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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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pisodes

  • 20230625 잘 믿고 싶어요 / 막 12:28-34
    막 12:28-34/잘 믿고 싶어요
    230626 주일설교
    잘 믿는 것은?
    기독교인치고 주님을 잘 믿고 싶은 바람이 없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잘 믿는 것입니까? 한 번 각자 정의를 내려보십시오. 여러분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아마 이 세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첫째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선하게 사는 것, 둘째는 교회를 충성스럽게 봉사하고 섬기는 것 그리고 셋째는 경건생활과 선교에 헌신하는 것… 아마 이 세 가지 유형 중 한 가지에만 속해도 칭찬을 받을 터이고 세 가지를 다 갖추면 더더욱 존경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삶은 우리 생각처럼 주님을 잘 믿는 삶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어째서 그럴수도, 아닐수도 있는 것입니까? 이 세 가지 삶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평가하셨을까요? 그 답을 이해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목적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잘 믿는다고 착각하며 잘 못 믿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삶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들어보고참으로 잘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십시다.
    선하게 사는 것?
    첫째 계명을 지키며 선하게 사는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계명을 지키라고 명하셨고 선한 삶을 칭찬하고 악한 삶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런데 계명을 다 지키며 선하게 사는 한 부자이자 관원인 청년이 찾아와 영생의 길을 물었을 때 주님은 그의 삶을 칭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재물까지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 주라고 명하셨고 결국 그는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어서 하신 말씀에 들어있습니다.
    (마 19:26) 예수께서 그들(제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문제는 그 부자 청년은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선한 삶의 노력으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선한 삶을자신의 의로움으로 여기는 순간 그 삶은 하나님을 믿는 삶이 아닙니다. 자신을 믿는 삶입니다. 자신을 믿는 삶의 특징은 자신의 노력, 공로, 업적, 기여, 희생을 생각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살지 못 하는 이를 무시하고 비판합니다. 그런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구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계명을 잘 지키며 선하게 살아도 그것이 인간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되게 봉사하는 것?
    둘째 교회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들도 충성된 일꾼을 칭찬하셨고 충성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눅 15장 두 아들의 비유에서 충성되게 아버지의 집을 섬기던 큰아들이 자신에게 염소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으셨다고 원망하자 그를 타이르며 이렇게 아버지의 목소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의 말은 성도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결혼하는 남자에게 가장 큰 선물은 신부가 들고오는 예물이 아니라 신부 자체라는 말과 같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가 주는 선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목적으로 하는 봉사는 아무리 충성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하나님을 믿는삶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역에 헌신하는 것?
    셋째 경건과 선교에 헌신하여 열매를 남기는 것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응답하는 이 삶이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는 삶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당신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이들조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들은 왜 선지자요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저주를 받습니까? 21절에서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갖 사역을 감당했고 열매도 남긴 듯 보였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이 한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뜻 곧 자신의 바람,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사역했던 이들이었습니다.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여야 합니다. 겉으로 아무리 경건하고 능력이 있고 사역이 열매를 남겨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자신의 뜻을 이루는 삶은 하나님을 믿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럼 도대체 그들은 무엇이 문제이기에 선하게 살고 충성스레 봉사하고 선교를 열심히 하면서도 하나님을 참으로 믿지 않는 이가 된것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바로 이런 의문을 가지고 오늘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최고의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사랑이’라고 요약하셨습니다.
    (막 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막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의 실천은 바로 이 사랑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계명을지키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나올 때 진짜 믿음의 열매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선을 행하고 구제하는 것이 이웃을사랑하는 데서 나올 때 진짜 믿음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성공을 사랑하고 즐거움을 사랑하고 욕망을 사랑해서도 얼마든지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모든 실천은 믿음의 열매가 아니라 자기사랑 나르시시즘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 마음이 자기사랑과 세상사랑에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방향을 180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의 방향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사역과 선행을 해도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 이름, 교회 이름 아무리가져다 붙여도 그저 불법을 행하는 악인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곧 마음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서 목숨과 뜻과 힘을 완전히 다른 방향에 완전히 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이 방향전환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이 아니며, 완전히 다시 태어나듯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은 교회가 행하는 세례예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움으로 교회공동체를 통해 다시 태어나듯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교회를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랑하라
    성령님은 교회를 통해 어떻게 일하십니까? 교회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할 때 성령님은 듣는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만드십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의 보배피를 흘리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47 min
  • 20230604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 / 행 4:23-31
    행 4:23-31/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
    230604 주일설교
    1. 이해불가한 비극 
    여기 한 아름다운 한인가족을 소개합니다. 텍사스주 달라스의 어느 한인교회의 신실한 성도인 이들 가족은 변호사인 아빠, 의사인 엄마 아래 5살, 3살 사랑스러운 두 아들을 두어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5월 6월 이 가족에게 예기치못한 큰 비극이 닥쳤습니다. 이 날 한 쇼핑몰에서 일어나 8명을 희생시킨 총격사건으로 아빠와 엄마, 동생이 세상을 떠나고 첫째 아들 윌리엄만이 큰 부상을 입은 채 살아남았습니다. 이들이 섬기던 교회는 물론이고 텍사스 한인사회 전체가 큰 충격을 받고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가족에게 도대체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이 아름다운 가족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 이 사회에 끼칠 선한 영향력이 얼마나 클텐데 왜 이렇게 허무하게 희생된단 말입니까?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비극을 허락하신단 말입니까?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보신 분들은 없으실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 정도로 큰 비극은 아니겠습니다만, 그 이유를 이해하기 힘든 안타깝고, 허무하고, 억울하고, 기가막힌 희생, 비극, 모순, 불의가 가득합니다. 그 때마다 과연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정의로우신가? 소위 신정론이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안타까운 희생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세례 요한과 스데반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얼마나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던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당신이 메시야냐?’라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그가 살아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거나 예수님과 협력했더라면 얼마나 주님의 사역이 더 크게 열매를 맺었을까요? 헤롯 안티파스의 칼에 목이 잘려 순교한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이요, 선교자원의 큰 낭비입니까! 그가 굳이 헤롯의 죄를 꼬집는 설교를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스데반 역시 얼마나 탁월한 성경교사였는지 모릅니다. 그가 돌에 맞아 죽지 않았더라면 초대교회에 얼마나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전도하였을지 모릅니다. 바나바나 바울 못지않은 선교사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회당에 모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설교를 하지 않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 하나님은 왜 세례 요한과 스데반을 살려서 더 크고 귀하게 쓰시지 않고 이렇게 희생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2. 사명을 다 이룬 삶
    첫째, 사명을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명대로 그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메시야를 맞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세례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자신의 제자들과 대중들을 예수님께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람들에게 큰 주목을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는 비로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만약 그가 헤롯에게 죽지 않고 사역을 계속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그의 큰 영향력은 어쩌면 예수님의 사역에 짐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사역 말기와 예수님 사역 초기가 겹쳐서 제자들끼리 어느 쪽의 세례자가 더 많으냐로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요 3: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예수님)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더구나 요한은 임박한 심판을 강조하는 자신과 달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선포하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그는 헤롯의 감옥에서 예수님이 메시야가 맞는지 의심하여 제자들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위대한 선지자에 틀림없었지만 역시 이해와 행동에 한계가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역을 지속했다면 예수님과 메시지와 사역에서 충돌을 일으켜 짐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역시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사역의 주도권이 예수님에게 넘어간다고 불평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3. 더 큰 열매를 남긴 삶
    둘째,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희생을 통해 더 큰 열매를 남기기도 합니다. 공회에서 한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성경 전체를 꿰뚫는 그의 통찰과 청중의 입을 막아버린 탁월한 스피치는 분명 초대교회의 큰 자원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당연히 살아서 아주 많은 선교의 열매를 남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 더 큰 열매를 하나님 나라에 남겼습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 성도들이 일제히 예루살렘 밖으로 흩어졌습니다.
    (행 8:1) …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이는 예수님이 교회에 하신 예언이자 명령이었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의 명령을 이해하지도 순종하지도 못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강제로 이 사명을 이루도록 만드렸습니다. 그렇게 흩어진 이들은 비로소 예루살렘 외의 지역에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행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
    스데반은 그가 살아서 설교하고 전도하여 구원할 수 있었던 영혼보다 훨씬 더 많은 영혼을 전도하고 복음이 온 세상을 퍼져가도록 쓰임받은 것입니다. 물론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이 그의 희생을 그렇게 쓰시는지 이해하지 못 했지만 분명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었습니다. 그 사실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원한을 품지 않고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원수를 위해 기도한 그의 모습에서 증명됩니다.
    (행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4. 참성도의 기도
    세례 요한과 스데반의 삶은 참성도가 구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자신이 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흥하게 하려는 삶이요,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구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의 박해를 직면한 성도들의 기도도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제사장 무리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심문과 협박을 받고 풀려나 성도들에게 이 모든 상황을 알렸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이 작은 일입니까? 이미 예수님도 잡아 죽인 그들의 심문과 협박을 받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또 모욕적인 일입니까? 아마 우리 중 누가 그런 일을 겪고 교회에 왔다면 듣고 우리가 특별기도회를 열어서 무엇이라고 기도했을까요? 울고 불고 부르짖으면서 마음에 받은 상처를 위로해 주시고 더 이상 이런 고난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대부분 이와 유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문의 성도들은 무엇이라 기도합니까? 그들은 이 고난과 위협을 억울하게 당했다고 탄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첫째, 이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선한 계획 중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행 4: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행 4: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행 4: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행 4:27) 과연 (예언하신 대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행 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이 예언대로 일어났다고 기도합니다. 곧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둘째,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가 아니라 하
    36 min
  • 20230528 성령이 임하시면 / 행 1:6-11
    행 1:6-11/성령이 임하시면
    230528 성령강림주일
    1. 성령세례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추상미 씨를 많은 분들이 아실 것입니다. 그녀는 한 차례 유산 후 오래 기다린 끝에 자녀를 가졌을 때 기대와 달리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산후우울증이 찾아와 5년 동안 불면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렸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고 아파트 11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망상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두 번째 회심을 경험합니다. 비몽사몽 간에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님이 매달리신 십자가에 자신도 매달린 것이었습니다. 또한 ‘내가 너의 참 아빠고 남편이다. 내가 바로 너의 곁에 있다.’하는 말씀을 두 번이나 또렷이 듣자 갑자기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추송웅 씨는 국민적 인기를 얻은 연극배우였지만 아내와 사이가 매우 나빠 어린 추상미는 아빠와 대화도 일절 하지 않고 늘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가 갑작스러운 패혈증으로 죽자 그제서야 추상미 씨는 자신의 분노 뒤에 숨은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컸는지 깨달았습니다. 아빠와 화해도 하지 못 한 채 갑자기 이별한 것이 커다란 상처로 남아있던 그녀는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도 아빠처럼 갑작기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또한 역시 연극배우로 너무나 바쁜 남편에 대한 불만도 사라지지 않던 그녀에게 주님은 당신 외에는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의 빈자리를 채울 이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두 시간이 넘도록 펑펑 울며 기도하던 그녀는 다음 날부터 아침에 QT를 시작하면 네 시간이 넘게 말씀보고 기도하는 개인부흥회를 6개월을 지속하면서 우울증과 불면증, 자살충동까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그 날 추상미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바로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 곧 성령세례는 구약에서부터 약속되었고 예수님도 그 약속을 확인하셨으며 초대교회가 탄생한 오순절에 시작되어서 오늘까지 참으로 믿는 자들에게 허락되는 놀라운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로 지킵니다. 성도는 성령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성도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뉴저지장로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은 성령세례를 받아 늘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충만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몇 가지 공통된 경험을 합니다. 이 경험이 무엇인지 알면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어떻게 해야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경험하는지도 배울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 지, 정, 의 모든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변화입니까?
    2. 깨달음
    먼저 지적인 변화 곧 깨달음입니다. 추상미씨는 성령님이 임하시자 환상과 음성을 통해 본인의 우울증이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또한 주님이 자신과 얼마나 가까이 계시는지 깨달았습니다. 주님만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공허를 채울 수 있음도 깨달았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성령님에게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의 문제와 상태를 모릅니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의 깊은 부분까지 다 아시는 성령님만이 아십니다.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죄와 의의 길과 심판에 대해 깨우치십니다.
    (요 16:8) 그(보혜사 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은 이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닫지 못 하던 모든 진리를 차례차례 깨닫도록 만드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 때 성령님의 도움을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것은 계속 성장해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순절 성령세례 후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도록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 깊이 깨닫고 문을 박차고 나가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날마다 깨우치십니다.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겸손히 주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이 지혜에서 자라가지 못 합니다. 설교를 듣고 QT를 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를 얻는 복된 시간입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날마다 더욱 진리를 깨달아 자라가시기를 축복합니다.
    3. 권능
    두 번째 변화는 정서적 변화인데 곧 능력입니다. 본문 8절 상반부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δυναμις)을 받고…
    권능으로 번역된 헬라어 두나미스는 힘, 권위를 의미합니다. 이 두나미스는 19세기 발명품 다이나마이트의 어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뜻이 통하긴 하지만 폭발력이기 보다는 무언가를 제어하고 물리치는 힘, 권위를 의미합니다. 무엇을 제어하고 물리칠까요?
    (눅 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
    즉 원수 마귀의 모든 권세를 제어하는 권위, 물리치는 힘을 의미합니다. 추상미씨는 성령충만을 경험하고서 그녀를 괴롭히던 우울증과 불면증, 자살충동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대신 주님의 은혜로 가득 차는 충만감,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기쁨,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얻는 담대함이 가득해졌습니다. 이전에 그녀를 괴롭히던 온갖 두려움이 다 사라지고 주를 위해 못 할 일이 없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주시는 권능입니다. 죄와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여기에 눈의 뜨이게 드러나는 은사가 종종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교단의 신학에 따라 이런 외적 은사를 인정하기도 하고 않기도 합니다. 개별적으로도 은사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죄와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믿음과 기쁨과 담대함의 능력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왜 예수를 믿는데도 믿음이 흔들리고 기쁨이 없고 두려운 일이 가득합니까? 성령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권능을 주십니다. 성령충만으로 여러분의 삶에 죄와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권능이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4. 사명
    마지막 변화는 의지적 변화인데 곧 사명입니다. 다시 8절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님이 깨달음과 권능을 주시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똑똑한 척하고 편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을 감당케 하심입니다. 그 사명은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추상미씨는 6개월 간 매일 4시간이 넘게 QT를 하며 주님과 신혼생활을 하며 정결한 신부가 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 시간 동안 그녀 안에 있던 모든 욕망이 다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배우와 감독으로 성공하고픈 욕망도, 아내와 엄마로서 이루고 싶은 바람도 다 사라지고 오직 자신과 주님만 남았습니다. “주님, 이젠 아무 것도 필요없습니다. 아무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저는 이제 무엇을 위해 살까요?” 그 기도 끝에 주님이 답을 주시기를, “복음을 이 시대의 언어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이제 성공한 배우와 감독이 아닌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45 min
  • 20230514 천국같은 가정 / 엡 6:1-4
    엡 6:1-4/천국같은 가정
    230514 어버이주일
    1. 불명예스러운 1위
    한국은 확실히 열정적인 나라입니다. 그 열정은 세계 1위를 찍은 여러 항목에서도 드러나는데 그 중에는 자랑스러운 1위도 여럿 있지만 결코 자랑하고 싶지 않은 1위도 있습니다. OECD 국가 중 자살율, 대기오염율 그리고 노인빈곤율이 모두 1위입니다. 그리고 전세계 모든 국가를 통틀어 압도적인 1위 항목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2022년 기준 합계출산율 0.78명의 기록입니다. 가임기여성 한 명이 평생 출산할 것으로 기대하는 평균출생아 수로 한국에서는 여성 한 명이 평생 0.78명 밖에 낳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2위 일본도 넉넉히 따돌린 이 기록은 한국사람들이 결혼도, 출산도 기피하는 추세를 반영합니다. 이미 시작된 인구절벽은 미래한국사회의 침몰의 가장 확실한 원인이라고 꼽힙니다.
    그 배경에는 가정의 붕괴가 있습니다. 작년 한국 통계청이 내놓은 한국사회 결혼건수와 결혼율은 모두 통계가 작성된 1970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결혼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43%만이 그렇다, 51%는 안 해도 괜찮다고 답을 했습니다. 한국인들은 결혼과 가정을 점점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어떤 이유로든 독신생활을 점점 더 원한다는 뜻입니다. 유독 한국사회에 더 강하게 나타나는 이런 추세는 옳은 것입니까? 괜찮은 것일까요? 이런 시대의 풍조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가르칠까요?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왜 우리는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그리고 가정의 달을 지킵니까? 가정의 중요성을 점점 상실해 가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2. 가정의 가치
    우리는 왜 결혼하고 왜 가정을 꾸립니까? 아마 진화론자들은 종족번식을 꾀하는 DNA의 맹목적 욕망 때문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낭만적인 이들은 사랑하는 이와 항상 함께 하고 싶어서라고 하겠지요. 혹 외로움을 덜거나 경제적 부담을 함께 지거나 부모님의 바람 때문에 혹은 사회적 요구 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본래부터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돕는 이가 필요합니다. 그 돕는 이로 하나님은 배우자를 주셨습니다.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님은 그 가정이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 복이 무엇일까요?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복은 생육 곧 자녀를 낳아서 번성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기를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큰 행복이 뒤따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인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복의 삶입니다.
    3. 독신의 가치
    그렇다면 독신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순종입니까? 오늘날 급증하고 있는 독신생활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으로 혹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독신생활을 하는 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 19:12)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공동번역)
    즉 사명을 전념해서 감당하기 위해 독신을 스스로 택하는 사람이 있는데, 억지로 그렇게 할 필요는 없고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라는 뜻입니다. 선교지에서 종종 독신으로 사역에 전념하는 여선교사님을 만납니다. 반면 남자선교사님은 독신이 잘 없습니다. 불필요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결국 결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독신을 차선이거나 불순종하는 삶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와 달리 독신으로 선교사역에 전념했던 사도 바울은 독신이 은사라고 가르쳤습니다.
    (고전 9: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베드로)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고전 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독신)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결혼과 독신을 다양한 기질과 상황과 선택을 다른 것으로 이해해야지, 옳고 그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결혼이 옳고 독신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결혼이든, 독신이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면 선합니다. 결혼이든, 독신이든 자신의 욕망을 위한 것이면 악합니다.
    결혼이 선한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 곧 서로 돕고 사랑하고 새생명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복을 세상에 퍼뜨리기 때문입니다. 결혼이 정욕이나 허영이나 경제적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전락할 때 그것은 악합니다. 독신이 선한 이유는 시간과 에너지를 하나님의 사역과 이웃을 섬기는데 더욱 집중하고 헌신할 수 있기 때문에 선합니다. 독신이 성가시고 부담스러운 의무를 피하고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생활을 즐기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악합니다. 여러분의 결혼생활과 독신생활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거룩하기를 축복합니다.
    4. 사랑의 사명 
    다음으로 가정의 사명을 생각해 봅니다. 모든 가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가정이 이 사명을 감당할 때 행복하고 거룩하고 신성합니다. 부부는 서로 돕는 배우자로 창조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서로 돕는 존재입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고 서로 도와야만 가능한 이 가정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사랑입니다.
    (엡 5:33) …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부부는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자연인으로 인간은 자기애의 감옥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기심의 감옥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경험을 연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합니다. 그 사랑이 영원할 줄 알고 가정을 이루지만 곧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갈등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그제서야 조금씩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훈련의 장입니다. 가정은 우리가 성숙해가는 훈련의 장입니다. 또한 가정은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자라가는 곳입니다. 이 과정을 부부는 서로 도우며 함께 갑니다.
    5. 돌봄의 사명
    둘째 가정의 사명은 돌봄입니다.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가정이란 울타리에서 돌봄을 받습니다. 부부는 서로를 돌보고 부모는 자녀를 돌보고 자녀는 부모를 돌봅니다. 오늘날 선진국의 복지시스템이 이를 많이 해결합니다만 어디까지나 가정의 돌봄을 보완하는 것이지,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극단적 예입니다만 공산주의 사회에서 생산성을 증대시킨다고 모든 자녀돌봄을 정부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맡기고 노인돌봄을 정부의 양로원에 맡겼습니다만 그 결과는 관계와 윤리, 도덕, 공동체성의 붕괴로 재앙과 같았습니다. 지금도 절대다수의 인류는 돌봄을 가정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회시스템이 발전해도 가정의 돌봄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들어가서 청소년은 기숙학교에서 살고 청년시절엔 건강하니까 혼자 살다가 은퇴하고는 홀로 양로원에 들어가는 인생을 살고 싶은 분 계십니까? 인생은 서로를 돌보고 돌봄을 받으며 보람과 기쁨을 동시에 느낍니다. 이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에 가정만한 곳은 세상에 없습니다.
    6. 양육의 사명 
    셋째 가정의 사명은 양육입니다. 여기서 양육은 정신과 신체가 건강한 다음 세대를 길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부모는 자녀를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양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양육은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해야 합니
    39 min
  • 20230507 엠마오로 가시는 주님 / 눅 24:13-35
    눅 24:13-35/엠마오로가시는주님
    230507 주일설교
    1. 부활의 주님을 만나다
    한국 현대소설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은 23세에 이 소설을 발표하여 천재로 인정받았습니다. 아내의 전도로 마지못해 교회를 출석하던 중 그는 네 번의 신비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참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신비체험 중 하나인 1983년 10월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을 간증집 ‘내가 만난 하나님’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전 10시경, 아침식사를 함께 했던 배감독은 시내외출하고 나는 침대에 발을 뻗고 베개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 성경을 읽고 있었다. 참 재미나게 성경을 읽고 있는데 문득 내 바로 옆, 침대와 침대 사이의 공간에 하얀 옷자락이 보이는 것이었다… 고개를 쳐들어 올려다 보니 대리석으로 빚은 듯 하얀 머리털, 하얀 얼굴, 하얀 수염을 기르신 분이 나를 지긋이 내려다 보고 서계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이구나! … 오전 햇볕이 환히 들어오고 있는 호텔 방안에서 영안(靈眼)이 아니라 내 육안(肉眼)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위엄 때문에 마치 무거운 바위가 나를 내리누르고 있는 듯한 조심스러운 느낌이 나에게 밀려들었다…
    종종 부활의 주님을 만난 신비체험을 경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이런 체험을 통해 주님을 만나지 않기에 부러워하거나 열등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고, 김승옥 작가도 자신이 ‘도무지 믿지 못 하는 무신론자였기에 하나님이 체험을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주일부터 3주에 걸쳐 부활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아마 마음에 이런 질문이 떠오른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만 듣지 말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라는데 도대체 어떻게 만나는 거야? 어떤 사람은 그 분을 만났다는데 나는 왜 만났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거지?’ 그래서 오늘은 부활의 주님을 왜 만나기가 어려운 것인지, 어떻게 만나는 것인지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경험을 통해 깨닫고자 합니다.
    2. 왜 만나기가 어려운가
    먼저 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가 어려운지 생각해 봅시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 날 오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한참이 걸렸다는 점입니다. 주님이 변형되셨기 때문이라고 지난 주에 설명드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본 것에 비하면 훨씬 긴 시간입니다. 13절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이십오 리 약 10여 킬로미터 정도입니다.
    (눅 24: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산길이고 천천히 대화하면 간다면 약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30-31절을 보면 그들은 엠마오에 도착한 후 에도 예수님과 저녁식사를 하던 중에야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인 줄 깨닫습니다.
    (눅 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 (눅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님이 언제쯤 이 여정에 동행하셨는지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모든 정황을 고려하면 대략 반나절 정도를 시간을 보내신 후에야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반면 안식후 첫 날 새벽 무덤을 방문한 여제자들은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을 보면 모두 몇 마디 나누지 않고 금방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왜 이 여제자들과 달리 엠마오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이렇게 오래 걸린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의 삶의 방향에 있습니다. 여제자들과 이 두 제자들은 삶의 방향이 달랐습니다. 여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부활의 믿음은 없었지만 그녀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주검이라도 주님을 보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주님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반대로 ‘주님을 떠나 세상을 향해’ 걸어가습니다. 22절 이하를 보면 분명 그들은 그 날 아침 빈무덤과 천사들이 전하는 부활의 소식을 여제자들을 통해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확인하러 달려가는 길에 그들은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와 전하는 빈무덤의 소식을 듣고도 그들은 주님을 기다리기는커녕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로로 향하여 주님과 더 멀어지는 길을 택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도 않았거니와 사실 부활의 진위여부가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인간적 슬픔에 잠겨 있었을 뿐입니다.
    (눅 24:17) …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들의 바람은 21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었습니다.
    (눅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즉 자신들의 바람을 이루어주실 예수님을 믿은 것이지, 그 분의 뜻과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방향이 주님이 아닌 세상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삼일 전 십자가를 지시던 날 그들이 어디 있었는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18절은 두 제자 중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라고 합니다.
    (눅 24: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
    그의 아내는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아래까지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요 19장입니다.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그 자리에 글로바는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는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는 어쩌면 아내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합류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혹 오늘 이 예배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아내를 따라오신 분들이 있다면 소망을 가지십시오. 글로바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여러분도 찾아오실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몸은 제자공동체에 두고 있었지만 마음은 예수님에게 향하지 않은 채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 이유입니다. 이 마음의 상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데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이는 마치 수학을 배우고 싶어 안달난 학생과 배울 생각이 전혀 없는 학생의 차이와 같습니다. 이미 동기부여가 끝난 전자는 수업을 스폰지가 물 빨아들이듯 흡수하여 금방 미분적분을 이해합니다. 동기부여가 안 된 후자는 물 위에 기름붓듯 수업내용이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이 콩밭에 가있으니까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 배운 미적분을 아직 이해 못 하시는 분들이 계시죠?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주님을 향한 제자는 주님이 찾아오실 때 금방 알아봅니다. 반면 마음이 세상을 향한 제자는 주님이 당신을 찾아오셔도 알아보지 못 합니다.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맨하탄에 나가 술집이 어디 있나 찾아보십시오. 교회는 거의 못 보고 지나칩니다. 반면 교회를 찾아다녀 보십시오. 술집은 대부분 못 보고 지나칩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글로바와 다른 제자는 주님의 고난은 두렵고 주님의 부활은 믿기지 않고 하나님 나라는 관심도 없었기에 자신들을 찾아온 주님을 알아보지 못 했던 것입니다.
    3. 어떻게 돌이키나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려는 이는 세상을 향한 마음을 주님을 향하도록 돌이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주님의 길을 예비한다며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수학에 관심이 없는 학생에게 왜 수학을 배워야만 하는지 동기부여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세상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주님을 향하도록 만드십니까? 그것은 사실 공생애 3년 내내 하신 일로 딱딱하게 굳은 마음밭을 일구어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32절은 저녁을 먹다 눈이 열려 주님을 발견한 그들의 마음이 언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낮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진리와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던 냉랭한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실 때 뜨거워졌습니다. 단단하던 땅이 녹아 말씀의 씨앗이 떨
    36 min
  • 20230430 무덤은 왜 비었는가 / 마 28:11-15
    마 28:11-15/무덤은 왜 비었는가
    230430 주일설교
    1. 반박할 수 있는가
    지난 2월 13일 미시간주립대에서 총기난사사건으로 3명의 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분들이 계실 것입습니다. 그 중 한 명인 윌리엄 그레이가 장례를 치른 다음 날 무덤에서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십니까? 관을 뒤덮은 두꺼운 흙을 파헤치고 기어이 무덤 밖으로 나온 윌리엄 그레이는 흙투성이의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친척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이 기적을 체험한 지역주민들과 학생들은 윌리엄 그레이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최근 화제가 된 애즈베리 부흥 못지않은 부흥이 미시간주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 주에 미시간주의 부흥현장을 방문할 예정인데 함께 가실 분들은 신청해 주십시오.
    여러분, 지금 제가 한 이 황당한 이야기가 믿기십니까? 아마 대부분 못 믿으실 것입니다. ‘뭐,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여러분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인터넷으로 미시간주 총격사건을 검색해 볼 것이고 주변에 교인들에게도 그런 소식 들은 적이 있느냐고 확인해 보시겠지요? 그러면 ‘총기난사사건으로 3명이 사망했다는 팩트’ 외에는 윌리암 그레이란 인물이나 그의 부활이나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금방 아시게 될 것입니다. 불과 50일 전 사건이요, 미시간주가 멀리 떨어져있기는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한 이 시대에 이런 거짓말로 상식을 가진 사람을 선동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 점이 초대교회가 탄생할 시점에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정황과 아주 비슷합니다. 오순절에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외치기 시작했을 때 그 말을 들은 이들은 불과 50일 전에 예루살렘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예수님의 죽음장면을 직접 보았거나 가족, 친척, 동네주민들로부터 들은, 바로 그 곳 예루살렘 주민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여러분이 지금 하듯이 제자들의 주장을 금방 반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봐, 예수가 죽는 것을 우리가 다 봤다고. 이런 미친 소리를 믿으라는 거야? 지금 당장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가서 그의 시체를 확인해 보자고.” 혹은 “무덤이 빈 것은 당신들이 시체를 훔쳐갔기 때문이 아니냐? 죽은 그가 살아났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으라는 거야?”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는 대신 3천 명과 5천 명이 대규모로 회심하여 그 예수가 살아났다고 믿으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이전의 비겁함이나 지금의 담대함을 볼 때, 그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주장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 빈 무덤의 난제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부활을 정말 믿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초대교회 사도들의 증언과 그 기록인 복음서 때문입니다. 그들의 증언은 믿을 만 합니까? 적어도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심까지는 거의 이견이 없습니다. 기독교를 공격했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에도 이 점은 명시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나왔는데, 그는 티베리우스 시대에 우리의 행정관 중 하나인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극형을 받았다.”
    죽으신 주님의 무덤이 삼일 째 아침에 비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여러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유대사회에 널리 퍼진 다양한 빈무덤을 설명하는 가설에 의해서도 반증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주장 중 하나인데 무덤이 빈 이유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전제를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를 설명하는 이런 주장을 퍼뜨릴 이유도, 퍼질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제자들이 부활을 전할 때에 대중들이 무덤이 비었다는 점을 전혀 반박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견이 시작되는 지점은 무덤이 왜 비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반박하는 이들은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도둑설, 기절설, 환각설입니다. 이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3. 도둑설
    도둑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가서 숨기고 그가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뜨렸다는 주장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된 이유를 보여줍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가 부활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 예수의 추종자들이 동요를 일으킬까봐 제자들이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지 드러납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갈 동기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도대체 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 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그들은 큰 실망을 느꼈습니다. 도대체 왜 위험을 무릎쓰고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가며 그래서 무엇을 얻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대중이 믿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들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부귀입니까, 영화입니까? 그들이 얻은 것이라곤 박해와 순교 뿐이었는데 말이지요.
    더구나 그들에게는 시체를 훔쳐갈 능력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실 때 모두 도망쳐 숨었다고 하였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조차 여종의 증언이 두려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 부인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로마군병이 지키는 무덤에서 몰래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다?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났으며 로마 군병은 어떻게 제압했을까요?
    4. 기절설
    또 다른 주장은 기절설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는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가 무덤에 묻힌 후 깨어나서 무덤 밖으로 나왔고 주님을 숨긴 채 제자들이 부활설을 퍼뜨렸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믿기 힘든 여러 가지 정황을 전제해야 합니다. 첫째로 당대 최강이자 최고 전문가였던 로마 군병들이 바보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적을 죽이고 반역자들을 십자가형 등으로 처형하는 일을 밥 먹듯이 자주 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기절한 것과 죽은 것도 구별하지 못 했어야만 합니다. 한 병사가 다른 두 죄인의 다리를 부러뜨려 죽이고 예수님도 그렇게 하려다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뼈를 부러뜨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때 그는 기절한 것을 죽은 것으로 착각했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절한 예수님을 아리마대 요셉과 제자들에게 넘겨주었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만신창이가 되신 예수님이 멀쩡하게 온 팔레스틴 땅을 씩씩하게 돌아다니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미 채찍질로 만신창이가 되어 십자가를 제대로 지지도 못 하고 쓰러지셨던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은 채 기절하셨는데 3일 째가 되도록 무덤 속에서 살아남으셨다가 그 몸으로 일어나 돌로 된 무덤문을 밀어 열고 무덤을 지키는 당대 최강의 로마군병들을 헤치고 유유히 무덤에서 나오셔야만 했습니다. 역시 그 몸으로 예루살렘에 나타나셨다가 엠마오로 하룻길을 가시다가 나중에는 저 북쪽 갈릴리 해변까지 가셔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기절했다가 깨어난 예수님을 숨기고 그가 부활하셨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예수님은 그 몸으로 이 모든 일을 하시고 제자들은 왜 그런 주님에 대해 거짓말을 또 하기 시작했을까요?
    5. 환상설
    또 한 가지 주장은 집단환각설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고 바란 나머지 혹은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집단적으로 부활한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 역시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일단 제자들 대부분이 똑같은 환상을 다른 장소에서 반복해 본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환상은 실제가 아닌 불안정한 심리상태에서 오는 주관적 경험이기에 보는 이와 보지 않는 이가 갈릴 수밖에 없고, 보는 이들도 각자 다른 모습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 승천까지 40일 동안 제자들은 같은 모습의 예수님을, 각기 다른 장소에서 일관되게 여러 차례에 걸쳐 만났습니다. 환상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환상설은 빈 무덤을 전혀 설명하지 못 합니다. 제자들이 어떤 심리상태
    39 min
  • 20230423 어떤 부활인가 / 마 22:23-33
    마 22:23-33/어떤 부활인가
    230423 주일설교
    1. 부활의 몸
    우리는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 쉽게 여기지만 개체수를 기준으로 지구의 주인노릇하는 생명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물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기에 존재한다는 것도 잊어버리지만 자그마한 연못 하나에도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보다 더 많은 수의 단세포 생명체가 존재합니다. 똑같이 지구상에 존재하지만 단세포생명의 몸체와 인간의 몸은 서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인간의 몸은 단세포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정교하고 오묘하고 단단하고 아름답고 기능적이고 오래 갑니다. 우리는 눈으로 무지개와 오로라를 보고 코로 꽃향기를 맡고 입으로 온갖 음식을 맛보고 노래하고 손으로 요리를 하고 발로 춤을 추고 황홀한 음악을 만들고 소설을 쓰고 우주선을 쏘아올립니다. 이 몸을 아메바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은 불쾌할 정도이지요. 야 이, 아메바 같은 놈아… 이것은 엄청난 욕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영광의 격차를 보이는 서로 다른 몸이 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원리로 인간의 몸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다른 생명의 몸도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약점, 쉽게 병들고 부러지고 마침내 죽고 썩는 이런 약점이 없는 몸 말입니다. 그런 몸을 우리가 입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길이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주십니다.
    부활절이 2주가 지났습니다. 부활의 소망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크고 놀라운 약속입니다. 부활이 가짜라면 기독교 신앙 전체가 거짓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부활을 전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고전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반면 부활이 진짜라면 기독교 신앙보다 더 놀라운 약속은 세상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이들에게 다시 만난다는 이 부활의 약속 외에 어떤 약속이 위로가 될까요? 이 생의 마지막을 향해 날마다 걸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이 부활의 약속말고 무슨 말이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있습니까? 이 생이 전부요, 죽은 후에 아무 것도 없다면 이 허무하고 덧없는 인생을 즐겨본들, 누려본들, 가져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럼 부활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어떠할까요?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만날까요? 여전히 지금 이 모습일까요? 아니면 다른 모습일갈까요? 이 질문의 답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 얻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믿고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의 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2. 천사처럼 변한다 
    첫째로 부활하면 우리 몸은 천사와 같이 변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부활에 대해 던지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당시 관습인 형사취수제에 의하여 형이 아들을 낳지 못 하고 죽으면 동생이 대신 형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대를 잇게 해주려다 일곱 형제가 모두 한 여자를 아내를 삼았다가 죽으면 부활할 때 이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답하시기를, 그들이 부활에 대해 무지하여 이런 생각을 한 것이라며 30절에서 부활 때에는 성적 구분이 없는 몸을 입을 것이라 하십니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천사의 몸은 성의 구분이 없습니다. 성은 종족번식을 위한 것이고 종족번식은 생명이 소멸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인데, 더 이상 죽지않는 몸으로 산다면 종족을 번식할 필요가 없고 그렇다면 성기능도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똑같은 사건을 다룬 누가복음이 이 점을 강조합니다.
    (눅 20: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죽지 않는 몸입니다. 이 천사의 몸은 분명 현재 우리의 몸과는 다릅니다. 그래서인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데 처음에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마리아가 그러했습니다.
    (요 20:14) (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막달라 마리아는 3년 동안 누구보다 가까이 예수님을 모셨는데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어떻게 알아보지 못 하였을까요? 그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 했다고 합니다.
    (눅 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눅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마가복음은 그 이유를 아예 예수님의 모습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막 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우리와 달리 죽지 않는 몸 곧 노화되거나 썩지 않는 몸, 성구분이 없는 몸은 분명 지금과 다른 몸이며 천사와 같은 몸입니다. 그렇더라도 제자들이 잠시 후 예수님을 알아 본 것을 보면 우리의 고유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비유하자면 다섯 살 때 본 아이를 20년이 지나 스물 다섯 살 때 보는 것과 유사할 것입니다. 분명 20년이 지났으니 알아보지 못 합니다. 다섯 살 꼬마와 비교할 수 없이 덩치도 커졌고 늠름해졌고 사나이다워져서 그 꼬마라고는 상상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이 청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 눈매와 얼굴과 특징이 떠오르며 비로소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영광스럽게 변한다
    둘째로 부활할 때 우리 몸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게 변합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과 악인이 모두 부활한다고 선언합니다.
    (행 24: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그런데 이 두 부활은 서로 다른 종류의 부활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요 5: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입니다. C.S.루이스는 성경에 바탕을 둔 상상으로 쓴 판타지소설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지옥에 있는 이들의 몸을 그림자처럼 실체가 없는, 유령같은 몸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천국에 있는 이들은 스스로 찬란한 빛을 내며 다이아몬드보다 높은 밀도와 비중을 가진, 생명의 영으로 충만한 실재로 묘사합니다. 천국백성의 몸을 충만히 채우는 것은 생명입니다. 이 생명으로 인해 그 몸은 영광으로 빛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 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전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전 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전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부활의 몸은 썩지 않습니다. 살과 뼈와 장기가 모두 다른 재료이고 다른 상태일 것입니다. 온갖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와 회충과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몸이 아닙니다. 이토록 쉽게 병들고 부러지고 상하고 찢기는 몸이 아닙니다. 마침내 죽고 썩어 흙이 되는 몸이 아닙니다. 우리 몸이 썩어 흙이 되는 이유는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흙이 아닌 다른 것으로 혹은 다른 분자결합구조로 만들어 생기를 불어넣으신다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몸이 되지 않을까요? 사도 요한 역시 우리가 입을 새 몸의 삶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사망도, 애통함도, 아픈 것도 다 지나간 옛 일이 되어버린 몸과 삶 곧 영광의 삶입니다. 이런 몸이 어떤 것인지 희미
    38 min
  • 20230409 부활의 날 / 마 28:1-10
    마 28:1-10/부활의 날
    230409 부활주일
    1. 부활의 소식을 듣다 
    할렐루야, 오늘은 복된 부활주일 아침입니다. 죽음을 멸하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생명과 은혜와 기쁨이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일터 위에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인사하십시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으로 인해 마땅히 우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야 할 터이지만 아마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어도 여전히 렌트비와 청구서, 건강과 일터가 걱정이 되어서 별로 기쁘지 않은 분들 말입니다. 왜일까요? 부활이 정말일까 하는 의구심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다음 달에 로또 1등이 당첨될 것이라면 지금 청구서, 렌트비 따위로 걱정하실 분이 있겠습니까? 다음 달에 병이 말끔히 나을 것이라면 지금 건강이 좋지 않은 것 때문에 걱정하실 분이 있을까요? 정말 그렇게 될 것이라면 말이지요. 정말 우리에게 부활의 새생명이 있을 것이라면 지금 이런저런 문제로 근심걱정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 그렇다면 좋겠지만 정말 그럴지 확신이 없기에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렇다면 너무 죄책감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활의 소식을 처음 들은 이들도 그랬기 때문입니다.
    2. 부활의 소식만 듣다 
    오늘 본문은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온전히 기뻐하지 못 했던 여제자들을 소개합니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 불법적 체포와 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오후 3시경 운명하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묻히신 지 3일 만인 안식 후 첫 날 곧 이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빈 무덤과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여제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여자는 독립적 인격으로 인정받지 못 했기에 사람 수를 셀 때도 계산되지 않았고 당연히 법정에서 증인을 채택되지 못 하던 시절입니다. 만약 누군가 예수님의 부활이야기를 지어내고자 했다면 절대 여자를 첫 증인으로 묘사하여 이야기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실제 벌어진 일에 대한 묘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천사들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들은 그녀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8절을 보면 여제자들은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에 크게 기뻤지만 동시에 두려워하였습니다.
    (마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이 소식이 진짜라 생각하면 정말 기뻤지만 동시에 과연 진짜일까 하여 두려웠습니다. 그녀들이나 우리나 별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부활의 소식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들도 천사들로부터 부활의 소식만 들었습니다. 우리도 설교시간에 부활의 소식만 듣기 때문에 기쁨이 없습니다. 여전히 근심, 걱정과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진정한 부활의 기쁨과 능력을 누릴까요?
    3. 부활의 주님을 만나다
    9절 이하가 그 답을 줍니다. 그녀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평안하냐’고 인사하셨지만 직역하면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마 28: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어서 10절에서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고 인사하셨습니다.
    (마 28: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하시니라.
    주님은 당신이 직접 여제자들을 만나 부활하셨음을 증명하여 기쁨을 주셨고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녀들은 이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오직 참 기쁨만으로 충만하여 제자들에게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러 달려갑니다. 사울 역시 부활의 소식만 들었을 때는 믿지도 못 했고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다메섹 가는 길에서 만나자 그의 삶이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충만한 소망과 기쁨으로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고전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4.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
    MBC 뉴스데스크 앵커 등 25년간 언론인이었던 조정민 기자를 아시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철저한 이론으로 무장한 무신론자였던 그는 47세 되던 해에 기독교 광신자가 된 듯 보이는 아내를 건져내려고 소위 잠입취재를 했습니다. 아내가 가는 새벽기도에 따라가서 도대체 뭘 하나 보고 있노라니 말씀이 끝나고 기도를 하는데 사람들이 통성으로 기도하고 그 중에는 방언으로 하는 사람도 있어서 ‘여기 전부 미친 사람들 소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상에 올라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중증광신자여서 건져낼 가망성이 안 보이는데 그나마 아내는 회중석에 앉아서 조용히 기도하는 것을 보고 건져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4일 째 새벽기도를 따라나갔는데 갑자기 찬양시간에 눈물이 터지더니 회개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뭔가? 기독교가 진짜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내가 1년 전부터 구역식구들과 교우들에게 남편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해서 수십 명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보니 주님이 자신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헛소리라가 진리의 복음임을 깨달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소망과 기쁨 속에 살다가 6년 후 53세에 iMBC 사장 자리에 사표를 내고 보스턴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이제 Basic Church를 섬기는 조정민 목사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구원의 길이 아니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외칩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며 부활의 소식을 들으나 부활의 주님은 못 만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소식을 들어도 진정한 기쁨을 못 누리고 여전히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미워하고 다투고 괴로워하며 살아갑니다.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의 소식만 듣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이 여제자에게 나타나셨듯,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셨듯 그리고 조정민 목사에게 나타나셨듯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그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5.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하다
    여제자들이 그 답을 줍니다. 그녀들은 처음부터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사들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들었고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녀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8절이 보여줍니다.
    (마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그녀들은 부활의 소식을 믿었습니다. 물론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기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기쁨도 있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었지만 주님은 그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또한 그녀들은 순종하여 제자들에게 빨리 알리려고 달려갔습니다. 이 순종 역시 그녀들의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복음의 소식을 믿고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에 순종하면 주님은 그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직접 만나주셔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더 큰 기쁨을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지름길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돈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처럼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만 하면 기계적으로 반드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격적이신 분입니다. 인격인 사람을 만나는 것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주권자이신 당신이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만 일어나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은혜를 의지하는 자녀들의 간구를 주님은 외면하지 못 하십니다. 그 분에게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사랑과 긍휼이 바다처럼 넘쳐흐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간구하는 자를 만나 주십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오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이 소식을 전파하라는 부름을 받은 여러분, 겸손히 믿고 순종함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참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1 min
  • 20230402 개선의 날 / 마 21:1-11
    마 21:1-11/개선의 날
    230402 종려주일
    1. 폭식증과 착각
    현대인에게 점점 증가일로에 있는 질환으로 섭식장애가 있습니다. 10대와 20대가 압도적으로 많고 여자가 남자에 비해 4배 이상 많은 대표적 섭식장애로는 거식증과 폭식증이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거식증은 음식을 거부하는 증세이고 폭식증은 과도하게 먹는 증세입니다. 둘 다 정신적 문제와 관련이 깊은데 이 중 폭식증은 위장이 음식으로 차있는데도 포만감 대신 배고픔을 느껴서 계속 음식을 섭취하는 증세입니다. 이 때 느끼는 배고픔은 사실 생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입니다. 공허감, 외로움, 거절감, 실패감, 상처 등으로 인해 생긴 정서적 굶주림을 육체의 굶주림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착각은 당연히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우리 삶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는 착각은, 물론 거식증이나 폭식증이 전부가 아닙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착각도 있습니다. 그 착각을 오늘 본문이 경고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내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간 고난주간이 이어지고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이 한 주간은 가장 중요한 기독교 절기입니다. 이 절기에 일어난 일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성경대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영원히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사건입니다. 이 핵심사건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씁니다.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 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기독교 복음은 바로 이 핵심사건을 뼈대로 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는 시간순서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 죽으심과 부활이란 핵심사건을 먼저 중심에 놓고 거꾸로 공생애와 탄생사건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는 바로 이 죽으심과 부활이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주간의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복음도, 복음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한 주간을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주일로 지키며 매년 묵상하고 믿음을 견고하게 다집니다. 우리도 내일부터 6일간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를 하며 주님의 한 주간의 행적을 따라가며 묵상합니다.
    2. 예루살렘의 개선행렬
    이 한 주간의 시작은 바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사건입니다. 며칠 전부터 예루살렘 안팎에 사는 대중에게 들불처럼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오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이가 베다니에 도착하셨다! 그는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심지어 죽은 이를 살리신다. 죽었다 살아난 베다니를 본 예루살렘 사람만 해도 족히 수백 명은 넘었습니다. 그야말로 선지자들이 예언한 오실 메시야가 아닌가! 오매불망 우리가 기다려온 그 분이 아닌가 말이다!
    바로 이 날 그 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고 예루살렘과 감람산 너머 벳바게와 베다니에 사는 이라면 그 누구도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몰려든 인파의 얼굴은 하나같이 근래에 본 적이 없는 희망과 기대의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실은 나귀가 감람산 언덕에 나타나자 대중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이다! 나사로를 살리신 이!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신 이, 물 위를 걷고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이! 몰려나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을 둘러싸고 성문까지 밀고 밀리며 행진했습니다.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의 개선행렬이었습니다.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오는 것은 구약시대 왕의 개선행진 모습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성문에 도달하자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땅에 깔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중은 대부분 겉옷이 한 벌 뿐이었지만, 그래서 옷을 벗어 속옷을 입은 몸이 드러났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옷으로 길을 메울 수 없자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땅에 깔고 손에 들고 흔들며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종려나무가지를 베어서 길에 깔고 손에 들고 흔드는 것 역시 구약시대 왕의 개선행렬의 모습입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는 외침 역시 왕과 장군들에게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이 열광적 분위기 속에 그들은 모두 기다리던 메시야, 로마 황제와 그 앞잡이 헤롯 왕을 물리치고 마침내 이스라엘에 독립과 자유를 가져다줄 왕이 오셨다고 믿었습니다.
    이들의 기대대로 과연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본문 5절이 스가랴서를 인용하여 선언합니다.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진정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개선행렬은 어디로 향해야 했을까요? 사람들을 이끌고 그대로 로마군이 주둔한 안토니오 성채로 향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먼저 헤롯궁으로 쳐들어가 로마의 앞잡이 헤롯왕과 그 당을 물리쳐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혹은 로마에 협조하는 대가로 온갖 특권을 누린 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을 처형하고 혁명을 시작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예수님은 궁전이 아닌 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기셨고 그 곳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몰아내신 후 백성을 가르치시고 해가 지자 베다니로 돌아가 쉬셨습니다.
    대중은 어리둥절 했습니다. 혁명은 어디로 갔습니까? 언제 침략군을 몰아낼 것입니까?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 다시 돌아와 저들을 몰아낼 것입니까? 그 날 밤 예수님께 열광했던 대중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 흥분과 이런 저런 질문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3. 속박과 착각
    대중은 왕을 기다렸고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중이 생각한 그 왕이 아니었습니다. 대중은 자신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을 개선시켜 줄 왕을 기다렸습니다. 로마를 몰아내고 다윗 시대와 같은 전성기의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줄 제 2의 다윗을 기다렸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처럼 자유와 해방과 복지를 주시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폐기된 희년을 회복시키는 것이라 선언하셨습니다. 희년은 자유와 해방, 복지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자유와 해방과 복지는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요, 참된 것입니다. 그것은 죄로부터의 자유요,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영생에 속한 복지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필요하다고 깨닫지도 못 했고 필요를 느끼지도 못 했던 자유와 해방과 복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과 슬픔, 굶주림이 로마의 속박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말도 아닙니다. 로마의 속박은 그들의 겪는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그들이 겪는 고통의 일부였습니다. 사실 타민족을 속박하는 로마도 속박당하여 고통받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를 속박하는 고통의 진짜 원인은 더 근본적인 데 있었다는 말입니다. 정서적 굶주림을 배고픔으로 착각하는 폭식증환자처럼 사람은 눈에 보이는 속박이 고통의 원인인 줄 알기에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지 못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착각을 깨우치기 위하여 성전에 가셔서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목요일까지 예수님이 계속 해 가르치신 이유도 이것입니다.
    그들을 묶고 있던 진짜 무거운 속박, 총과 칼을 써도 벗을 수 없고, 압제자도, 피압제자도 모두 묶인 속박, 배운 자도, 가진 자도, 품위 있는 자도 벗을 가능성이 없는 이 절망의 속박은 무엇입니까? 바로 죄와 죽음의 속박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며 그 대가로 영원한 멸망,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속박으로 속이고 빼앗고 의심하고 미워하고 비방하며 살아갑니다. 죽음의 속박으로 근심하고 우울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며 살아갑니다. 정확히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다가갑니다. 우리는 죄의 속박과 죽음의 증세에 묶여 있습니다.
    예수
    29 min
  • 20230326 미움받으며 살지 않기 / 요 15:18-16:4
    요 15:18-16:4/미움받으며 살지 않기
    230326 주일설교
    1. 바꿀 수 없는 것
    최근 세계적 인기를 끈 한국드라마 ‘더 글로리’의 소재는 학교폭력입니다. 주인공 문동은은 가해자인 박연진에게 자신을 왜 그토록 가혹하게 괴롭혔는지를 묻습니다. 가해자 박연진에게는 기억에 남는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이해할수없는 미움은 인간세상 어디에나 있는 부조리입니다. 현재 일본왕비 마사코는 왕실에서 당한 따돌림으로 국내외에 유명해졌습니다. 5개 국어를 하는 일본 최고엘리트 외교관이었던 그녀가 왕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이유는 결혼기자회견장에서 남편보다 28초 더 길게 발언했다는 것, 남편보다 키가 더 크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 했다는 이유까지 더해져 그녀의 불행한 왕실생활은 국제적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미움과 시기, 비방을 당해본 적이 없습니까? 그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평안을 위한 기도’에서 미국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또한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성도의 삶에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18절입니다.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잘못해서 받는 미움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은 지난 주 살펴본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당부에 뒤이어 나옵니다. 서로 사랑하고 원수마저 용서하면 마땅히 칭찬받고 존경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아무에게도 미움받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만 잘 하면 되겠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 하려 애써도 미워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습니다. 20절입니다.
    (요 15: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 즉 아무 죄가 없는 나도 박해를 받았는데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많이 박해받겠느냐, 내 말도 저렇게 순종치 않는데 너희 말인들 순종하고 듣겠느냐 하는 반어법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에 박해는 기본조건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어려움은 다 피해간다’는 식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인간의 간절함에 부응하는 종교적 홍보문구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를 ‘안락의자식 기독교’라고 이름붙였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이래 의인에 대한 악인의 미움과 박해는 끊인 적이 없습니다. 성도의 미움과 박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작년 10월 나이지리아 남부 베누에 주에서 이틀간 급진이스람민병대의 교회테러로 70명의 기독교인이 순교하고 수천 명이 난민이 되었습니다. 이는 작년 한 해 동안 전세계에서 순교한 기독교인 5,898명의 일부일 뿐입니다. 기독교인을 향한 미움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오픈도어선교회의 통계에 의하면 작년 2022년 기준 76개국 3억 6천만 명의 기독교인이 살인, 방화, 투옥, 납치, 성폭행, 교회와 집에 대한 테러를 당하고 있고 이는 갈수록 증가추세입니다.
    이들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지만 서구사회 기독교인들도 미움받는데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이라고 선언하는 이들은 조롱받습니다. 절제와 검소한 삶은 풍요와 호화로움이 미덕인 사회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입니다. 불의한 권력과 탐욕을 경계할 때 오히려 비방에 시달립니다. 거짓과 불의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은 미움받고 비난당합니다.
    2. 미움의 이유
    그럼 세상은 왜 성도를 미워합니까? 여기서 세상이란 피조세계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순종치 않는 질서와 세력을 가리킵니다. 그 첫째 이유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21-22절입니다.
    (요 15: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기에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사람을 미워합니다. 16:3도 말씀하십니다.
    (요 16:3) 그들이 이런 일(미움과 박해)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그러나 몰라서 미워했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22절입니다.
    (요 15: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그들의 악한 마음을 드러내어 고발하셨기에 핑계할 수 없습니다.
    성도를 미워하는 둘째 이유는 자신의 불의에 동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9절입니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성도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택함받아 세상에서 주님께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조폭들도 자신들 조직원은 아낍니다. 자신들 편이니까요. 침략군도 자신들 동료들이 총맞으면 격분합니다. 의로우냐, 아니냐는 상관없습니다. 자신의 편이냐, 아니냐만 중요합니다.
    셋째는 성도들이 의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요 15: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구원)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동조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눈엣가시가 되는데 더 나아가 의를 행하면 자신들의 악이 더욱 드러납니다. 모두가 도둑질하는 사무실에서 혼자 도둑질하지 않으면 미움을 받습니다. 혼자 고결한 척 다하네, 얼마나 고결한지 두고 보자… 어디 가든지 사람들이 하는 대로만 하면 미움을 적게 받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법대로 살면 미움을 받습니다.
    3. 바꿀 수 있는 것
    이렇게 미움받을 때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인홀트 니버의 기도처럼 바꿀 수 없는 현실은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우리 마음을 바꾸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미움과 박해는 고통스러운 자극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면 의외로 쉽게 견딜 뿐 아니라 오히려 많은 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옳습니까?
    첫째, 놀라거나 억울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라고 이 모든 일을 미리 가르쳐 주셨습니다. 16:1, 4입니다.
    (요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 (요 16: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고난의)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둘째,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왜입니까? 마 5:11-12입니다.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의를 행하고 미움을 받으면 하늘에서 상이 큽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상 주시는 이심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이 미움과 박해를 분노와 억울함으로 받는지, 기쁨과 감사로 받는지로 드러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상이며 기쁨이며 은혜입니다.
    셋째, 미워하는 이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도 바울도 권면합니다.
    (롬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어떻게 박해자를 축복합니까? 긍휼히 여길 때만 가능합니다. 미움받는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니고 무지와 죄악에 사로잡혀 의인을 미워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불행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미움을 품는 것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더 글로리’의 복수이야기는 드라마로 보면 속시원할 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가해자나, 복수하는 피해자나 모두 지옥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성도가 이렇게 할 때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성도가 이렇게 할 때 미움받는 삶에서 벗어납
    32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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