 의미를 이해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고 고집을 부려서 예수님의 핀잔을 듣습니다. 8-9절입니다.
    (요 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는 무지한 데 고집이 셉니다. 예수님의 대답에는 ‘또 시작이군’하는 가벼운 짜증이 묻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베드로가 아니지요. 그는 고집을 부리다 핀잔을 들은 것이 속상했는지, 아니면 점수를 따려했는지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너무 나가버립니다. 9절입니다.
    (요 13: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베드로는 항상 모자라기보다는 지나쳐서 문제가 되는 성격입니다. 마가복음 8장을 보면,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씀을 하시자 예수님을 붙들고 그러지 말라고 비난했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예수님의 엄청난 꾸중을 듣습니다. 오늘 본문의 후반부 13장 37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제자들이 지금은 따라오지 못 하지만 후에 성령이 임하시면 따라올 것이라고 하자 베드로는 ‘목숨을 버려서라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가 예수님이 혀를 차며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게 만듭니다. 21장으로 가보면, 갈릴리에서 물고리를 잡다가 요한이 바닷가에 서신 예수님을 알아보자 베드로는 배가 해변에 닿기를 기다리지 못 하고 물에 뛰어듭니다. 베드로는 항상 무모한 열정과 고집으로 예수님을 답답하고 힘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셔야 했습니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무모한
    44 min
  • 20221120 누가 감사하는가 / 눅 17:11-19
    눅 17:11-19/누가 감사하는가
    221120 추수감사주일
    1. 행복의 비밀
    아마 추수감사절을 맞아 이들만큼 감사하고 기뻐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12일 우크라이나군은 남부 요충지 헤르손을 수복했습니다. 주민들은 감격에 겨워 거리로 몰려나와 국기를 흔들며 춤을 추고 군인들을 환영하고 음식을 가져다 주며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며 군인들을 껴않곤 했습니다. 잃었던 땅과 자유와 안전을 되찾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폐허가 된 땅에서 그들이 되찾은 것과 비교도 할수없이 큰 안전과 풍요와 번영을 늘 누리는 우리는 당연히 그들보다 훨씬 더 기뻐하고 더 행복한 것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누리는 것에 기뻐하기보다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평안하기보다 불안해하고 행복하기보다 불행하다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입니까? 우리가 누리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행복은 더 누리는 것이 아니라 더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감사의 능력은 단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놀라운 복을 가져다 줍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2. 기도하고 순종하는 믿음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만난 열 명의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은 사건을 기록합니다. 열 명 모두 저주와도 같은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으니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중 한 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19절입니다.
    (눅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나병고침과 구원 중 어느 것이 큰 복입니까? 육체가 치유받은 것은 큰 복임에 틀림없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막지 못 합니다.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니 비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열 명 모두 예수님을 만났는데 왜 9명은 몸이 치유받는 것에 끝나고 한 명만이 거기에 더해 영생을 얻는 복을 누립니까? 예수님은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나머지 9명은 아무런 믿음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9명도 분명 두 가지 믿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간구하는 믿음입니다. 12-13절입니다.
    (눅 17: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 17: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거기에 더해 둘째로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14절입니다.
    (눅 17: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분명 예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그들의 몸은 여전히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 상태로 제사장에게 가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미친 놈 취급은 물론 돌에 맞아 죽을수도 있었습니다. 나병환자가 마을에 들어가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가는 도중에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간구하는 믿음과 순종하는 믿음으로 그들은 육신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머지 한 사마리아인에게 있었던 세 번째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3. 감사하는 믿음
    (눅 17: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를 돌립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감사하는 믿음을 찾으시고 높히 평가하셨습니다.
    (눅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아홉 명은 왜 돌아와 감사하지 못 했을까요? 치유받은 순간 너무나 기쁜 나머지 가족을 만나러 달려가느라 치유하신 주님은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으려다보니 그들이 경계하는 예수님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 치유가 마침 나을 때가 되어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곤 예수님께 굳이 감사해야 하느냐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진작 치유받아 마땅했는데 온갖 고생을 다하고 이제 치유받은 것에 불만을 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들은 감사하기를 잊어버렸기에 치유는 받았으나 구원은 받지 못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 삶에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절박하기에 부르짖어 간구하고 응답을 위해 순종도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그만 주님을 잊어버리고 세상 즐거움을 찾아 달려갑니다. 주님께 감사하고 경배하는 삶으로까지 나가지 못 합니다. 그 결과 또 다시 고난을 만나야 주님께 나와 간구하고 순종하고 해결되면 세상으로 달려가는 삶을 반복합니다. 구원의 삶으로 들어오지 못 합니다. 이런 종교생활은 어느 종교에나 다 있습니다. 불교인도, 무슬림도, 무속인도 다 답답하며 나와 간구하고 해결되면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정도는 합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돌아와 감사한 유일한 이는 사마리아인입니다. 유대인들이 개보다 더 경멸하고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조차도 감사할 줄 아는데 정작 유대인 중에는 한 명도 감사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부르는 민족이름 유다란 말 뜻이 ‘찬양하라’입니다. 태생부터 찬양하도록 부름받은 이들이 한 명도 감사하러 온 이가 없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아이러니입니다.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의 입에서 감사와 찬양이 아니라 저주와 비방이 가득 쏟아져 나온다면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까요!
    4. 예수님께 감사하는 믿음
    구원의 삶은 감사와 경배의 삶인데 무엇보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 나와 경배하고 감사하는 삶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앞이어야 합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이야말로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감사의 삶도 있습니다.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지혜와 겸손을 타고난 이들은 남들보다 더 매사에 감사하며 살곤 합니다. 그런 감사의 태도는 그에게 행복과 품위를 더해 줍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구원을 주지는 못 합니다. 아무리 다복하고 품위있는 귀족같은 삶이라도 죄와 사망의 멍에를 풀 능력은 거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생명을 가진 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땅을 판다고 다 우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물근원이 있는 곳이어야만 우물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수가 있기에 거기서 파면 생수의 우물이 됩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의 떡이 있기에 거기서 구하면 생명의 떡을 먹습니다.
    예수님께 감사하는 믿음은 구원의 삶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 구원의 삶은 그에게 더 큰 감사를 선물합니다. 그것은 고난을 포함한 모든 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이런 선물을 받고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엡 5:20)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참믿음은 좋은 일은 물론이지만 고난도 감사합니다. 십자가로 영생을 주신 예수님 때문에 어떤 일에도 감사치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권면했습니다.
    (살전 5:18)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영생의 선물을 주신 분 안에 있으면 어떤 일도 감사치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해 이런 고난도 못 당한다 하겠는가! 주님은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을 원망하며 감사치 못 할 일이 있겠는가! 이렇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성도에겐 고난에도 감사하는 은혜를 누립니다.
    5. 고난 중에 감사하는 믿음
    여러분, 살다보면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그 때 감사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캐나다 큰빛교회의 임현수 목사님은 북한선교를 열심히 하던 중 2015년 북한에 억류되어 종신노동형을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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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6 어떤 자유인가 / 눅 15:1-3, 11-20
    눅 15:1-3, 11-20/어떤 자유인가
    221106 주일설교
    1. 신앙은 자유를 구속하는가
    예전에 한 젊은이를 전도하는데 교회에 못 나오는 이유를 이렇게 대는 것입니다. ‘교회 가면 술, 담배도 끊어야 하고 못 하는 것이 너무 많아요. 자유를 구속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많은 현대인이 하나님을 사람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못마땅해 회초리를 들고 감시하는 감시자처럼 생각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주로 ‘하지말라’는 것이고 교회는 다른 사람이 행복한 것을 못 마땅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심지어 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오해입니다만, 기독교인 중에도 신앙 때문에 자유를 구속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좀 더 큰 이익을 거둘 방법이 있는데 하나님이 신경쓰입니다. 가슴 설레는 진짜 사랑을 만나고 보니 배우자는 진짜 사랑이 아닌 것 같은데 성경말씀이 걸립니다. 성경을 읽으면 회개해야 할까봐 왠지 읽기 싫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보셨다면 오늘 본문의 둘째 아들의 행동이 잘 이해될 것입니다.
    2. 거짓 자유의 결말
    3주째이자 마지막으로 탕자의 비유를 살펴봅니다. 큰아들, 아버지에 이어 오늘은 작은아들이 주인공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일찍 물려달라고 요구하여 받은 후 기다렸다는듯 아버지 집을 떠나 먼나라로 가 방탕하게 재산을 낭비합니다. 그의 행동은 아버지의 존재와 그 권위 아래서 사는 삶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잘 드러내 줍니다. 아버지는 그가 꿈꾸는 자유로운 삶의 족쇄였습니다. 할수만 있으면 그 족쇄를 풀고 자유로운 삶,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삶을 그는 원했고 기회가 오자 조금의 주저함 없이 그 자유를 향해 내달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자유의 결말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14절 이하입니다.
    (눅 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눅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행복을 지켜준다고 인간이 믿는 돈, 지위, 건강, 인간관계 등은 금방 바닥납니다. 그리고 인생의 흉년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노화일수도, 질병일수도 혹은 파산이나 다른 고난일수도 있습니다. 그 때서야 인간은 자신의 궁핍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여기저기 손을 내밉니다. 이 아들이 손을 내민 곳은 돼지를 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혐오하여 근처에도 가지않는 이방인에게 빌붙어 역시 혐오하여 손도 대지 않는 돼지를 치며 생존을 꾀합니다. 그는 더이상 추락할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한 지경에 이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찾으려는 안전과 복지는 결코 굶주림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유와 복지를 모두 잃어버리고 오히려 죄악의 노예상태로 전락하고 멸망만 기다리며 삽니다.
    3. 자유의 울타리 
    이 아들의 처지는 자유를 목매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처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도대체 이 아들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그처럼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무지한 이 아들도 우리도 모두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자유를 구속하는 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유를 구속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언가로부터의 자유가 있고 무엇을 향한 자유가 있습니다. 전자를 소극적 자유, 후자를 적극적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소극적 자유는 해로운 것으로부터 안전할 자유입니다. 구속으로부터 자유,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등이 있습니다. 적극적 자유는 복지를 누릴 자유입니다. 결혼할 자유, 공부할 자유, 일할 자유 등이 있습니다. 두 가지 자유 모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습니다. 구속과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사회에 속해야 하고 튼튼한 국가경제의 우산 아래 있어야 하고 훌륭한 의료시스템을 구축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정과 공부와 직업을 가질 자유를 누리려면 사랑을 받아주고 사랑해줄 가족이 있어야 하고 좋은 교육시스템을 갖추어야 하고 좋은 일자리와 동료가 있어야 합니다. 국가, 사회, 법률, 시스템, 공동체, 동료는 모두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는 울타리입니다. 이 울타리를 성가시다고 뿌리치고 나가면 곧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잃고야 맙니다.
    이 모든 자유를 보호하는 울타리의 정점에 바로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과 그 율법은 우리가 이 땅에서 모든 종류의 안전과 복지를 누릴 자유를 지키시는 울타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유를 구속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금하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자유를 구속하는 함정입니다. 죄와 악은 우리의 구속하고 멸망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율법을 주셔서 자유를 지키십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선악과를 주신 것입니다.
    4. 참자유를 주시는 분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마음대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으며 선악과를 왜 못 먹게 하느냐고 하나님의 금하신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먹게 하신 것은 얼마나 많은지 보십시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모두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동산에 나무가 몇 그루나 있었을까요? 동산이 얼마나 크고 풍요로웠을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딱 만 그루만 있었다고 가정합시다. 하나님은 9,999그루의 나무열매를 주시고 단 한 그루의 나무열매만을 금하셨습니다. 왜요? 나머지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껏 먹고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만 그루의 자유를 얻기 위해 한 그루를 금하신 것입니다. 이를 생각해 보면 아담이 한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단 한 그루를 얻으려다 만 그루를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거스리고 누리려는 자유의 대가가 이것입니다. 하나를 얻으려다 모두를 잃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누리도록 하나를 금하셨습니다. 그 하나는 선악을 스스로 결정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자유를 지켜주는 안전띠입니다. 번지점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날개도 없는 우리가 허공에서 자유낙하의 짜릿함을 안전하게 즐기려면 안전띠는 필수입니다. 왜 내 다리에 이런 거추장스러운 줄을 묶는 겁니까? 난 이런 줄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 거예요.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교통법규가 거추장스럽지 않던가요? 규정속도가 있고 신호등이 있고 stop 사인이 있으니 더 빨리 가지 못 하여 얼마나 성가십니까? 그러나 이런 법규와 사인과 차선이 없으면 더 느려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선교지를 가면 중앙차선도 없고 교통경찰도 거의 없는 지역이 많습니다. 그런데서는 차가 미국보다 훨씬 느립니다. 왜요? 언제 다른 차가 튀어나오고 끼어들지 모르기에 사방을 살피며 저속운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고가 날까봐 훨씬 더 긴장되고 실제 더 큰 사고가 더 자주 발생합니다. 집을 사려는데 은행이자가 얼마나 부담스럽고 각종 법규와 세금은 또 얼마나 성가십니까? 다 없었으면 좋겠지요? 그러면 집도 없어집니다. 세금과 법규로 시장을 관리하는 정부가 없고 이자받고 돈 빌려줄 은행도 없으면 정부와 은행을 의지해 집 지을 건축회사도 없고 화폐의 신뢰도 땅에 떨어져 살 돈도, 살 집도 없이 경제가 붕괴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세상에서 굶어 죽을 자유만 남습니다.
    5. 참자유로 가는 길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한 그루를 버리고 만 그루를 얻는 자유와 복지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는 모든 복되고 유익한 것을 무엇이든 할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
    여기 진정한 자유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를 얻습니
    30 min
  • 20221030 어떤 아버지인가 / 눅 15:1-3, 11-24
    눅 15:1-3, 11-24/어떤 아버지인가
    221030 주일설교
    1. 군맹무상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인도의 경면왕이 어느 날 시각장애인들을 불러다가 코끼리를 만지고는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 보라고 했습니다. 다리를 만진 이는 기둥같다 하였고 귀를 만진 이는 부채같다 하였고 꼬리를 만진 이는 뱀같다 하였습니다. 아무도 거짓말 한 이가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경험한 바에 근거해 진실을 말했지만 실제는 진실의 일부만을 묘사할 뿐이었고 코끼리의 실제모습을 제대로 묘사한 이는 없었습니다. 인도의 고대경전 열반경에 나오는 고사성어 군맹무상은 사람의 경험과 판단이 진실을 찾는데 얼마나 부실한 도구인지 보여줍니다.
    우리도 종종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면서 내가 봤다니까, 내가 겪었다니까 하는 경험에 근거한 판단이라는 주장을 합니다만 여전히 어둠속에 있는 것을 아닐까요? 우리 육체의 눈을 열렸으나 지적인 눈, 영적인 눈은 흐릿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강조하는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진실을 가장 잘 안다고 확신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왜곡된 시각을 교정시켜 주십니다. 잘 살펴보면 우리의 시각도 교정해야 할지 모릅니다.
    2. 하나님을 오해하다 
    지난 주에 이어 탕자의비유를 살펴봅니다. 지난 주에는 비유 후반부에서 큰 아들을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전반부에서 아버지를 살펴 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말씀 중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에 관하여 가장 감동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묘사하는 이가 바로 비유 속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려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지난 주에 비유의 배경에서 살펴보았듯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대하시는 태도에 대해 비난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식사를 같이 하셨습니다. 이런 행동은 존경받는 랍비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되며 실제 훌륭한 종교인으로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하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하는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이 그렇게 가르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 1편입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이들을 미워하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섬기는 신앙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하고 비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영접하고 식사까지 같이 한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설마 이 말씀을 모르시는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은 이 말씀을 잘 아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달리 구약성경 전체를 아십니다. 그들도 구약성경 전체를 읽고 외우지만 그들이 믿고 싶은 부분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왜곡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 한 하나님의 진짜 모습, 구약성경 전체가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을 예수님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3. 그리우신 하나님
    하나님은 죄를 멸시하고 악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죄인과 악인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들이 심판받아 멸망받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고, 돌아오는 이들을 무한한 긍휼로 용서하십니다. 이 점을 20절이 잘 보여줍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거리가 먼데 어떻게 아버지는 그가 아들인 줄 알아보았을까요? 부모된 이들은 그 이유를 압니다. 아버지가 날마다 마을 어귀에서 아들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방황하는 어리석은 자녀를 둔 부모는 결코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없습니다. 자녀가 돌아오기까지 안식은 없습니다. 어디서 밥은 먹고 다니는지, 아프지는 않는지,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는지 걱정하느라 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죄와 미련한 악에 빠져 살 때 하나님은 우리로 인하여 편히 쉬지 못 하십니다.
    제가 처음 가출한 것은 4살 때입니다.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 살 때 부엌에서 밥하시는 엄마를 귀찮케 하니 아, 좀 나가서 놀아, 하셨답니다. 마상을 입은 저는 그 길로 아장아장 걸어서 가출을 했습니다. 저녁 준비를 끝내시고 보니 아이가 안 보였습니다. 순간 눈 앞이 하얘진 어머니는 온 동네를 뒤지며 저를 부르는데 동네 골목골목에 노는 아이들이 다 아들 도완이로 보이시더랍니다. 해가 다 지고서야 경찰서에서 잠든 저를 발견하시고는 얼마나 우셨는지 모른다고 어머니는 몇 번이나 이 이야기를 되풀이하시며 그 때 너를 잃어버렸더라면 어쩔 뻔 했냐고 눈시울이 불거지십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틀림없이 이 아버지는 동네 어귀에서 날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겠구나. 누군가 저 멀리 나타나기만 하면 달려가 내 아들이 아닌가 확인해 보았겠구나…
    4. 영접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죄인을 기다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따뜻하게 맞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측은히 여겨 달려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시며 우리를 영접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무한한 긍휼 덕분에 우리는 멸망치 않고 용서받고 구원받습니다.
    주님의 이 마음을 모르기에 바리새인들처럼 우리도 죄인과 악인을 미워하고 멸시합니다. 사실 우리는 죄와 악은 그렇게 미워하지 않으면서 죄인과 악인만 미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반대로 죄와 악은 견딜 수 없이 미워하시지만 죄인과 악인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시 86:15) …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이 긍휼 덕분에 저와 여러분이 심판받고 멸망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 긍휼을 아는 이라면 주님처럼 죄인과 악인도 긍휼히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5. 용서하시는 하나님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영접하실 때 아무 대가 없이 받아주십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을 때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고 여깁니다. 맞습니다. 그럴 자격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이 아들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자신을 종으로 여겨달라고 합니다.
    (눅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종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사실 종이 되는 것도 그가 저지른 죄에 비하면 과분한 처분입니다. 그가 한 일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만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가부장적 권위가 확고했던 고대 중근동에서는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의 용서받을 수 없는 불효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패역한 아들은 동네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멍석말이로 때려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종으로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제일 좋은 옷과 반지와 신은 모두 종이 아니라 상속자인 아들만이 입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먹고 즐기는 잔치를 열어주십니다. 아버지에게 그는 죽었다 살아난 아들이며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대접이며 영접입니까?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면, 우리 죄를 어찌 할 수도 없이 아무 공로도, 자격도 없이 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시고 우리를 위해 천국잔치를 열어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이 얼만 큰 긍휼이며, 이 얼마나 큰 상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은혜와 긍휼과 상을 거저 받습니까? 이건 불공평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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