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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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pisodes

  • 20231203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 / 행 15:22-29
    행 15:22-29/성령이 이끄시는 교회
    231203 주일설교
    1. 재신임투표 문의
    많은 교우께서 다음 주의 담임목사재신임투표에 관심이 많으실 줄 압니다. 지난 주간에 투표자격과 명단확인에 대한 문의가 많았습니다. 추가로 설명을 드리자면, 제직회와 달리 공동의회는 18세 이상 세례받은 등록교인이면 누구나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본인이 자격이 있다 생각하시는 분들은 다음으로 하실 일이 교회홈페이지에 있는 교인등록명단에 본인의 성함이 있는지, 있다면 여러분이 들고오실 아이디와 성함이 같은지를 반드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문의가 많아 추가로 오는 수요일 6일 자정까지 확인기간을 연장하니 그냥 맞겠지,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 댁에 가셔서 반드시 확인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있고 맞으려니 생각했다가 명단에 없거나 성함이 다르면 확인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릴수도 있고 투표에 참여못하실 수도 있다는 점 다시 한번 강조드립니다.
    지난 주와 달리 이번 주에 새로 올린 명단에는 한글이름과 더불어 영어이름이 있는 경우 옆에 나란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여러분의 아이디 성함이 한글이름과 영어이름 둘 중 하나와 일치하면 됩니다. 라스트네임이 결혼 등으로 성이 바뀌어 등록되지 않았는지 확인해 주시고요, 아이디에 미들네임이 이니셜로만 표기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김도완을 영어로 표기하면 Dowan Kim 이라고 하지 않고 Wan의 이니셜로 W만 써서 Do W Kim이라고 하는 식인데요, 이 경우 사진이나 선관위의 판단으로 본인확인이 가능하지만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 이메일로 아이디의 기록된 이름을 알려주시면 더 신속하게 본인확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튼 조금이라도 다르거나 애매한 부분이 있는 분들은 사무실 이메일로 알려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당일에는 어떤 절차를 거치는가? 예배당에 오시면 약 25분 전부터 로비에서 본인확인을 먼저 하셔야 합니다. 4개의 테이블을 라스트네임 성을 가나다순으로 배치하였으니 해당 테이블에 가셔서 본인의 성함 혹은 고유번호 혹은 둘 다를 알려주시고 아이디를 보여주시면 확인증을 써드립니다. 이 확인증을 예배당 입구의 투표지배부테이블에 제출하시고 투표지를 받아서 예배당에 들어오시면 됩니다. 혹 줄이 길거나 늦어서 예배가 시작하면 바로 들어오셔서 예배를 드리시고 예배 중 공동의회가 선언된 후 다시 나가셔서 같은 절차로 투표지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시간은 넉넉히 드리니 모두가 참여하실 수가 있습니다. 공동의회시간에 투표지에 찬성 O, 반대 X를 기표하셔서 접어서 손을 들어주시면 투표함을 든 진행위원이 다가갈테니 투표지를 함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투표함은 예배당에서 밀봉한 후 새가족실에 보관하고 오클랜드 예배당에서 3시부터 개표하여 교회 홈페이지에 결과를 발표합니다.
    2. 재신임을 넘어선 문제
    우리교회는 2012년 제정한 내규에 따라 담임목사는 7년 임기로 사역하며 매 6년째에 재신임투표를 통해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임기를 연장합니다. 찬성이 그에 이르지 못 하면 7년째를 안식년으로 가지고 사임합니다. 2009년 9월부임한 저는 2010년에 위임투표를 받았고 2016년에 첫 번째 재신임투표를 받았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과거 위임투표와 재신임투표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그 때와 달리 명단확인부터 모든 절차가 까디로워졌다고 불평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이번 재신임투표의 공정성을 염려하는 분들이 많아서 부득이 취하는 조치입니다. 왜 예전과 달리 투표의 공정성, 엄정성을 염려하는가? 이는 잘 아시다시피 최근 불거진 교회내 갈등 때문입니다.
    작년말 반주자소송관련 제직회로부터 비롯되어 최근까지 점점 증폭된 교회내 갈등상황에 대해 담임목사로서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교회의 리더이자 책임자로서 모든 상황을 잘 대처하지 못 한 저의 잘못이 가장 크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로인해 재신임투표를 앞두고 찬성과 반대를 주장하는 교우들의 반목이 커진 것 역시 저의 잘못이 큽니다. 이에 저는 양측의 교우들과 사태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모든 교우들께 감히 당부를 드리고자 합니다.
    김도완 목사 재신임 통과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울 분들이 많겠지만 이는 사실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통과된다고 우리 교회에 꽃길만이 열리는 것도 아니고, 안 된다고 교회가 크게 잘못되는 것도 아닙니다. 목사는 언젠가 교회를 떠나야하는 일꾼일 뿐이므로 지금 떠나나, 7년 후 떠나나 혹은 은퇴할 나이가 되어 떠나나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자격도 없이 15년 전 뉴저지장로교회를 섬길 특권을 얻었습니다만, 이 세상에는 김도완 목사보다 우리 교회를 더 잘 섬길 목사들이 당연히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염려해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목사의 재신임여부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교회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회에서 일개 목사의 재신임여부는 정말 사소한 문제일 뿐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외면한 교회는 재신임이 되든 안 되든 큰 문제거리가 됩니다. 교회는 목사가 인도하는 곳이 아니라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3.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
    그럼 우리교회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는 말씀입니다. 계시록을 들어보십시오.
    (계 2: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님은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교회를 탄생시키신 성령님은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살아서는 성령님의 말씀을 설교하며 전했고 죽은 후에는 그들이 기록한 복음서와 서신서를 교회에 남겼습니다. 사도가 세상을 떠난 후 교회는 사도들의 권위를 안수를 통해 위임받은 교부들의 설교를 통해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성령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전통을 좇아 오늘날에도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안수를 받은 목사는 성경을 설교함으로써 성령님의 말씀을 교회에 전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교회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교회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교회는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그 은혜를 누립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교회는 사명을 깨닫고 순종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교회는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깁니다.
    이 말씀을 성령님의 음성으로 듣지 않는 순간 교회는 구별됨 곧 거룩함을 잃어버립니다. 이름은 교회지만 세상원리로 돌아가는 세상의 모임과 다를 바 없어집니다. 거룩함은 곧 구별됨을 의미하고 그 모임은 교회로서의 거룩함을 더 이상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늘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그 인도를 받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성령님의 음성이 아닌 인간의 생각과 욕심에 이끌림을 받지 않는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마귀는 교회를 항상 성령님으로부터 떼어놓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고자 노리기 때문입니다.
    4. 질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성령님이 교회를 인도하시는 둘째 방법은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입니다. 이 진리를 가르쳐주는 오늘 본문은 안디옥교회와 예루살렘교회 사이에 일어난 갈등을 배경으로 합니다. 행 15:1-2을 보십시오.
    (행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이방인)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행 15: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자칫 잘못하면 안디옥교회와 예루살렘교회의 갈등으로 번져 큰 분열을 불러올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판단을 예루살렘교회에 의뢰하면 어떻게 합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예루살렘교회 교인들 편을 들지 않으리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런데 안디옥교회 지도자인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에 이 문제를 의뢰하러 떠납니다. 왜입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가진 어머니교회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11 min
  • 20231126 케냐의 하나님 / 골 1:24
    골 1:24/케냐의 하나님
    231126 주일설교
    1. 이동관 선교사
    (영상1) 방금 보신 영상은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 근처의 오지 마사이부족의 땅 모를로교회 성도들의 기도모습입니다. 이 지역은 미국의 인디언보호구역과 비슷한데 100% 마사이족만 사는 오지로 포장도로가 있는 마을에서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 정도 달려서 들어가야 도착합니다. 지난 주 보고드린 탄자니아에 이어 이 지역에서 사역 중인 우리교회 케냐협력선교사이신 이동관 선교사님을 뵙고 왔습니다. 제가 걸고있는 이 목걸이는 마사이족의 전통장신구인데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선교사님은 케냐의 오지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공동체를 일구는 사역을 19년 째 해오시면서 네 곳의 오지공동체를 개척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개척한 곳이 나이로부 북부의 춤부니 마을의 캄바부족이었습니다. 다음이 소소마 마을의 캄바부족이었습니다. 이 두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만들어 현지 지도자들에게 위임한 후 5년 전부터 세 번째로 개척을 시작한 지역이 앞서 보여드린 영상의 마시이부족의 마을 모를로였습니다.
    2. 모를로교회
    앞선 두 곳에서처럼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들판에 싯딤나무 아래 텐트로 베이스캠프를 만들고 주변지역의 마사이족을 방문하여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싯딤나무는 현지에선 아카시아나무라고 부르는데 구약성경에 법궤를 만든 바로 그 나무입니다. 사진을 보면 주변에 마사이족이 어디 있는가, 싶으실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 모를로 교회를 방문하고 왜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 교회를 세웠냐고, 교인들이 어디서 오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선교사님이 웃으시면서 저기 보라고 하는데 저기 지평선 가까이 집이 한두 채가 보였습니다. 이 쪽도 보라고 저 산등성이에 집이 또 한두 채가 보입니다. 마사이족은 유목을 하는 이들이라서 이런 광야에 한두 시간씩 걸어가야 집이 한두 채씩 있고 끝도없는 들판에 양떼, 소떼를 몰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모두 최소 한두 시간씩 걸어오고 선교사님도 여기에 텐트를 치고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며 한 집, 한 집 방문하고 전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매일 라면을 끓여먹고 밥을 해먹으며 현지인 스텝 한 명과 텐트생활을 3개월 정도 하는 동안 가장 어려운 것은 밤의 살을 에는 추위와 밤마다 울어대는 하이에나들이었습니다. 3개월을 텐트생활을 하던 중 후원금이 들어와 양철집을 지어서 숙소를 삼고 이 곳에서 2년을 지냈습니다. 이 양철집은 추위와 들짐승의 위험을 막아준 대신 새로운 적을 데리고 왔는데 바로 빈대떼였습니다. 새벽 2시쯤이면 온 몸이 빈대에 물려 견딜 수 없는 가려움과 고통으로 일어나 긁노라면 상처가 터져 피가 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고생을 견디며 마침내 양철로 교회를 세우고 전도한 마사이족과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전통토속신앙에 물든 이들이지만 자신들의 마을로 찾아와 함께 생활하며 복음을 전하는 이선교사님의 전도로 하나 둘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후원금이 들어와서 현재의 멋진 모를로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제가 이 지역을 방문한 날 마침 이선교사님이 교인들과 마사이족장들이 회의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동관 선교사님께 54에이커의 땅을 줄테니 마사이족을 위한 커뮤니티사역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자리였습니다. 처음에는 외국인이 자기들 땅에 무얼 노리고 들어왔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이들이 5년 동안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이선교사님을 보고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 사역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회의 후에 한 교회성도가 초청하여 마사이족의 집을 방문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성도는 아내가 넷에 자녀가 29명이 있는 유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진 속에 셋째 아내와 넷째 아내와 아들들이고 뒤에 보이는 소똥과 지푸라기를 이겨서 만든 집이 네 채가 있습니다. 집 한 채가 여러분 집의 안방만 한데 거의 10명 가까이가 한 집에서 잡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옥수수를 갈아서 만든 백설기같은 떡밥에 양념을 한 야채를 얹고 귀한 손님이 왔기에 고기도 몇 점 올려서 파리떼를 쫓아내며 먹었습니다.
    3. 케냐를 품다
    이런 식의 오지개척을 이선교사님은 19년 동안 벌써 네 번째 다른 지역에서 각각 해오신 것입니다. 제가 짧게 소개했습니다만 이런 고생스러운 오지개척을 왜 하시는 것일까요? 이동관 선교사님은 신학대학원 재학시절부터 선교사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이들이 하는 것일줄 알고 선교사가 되리란 생각은 꿈도 꾼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캠퍼스에 붙은 견습선교사 모집광고를 보았는데, 1년 동안 학교를 휴학하고 선교지에서 소위 인턴선교사가 되어 현지선교사님을 돕고 사역을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광고에서 보고는 얼룩말이 뛰어놀고 어디나 바나나가 주렁주렁 열린 낭만적인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그런 세계를 한 번 경험하고 졸업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는 생각에 덜컥 지원하였습니다.
    막상 케냐에 발을 들여놓은 선교사님이 본 아프리카는 상상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케냐의 빈민촌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을 도와 교회를 섬겼는데, 초등학교 2학년생인 레베카의 엄마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교사님과 함께 병문안을 갔습니다. 허름한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가 살 수 없을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에 파리가 들끓는 얼굴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는데 의사말이 에이즈라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애 아빠는 어디 있나요? 잠시 후 들어오는 그를 보니 더 기가 막혔습니다. 그는 하반신이 없는 장애인으로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들어왔습니다. 엄마를 잃으면 저 어린 소녀가 저 장애인 아빠 밑에서 어린 동생까지 데리고 어떻게 살까 기가막혔습니다. 돌아오는 차에서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한 아이의 동생이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 병원에 달려갔더니 네 살된 여자아이가 동네청년에게 성폭행을 당해 실려왔다는 것입니다. 기가막혀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화를 냈더니 케냐의사가 담담한 말투로 흔히 있는 일이니 흥분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좋은 집 화장실보다 더 작은 양철집에 일곱, 여덟명이 사는데 부모가 낮에 돈벌러가면 아이들은 고스란히 온갖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1년의 견습선교사 사역을 마치고 돌아와 3년의 공부와 7년의 부교역자 생활을 하는 동안 케냐의 아이들의 모습이 내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선교사가 되리라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목사님은 케냐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케냐를 놓고 기도하다가 어느 새 케냐에 돌아가는 것이 기도제목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침내 10년 만에 아내와 어린 세 딸을 안고 케냐에 돌아온 선교사님은 가족을 나이로비에 남겨두고 자신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오지마을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 길도 없는 오지마을로 들어갈 때면 이선교사님의 마음이 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은 동네에는 현지인교회도 있고 나 말고도 복음 전할 선교사들이 많겠지, 하지만 길도 제대로 없는 이 오지에는 누가 들어와 복음을 전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뛰고 설렌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19년 동안 네 곳의 오지마을 교회개척과 공동체사역을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이선교사님은 누가 등떠미는 것도 아닌데 고생과 어려움을 사서 하십니까? 그 이유는 감옥에 갇혀서도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하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아니 왜 사울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그것이 왜 기쁘고 거기다더해 고난을 더 받겠다고 합니까? 속된말로 미친 것 아닌가요? 그 이유는 그가 진 빚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빚은 십자가에서 그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에게 진 사랑의 빚입니다. 이 빚을 갚기 위해, 아무리 고난받아도 다 못 갚을 빚이기에 교회와 성도를 위해 고난받음으로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기쁘고, 더 고난받아 더 갚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선교사님은 왜 아무도 등떠밀지 않는데 케냐로 돌아갔습니끼 왜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데 오지로 오지로 들어가서 추위와 들짐승과 빈대와 싸우면
    38 min
  • 20231119 탄자니아의 하나님 / 렘 33:1-3
    렘 33:1-3/탄자니아의 하나님
    231119 주일설교
    1. 음툴루도서관교회
    음툴루교회 찬양 3분
    아프리카교회의 예배는 늘 예외없이 저를 감동시킵니다. 저도 저들과 함께 춤추고 목청껏 찬양하며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느끼며 행복했습니다. 이 곳은 아프리카 동부 탄자니아의 잔지바르섬의 음툴루마을의 음툴루도서관교회의 헌당예배장면입니다. 잔지바르섬은 탄자니아연방공화국에 속해있지만 대통령과 자치권을 모두 가진 섬나라입니다. 무엇보다 과거 사우디반도의 오만의 지배영향으로 97%의 국민이 무슬림인 이슬람국가입니다. 3%의 기독교인은 본토에서 돈벌러 온 가난한 젊은이들입니다. 이들은 농장농부, 호텔직원 등으로 일주일 내내 힘겹게 살아가다가 주일 하루 쉬는 동안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목놓아 부르짖으며 살아갈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박해로 주거지에선 모일 수가 없어서 숲 속에 천막을 쳐서 예배하는데 교인들은 매주일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을 걸어서 예배를 드리러 옵니다. 그렇게 모이던 몇몇 교회마저 무슬림주민들의 신고와 박해로 결국 문을 닫고 음툴루 지방의 유일한 교회로 이 교회가 살아남았습니다. 우리 교회와 협력하고 계시는 말라리아교육재단의 박종원 선교사님이 이 울툴루교회를 몇 년 전 방문하고 100여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뙤약볓 아래 천막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찬양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마음이 아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수의 두 교회와 연결이 되어서 4만 불 정도의 후원을 받아 반 년의 공사를 거친 끝에 지난 주에 완공감사봉헌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건축은 허가가 나지 않기에 도서관을 지어 주중에는 주변동네의 아이들을 도서관으로 이용케 하고 주일에만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바뀝니다. 완공은 되었는데 후원한 여수의 두 교회 목사님들이 방문할 여건이 안 되어서 무한정 미룰 수 없었는데 마침 제가 방문하니 봉헌예배를 좀 섬겨달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다른 교회가 후원한 예배당 봉헌예배를 섬기려니 염치도 없고 또 감동의 예배에 감사하기도 해서 저희 교회도 의자 100개와 모기장 200개를 봉헌감사선물로 드렸습니다. 감사하다고 살아있는 닭 한마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오늘 사택에서 이 닭을 잡아 치킨파티를 열테니 모두들 탄자니아 닭백숙 드시러 들르십시오. 
    2. 말리리아교육재단
    13일간 탄자니아와 케냐의 우리교회 두 협력선교사님의 사역지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그간 말로만 보고받던 선교지사정을 직접 보고 교우들의 정성어린 헌금과 후원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역시 눈으로 직접 보고 발로 밟는 감동은 백마디 말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두어 차례 우리 교회를 방문하고 선교보고를 해주셔서 아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탄자니아의 박종원 선교사님은 최일도 목사님이 섬기시는 다일공동체의 미주본부장으로 20년 간 저개발국가 자립지원사역을 해오신 전문가입니다. 지난 2020년 팬데믹이 시작된 직후 미주의 어느 교회 청빙을 받고 기도하시던 중 이미 5년을 섬겨오신 탄자니아로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미주에 머무시는 동안 계속 탄자니아로부터 언제 돌아와서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느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담임목사로 탄자니아를 도울 수 있는 목사는 많지만 20년의 현장경험으로 그 땅을 섬길 수 있는 사역자는 많지 않다는데까지 생각이 이르자 하나님이 당신을 탄자니아로 보내신다는 부르심을 확인하였습니다. 사하라사막 이남에서 하루 3천 명의 5살 미만 아이들이 말리라아로 죽어가는 그 땅을 구원하는 한알의 밀알이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여 Malaria Education Foundation 말라리아교육재단을 설립하고 이 땅을 위해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박종원 선교사님과 재단의 목표는 탄자니아를 중심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땅에 말라리아를 예방하는 동시에 자립교육을 통해 이슬람국가에서 탄압받는 교회와 사역자, 교인들이 자립하고 건강하고 탄탄한 교회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2020년 재단을 설립한 이래 탄자니아, 르완다, 말라위, 잠비아등 동아프리카 4개국과 네팔등 5개국에 약 4만개의 모기장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모기장을 받은 마을은 다음 해에 방문하면 평소 매년 50%에 이르던 말리리아 발생율이 거의 제로에 가깝게 떨어졌습니다. 
    3. 교회 자립지원
    말리리아예방과 더불어 MEF가 주력하는 것이 교회의 자립지원입니다. 이슬람국가에서 교회와 기독교인은 탄압받는 약자입니다. 교인은 가난하고 당연히 교회도 자립이 안 됩니다. 이들 교회의 목회자, 지도자, 일꾼들이 자립하도록 지원하는 것은 직접적 복음전파와 병행되어야 하는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음툴루교회와 같이 자립이 안 되지만 박해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교회에 도서관교회를 지어주는 것입니다. 음틀루교회는 한국교회의 후원과 교인들이 힘을 모아 예배당을 짓는 중에도 갈 곳이 없는 기독교인 젊은이들이 매주 모여들어 지금은 100여 명이던 출석교인이 300명까지 늘었습니다. 2호 도서관교회가 음툴로교회이고 3호가 말라위에서 준비 중입니다. 
    이렇게 건물이 생겨도 여전히 자립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방앗간사역입니다. 시골사람들은 쌀과 밀을 제분하기 위해 도시로 가는데 돈과 시간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시골교회 바로 옆에 5천 불 정도를 들여 방앗간을 짓고 운영케 합니다. 동네에 생기니 무슬림들도 이 방앗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방앗간 수입이 목회자 생계와 교회운영에 쓰이는 것입니다. 현재 5호 방앗간이 오픈했고 연말까지 11호가 오픈을 기다리며 공사 중입니다. 
    4. 교인 자립지원
    다음으로 교회일꾼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현지에선 오토바이 택시를 삐끼삐끼라고 합니다. 가난한 기독교인들은 오토바이택시운전을 많이 하는데 하루종일 일해도 대부분 무슬림 택시주인에게 50%에 이르는 사납금을 내고 나면 한 달 100불이 안 되는 수입이 남는데 이것으로 개스비와 점심값을 쓰면 그저 아이들이 하루 먹을 옥수수가루를 겨우 사서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10년을 일해도 입에 풀칠하는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들을 위해 MEF는 후원금으로 한 대 1,500불 정도 하는 오토바이를 구입해서 신실한 교회일꾼을 선정하여 임대를 해줍니다. 오토바이 주인에게 낼 사납금을 MEF에 내게해서 2년 정도 모으면 1,500불이 됩니다. 그러면 그 오토바이의 소유권을 그 교인에게 넘겨서 개인택시처럼 자기소유의 오토바이가 되어 수입을 온전히 모아 저축하고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재단에 모인 1,500불로는 다음 일꾼을 선정하여 또다시 오토바이를 사서 빌려주어 같은 방식으로 자립하게 돕습니다.
    이번에 저희교회도 열다섯 번째로 오토바이 한 대를 후원하였습니다. 박선교사님이 전부터 후원하고 싶어했던 피터라는 교인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두 명의 조카와 함께 알비노증을 앓는 아이를 양육하는 신실한 교인입니다. 흔히 백색증이라고 하는 알비노증을 앓는 이는 아프리카에서 아주 큰 차별을 받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합니다. 알비노인의 고기를 먹으면 병이 낫고 부자가 된다는 미신이 퍼져있어 종종 여러 사람이 알비노인을 살해하여 팔다리를 잘라 먹고 팔기도 한다는 끔찍한 뉴스가 국제란에 실리기도 합니다. 오토바이를 선물받고 감격한 피터가 거듭 성도들께 전한 감사를 제가 대신 전합니다. 
    남성교인들의 자립을 돕는 오토바이사역이 있다면 여성교인들의 자립을 돕는 미싱교육사역이 있습니다. 현재 2호학원을 오픈했고 3호를 도도마란 지역에 준비 중입니다. 현지에서 미싱기술은 상당히 고급기술입니다. 이 미싱학원에서 기술을 배우고 졸업하면 150불짜리 미싱 한 대와 150불어치 원단을 졸업선물로 줍니다. 그러면 여성교인들은 자기미싱을 가지고 독립해서 원단으로 옷이나 가방 등을 만들어 팔아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혹은 미싱학원에 소속으로 상품을 제작, 판매하거나 후배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매고 온 이 가방도 이 학원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것을 선물로 받아왔습니다. 
    탄자니아에 박선교사님처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한인선교사만 100가정이 넘습니다. 절망에 빠진 나라 곳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 일
    43 min
  • 20231105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이 / 요 17:1-16
    요 17:1-16/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이
    231105 주일설교
    1. 전쟁같은 인생 
    미국이 가장 오랜 기간 치른 전쟁은 무엇일까요? 9.11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부터 2021년 8월까지 20년간 치른 아프가니스탄 전쟁입니다. 미국 군인 110,000명이 참전해서 2,448명이 전사한 이 전쟁에는 한인의 자녀들도 약 적지않게 참여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이 전쟁에 참전한다면 그를 위해 어떤 기도를 드리시겠습니까? 당연히 먼저는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안전하게 전장에서 돌아오기를 밤낮없이 기도하시겠지요? 거기에 더해 해야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의 마음도 충격과 고통을 잘 이겨내고 건강하게 회복되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PTSD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때문입니다. 몸이 상하지 않았다고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적국과 아군이 눈 앞에서 죽어나가는 전투를 거듭하면 그 마음도 총에 맞은 몸처럼 큰 상처를 입습니다. 보통 참전군인의 5-10%가 이 증세를 앓아 심각한 우울증, 불면증, 대인기피증, 죄책감, 자살충등 등에 시달립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자녀들만 이런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전쟁터보다 별로 안전하지 못 합니다. 질병, 실직, 진학실패, 사별, 이혼, 괴롭힘, 왕따, 사기, 차별 등의 지뢰를 밟는 이들은 마음이 큰 충격을 받고 PTSD를 종종 겪습니다. 이들의 마음을 위해서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지뢰를 밟고 PTSD를 겪는 이들은 오늘 주님의 기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은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에서 설교를 마치신 후 제자들을 위해 드리신 기도의 첫 단락입니다. 4복음서는 모두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예수님의 기도를 기록하는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와 요한복음이 각각 다른 기도를 소개합니다. 먼저 앞선 세 복음서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기도를 기록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최후의만찬장에서 제자들을 위해 드리신 기도를 기록합니다. 두 기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로서 아주 짧게 기록한 반면 최후의만찬장의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로서 훨씬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왜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까? 그들은 잠시 후 그들이 상상도 못했던 충격적인 사건을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눈 앞에서 가룟 유다가 데리고온 대제사장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심문받고 십자가에 달려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묻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고 두렵고 충격을 받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이 강하지 못 하다면 마음과 믿음이 완전히 무너져내려버릴 것입니다. 바로 그들을 위해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가 주는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PTSD를 겪는 이들에게 어떤 위로를 주실까요? 
    2.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이들
    첫째 인생의 전장을 지날 때 하나님의 눈은 여러분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요 17: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세상이 아닌 제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세상이란 예수님을 거역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당신의 제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맡기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6절입니다.
    (요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아버지께 속한 사람, 아들에게 맡긴 사람을 어떻게 압니까?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눈을 그들을 주목하십니다. 입학식에 가면 더 똑똑하고 잘나고 예쁜 수백 명의 학생이 있지만 여러분의 눈은 오직 한 명에게만 향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속한 이, 당신의 자녀들을 주목하십니다. 세상에 불의가 만연하면 할수록 더욱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의의 길을 가는지를 주목하십니다. 대하 7:14을 보십시오.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세상의 운명은 악인들에 의해 흥하고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항상 세상에 있고 그들의 심판은 엄중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며 많은 이들이 악에게 넘어갈 것을 경고하시면서도 절망하는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인이 남아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항상 의인을 향하고 계십니다. 의인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세상에 악이 왜 이렇게 많은지, 불의한 이가 왜 이렇게 많은지를 보며 한탄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보시는지,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지만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뿐 아니라 세상의 운명도 여기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주목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무리 세상에 악과 거짓이 흥해도 늘 말씀을 지키며 의의 길을 감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길 축복합니다. 
    3. 성도가 바라보아야 할 것
    둘째 인생의 전장을 지날 때 여러분은 눈앞의 참상이 아닌 그 너머의 승리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참상을 마주할 제자들이 바라보아야할 영광을 기도하십니다. 본문 1-5절에서 예수님은 다섯 번이나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1절입니다. 
    (요 17:1) …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질 때가 되었으니 죽음을 이기고 부활, 승천하게 하셔서 아들이 영광을 받음으로 아버지께서 또한 영광을 받으소서’ 하는 내용입니다. ‘영화롭게 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독사조’는 영광스럽게 하다, 경의를 표하다 하는 뜻입니다. 이 영화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개선장군을 백성이 나가 환영하며 찬양하는 것과 같습니다. 월드컵 우승을 한 국가대표선수들이 시상대 위에 세우고 환호하는 것과 같습니다. 2절, 이 일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유는 자녀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3절, 이 영생은 양적으로는 영원한 삶이지만 질적으로는 하나님과 그 아들과 연합하는 영적 삶을 가리킵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절, 예수님은 이 구원을 다 이루어 아버지를 기쁘게 하셨습니다. 
    (요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절, 그러므로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머물던 영광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기도하십니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전의 육체와 다른 영적 육체로 부활하여서 영이신 하나님에게로 가도록 승천하게 하옵소서 즉 영광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겟세마네동산의 기도와 달리 최후의만찬자리에서 제자들이 다 듣도록 이 기도를 드리는 것은 제자들에게 그 영광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혹독한 시련과 크나큰 충격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시련을 이기는 길은 무엇입니까? 눈앞의 시련이 아닌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뒤에 올 부활과 승천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걱정과 두려움을 압도하는 소망과 담대함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도 롬 8장에서 권합니다.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난이 아닌 영광을 바라보라는 당부입니다. 작은 고난을 통해 주실 크나큰 성숙과 거룩함과 영광을 바라보면
    42 min
  • 20231022 세상을 이기는 믿음 / 요 16:25-33
    요 16:25-33/세상을 이기는 믿음
    231022 주일설교
    1. 성인호칭기도
    “천주의 성모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님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미카엘 천사님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천주교 장례미사 등 여러 미사에서 들을 수 있는 성인호칭기도문의 일부입니다. 천주교에서 드리는 탄원기도로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성모 마리아와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천사들이 들어가고 성 요한 등 사도들, 성 요셉 등 순교자, 사제 등이 들어가는 꽤 긴 기도문입니다. 우리 개신교인들이 좀 이해하기 힘든 기도문입니다. ‘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데 마리아나 천사, 성인, 순교자들에게 기도드리는가? 이것은 우상숭배 아닌가?’ 이에대해 천주교인들은 답하기를 ‘마리아나 천사,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다. 개신교인들도 목사에게나 동료 신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지 않는가? 우리도 먼저 하늘나라에 가있는 이들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도를 들어주소서 라고 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라고 하지 않는가?’라 합니다. 듣고보면 수긍이 갑니다만, 그럼에도 100여 명이 넘는 이들의 이름을 매번 언급하며 기도문을 낭독 하느라 이십 분이 넘게 걸리는 것을 보면 ‘과연 단순한 기도부탁이라 볼 수 있는가, 그냥 그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왜 다른 이들에게 기도부탁하느라 그 시간을 쓰는가, 그들이 가진 특별한 공로가 하나님 앞에 기도응답을 받는데 더욱 효과적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개신교인은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선조들이라도 그들에게 기도부탁을 하기 위해 시간을 이렇게 쓰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 아주 명확히 등장합니다. 
    2. 대면하는 하나님
    본문은 지난 주에 이어 예수님의 고별설교의 일부분으로 지난 주 메시지에 이어집니다. 지난 주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승천하신 후 모든 제자들에게 허락될 특별한 은혜를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어떤 제자이든지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들으심으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복입니다. 이 것은 예수님 곁에 있던 열두 제자만이 누릴 수 있던, 주님과 친밀한 관계로 묻고 들으며 구하고 응답받는 특별한 복을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제자들이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복을 제자들이 누릴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26절을 보면 승천 후 제자들이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는, 명령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제자들 대신 아버지께 구해주신다는 말씀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요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예수님이 먼저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 알았어. 잠깐 기다려.’ 하나님께 가셔서 ‘아버지, 뉴저지에 사는 김집사가 좀 살려달라는데요. 들어 주시면 안 돼요?’ 이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구조라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멀리 두고 보는 것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바로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십니다. ‘직접 말씀드려. 나의 아버지이시고 너의 아버지셔.’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아버지라 부르며 그 영광을 보고 묻고 구하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3. 친밀하신 하나님
    이 얼마나 놀라운 친밀함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가르침입니까! 세상조직의 사장, 회장, 장관, 부서장 하나를 만나려고 해도 전화통화도 어렵고 만나기는 더 어렵고 천신만고 끝에 만나도 잠깐이면 나와야 하고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만물의 창조자, 온 우주의 주인을 만나는데 낮이나 밤이나, 백악관에서나 교도소에서나, 재벌이나 홈리스나 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대고 나가기만 하면 만날 수가 있습니다. 1분이고 1시간이고 하루 종일이고 언제까지나 그 분과 머물러도 되고 밤새도록 묻고 듣고 대화해도 쫓아내지 않습니다. 속된말로 소나개나 다 창조주를 만나겠다고 나서도 예수님은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 분 앞으로 인도해 주시겠다니 이 얼마나 엄청난 진리입니까! 
    예수님 이전에 이후에도 어떤 신도, 어떤 신앙도 이런 친밀하고 가까운 신과 인간의 관계를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시대 모든 종교에서 신은 두렵고 어렵고 멀리 있었습니다. 사제나 왕족과 같은 특별한 이들만 다가갈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신에게 다가가려면 그의 호의를 받기위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고 대가를 지불해서 만족시켜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다못해 결혼식장에를 가려고 해도 예복을 입지 않으면 환영받지 못 하고, 동호회 모임 하나를 참석하려고 해도 회비를 내지 못 하면 참석이 안 되는데 하물며 신에게 가서 환영받으려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며 얼마나 큰 자격을 갖추어야 하겠습니까? 모든 종교가 이런 대가지불과 자격을 요구합니다. 그러니 감히 힘없고 자격없는 자들에게 신은 저 멀리 계시고 감히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 친히 다가오시는 목자같은 하나님,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처럼 당신이 더 애닳는 하나님, 죄인을 아들이라 부르시며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같은 하나님입니다. 아무 자격도 없이 대가지불도 할 수 없는 죄인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목자처럼, 아버지처럼 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이 직접 십자가에서 모든 대가를 대신 치러서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시고, 죄인에게 의인의 자격을 주셔서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화해시키시고 성령으로 인도하셔서 그 분 앞에서 친밀한 돌봄을 받도록 만드셨습니다. 고린도후서를 보십시오. 
    4. 화해케 하신 하나님
    (고후 5: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이 모든 화해의 역사를 누가 계획하였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복을 주십니까? 27절은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 때문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요 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제자들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을 하나님은 기쁨으로 받으셨고 동시에 그들을 친히 친밀하게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런 사랑을 누리셨고 이제 그 친밀한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신다고 2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요 16: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그리고 그 관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마리아나 천사나 성인들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처럼 누구나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며 놀랍도록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제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묻고 구하고 듣고 응답받으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는 성도에게 놀라운 기쁨을 지속적으로 선물합니다. 이런 친밀한 복을 매일 매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5. 착각하는 제자들
    그리스도인이면서 이 복을 누리지 못 하는 이들은 있다면 그보다 불쌍한 인생이 없을 것입니다. 마치 은행에 돈을 수 천억을 쌓아두고 홈리스로 사는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홈리스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만찬석상에 앉았던 당시의 제자들은 그랬습니다. 25절입니다. 
    (요 16:25) “이것을 (지금까지는)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성령님이 오실)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예수님은 이 진리를 아직 이해력이 부족한 제자들에게 비유로 가르치셔야만 했고 승천 후 성령님의 도움으로 제대로 이해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같은 이유로 마태복음 13장은 지금까지 예수님이 이런 영적 원리를 주로 비유로 가르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마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비유는 본 뜻을 이해 못 해도 쉽게 오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38 min
  • 20231015 빼앗을 수 없는 기쁨 / 요 16:16-24
    요 16:16-24/빼앗을 수 없는 기쁨
    231015 주일설교
    1. 소소한 기쁨
    공자는 논어 첫머리 ‘학이 편’에서 인생삼락 곧 인생에 세 가지 기쁨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공부, 둘째는 멀리서 찾아온 친구 그리고 셋째는 타인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저는 요즘 손주를 보는 순간의 기쁨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손주자랑하시는 교우들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그렇습니다. 최근 한 교우께서 ‘요즘 삶에 기쁜 일이 없다’고투덜대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분께 공자의 말을 전해드리면 어떨까 생각해 보니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논하는 소위 대가나 지혜의 스승들 글을 읽으면 대부분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추천합니다. ‘한결같이 부, 성공, 지위와 같이 모두가 바라나 대부분 손에 넣지 못 하는 것이 아닌,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일상에서 얻는 기쁨을 찾으라’고 권하는데그 이상의 것은 없는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뾰족한 답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는 인생을 위로할 진정한 기쁨은 어디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있다고 답합니다. 일상의 소소한 기쁨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것이 기뻐할 이유가 되고 또한 일상의 기쁨을 넘어선 압도적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그 기쁨은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지, 과연 그것이 진정 삶의 의미가 될 만한 것인지 오늘 본문이 답을줍니다.
    2. 고난을 이기는 기쁨
    요한복음 16장 중반부는 지난 주에 이어 여전히 예수님의 고별설교의 한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마주할 고난을 거뜬히 이길 수 있는 힘이 기쁨에서 나온다고 출산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요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엄마는 너무나 잘 이해하는 비유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하지만 새생명이 주는 기쁨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 고통을 잊게 만들고도 남습니다. 신앙에는 압도적이고 넉넉한 기쁨이 있어서 마주하는 온갖 고난을 이기게 만듭니다. 그 기쁨이 정확히 어디서 오는지를 20절에서 이어서 설명하십니다.
    (요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이는 바로 최후의 만찬에 이어 벌어질 예수님의 체포, 고문, 십자가 처형사건을 마주할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놀라고 충격을 받고 울고 애통하지만 대제사장 무리는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않아 제자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사건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이 무엇일까요? 22절입니다.
    (요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만나실 때 제자들은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은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기쁨이야말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압도적인 기쁨입니다.
    3. 빼앗을 수 없는 기쁨
    주님의 부활이 압도적인 기쁨이 되는 이유는 부활이 예수님의 모든 메시지가 진리임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선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제자들은 참 길과 진리와 생명을 만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을 받았고 근심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고 예수님을 통해 영생과 부활의 소망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실 때 그의 누이인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지금 당하는 이깟 고난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그 부활과 영생의 소망 앞에 다 사소하고 부질없는 근심거리일 뿐입니다. 1000억불 로또를 맞았는데 100불 교통티켓이 다 무엇입니까? 그 천 억불 로또보다 더 큰 것이 이 부활의 기쁨입니다. 천 억불 로또 맞아봐야 다 쓰지도 못 하고 죽을터이고, 그 돈 때문에 자식들이 원수되고 망할지도 모르는데 기쁘기만 할 것입니까? 하지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은 빼앗을 수가 없는 압도적 기쁨입니다.
    작은 기쁨은 쉽게 빼앗습니다. 맛있는 식사가 주는 기쁨은 형편없는 서비스 때문에 금방 빼앗깁니다. 하지만 건강하고 예쁜 손주를 얻은 기쁨은 쉽게 빼앗길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부활과 영생의 소망은 영원히 빼앗길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이런 압도적인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2차 전도여행 중 사도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일거리를 뺏겼다 여기는 점집사장들에게 고소를 당해 모욕을 당하고 옷을 벌거벗기운 채 많이 매질을 당하고 마침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땅굴에 족쇄를 채운 채 던져졌습니다. 춥고 배고픈 채 벌레와 쥐떼가 들끓는 지저분한 곳에 기약도 없이 억울하게 갇혀 있으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아마 울고 절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까요?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들 마음에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3장을 보면 1차 전도여행 중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이 그 지역 유지들을 선동해 바울 일행을 박해하고 그 지역에서 쫓아냈습니다. 이 역시 얼마나 불쾌하고 모욕적인 일입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게 그 곳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전도하러 갔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들 마음에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에게는 이런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성령님이 주십니다. 이것은 어떤 고난이나 위협이나 비방도 빼앗을 수 없는 압도적인 기쁨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바울과 실라는 이 기쁨 때문에 선교사로 순종하였고 이런 기쁨 때문에 고난도 거뜬히 이겨냈습니다. 이런 기쁨이야말로 예수믿는 기독교인에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런 기쁨이 없는 삶은얼마나 불행한지 모릅니다.
    미국과 한국에 마약이 이렇게 문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홈리스야 아무 기쁜 일이 없어서 그렇다지만 돈도 잘 벌고 성공한 사람들도 적지않게 마약을 한답니다. 왜입니까? 제 생각에는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 기쁨을 아는 사람은 유사품에 유혹받지 않습니다. 참 기쁨을 아는 사람은 헛된 부귀영화를 쥐려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참 기쁨을 아는 사람은 헛된 욕심과 죄악과 시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런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요,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 하고 이 기쁨을 모르고 사는 이는 불행합니다. 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 넘치지시를 축복합니다.
    4. 영원히 샘솟는 기쁨
    그러나 마귀는 성도가 이 기쁨을 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 기쁨을 뺏으려 합니다. 어떻게든 빼앗기 위해 고난과 유혹으로 흔듭니다. 유사품에 맛을 들여서 진짜 기쁨을 잊어버리도록 만듭니다. 기쁨을 줄 것처럼 돈, 쾌락, 성공, 지위, 인기로 유혹하여 헛된 것을 좇게 만듭니다. 이 전략은 상당히 효과적이어서 많은 성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기쁨을 잊고 살아갑니다. 이런 위협을 잘 아셨기에 주님은 성도가 다시 기쁨을 회복할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쁨을 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3절 전반부입니다.
    (요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구하지) 아니하리라…
    그 날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이 땅에 더 이상 계시지 않은 때입니다. 이 때에는 육체로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기에 그 어떤 것도 묻거나 구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에게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곁에 있던 열두 제자 뿐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제자가 예수님 바로 곁에 있는 것같은 은혜를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예수님이이 땅에 계실 때 그 분 곁에 늘 머무르고 그
    43 min
  • 20231008 어둠을 밝히기 / 요 16:1-15
    요 16:1-15/무지와의 전쟁
    231008 주일설교
    1. 계몽과 계시
    여러분이 인도를 여행하시다가 달리트계급 곧 불가촉천민을 만났다고 하십시다. 가장 낮은 계급 수드라 중에서도 가장 천해서 낮에는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 하도록 집에서만 지내다가 밤이 되면 나와서 화장실을 치우거나 다른 이들의 빨래를 해주고 해가 뜨기 전에 자기네 동네로 사라져야 하는 이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자녀들이 미국에서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격분하시겠지요? 사람이 이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겠지요? 많은 인도인은 크게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데 여러분은 왜 분개하십니까? 계몽되었기 때문입니다.
    계몽이란 무지를 일깨우다는 뜻입니다. 18세기 유럽에서 계몽주의라는 사고방식이 생겼습니다. 물론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고 16세기 르네상스운동, 17세기 과학혁명의 열매로 인간의 이성이 꾸준히 발전해 온 결과입니다. 그 때부터 서구인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이성과 합리성에 기초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계몽된 인간은 모든 인간은 신이 주신 존엄함을타고 났다는 믿음 위에 정치, 종교, 사회, 경제 등 모든 생활에서의 자유와 평등, 사회계약 등의 가치를 세우고 인간의 삶을 재설계했습니다. 오늘날 서구선진국의 삶의 모습은 그렇기에 전근대적 그것과 크게 다릅니다. 무지와의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계몽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힌두교의 신분제, 이슬람의 여성차별을 포함해 서구사회에도 남아있는 모든 인종주의, 계급주의, 성차별, 장애인차별 등에 반대합니다.
    200년 전 계몽의 시대가 있었던 것처럼 2000년 전에는 계시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계시란 진리를 드러내 보인다는 뜻입니다. 이 때는 지적 어둠이 아닌 영적 어둠으로부터 해방된 시대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완성하신 때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율법과 선지서를 통해 조금씩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보이시던 하나님은 육신으로 오신 말씀 예수님을 통해 계시를 완성하셨습니다. 히브리서가 그 계시의 완성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마지막 날은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 지금까지의 시대 곧 신약시대를 가리킵니다. 아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으로 모든 계시의 말씀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계시의 완성이 묘사되는 장면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2. 계시의 완성
    오랜만에 요한복음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지난 3월에 요한복음 15장까지를 설교하고 반 년만에 돌아와 16장을 시작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설교의 일부분입니다. 분위기는 몹시 무겁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지만 거듭 자신들을 떠나 가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표정과 어조, 몸짓에 비장함이 흐르는 것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막연히 근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실 때 제자들이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 때 믿음을 잃지 않도록 예수님은 예방주사를 1절에서 놓아주셨습니다.
    (요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제자들은 예수님과 자신들을 향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적대감을 마주할 때 몹시 놀라고 두렵고 혼란스러워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도자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대리한다고 믿어온 이들이고 또 다름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제자들을 핍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요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런 일을 당할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두렵고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실 박해자들이 무지의 어둠에 갇혀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3절입니다.
    (요 16: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또한 제자들 역시 무지때문에 근심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십니다. 6절입니다.
    (요 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때가 되어 그들의 무지를 깨우칠 분 성령님이 오시고 이것이야말로 제자들을 어둠에서 해방하여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복이 될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그 때는 오순절을 가리킵니다.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로 인도되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난 제자들은 근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진리를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로 그 계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 기록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인류가 역사와 철학과 과학을 통해 지적 무지로부터 벗어나듯 성도는 성경을 통해 영적 무지로부터 벗어납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성도가 완성된 계시인 성경을 통해 진리를 깨달으면 모든 근심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 진리의 성령님
    성령님이 계시하신다는 그 진리란 무엇입니까? 8절을 보면 그것은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한 진리입니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는 모두 법정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성령님은 재판장이 되셔서 세상을 재판하시고 판결하십니다. 9절을 보면 먼저 세상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그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으니 죽어마땅한 죄를 지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진짜 죄는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죄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죽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뱀의 말을 믿은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죄 역시 하나님을 믿지 않고 탐욕과 거짓에 귀기울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무엇이 진짜 의인가를 설명하십니다. 10절을 보면 의로운 분은 오직 한 분 죽음에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세 번째로 11절을 보면 이 세상 임금 마귀는 이미 멸망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가 아직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사형수가 사형판결날까지 살아서 악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마귀)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이 모든 성령님의 계시를 정리하면 제자들이 박해받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종이기에 마귀의 종으로부터 받는 의로운 고난이며,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로 인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이를 깨달으면 제자들은 더 이상 근심하지 않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님의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기쁨과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근심, 걱정 가운데 살아갑니까? 그 모든 근심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르면 두렵습니다. 알면 편안합니다. 진리를 알면 인생이 두렵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진리를 계시하셔서 성도들을 근심, 걱정,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시고 충만한 기쁨과 담대함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 모든 근심, 걱정,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성령님의 계시를 들어야합니다. 성령님은 어떤 진리로 우리를 깨우치십니까?
    4. 고난의 의미를 깨닫도록
    첫째는 고난의 의미를 깨우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불행과 실패, 재수없음, 억울함, 기가막힘, 괴로움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은 고난과 실패와 고통마저도 유익하게 사용하십니다. 성령님의 계시로 이 진리를 깨달은 시인은 노래합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
    39 min
  • 20230924 당신을 위한 고엘 / 룻 4:1-12
    룻기 4:1-12/당신을 위한 고엘
    230924 주일설교
    1. 땅을 주시는 하나님
    3주만에 룻기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룻기의 하일라이트로 기업무를 것을 약속한 보아스가 실제로 기업무르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먼저 기업무르기의 배경을 잠깐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으로 모세의 인도를 받아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땅에 정복하였습니다. 이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누가 토지를 차지할 것인가였습니다. 그 답은, 하나님이 명하신 제비뽑기를 통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토지를 받는다였습니다. 제비뽑아 전체 가나안땅을 열두 등분해 열두 지파에게 나누어주고 각 지파는 그 땅을 다시 제비뽑아 각 가문별로 나누었습니다. 고대의 농사는 개인이 짓기에 너무 힘겨운 노동이었기에 가문 전체가 협동할 수밖에 없었고 토지를 가문별로 분배하여 소유케 한 것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은 모든 백성이 단 한 사람도 예외없이 자신이 속한 가문을 통해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이가 없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이상사회로 출발했습니다. 모든 국가가 소수의 부유한 지배층과 다수의 빈곤한 피지배층으로 나뉘었던 고대왕국과 비교할 때 이스라엘은 놀랍도록 평등하고 발전하는 사회의 기초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이런 평등한 토지소유구조는 공동체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한 핵심요소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이런 복되고 부강한 나라에서 살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2. 모든 땅의 주인
    고대국가와 근대국가까지 이상사회를 꿈꾸는 사회치고 이스라엘만큼 평등하지는 못 했지만 토지개혁을 통해 민중의 지지를 얻으려 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한반도만 해도 삼국시대가 그랬고 조선이 그랬고 해방직후 남한과 북한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자들의 토지독점이 시작되며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이런 위협에 직면할 것이 틀림없었기에 하나님은 평등한 토지소유구조를 깨뜨리지 못 하도록 안전장치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토지소유권과 희년이었습니다.
    먼저 토지를 하나님의 소유라고 선언하셔서 모든 땅주인은 사실 임대인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토지의 소유구조, 사용방식 등을 모두 참소유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토지가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임대인인 이스라엘 백성은 그 토지를 팔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투자를 위해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야 한다든지 혹은 빚을 못 갚아 땅을 빼앗긴다든지, 가족이 먼 땅으로 떠나서 토지를 관리할 수 없다든지 하는 상황이 생기기에 이럴 때는 타인에게 임대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즉 돈을 받고 땅을 넘기더라도 이는 판매한 것이 아니며 임대한 것이고, 이는 희년을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5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쥬빌리 곧 희년이 돌아오면 임대기간이 끝나서 원래 주인에게 아무 조건없이 돌아오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임대할 때 받는 돈은 희년이 돌아오기까지 남은 햇수를 땅의 사용가치에 곱한 금액이었습니다. 50년 주기로 돌아오는 희년까지 20년이 남았고 이 땅을 경작해서 거둘 수 있는 수익이 연 만 불 정도라면 20만 불을 받고 넘기는 것입니다. 30년이 남았다면 30만 불을 받는 식입니다.
    3. 은혜로운 희년
    50년마다 희년을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느 사회든 인구는 늘기마련이지만 땅은 늘지 않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땅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한 번 판매한 땅이 영원히 구매자의 소유로 남으면 그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땅을 잃어버린 집안은 갈수록 비싸지는 땅을 되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결국 빈익빈 부익부으로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사회적 갈등과 분노가 점점 커집니다. 이를 제어하지 못 하면 요즘 문제가 되는 묻지마폭행, 묻지마살인이 등장합니다. 도무지 탈출할 수 없는 빈곤의 늪에 갇힌 이들이 사회를 향한 분노를 무작위로 누군가에게 쏟아놓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에서 제어하지 못 하면 분노가 집단화되면서 시위, 폭동, 반란, 혁명, 전쟁 등으로 기존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이런 양극화와 사회붕괴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놀라운 제도가 바로 희년입니다. 50년 약 1.5세대마다 찾아오는 희년으로 토지의 독점이 제어되어 불평등이 해결되고 분노의 김이 빠집니다. 희년 문자 그대로 기쁠 희자를 써서 기쁨의 해입니다. 노예된 신분이 자유민으로 해방되고 잃었던 가문의 토지를 되찾으니 얼마나 기쁜 해입니까? 당연히 모든 가문이 자신들의 토지를 소유함으로 소수에게 독점될 때보다 생산력이 올라가고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는 의욕도 크게 높아져서 지속적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하나님은 토지제도와 희년제도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탐욕과 폭력으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얼마나 지혜롭고 세심한 돌봄의 손길인지요!
    4. 재기의 기회 고엘
    물론 희년만으로 복지의 구멍을 모두 메울 수는 없었습니다. 땅을 잃은 가족은 희년이 될 때까지 남은 기간 빈곤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을 위한 구제책이 바로 오늘의 주제 기업무르기입니다. 룻기는 여호수아시대에 바로 이어지는 사사시대에 벌어진 일입니다. 사사기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흉악한 죄악이 얼마나 벌어졌는지를 고발합니다. 그러나 그런 암흑기에도 하나님의 법을 좇아 살아가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룻기는 증언합니다.
    보아스는 3장에서 룻에게 약속한 대로 기업을 무르기 위해 4장에서 성문 앞에서 장로들을 청하고 자신보다 나오미와 더 가까운 친척을 만납니다. 가까운 친척이 우선 기업무를 권리와 의무를 져야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은 재판정의 역할을 했습니다. 나오미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은 십년 전 흉년을 피해 가족과 함께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할 때 땅을 누군가에 팔았을 것입니다. 그는 땅 판 돈을 들고 모압에서 흉년도 피하고 돈도 불려서 고향으로 돌아와 그 땅을 스스로 다시 사들일 즉 무를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치못하게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이국땅에서 죽고 들고간 돈도 바닥나 그의 아내와 작은 며느리만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극빈층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던 나오미에게 룻을 통해 기업무름이란 소망이 생겼습니다. 부유한 친척 보아스가 나오미 집안의 땅을 물러준다면 빈곤에서 벗어날 것이요, 만약 며느리 룻과 결혼해 아들을 낳아준다면 가문도 다시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5. 고엘의 희생
    3-4절에서 보아스는 자신보다 더 나오미에게 가까운 천척에게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의사가 있는지 묻습니다. 1절은 그를 아무개라고 부르니 우리도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룻 4: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무를 권리를) 팔려 하므로 (룻 4: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3절의 판다는 뜻은 죽은 엘리멜렉이 판 땅을 나오미가 다시 물러 되찾아올 힘이 없으니 그 무를 권리를 가장 가까운 친척인 당신에게 맡기려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개는 그 권리를 위임받아 엘리멜렉의 땅을 무르겠다고 답합니다. 그의 생각에 이는 엄청난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되사는데 적지않은 돈이 들겠지만 그 땅을 돌려받을 엘리멜렉이 죽고 없으니 고스란히 아무개의 것이 됩니다. 보통 남의 땅을 돈주고 임대해도 희년이면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데 무를 권리를 얻어 그 땅을 사면 엘리멜렉이 죽고 없으니 돌려줄 필요 없이 영원히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껏해야 나이든 나오미가 죽을 때까지 돌보는 것 정도가 추가부담일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큰 이득입니까? 그러자 보아스가 5-6절에서 그 권리에 큰 의무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그의 입장이 갑자기 바뀝니다.
    (룻 4: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룻 4: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43 min
  • 20230917 동굴밖으로 부르시는 음성 / 왕상 19:1-18
    왕상 19:1-18/동굴밖으로 부르시는 음성
    230917 주일설교
    1. 마음의 감기 우울증
    존경받는 목회자인 한국의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은 오랫동안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아왔고 지금도 약을 복용한다고 밝혔습니다. 우울증, 불안증, 공황장애 등의 신경증을 앓는 것은 기독교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 때 이를 믿음의 부족, 의지력 부족 등으로 여겨 부끄러워하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신경증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이었습니다. 모세, 다윗, 예레미야 등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 그리고 마틴 루터와 존 웨슬리, 데이빗 브레이너드 등 교회사에 족적을 남긴 많은 이가 우울증으로 고생했습니다.
    우울증을 흔히 마음의 감기라고 합니다. 감기를 누구나 걸리는 것처럼 우울감도 누구나 겪을 수 있습니다. 감기를 잘못 다루면 폐렴으로 발전하듯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우울감을 잘 다루지 못 하면 우울증으로 심해집니다. 체력이 크게 떨어진 이에게 폐렴은 생명을 위협하듯 마음의 체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에서 우울증은 생명을 위협합니다. 그러므로 우울감이 찾아올 때 이를 잘 다루어 우울증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예방해야 하고, 우울증으로 발전했다면 적절한 치료와 관리를 통해 이로부터 신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우울증은 적절한 의료적 지원과 자기관리를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 한국인은 무척 취약합니다. 한국인은 OECD국가 중 우울증 유병률 1위입니다. 반면 치료율은 OECD 꼴찌입니다. 미국인은 우울증 치료율이 66%에 달하는데 한국인은 11%밖에 안 됩니다. 여기에는 우울증을 숨기거나 병원을 찾지 않는 한국인의 태도가 큰 몫을 차지합니다.
    아마 우울감으로 고생해 보지 않은 분은 한 분도 없으실 것입니다. 일부는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이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없습니다. 우울감의 원인인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때로 스트레스 대응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 요인을 극복하기 위해 약물치료도 이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수시로 찾아오는 우울감을 다스리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극심한 우울증 환자였던 엘리야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지혜를 배우고자 합니다.
    2. 우울증환자 엘리야
    본문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보여줍니다. 이세벨의 살해위협을 들은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스라엘 북쪽 이스르엘 평원에서부터 남쪽 경계 네게브 광야까지 도망칩니다.
    (왕상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종과 떨어져 홀로 있으려고 광야로 가서는 자살충동을 느낍니다.
    (왕상 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서 쓰러져 자고 천사가 거듭 먹을 것을 주자 먹고 또 쓰러져 잡니다. 9절 이하를 보면 호렙산으로 이동한 후에도 굴에 들어가 나오지 않으려 합니다.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몸과 마음이 완전히 burn out 탈진상태입니다. 그의 우울증, 자살충동, 탈진과 무기력증은 어디에서 기인합니까? 그의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되어버린 것 때문입니다. 앞선 18장을 보면 그는 여호와의 명령으로 목숨을 걸고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인과 하루종일 대결하고 마침내 승리하였습니다. 이 위대한 승리로 그는 아합이 회개하든지 혹은 이스라엘의 영적 기류가 완전히 바뀌리라 기대했습니다. 아마 자신의 3년 반의 도망자생활도 끝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19장 1-2절을 보면 아합은 여전히 두로의 공주이자 바알의 선지자인 아내 이세벨의 손아귀에 잡혀 있고 그녀는 기세등등하여 엘리야를 잡아죽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기대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목숨을 건 싸움과 승리가 모두 허사가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그는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했습니다. 극심한 우울감이 몰려와 그를 무너뜨렸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역시 인간입니다. 총맞고 멀쩡한 사람이 없듯이 이런 위협과 저주, 무력감 앞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쓰러져버린 엘리야를 하나님은 그럼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끈질기게 엘리야의 곁에서 그를 도와 우울증의 굴을 빠져나와 다시 일어서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쓰신 그 방법을 지금부터 살펴봅니다.
    3. 잘 먹이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첫 번째로 잘 먹이셔서 체력을 회복케 하십니다. 5-8절을 보면 하나님은 거듭거듭 탈진해 쓰러진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구운 떡과 물을 주셔서 먹고 몸을 회복시키십니다.
    (왕상 19: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엘리야가 탈진한 19장에서 처음 등장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천사를 통해 하신 ‘일어나서 먹으라’였습니다. 하나님은 잘 먹이시는 분입니다. 왜일까요? 모든 정신과의사가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우리의 정신은 육체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약해지면 우울감은 더 쉽게 찾아오고 더 오래 머물고 더 자주 다시 찾아옵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맛있는 것을 먹고 푹 자고 잘 쉬고 운동을 시작하고 즐거운 놀이를 많이 하라고 강력하게 권합니다. 몸을 강하고 튼튼하게 하면 마음도 덩달아 유쾌하고 여유가 생겨 우울감과 싸울 힘을 얻습니다.
    (왕상 19: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18장에서 850명의 바알제사장을 홀로 물리친 엘리야가 19장에서 이세벨의 협박 한 번에 주저앉아 버린 것은 그의 약해진 체력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3년 반 동안 그를 죽이려는 아합의 추격대를 피해 그릿시냇가 등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을 먹으며 지냈던 그의 몸은 당연히 무척 약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몸으로 아합 앞에 나타나고 갈멜산 정상까지 걸어올라 하루 종일 그들과 대결하고 비구름이 오기까지 일곱 번을 머리를 무릎에 넣고 간절히 기도하는 등 그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긴장해 있었을까요? 거기에다 이스라엘의 북쪽 이스르엘 평원에서 남쪽 네게브 광야까지 며칠을 도망치느라 또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천사가 가져다준 음식을 먹고도 거듭 쓰러져 잘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왕상 19: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그래서 주님은 거듭거듭 천사를 통해 그를 먹고 마시고 자도록 하십니다. 그의 체력이 회복되어야 마음도 회복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지혜로 엘리야는 마침내 체력을 회복하여 네게브광야를 떠나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율법을 받았던 곳 호렙산에 이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왕상 19: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탈진했던 그가 40일을 광야를 지나 호렙까지 이르게 한 힘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먹고 마시고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서라고 강조합니다. 음식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건강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니까 몸은 아무래도 괜찮다 하면 안 됩니다. 몸을 무시하는 풍조는 그리스철학의 이원론에서 온 것으로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한 때 한국에선 운전이 서툰 여자를 보고, 집에서 솥뚜껑이나 운전하지 왜 도로에 나와 민폐를 끼치느냐고 조롱하곤 했습니다. 얼마나 무식한 말인지 모릅니다. 솥뚜껑 운전이야말로 인류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까? 밥 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맛있는 밥을 먹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습니까? 자녀를 맛있게 배불리 먹이는 것만큼 부모에게 큰 기쁨이 있습니까? 가정의 식사를 담당하는 엄마들을 늘 존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배불리 먹이시는 분이십니다.
    4. 동굴 밖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두 번째로 어두운 굴에 갇힌 이를 빛으로 불러내십니다. 천사를 보내어 탈진한 엘리야를 잘 먹이고 회
    47 min
  • 20230910 와서 보라 / 요 1:43-51
    요 1:43-51/와서 보라
    230910 주일설교 변증
    1. 성혈과 성배
    최근 한 교우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영국에서 출간된 ‘성혈과 성배’라는 책과 BBC 다큐멘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않고 프랑스로 이주해서 살았다’는 내용을 증명했다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구글링을 해보니까 여러 개인블로그에서 복사-붙이기를 한 듯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었습니다.
    1. 1982년 ‘성혈과 성배’란 책이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2. 이 책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으며 프랑스로 이주해 살았음’을 증명했다.
    3. BBC 등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책의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4. 재판이 열려서 이 책이 진실임을 판결하자 충격을 받은 영국 기독교인 80%가 신앙을 버렸다.
    이 교우의 질문에 답을 설교시간에 하는 이유는 다빈치코드 등 이와 유사한 류의 기독교신앙에 도전하는 거짓이 너무나 많이 퍼져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을 판단하는 과정을 이해하시면 다른 주장에 대해서도 당황하지 않고 쉽게 답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일단 공부가 업이 아닌 대부분의 교인은 이런 주장을 접할 때 진위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활자화되거나 방송에 나오거나 누군가 진지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권위가 있는 듯 쉽게 착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혹은 흔들릴까봐 아예 부정하거나 외면합니다. 모두 적절한 반응이 아닙니다.
    2. 진실에 다가가기
    이런 류의 주장의 진실여부를 확인하는 첫 번째 방법은 이 책을 가지고 직접 연구를 하여 진위를 밝히는 것입니다만 우리 대부분은 그럴 여건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으로, 이 책을 연구한 권위있는 전문가 곧 역사학자, 신화학자, 고고학자 등의 연구서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쏟아지는 이슈들마다 그들의 책을 다 읽을 여유 역시 안 됩니다. 그럴 때는 세 번째로 이들의 연구성과를 정리한 공신력있는 인용사이트를 참고하는 것입니다. 이 때 당연히 아무런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라고 합니다’라는 식의 개인블러그는 배제해야 합니다. 대표적인 카더라통신, 유언비어통신, 아니면말고통신, 믿고싶은대로통신입니다. 이럴 때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신력있는 사이트가 위키피디아와 같은 온라인사전입니다. 이런 사전을 그래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출처가 된 책, 기사, 자료를 잘 소개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빠 죽겠는데 언제 위키피디아 뒤져봅니까? 그럴 때 쓸 수 있는 네 번째 방법은 그래도 이런 자료를 좀 다루어본 주변의 목사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교우는 네 번째 카드를 아주 잘 쓰셔서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 번째 방법을 써서 답변을 해드립니다. 위키피디아에서 성혈과 성배(The Holy Blood and the Holy Grail)을 검색하시면 32권의 참고자료를 인용목록에 올려놓고 자세한 해설과 비평을 해두었습니다. 그 비평을 근거로 팩트첵크를 해 봅니다.
    3. 모래성 같은 거짓
    1번, 진실입니다. 이 책이 이 때 출판된 것을 부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2번, 거짓입니다. 이 책의 주장은 증명되지 못 했습니다. 과학적 주장은 과학자들의 검증에 의해 증명되거나 부정되고 혹은 잠정적 지지를 받듯이 역사적 주장은 역사학자들의 비평에 의해 그 설득력을 인정받거나 부정당하거나 혹은 보류됩니다. 여러 개인블로그가 책의 내용을 아무런 비평없이 그대로 옮겨놓고 ‘증명’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위키피디아는 관련분야 전문학자들의 자료를 인용하며 이렇게 언급합니다.
    ‘이 책에 대한 전문역사가와 관련분야학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그들은 이 책이 근거라고 제시한 주장, 고대의 미스터리, 음모론은 대부분이 유사역사적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유사역사적이란 표현은 역사적 사실인 척 하지만 역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3번, 거짓입니다. BBC 등이 이 책의 주장을 증명한 적이 없습니다. 위키피디아의 언급입니다.
    ‘성혈과 성배의 주장은 몇 년 동안 많은 조사와 비평의 소재가 되었다. 60 Minutes, Channel 4, Discovery Channel, Time Magazine 그리고 BBC 등 많은 독립조사기관은 이 책의 주장이 신뢰할 수 없거나 검증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BBC 등이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것 외에는 거짓입니다.
    4번, 거짓입니다. 이 책의 진위를 판단하는 재판이 열린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이 책이 진실이라는 판결도 내린 적도 없습니다. 일단 상식적으로 역사책의 진실여부를 학계가 아닌 사법부가 판단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 재판이 열렸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와 관련한 재판은 2003년 출판한 책 다빈치코드가 이 책을 표절했다고 그 저자가 제기한 소송 뿐입니다. 소설가들의 표절소송이 뜬금없이 예수님의 죽음 증명재판으로 둔갑하더니 중학생이 쓴 것 같은 신파소설이 등장합니다. ‘쩔쩔매던 판사가 자신도 3대 기독교집안에서 자랐지만 이 책의 주장이 사실임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양심선언을 했으며 ‘충격을 받은 영국인 80%가 기독교신앙을 버렸다’는 식입니다. 위키피디아에서는 언급조차 없으며 복사-붙여넣기를 한 것 같은 몇몇 블러그를 제외하고는 어디서도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소설입니다.
    4. 나사렛에서 무슨
    이렇게 진실을 찾는 것은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시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을 좇는 제자라면 당연히 결코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한다는 말씀은 역으로 무지가 우리를 노예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진실에 관심이 없거나 진실을 외면하면 우리의 무지를 이용하여 죄와 악이 우리를 노예로 삼습니다. 보이스피싱에 대해 무지하다고 가정합시다. 우리의 피땀흘린 재산을 눈뜨고 코베이듯 다 빼앗기지 않겠습니까? 거짓과 모략에 대해 무지하다면 우리의 생각과 판단력을 빼앗기고 더 나아가 영혼과 생명까지 빼앗깁니다.
    앞서 소개한 책 외에도 온갖 거짓이 우리를 속이고 영혼을 빼앗으려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첫째는 신중하고 열린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며 전도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46절 전반부에서 이렇게 반응합니다.
    (요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나다나엘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이 메시야일 수 없다고 결론내립니까? 예수님의 출신지인 나사렛에 대한 편견입니다.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릴만큼 이방인이 많아서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던 갈릴리 지역에서도 구석진 곳의 조그만 산골마을 나사렛에서 어떻게 위대한 메시야가 나느냐? 편견과 선입견은 진실의 실체를 접하지 않은 채 내리는 섣부른 판단입니다. 당연히 오류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편견과 선입견을 이용해서 광고주들은 물건을 비싸게 팔고 사기꾼은 돈을 훔쳐가고 독재자들은 지지자들을 만들어내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거짓에 속아넘어가면 돈이나 기회나 자유를 잃고 자칫 공의와 믿음과 영생까지 잃습니다.
    종종 성경을 폄하하고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단편적인 정보, 이미지, 경험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 많이 들어보았다고 해서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매일 차를 몰지만 차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타이어 하나 갈 수 있으세요? 엔진오일 하나 교체할 수 있습니까? 교회에서 실망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교회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 있습니까? 부정직한 의사를 만났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아프면 병원 안 가고 의사를 다 없애야 합니까? 한두 명의 사례로 전체 의료시스템을 판단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스 철학에서 진리에 다가가고자 하는 이는 가장 먼저 epoch 곧 판단중지를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진실을 가리지 못 하도록 섣불리 결론내리지 말고 열린 마음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섣부른 판단을 멈추고 열린 마음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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