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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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pisodes

  • 20231231 식은 땀이 흐르는 질문 / 창 22:1-19
    창 22:1-19/식은 땀이 흐르는 질문
    231231 주일설교
    1. 진실한 사랑에의 갈망
    이런 질문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자기는 내가 더 이상 젊고 예쁘지 않아도 여전히 나를 사랑할거야? 여보, 내가 더 이상 돈을 못 벌어도 여전히 나를 사랑할거야? 들어보셨죠? 식은 땀이 흐르진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답하셨던가요? 솔직한 답을 원해, 기분좋은 답을 원해? 설마 이렇게 답하진 않으셨겠죠.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 도대체 이 인간은 왜 이러는 걸까? 이런 질문을 왜 하는 것일까? 오늘 설교는 이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진실한 사랑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하듯 영혼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진실한 사랑을 받을 영혼을 만족하고 행복합니다. 진실하지 않는 사랑은 받아도 공허하고 불안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끊임없이 그 사랑이 진실한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갈망때문에 인기를 끄는 대중문화컨텐츠가 미녀과 야수, 개구리왕자 같은 동화와 이를 다양하게 변주한 이야기입니다. 야수나 개구리처럼 흉측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한 소녀가 진실하게 그를 사랑했는데 그 사랑의 힘으로 마법을 풀려서 보니 그가 왕자더라, 말괄양이 말단사원인 소녀가 찌질한 동기를 사랑했는데 알고봤더니 재벌3세 본부장님이더라, 이런 이야기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흉칙한 외모같은 조건을 뛰어넘는 진실한 사랑은 왕자와의 결혼과 같은 큰 보상이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이런 조건없는 진실한 사랑에 우리는 목마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실한 사랑을 확인하고픈 갈망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누구에게 있을까요? 우주 최고의 로맨티스트이신 하나님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자녀들의 사랑과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이 바로 성경 욥기의 주제입니다.
    2. 고난의 의미
    최근 새벽기도에서 오래 묵상한 욥기는 우리가 겪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지난 성탄절 새벽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난 화재로 4층의 젊은 부부가 두 살, 일곱 달 된 아기를 각각 품에 안고 살리려고 자신의 몸을 쿠션삼아 뛰어내렸는데 두 아이는 모두 살렸고 아내도 크게 다치고도 목숨은 건졌지만 아빠는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내 친구가 연락이 와서 그 아빠가 자신의 가까운 학교후배라는 것입니다. 뉴스를 찾아보니 그 부부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고 교인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 부부가 죄가 있다면 얼마나 있다고 이런 참혹한 일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이미 4천 년 전 욥도 던졌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던져왔습니다. 욥은 아무 이유도 없이 하루 아침에 전재산을 잃고 자녀들 모두 잃더니 마침내 자신의 건강과 아내와의 관계까지 잃고 신음합니다. 그를 찾아온 세 친구는 욥과 더불어 이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의 의미를 놓고 씨름합니다. 이들은 모두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이해를 가졌기에 세 친구는 욥에게 숨겨진 죄가 없는지 찾아보라고 비난하고 욥은 숨겨진 죄가 없으니 하나님이 잘못 심판하신 것이라고 항변합니다. 그에 비해 또다른 등장인물 엘리후는 또다른 고난의 의미를 제시하는데, 죄가 없어도 연단과 훈련 등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실 수 있다는 한단계 성숙한, 진일보한 관점입니다. 그런데 사실 욥기는 시작하면서부터 이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들이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 한 다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고난이 욥의 믿음을 시험하는 테스트라는 것입니다.
    욥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먼저 욥의 믿음을 자랑하시자, 사탄이 그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이유는 복을 많이 주셨기 때문이기에 그 복을 거두어 가시면 그가 믿음을 버릴 것이라고 도발합니다. 곧 욥의 믿음은 조건적인 것이기에 진실하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욥의 믿음이 진실함을 보여주시려 사탄이 욥을 괴롭히도록 허락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과 사탄 그리고 온우주가 지켜보는 가운데 욥의 믿음이 진실한지를 놓고 내기가 벌어집니다. 고난의 의미는 바로 믿음의 시험입니다.
    3. 믿음의 시험
    하나님이 고난을 참믿음을 확인하는 시험도구로 쓰신다는 사실은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하십니다. 욥보다 아브라함이 더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니, 이방우상들이나 요구하는 아들을 바치는 제사를 의로우신 하나님이 요구하시다니요! 거기다 그럴거면 애초에 왜 100세나 되어서 아들을 주신단 말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그제서야 하나님은 칼을 드는 아브라함을 막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동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확인코자 함이었습니다.
    순간 우리는 당황합니다. 아니, 이 말도안되는 요구가 고작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기에 이런 상황까지 연출하시면서 시험하셔야 하는 거야?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얼마나 화가 났겠어? 진짜 아들을 바치라는 줄 알았을 것 아니야? 이런 생각 안 해보셨나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새디스트가 아니냐고 비난합니다. 고작 믿음을 확인하자고 욥에게 그런 고난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그런 상황에 몰아넣으시다니요, 욥도 아브라함도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4.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이 이러시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으신가요? 길에서 스쳐지나가는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분 계십니까? 오직 여러분이 사랑하는 그 사람, 그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저 썸타는 사람의 마음과 보고싶어 밤낮으로 못견디게 짝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중 누구를 더 확인하고 싶으십니까? 당연히 더 사랑하는 사람이겠지요?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은 ‘네 아들을 바칠 만큼 나를 사랑하느냐’는 도전인 동시에 ‘나는 내 아들을 너에게 줄 만큼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만 확인하시고 가장 소중한 아들을 빼앗지 않으셨지만 하나님 당신은 가장 소중한 아들을 아브라함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버리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천사가 이삭을 잡으려는 아브라함의 팔을 잡았지만 예수님을 매어다시는 하나님의 팔을 도저히 잡지 못 했습니다.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기어이 아들을 내어주어서라도 우리를 살리시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겪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크기는 여러분을 향한 사랑의 크기입니다. 도저히 확인하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만큼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애닳는 사랑의 크기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더 깊고 큰 하나님의 이 사랑의 깊이를 깨달아 불평과 원망이 아닌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시기를 축복합니다.
    5. 믿음이 중요하기에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둘째 이유는 진실한 믿음이 고난 없는 편한 삶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를 언듯 납득하지 못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없이 편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의 명문대도 미달사태가 속출한다는데 그 이유는 똑똑한 학생들이 전부 의대로 몰리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사명감보다는 지방의대를 나와도 의사가 되는 것이 명문대 나온 다른 전공자보다 훨씬 수입이 크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도 ‘자녀가 잘 되었네요’하는 덕담의 의미는 ‘연봉높은 직업을 가졌네요’는 뜻입니다. 어떻게든 고생 않고 편하게 살고 싶은 우리는 도대체 믿음이 뭐가 그리 중요하기에 이런 고난을 주시면서까지 확인하셔야 한단 말인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41 min
  • 20231224 목자들의 노래 / 눅 2:1-20
    눅 2:1-20/목자들의 노래
    231224 성탄주일
    1. 왕이 오신 곳
    오늘은 기쁜 성탄절입니다. 서로에게 축복의 인사를 해주십시오. 주님이 당신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온 세상의 구주가 오셨다는 성탄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주께서 어디에 오셨습니까? 
    (눅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만왕의 왕께서 이 땅에 오시되 구유에 오셨습니다. 왕궁에나 부자집에나 화려한 곳이 아닌 서민들의 여관에서도 누울 곳이 없어 가축들과 함께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1세기 유대지방의 전형적인 서민가옥은 2층 구조입니다. 2층이 사람이 자는 곳이고, 1층은 부엌, 창고, 작업실, 가축우리를 겸했습니다. 2층의 누울 자리가 없어서 요셉가족은 1층의 가축들과 함께 누웠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의 왕이요, 온 우주의 구주의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토록 비천한 곳으로 오셨을까요? 정말 여관에 누울 자리가 없어서입니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바다를 갈라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마리아를 잉태케 하신 하나님이 아들의 누울 왕궁을 찾지 못 하여, 변변한 여관의 방 하나를 못 구할 힘이 없어 구유에 눕도록 내버려두신 것일까요? 말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구유에 누우신 것일까요? 일부러 구유를 택하신 겁니다. 가장 비천한 자리,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리를 일부러 고르신 겁니다. 왜요?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 왕을 찾아올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의 정체를 8-9절이 알려줍니다. 
    2. 왕이 부르신 이
    (눅 2: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그들은 바로 목자들입니다. 양들이 주거지 주변의 풀을 다 뜯으면 먼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야 하고 매번 마을의 우리 로 돌아오지 못 하기에 밤이면 들판의 동굴이나 임시로 만든 우리에 양들을 몰아넣고 목자들이 번갈아 깨서 지키기를 반복하며 며칠 혹은 몇 주를 다닙니다. 이렇게 몰고 다니는 많은 양떼를 소유한 부자가 직접 들판에 나가 추위와 들짐승과 싸우며 불편한 잠자리에서 고생을 하겠습니까? 목자들은 한 철 양떼를 치면 주인에게 그 대가로 한 마리 혹은 두 마리를 삯으로 받곤 했습니다. 당연히 목자는 가난하고 육체노동으로밖에는 생계를 이어갈 재간이 없는 이들이고 가장 낮은 계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천사들을 보내여 왕의 탄생을 알리셨습니다. 놀라고 감격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러 갔을 때 만약 왕궁이었다면 그들이 근처에나 갈 수 있었겠습니까? 부자들의 안방이었다면 그들이 왕에게 경배하겠다고 말이나 꺼낼 수 있었을까요? 어머니 마리아가 귀부인이었다면 목자들이 전하는 말을 들으려고나 했겠습니까? 
    놀랍게도 왕이 오셨는데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가축의 구유에 오셨고 그 어머니도 갈릴리에서 온 너무나 평범한 여자였기에 목자들은 두려움도, 어색함도, 어려움도 없이 다가가 왕께 경배하고 천사들의 말을 전하고 기쁨으로 가득차 찬양하며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3. 왕이 주시는 기쁨
    바로 이것이 왕이 오신 소식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이유입니다. 고대의 모든 왕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자칫 노여움을 사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백성은 왕이 행차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혹 마주쳤다가 무슨 변이나 당할까 두려워 도망다녔습니다. 하다못해 대명천지 21세기에도 회식하면 사장님 옆자리에 불편해서 안 앉으려고 하지 않나요? 심지어 목사 옆자리에 안 앉으려는 교인들도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장은 자신의 안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니 혹 실수라도 해서 밉보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없지 않지요? 생사여탈권을 지닌 왕은 어떠했을까요?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거나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파리목숨처럼 사람을 죽이기도 했던 고대왕들이 온다는 소식이 어떻게 백성에게 기쁨이었을까요?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화려한 왕궁에, 왕자로 오셨다면 이 목자같은 낮은 계층의 사람은 근처에도 못 갔을 것입니다. 구세주시라는데 그 앞에 고개도 들지 못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은혜로우신 우리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구유에,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의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목자들의 영접을 받으며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말구유처럼 악취가 나는 죄인이라도, 아무리 목자들처럼 보잘것없는 우리라도 감히 왕께 가까이 나아가 경배하고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주님은 그러나 더 낮은 십자가에까지 내려가셔서 피흘리심으로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리, 세상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나라에 올려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왕이 오셨다는 소식이 기쁜 이유입니다. 이 성탄의 소식이 온 세상에 모든 마음이 가난하고 신분마저 비천하고 목마르고 굶주린 죄인에게 기쁨이 되는 이유입니다. 목자들은 그 기쁨으로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 
    (눅 2: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이 성탄절에 여러분도 큰 기쁨과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은혜를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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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min
  • 20231217 다리를 불태우지 마라 / 행 15:36-41
    행 15:36-41/다리를 불태우지 마라
    231217 주일설교
    1. 치유의 소망
    모두들 아시겠지만 지난 주일 공동의회에서 3분의 2의 지지를 넘지 못 하여 재신임이 부결되었습니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김목사에게는 14년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길을 준비하라는 뜻이고, 교회는 김목사와의 동행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새시대를 잘 열기 위해서는 옛시대를 잘 마무리해야 합니다. 재혼을 한다고 칩시다. 옛배우자의 흔적을 곳곳에 남겨두고 새로운 배우자와 행복한 새삶을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새시대를 열려면 옛시대의 마무리를 잘 해야 합니다. 중요한 마무리가 있는데 여러분의 마음에 남아있는 앙금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공동의회를 전후하여 서로 다른 입장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 아픔이 남은 듯하여 무척 안타깝습니다. 제가 그 마음을 다 풀어드릴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치유의 길을 열어보여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벌어진 가장 안타까운 다툼 중 하나를 들여다 봄으로써 여러분의 마음에 치유와 회복의 빛이 비취기를 기도합니다.
    2. 다툼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후반부는 초대교회 최초의 공식선교사였던 바울과 바나바의 2차 전도여행이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이 시점은 13-14장에서 이들의 1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15장에서 2주 전에 살펴본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이방인선교의 방향을 결정한 직후입니다. 36절을 보면 예루살렘공의회가 끝난 며칠 후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여행방문지를 돌아보는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합니다.
    (행 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그런데 전도여행은 시작부터 큰 장애물을 만납니다. 바로 선교팀의 리더인 바나바와 바울의 큰 다툼입니다. 37-38절입니다.
    (행 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행 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행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로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라 하는 요한을 2차 전도여행에 동행시키는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이 크게 다툰 것입니다. 그의 이름 마가는 아람어 이름이고 요한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저의 이름이 한글로 도완이고 영어로 대니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1차 전도여행 중 선교팀을 떠남으로써 선교팀원들을 크게 실망시킨 적이 있습니다. 13장으로 가봅니다.
    (행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마가는 왜 중도에 팀을 떠났을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여행길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란 마가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일 수 있습니다. 마가는 오순절성령세례가 있었던 마가의 다락방의 그 마가입니다.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루살렘의 부촌 upper city에서 120명이 들어가는 저택을 가진 부유한 여성이었습니다. 그 집의 아들이었으니 곱게 자라서 이 험한 선교여행이 너무 힘들었을 수 있습니다. 신학적 견해 차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자란 마가는 유대주의적 사고방식이 강했을 터이고 이방인에게 율법준수를 요구하지 않고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고 전하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정책에 거부감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2차 전도여행 직전에 있었던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공의회에서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와 반대편에 서서 논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3. 분열
    어떤 이유였든 1차 전도여행시에 선교팀을 크게 실망시킨 마가가 2차 여행에 다시 따라나선다고 하자 바나바는 그를 받아주기를 원했지만 바울은 반대했습니다. 여기에는 바나바와 바울의 성향과 입장 차이가 한 몫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의 외삼촌입니다. 거기에다가 그는 마음이 착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나바를 묘사하는 표현은 한결같이 착하다, 위로하고 권면하는 사람이다, 자기 밭을 팔아 가난한 자를 위해 내어놓았다는 식입니다. 마가의 허물을 너그럽게 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나바는 일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한 사람으로 이런 유형을 relationship oriented 유형이라 부릅니다. 거기에 비해 바울은 일이 더 중요한 task oriented 유형입니다. 그는 무엇을 하든 끝장을 보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핍박할 때도 앞장서서 열심을 다했고 회심하고 복음을 전파할 때도 목숨을 걸고 쉬지않고 돌아나닙니다. 그는 마가가 못마땅하기도 했겠지만 그가 또다시 팀을 실망시킬 경우 생길 피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다른 성향은 결국 파국을 가져왔습니다. 이견을 좁히지 못 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39-41절입니다.
    (행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 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행 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결국 선교팀이 둘로 갈라집니다. 바울선교팀의 행적을 우리는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선교팀의 일원인 누가에 의해 보고받았습니다. 반면 바나바선교팀에는 누가와 같은 기록자가 없었기에 우리가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바나바는 후에 그의 고향 구브로섬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 의해 순교당했다고 교회 전승이 전합니다.
    초대교회 최초의 공식선교사였던 두 선교사의 분열은 선교역사 초기에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인 동시에 인간적으로 볼 때도 무척 가슴아픈 일입니다. 바울에게 바나바는 큰 은혜를 베푼 은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바울이 교회를 박해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회심한 후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나려고 했지만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그의 회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를 데리고 사도들 앞에 가서 그의 회심이 진짜임을 보증해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11장으로 가면 고향 다소에 가 머물던 바울을 스카웃해서 안디옥교회 목회사역에 데뷔시킨 것도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13장에서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를 소개하는 표현에서 가장 먼저 바나바가 나오고 몇 사람이 더 나온 후 마지막에 바울이 나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 담임목사였다면 바울은 교육전도사 쯤 되었다는 뜻입니다. 안디옥교회가 성령의 인도로 두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도 분명 바나바의 권위 아래 바울이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랬기에 바울이 바나바의 뜻에 순종치 않고 끝까지 마가를 반대하여 결국 두 사람이 다른 길로 갈라진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바울은 인간관계보다 자신의 직무 혹은 사명이 훨씬 중요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반전
    아무튼 바울에게 마가는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1차 여행 때는 선교팀에 중도에 떠나버려 큰 실망을 안기더니 2차 여행 때 또 따라나서겠다 하여 결국 자신의 은인인 바나바와 갈라서게 하고 선교팀마저 둘로 나뉘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이 정도까지 관계가 틀어졌으면 바울과 마가의 관계가 회복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이 정도로 바울을 실망시킨 사람이라면 마가가 초대교회에 제대로 된 일꾼으로 쓰임받을 수 있을까요? 마가의 잘못, 바울의 성향, 분열된 선교팀을 볼 때는 가능성이 높아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도저히 회복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바울과 마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년에 감옥에서 쓴 디모데후서를 보십시오.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딤후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다른 이들은 자신을 버렸거나 사역을 위해 보냈고 누가만 곁에서 그를 돌보는데 마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가가 바울에게 유익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빌레몬서에서도 자신의 동역자를 소개하는데 누가 있는지 보십시오.
    (몬 1:24) 또한 나
    36 min
  • 20231210 살든지 죽든지 / 행 12:1-5
    행 12:1-5/살든지 죽든지
    231210 주일설교
    1. 하나님의 뜻
    투표하느라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이번 재신임투표는 7년 전과 달리 많은 교우들이 정말 힘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의 책임자로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투표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오후면 홈피에 실리겠지만 벌써 궁금하시죠? 제가 미리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번 재신임투표는 통과되거나 안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어느 쪽이 하나님 뜻일까요? 통과일까요, 부결일까요? 그 답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같이 본문을 들여다 보시지요.
    2. 다른 운명의 이유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가 겪은 박해를 배경으로 합니다. 아기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교회를 박해합니다. 먼저 야고보를 잡아서 사형시킵니다. 이어서 베드로도 잡아서 가두고 다음날 아침 사형시키려 합니다.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천사가 개입하여 기적적인 방법으로 베드로는 감옥을 나와서 안전한 곳으로 피합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야고보가 잡혔을 때는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간절히 기도했을 겁니다. 그러면 왜 야고보는 순교하고 베드로는 구출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야고보를 위한 기도는 듣지 않으시고 베드로를 위한 기도만 들으셨기 때문입니까? 야고보는 베드로만큼 사랑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까?
    3. 다른 사명때문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고보나 베드로나 똑같이 사랑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다른 운명은 그들의 다른 사명때문입니다. 곧 야고보는 순교로서 감당할 사명이 있었고 베드로는 살아서 감당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는데 무슨 사명을 감당합니까? 먼저 순교한 스데반의 가르쳐 줍니다. 스데반의 탁월한 은사는 그의 죽음으로 낭비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의 당부대로 예루살렘을 넘어 이방세계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사도 바울을 회심시키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숭고한 마지막 모습은 바로 곁에서 지켜본 사울이 회심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습니다. 누가가 자세히 기록하지는 못 했지만 틀림없이 야고보의 순교도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귀하게 쓰였을 것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살아서 감당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수제자로서 주님의 말씀과 삶을 교회에 가르칠 뿐 아니라 박해의 파도를 교회가 견뎌낼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둘 중 어떤 사명을 택하고 싶으세요? 우리에게 택하라면, 죽은 정승보다 산 개나 낫다고 아마 백이면 백 야고보가 아닌 베드로를 택할 겁니다. 그럼 베드로가 되면 더 좋을까? 그러나 요한에 비하면 베드로도 빨리 죽습니다. 베드로는 약 65년경 순교했지만 요한은 100년경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도 요한에 비하면 훨씬 빨리 순교한 것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에베소 선교와 요한서신의 기록에 더해 무엇보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는 것이었기 때문에 열두 사도 중 유일하게 나이들어 죽음으로 순교했습니다.
    4. 살든지 죽든지
    성도는 모두 사명때문에 다른 길을 갑니다. 야고보처럼 일찍 순교할수도, 베드로처럼 나이들어 순교할수도, 요한처럼 장수하고 순교할수도 있습니다. 성도는 오래 살았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고 일찍 죽었다고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재신임이 통과되었다고 제가 성공했거나 찬성한 이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 아닙니다. 통과되지 않았다고 제가 실패했거나 반대한 이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도 아닙니다. 통과되었다면 제가 아직 우리교회에서 감당할 사명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를 안정시키고 치유하는 데 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요. 통과되지 않았다면 우리교회에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라시는 음성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통과되든 않든 모두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느 쪽이든 겸손히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좇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사명자로 삽니다. 그렇지않고 결과를 자신의 성공과 실패로 여기고 성공했다고 기고만장하고 실패했다고 분노하면 사명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로 삽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주를 위해 산다한 바울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1장입니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명자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The post 20231210 살든지 죽든지 / 행 12:1-5 first appeared on 뉴저지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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