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2:1-19/식은 땀이 흐르는 질문
231231 주일설교
1. 진실한 사랑에의 갈망
이런 질문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자기는 내가 더 이상 젊고 예쁘지 않아도 여전히 나를 사랑할거야? 여보, 내가 더 이상 돈을 못 벌어도 여전히 나를 사랑할거야? 들어보셨죠? 식은 땀이 흐르진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답하셨던가요? 솔직한 답을 원해, 기분좋은 답을 원해? 설마 이렇게 답하진 않으셨겠죠.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 도대체 이 인간은 왜 이러는 걸까? 이런 질문을 왜 하는 것일까? 오늘 설교는 이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진실한 사랑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하듯 영혼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진실한 사랑을 받을 영혼을 만족하고 행복합니다. 진실하지 않는 사랑은 받아도 공허하고 불안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끊임없이 그 사랑이 진실한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갈망때문에 인기를 끄는 대중문화컨텐츠가 미녀과 야수, 개구리왕자 같은 동화와 이를 다양하게 변주한 이야기입니다. 야수나 개구리처럼 흉측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한 소녀가 진실하게 그를 사랑했는데 그 사랑의 힘으로 마법을 풀려서 보니 그가 왕자더라, 말괄양이 말단사원인 소녀가 찌질한 동기를 사랑했는데 알고봤더니 재벌3세 본부장님이더라, 이런 이야기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흉칙한 외모같은 조건을 뛰어넘는 진실한 사랑은 왕자와의 결혼과 같은 큰 보상이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이런 조건없는 진실한 사랑에 우리는 목마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실한 사랑을 확인하고픈 갈망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누구에게 있을까요? 우주 최고의 로맨티스트이신 하나님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자녀들의 사랑과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이 바로 성경 욥기의 주제입니다.
2. 고난의 의미
최근 새벽기도에서 오래 묵상한 욥기는 우리가 겪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지난 성탄절 새벽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난 화재로 4층의 젊은 부부가 두 살, 일곱 달 된 아기를 각각 품에 안고 살리려고 자신의 몸을 쿠션삼아 뛰어내렸는데 두 아이는 모두 살렸고 아내도 크게 다치고도 목숨은 건졌지만 아빠는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내 친구가 연락이 와서 그 아빠가 자신의 가까운 학교후배라는 것입니다. 뉴스를 찾아보니 그 부부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고 교인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 부부가 죄가 있다면 얼마나 있다고 이런 참혹한 일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이미 4천 년 전 욥도 던졌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던져왔습니다. 욥은 아무 이유도 없이 하루 아침에 전재산을 잃고 자녀들 모두 잃더니 마침내 자신의 건강과 아내와의 관계까지 잃고 신음합니다. 그를 찾아온 세 친구는 욥과 더불어 이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의 의미를 놓고 씨름합니다. 이들은 모두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이해를 가졌기에 세 친구는 욥에게 숨겨진 죄가 없는지 찾아보라고 비난하고 욥은 숨겨진 죄가 없으니 하나님이 잘못 심판하신 것이라고 항변합니다. 그에 비해 또다른 등장인물 엘리후는 또다른 고난의 의미를 제시하는데, 죄가 없어도 연단과 훈련 등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실 수 있다는 한단계 성숙한, 진일보한 관점입니다. 그런데 사실 욥기는 시작하면서부터 이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들이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 한 다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고난이 욥의 믿음을 시험하는 테스트라는 것입니다.
욥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먼저 욥의 믿음을 자랑하시자, 사탄이 그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이유는 복을 많이 주셨기 때문이기에 그 복을 거두어 가시면 그가 믿음을 버릴 것이라고 도발합니다. 곧 욥의 믿음은 조건적인 것이기에 진실하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욥의 믿음이 진실함을 보여주시려 사탄이 욥을 괴롭히도록 허락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과 사탄 그리고 온우주가 지켜보는 가운데 욥의 믿음이 진실한지를 놓고 내기가 벌어집니다. 고난의 의미는 바로 믿음의 시험입니다.
3. 믿음의 시험
하나님이 고난을 참믿음을 확인하는 시험도구로 쓰신다는 사실은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하십니다. 욥보다 아브라함이 더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니, 이방우상들이나 요구하는 아들을 바치는 제사를 의로우신 하나님이 요구하시다니요! 거기다 그럴거면 애초에 왜 100세나 되어서 아들을 주신단 말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그제서야 하나님은 칼을 드는 아브라함을 막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동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확인코자 함이었습니다.
순간 우리는 당황합니다. 아니, 이 말도안되는 요구가 고작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기에 이런 상황까지 연출하시면서 시험하셔야 하는 거야?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얼마나 화가 났겠어? 진짜 아들을 바치라는 줄 알았을 것 아니야? 이런 생각 안 해보셨나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새디스트가 아니냐고 비난합니다. 고작 믿음을 확인하자고 욥에게 그런 고난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그런 상황에 몰아넣으시다니요, 욥도 아브라함도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4.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이 이러시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으신가요? 길에서 스쳐지나가는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분 계십니까? 오직 여러분이 사랑하는 그 사람, 그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저 썸타는 사람의 마음과 보고싶어 밤낮으로 못견디게 짝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중 누구를 더 확인하고 싶으십니까? 당연히 더 사랑하는 사람이겠지요?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은 ‘네 아들을 바칠 만큼 나를 사랑하느냐’는 도전인 동시에 ‘나는 내 아들을 너에게 줄 만큼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만 확인하시고 가장 소중한 아들을 빼앗지 않으셨지만 하나님 당신은 가장 소중한 아들을 아브라함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버리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천사가 이삭을 잡으려는 아브라함의 팔을 잡았지만 예수님을 매어다시는 하나님의 팔을 도저히 잡지 못 했습니다.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기어이 아들을 내어주어서라도 우리를 살리시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겪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크기는 여러분을 향한 사랑의 크기입니다. 도저히 확인하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만큼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애닳는 사랑의 크기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더 깊고 큰 하나님의 이 사랑의 깊이를 깨달아 불평과 원망이 아닌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시기를 축복합니다.
5. 믿음이 중요하기에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둘째 이유는 진실한 믿음이 고난 없는 편한 삶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를 언듯 납득하지 못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없이 편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의 명문대도 미달사태가 속출한다는데 그 이유는 똑똑한 학생들이 전부 의대로 몰리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사명감보다는 지방의대를 나와도 의사가 되는 것이 명문대 나온 다른 전공자보다 훨씬 수입이 크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도 ‘자녀가 잘 되었네요’하는 덕담의 의미는 ‘연봉높은 직업을 가졌네요’는 뜻입니다. 어떻게든 고생 않고 편하게 살고 싶은 우리는 도대체 믿음이 뭐가 그리 중요하기에 이런 고난을 주시면서까지 확인하셔야 한단 말인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