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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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pisodes

  • 20230903 명작과 막장 사이 / 룻 3:7-18
    룻 3:7-18/명작과 막장 사이
    230903 주일설교
    1. 명작과 막장 사이
    1970년 개봉한 영화 러브스토리는 반세기가 넘도록 지금까지 사랑받는 멜로영화의 고전명작으로 꼽힙니다. 부유한 명문가상속인이자 하버드생인 올리버는 가난한 이민자의 딸 제니와 사랑에 빠집니다. 막대한 상속과 특권을 포기한 올리버는 제니와 가난하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온갖 역경을 딛고 사랑을 일구어가지만 제니는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하고 홀로 남은 올리버는 제니와의 짧은 추억을 그리워하며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삶과 사랑, 희생과 헌신의 아름다움을 음미케 하며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런 영화를 명작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공장에서 마구 찍어낸 듯, 자극적인 MSG를 쏟아부은 듯한 막장 드라마도 있습니다. 불륜, 패륜, 출생의 비밀, 모략, 다툼 등 온갖 자극적인 요소를 짬뽕처럼 버무려 시청률만을 목적으로 만드는 드라마입니다. 보면서도 욕하고 보고나면 다 잊어버리는 류의 드라마입니다. 모든 감독이 다 명작을 만들고 싶겠지만 실은 막장 드라마, B급 영화, 흉내만 내는 아류작이 훨씬 많습니다. 영화에 명작과 막장이 있듯이 인생도 그렇습니다. 명품인생도 있고 막장인생도 있습니다. 보아스와 룻의 사랑은 어느 쪽일까요? 
    룻기 3장 후반부를 읽었습니다. 보아스가 왜 집에서 안 자고 타작마당에서 잠들었을까요? 당시 풍습에 주인은 종종 추수를 마친 후 타작마당에서 늦게까지 일꾼들과 먹고 마시며 즐거운 잔치를 벌인 후 도둑을 막기 위해 곡식단 곁에서 잠들곤 했습니다. 7절을 보면 그는 일꾼들과 좀 떨어져서 곡식단 끝에 누웠습니다. 그래서 룻이 그의 발치에 누울 때나 떠날 때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청혼을 득고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돌려보내고 4장을 보면 기업무르는 고엘이 되기 위한 절차를 밟습니다. 결국 이야기는 룻과 나오미가 곤경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물론 엘리멜렉의 집안이 다시 일어서고 다윗왕조가 열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아름답고 품위있고 감동있는 명품드라마, 룻과 보아스의 러브스토리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충분히 막장드라마로 끝날수도 있었습니다. 한밤중에 과부가 몰래 나이들고 부유한 유부남의 이불 안에 들어왔다! 아슬아슬한 막장드라마의 한 장면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도 이 이야기가 막장이 아닌 명품 러브스토리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2. 하나님을 발견하는 믿음
    .먼저 막장이 될뻔한 드라마를 탁월한 극본과 연출로 명품으로 만든 PD 하나님의 역할이 첫째입니다. 다음으로 그 분의 지도를 받는 배우들의 열연이 둘째입니다. 첫째 주연배우인 시어머니역의 나오미는 믿음과 지혜와 인내로 열연하였습니다. 처음 룻이 보아스에게 은혜를 입고 돌아온 날 나오미는 그 만남을 우연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2장 20절입니다. 
    (룻 2: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
    한글성경을 보면 은혜 베푸는 이가 마치 보아스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영어성경을 보면 다릅니다. 
    (Ruth 2:20) “The LORD bless Boaz!” Naomi replied. “He has shown that he is still loyal to the living and to the dead…”
    문맥으로 보아도 He는 The Lord 주를 가리킨다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푼다는 내용도 보아스보다 하나님에게 훨씬 더 타당합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여기서 ‘그’는 보아스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다시 보면 나오미의 말은 여호와께서는 살아있는 우리에게와 죽은 남편과 아들에게도 기업무르기를 통해 은혜를 베푸실 지도 모르겠다.’ 나오미는 보아스의 호의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넘어서 ‘하나님이 이 일 뒤에 일하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믿음이 나오미와 룻을 움직여 명품드라마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렌즈로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캄캄한 밤 맨눈으로는 아무 것도 못 보지만 적외선렌즈로 는 어둠 속의 온갖 생명체를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렌즈는 우리의 눈을 열어 우연처럼 보이는 일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만들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이 믿음의 렌즈로 항상 보이지않는 하나님을 발견하시길 축복합니다. 
    3. 때를 기다리는 지혜
    그녀는 그 길로 룻을 데리고 보아스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큰소리로 사람들 앞에서 떠듭니다. “보아스 숙부, 내 들으니 우리 며느리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은데 어차피 기업무를 고엘이기도 하니 날 잡읍시다. 당신은 부자이니 아내 하나 더 두는 것도 부담될 일도 아니고, 며느리는 젊고, 어때요?” 만약 그랬더라면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난데없이 사람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르고 호의가 괜한 오지랍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보아스와 나오미 집안의 인연은 그 길로 끝나고 우리는 룻의 이야기를 듣도보도 못 했을지도 모릅니다. 
    나오미는 지혜로운 계획을 세웁니다. 그 지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룻이 희생을 감수하며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여인인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보아스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인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보아스와 룻에게 시간을 줍니다. 그것이 추수가 끝날 때까지 네 달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분주한 추수를 다 끝내고 홀가분하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때, 가장 기분이 좋아서 유쾌하게 짐지기를 선택할 수 있는 때를 고릅니다. 그 때가 추수를 마치고 잔치를 하는 날 밤이었습니다. 그리고 혹 보아스가 룻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더라도 그의 거절을 아무도 모르는 때와 장소, 룻이 거절당하더라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이 동네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아무도 모르는 시간과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것이 한밤중의 타작마당이었습니다. 나오미의 이 인내와 지혜 덕분에 보아스와 룻은 아무도 모르게 과감한 도전을 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펼쳐진 것입니다. 
    4.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내
    하루하루가 고단하고 힘든데 나오미는 어떻게 조급하고 답답하지도 않아서 4달이나 기다렸습니까? 그녀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내로 증명됩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고 명하십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뒤에서 애굽의 군대가 칼을 들고 말을 달려 오는데 어떻게 기다립니까?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가능합니다. 믿는 이는 군대를 수장시키는 구원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물론 조급하고 답답합니다. 힘든 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눅 12:50) 나는 받을 세례(십자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그럼에도 주님은 아버지를 향한 신뢰로 인내하며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못 견디는 것이 이 조급함 아닙니까? 조급하고 못 기다려서 우리는 서툰 말을 쏟아놓고 무모하게 내지르고 어리석게 덤비다가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 스스로 망하는 길에 들어서지 않습니까? 시인과 예레미야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고백합니다. 
    (애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시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는 믿음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5. 사려깊은 절제
    나오미와 더불어 열연한 또 한 명의 주연배우 보아스의 사려깊음과 절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난데없이 청혼을 받습니다. 풍성한 추수가 끝났고 수확물이 그득이 쌓였습니다. 그렇지않아도 기분이 좋은데 평소에 참 예쁘게 보았던 젊은 룻이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합니다. 자신은 그녀의 기업무를 고엘이니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습니다. 캄캄한 밤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36 min
  • 20230823 환란 만난 자의 고엘 / 룻 3:1-9
    룻 3:1-9/환란 만난 자의 고엘
    230827 주일설교
    1. 두렵고 서러운 세상 
    지금이야 아이들의 장래희망이 아이돌, 연예인, 유투버도 있고 재능과 흥미에 따라 무궁무진합니다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대통령, 장군, 판검사 아니면 의사로 대부분 수렴되었습니다. 당연히 아이의 바람이라기보다는 부모의 바람이 투영된 것입니다. 교사나 화가 따위의 희망을 얘기했다가는 꿀밤 한대 맞고 사내자식이 태어났으면 대통령이나 장군이 한 번 되어봐야지, 고작 그딴 것을 꿈이라고 하냐는 핀잔을 듣기 쉽상이었습니다. 당시 어른들은 왜 그랬을까요? 두렵고 서러워서 그랬던 것입니다. 온갖 환란이 수시로 닥치는 불안한 세상에서 가족이나 먼 친척이라도 권력자 한 사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남는데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복을 누리지 못 하는 대부분의 서민들은 환란이 닥칠 때마다 고스란히 온갖 서러움을 당하며 눈물을 삼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고대사회이고 예외가 없었습니다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권력자가 없어도 모두 생명과 복지와 공의의 복을 누리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에 은혜의 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거듭 등장하는 고엘제도입니다.
    2. 희망을 발견한 나오미
    룻기 3장 전반부를 읽었습니다. 지난 주에 읽은 2장 후반부에서, 룻이 들고온 많은 이삭에 놀란 나오미는 보아스가 베푼 호의를 듣고 이스라엘에 있는 독특한 제도를 떠올리고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엘제도입니다. 2장 20절에서 나오미는 보아스를 자신들의 기업무를 자 곧 고엘이라고 부릅니다.
    (룻 2:20) … 나오미가 또 그(룻)에게 이르되 “그 사람(보아스)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גאל:고엘)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나오미는 이 고엘제도에 의해 룻과 보아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떠올리며, 룻에게 보아스의 밭에만 머물고 다른 곳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나오미와 룻은 보리추수 시작할 때 베들레헴에 도착했고 룻은 밀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의 밭에 머물렀습니다. 이스라엘에선 4-5월에 보리를 추수하고 6-7월에 밀을 추수하니까 약 4달 가까이 보아스는 룻을 거의 매일 지켜볼 시간이 있었습니다. 좋은 첫인상을 확신으로 바꾸어주기 충분한 시간입니다. 밀추수까지 끝날 때를 기다린 나오미는 룻에게 대담하게 보아스를 찾아가 청혼하라고 시킵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나오미의 명대로 밤에 타작마당을 찾아간 룻은 보아스에게 바로 이 제도를 근거로 청혼을 합니다.
    (룻 3: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גאל:고엘)가 됨이니이다.” 하니
    3. 고엘, 기업무르는 자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나오미가 룻에게 청혼하라 시킬 수 있었고 룻이 대담하게 청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고엘제도 때문이었습니다. 고엘은 동사 가알의 명사형입니다. 가알은 대신 값을 치르다, 구원하다, 억울함을 풀어주다는 뜻입니다. 명사인 고엘은 값을 치르는 사람, 구원하는 사람, 억울함을 풀어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고엘은 친족 중 환란을 만난 사람을 도와서 곤경을 벗어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이는 개인의 안전과 복지를 보장할 뿐 아니라 공동체의 번영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복지제도로서 오늘날에도 선진국에서나 시행하는 수준의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고엘은 어떤 환란을 만난 이를 어떻게 도울까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가난의 환란을 만난 사람을 구해주는 고엘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기업무르는 자입니다. 가난이나 빚 때문에 어느 가정이 땅을 팔거나 자신이나 가족을 팔아 종이 되면 당연히 극빈층으로 추락하고 자유를 구속당한 채 비참한 삶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 때 부유한 친족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나서서 고엘이 되고자 하면 땅을 처음 판 수준으로 다시 사서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율법은 규정하였습니다. 빚도 이스라엘 사람들끼리는 이자를 못 붙이니 처음 진 만큼만 갚으면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엔 50년마다 채무를 탕감하는 희년제도가 있어서 희년까지 남은 기간 만큼만 땅값을 계산하거나 남은 빚을 계산하면 되니 그 친족은 처음 땅값이나 채무보다 적은 부담으로 그 땅을 되사서 친척에게 돌려줄 수 있었습니다.
    둘째 대가 끊어지는 환란을 만난 사람을 구해주는 고엘이 신명기 25장에 나오는 “대를 잇는 자”입니다. 남자에게만 땅과 가축이 상속되던 시절 아들을 낳지 못 하고 죽은 가문은 대가 끊어질 뿐 아니라 재산도 뿔뿔히 흩어져서 지파 전체의 땅이 줄어듭니다. 이는 공동체의 큰 위협이었기에 죽은 남자의 가까운 형제부터 의무를 지워서 죽은 이의 남은 아내 과부와 결혼하여 그녀의 생계과 안전을 책임지고 또 아들을 낳을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죽은 형제의 아들로 호적에 올리고 그가 남긴 재산을 상속하여서 가문이 끊어지지 않고 번성케 하였습니다. 이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의 명령을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셋째 억울한 일을 당한 환란을 풀어주는 고엘이 민수기 35장에 나오는 피를 보복하는 자입니다. 누군가 무고하게 살인을 당하면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이 고엘 곧 피를 보복하는 자가 되어 살인자를 공개처형할 권리를 가집니다. 물론 처형하기 전 레위인들의 성읍 도피성의 지도자들로부터 이것이 과실치사가 아니라 고의적 살인이란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사법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시절 개개인을 불의한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사법정의를 세우는 제도였습니다.
    4. 최고의 고엘 하나님
    룻과 나오미는 이 중 두 가지 곧 가난의 환란과 대가 끊어지는 환란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고엘은 큰 대가지불이 필요했기에 친족이라도 스스로 지기로 결심하지 않으면 강요하기 힘들었습니다. 룻기를 보면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를 베풀기 전까지 나오미는 고엘제 시행을 거의 기대치 않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호의를 들은 후에도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기업을 무르는 것까지는 기대치 않고 그저 룻과 결혼하여 룻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정도만도 감사하다는 뉘앙스입니다.
    (룻 3: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보아스는 나오미의 기대를 넘어 룻을 통해 대를 잇는 것뿐 아니라 그 집안의 잃어버린 토지를 되찾는 것까지 기꺼이 부담을 짊어집니다. 나오미와 룻은 이 제도를 통해 인생역전을 합니다. 이 아름다운 제도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복지의 안전망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안전하고 풍요롭게 유지하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고엘을 통해 백성 한 명 한 명을 사랑하시고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시려는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도 당신이 친히 인류의 고엘이 되심으로 구원의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고엘이 되십니까?
    5. 자유를 되찾아주시는 고엘
    첫째, 하나님은 노예 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고엘이십니다. 로마서는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의 노예였으나 아들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신 하나님이 사셨다고 합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가 빚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특히 악독한 사채업자에게 갚지못할 빚을 진 이는 지옥에서 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역사상 최고로 악독한 사채업자에게 고통당하며 살아왔습니다. 바로 죄의 빚을 갚으라고 끊임없이 협박하고 위협하고 괴롭히고 저주하는 마귀입니다. 죄책감과 불안감과 심판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이 노예상태는 죄값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때까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친히 고엘이 되신 하나님은 아들의 피값으로 모든 죄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자유롭게 해방시키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는 모든 죄값을 탕감받고 생명과 평안과 자유와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6. 낙원을 되찾아주시는 고엘
    44 min
  • 20230820 믿음으로 사는 여자 / 룻 2:17-23
    룻 2:17-23/믿음으로 사는 여자
    230820 주일설교
    1.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근대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로 찬양받는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이 시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우울한 날 지나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으로 다 지나가는 것이며/지난 것은 소중한 것이라네.” 삶이 여러분을 속이는데 정말 슬퍼하지도, 노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까?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의 주인공 룻은 자신의 뺨을 후려치는 삶을 향해 왼뺨을 내미는 여자입니다.
    룻기로 돌아왔습니다. 2주 전 은혜로 사는 남자 보아스를 만나보았다면 오늘은 믿음으로 사는 여자 룻을 만나봅니다. 룻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은혜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줍니다. 먼저 그녀가 고난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십시오. 그녀는 삶에게 속고 뺨맞은 여자입니다. 부픈 꿈을 안고 결혼했지만 자녀 하나 갖지 못 한 채 젊은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아버지와 아주버님까지 졸지에 세상을 떠나더니 늙고 가난한 시모를 따라 남의 나라에서 외국여자로 극빈층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남의 밭에 나가서 눈총을 받으며 얼마 안 되는 이삭을 주워와 입에 풀칠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처지에 놓인다면 아침에 일어나고 싶겠습니까? 진학이나 취업, 사업이나 결혼에 실패하고 무시와 조롱, 미움과 비방을 받으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만사가 귀찮고 아침에 눈뜨기가 싫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심정을 한 번쯤은 겪어 보셨지요? 그녀도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2.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그런데 2장에서 룻은 그런 삶을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랑하는 듯 보입니다. 2장 2절에서 그녀는 시어머니가 보내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나서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합니다.
    (룻 2: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남의 밭에서 눈총과 무시를 받아가며 이삭을 줍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먼저 나서서 하고 싶은 일일까요?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고 한탄한고 원망하고 분노하는 대신 먼저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녀가 보아스의 밭에 이르기까지 여러 날이 지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다른 날과 달리 룻이 많은 이삭을 주워온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아마 이삭줍기는 요즘으로 치면 최저시급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을 그녀가 어떤 태도로 하는지 7절이 보여줍니다.
    (룻 2: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움막)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그녀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한결같이 태도로 부지런히 이삭을 주웠습니다. ‘이딴 것 주워서 어느 세월에 자리잡겠나’ 할수도 있었을텐데 오히려 이삭 하나도 하잖게 보지않았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했다고 슬렁슬렁 주운 다른 이보다 크게 많은 이삭을 주웠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태도때문에 뜻밖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보아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룻 2: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15kg)쯤 되는지라.
    한 에바 약 15kg의 곡식은 당시 남자 일꾼의 한 달치 품삯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양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그녀는 혹독한 고난과 슬픔을 겪고도 여전히 삶을 사랑했습니다. 삶의 의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는 쉽지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성도는 아무리 혹독한 고난으로 아무리 처절한 자리로까지 추락해도 그런 인생에도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고 계심과 마침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상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이는 룻처럼 삶의 의지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삶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이삭을 주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를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십니다.
    레오나드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catch me if you can’에는 가난해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주인공이 이솝우화를 인용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두 마리의 쥐가 우유통에 빠졌지. 한마리는 포기하고 빠져 죽었는데 다른 한마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허우적대며 마지막 힘이 빠지기 전까지 헤엄을 쳤어. 그러자 우유가 점점 굳더니 버터가 되었지. 그 쥐는 굳은 버터를 딛고 우유통 밖으로 나와 살았어. 내가 바로 그 쥐야.’ 우리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길이 안 보인다고 포기하면 정말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포기하지 않으면 눈을 열어 길을 보여주십니다. 삶이 아무리 여러분을 속이고 뺨을 후려쳐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길을 여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은혜를 만나거든 
    룻의 믿음은 삶을 대하는 태도 뿐 아니라 은혜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룻 2: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그녀는 은혜가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교만은 신세지기를 거부합니다. ‘내가 왜 당신 도움을 받아? 내가 거지야?’ 자신이 은혜가 필요없다는 생각이야말로 최고의 교만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 누구 도움도 없이 성공했고 앞으로도 도움같은 것 안 받아.’ 마귀를 타락시킨 교만이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로 결정한 아담과 하와의 교만입니다. 자기 힘만으로 살수있는 이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로 태어났습니다. 가족과 친지와 공동체의 은혜로 자라고 교육받고 일터를 찾았습니다. 지금도 동료와 고객과 사회의 은혜로 벌어먹고 삽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은혜가 묻어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은혜가 필요합니다. 룻은 또한 그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10절입니다.
    (룻 2: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자신이 보아스의 하녀 중 하나와도 같지못한 이방여자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보아스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당신은 부자이니 이 정도는 당연히 베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정도는 당신에게 별 것 아니니 대단한 은혜라 할 것도 없지 않아요?’ 겸손의 또다른 면은 자신이 누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 곧 진짜 은혜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예수님이 이방땅인 두로를 방문하셨을 때 한 이방여자가 와서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시고 제자들에게 이에 대해 가르치시려고 의도적으로 그녀를 유대인 들의 비하하는 표현으로 모욕하시는 척 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때 그녀가 보인 반응을 예수님은 큰 믿음으로 칭찬하셨습니다.
    (마 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그녀는 자신이 율법에 무지한, 개나 다름없어 은혜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은 주님의 은혜가 없으
    35 min
  • 20230813 교회의 미래 / 요 1:14-18
    요 1:14-18/교회의 미래
    230813 창립51주년
    1. 도전받는 교회
    오늘은 광복 78주년이면서 동시에 우리 교회 창립 5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로서는 51주년을 맞이한 기쁜 날이지만 교회를 둘러싼 현실을 돌아보면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미국에 있는 대부분 교회는 교세가 위축일로인데다 팬데믹으로 더욱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학교마다 미달사태를 겪어 통폐합되는 곳이 속출하고 갈수록 사역자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소년, 청년세대의 감소세가 가팔라 미래가 더 걱정스럽습니다. 또한 동성애, 세속화, 이단과 사이비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21세기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또 우리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은 룻기를 잠시 접어두고 이 답을 찾기 위해 먼저 종교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먼저 한 무신론 과학자의 입장을 들어보십시다.
    2. 과학과 종교
    그의 말은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과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모두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먼저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많은 무신론자가 과학의 발달로 신의 부재가 증명되었으니 머잖아 종교는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부터 사람들은 신은 없으니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해 왔고 20세기 공산국가는 노골적으로 종교말살정책을 펴왔습니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서구선진국에서 교회가 위축된 것은 맞지만 21세기 현재 세계인구의 84%가 여전히 종교인이고 종교인의 인구비율은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몇몇 공산국가는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교회가 성장하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70억 중 25억 명이 가장 규모가 큰 종교입니다. 왜 종교는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무신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과학이 신의 부재를 증명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존재는 과학으로 증명되지도, 부정되지도 못 합니다. 애초 신과 과학은 서로 다른 카테고리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신은 믿음의 영역에, 과학은 관측의 영역에 속합니다. 신이 관찰되지 않는다고 부재하다는 것은 더듬이로 페로몬을 맡아 움직이는 개미가 인간을 보지못한다고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키위새가 안 보인다고 세상에는 키위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히 과학은 신에 대해 ‘모른다’고 답합니다. 과학은 세상을 이해하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도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과학의 발전이 신앙을 무너뜨리지 못 합니다. 
    더구나 과학은 신이 존재할 높은 개연성을 보여주기까지 합니다. 우주의 질서와 정교함과 법칙을 연구하면 할수록 우연히, 아무 원인도, 목적도 없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믿기 어렵습니다. 우주 안에 모든 것은 인과율 곧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따르는데 무신론자들은 오직 우주 자체는 아무 원인도 없이 그저 빅뱅으로 태어났다고만 합니다. 오히려 우주와 그 우주를 지탱하는 놀라운 질서와 법칙과 정교함은 그 존재를 가능케 한 절대적 힘의 존재를 외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지난 2007년 하버드대학매거진은 미국대학교수 1,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가 4분의 1 정도이며 절반 이상은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습니다. 21세기 현재에도 전세계 종교인 성장비율은 무신론자의 그것보다 더 빨리 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3. 종교의 순기능
    무신론은 또한 종교에 많은 문제가 있기에 사라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과거 종교가 저지른 잘못, 종교전쟁, 근본주의 종교인에 의한 테러, 현실종교의 부정 혹은 부패를 꼬집습니다. 그러나 이는 영상 속 과학자가 말한 것처럼 종교자체의 가치와 종교의 문제를 구분하지 못 하는 오류입니다. 2차 대전이 국가간에 벌어졌다고 누구도 국가를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독일이 일으켰다고 독일민족과 국가를 없애자고 하지도 않습니다.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가 있다고 가정이란 제도 자체를 없애자고 하지도 않습니다. 탐욕스러운 회사가 있다고 자본주의 자체를 없애자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종교만은 문제가 있으니 없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큰 억지입니까!
    21세기에도 종교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부흥하는 이유는 종교의 효용성이 여전히 엄청나게 크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위안에 더해 사회통합과 질서유지, 전통과 생활방식 계승 등 사회적 순기능은 어떤 사회, 국가기관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역기능이 아무리 커도 순기능보다 크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종교할 것 없이 일정한 삶의 목적과 가치를 제공합니다. 오늘날 큰 인기를 끄는 진화생물학은 생물의 목적이 종의 DNA를 널리 퍼뜨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퍼뜨려야 합니까? 종이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이 말은 삶의 목적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동어반복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절망과 허무에 빠뜨립니다. 땅을 왜 파세요? 파야하니까요. 이런 노동을 견딜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20세기 초 실존주의가 등장한 것입니다. 왜 파는지는 모르니 파는 순간순간 현재를 즐기자. 구덩이가 점점 커지는 것이 보람되지 않나? 땀을 흘리는 이 순간 몸이 상쾌하지 않나? 참으로 땅파기를 즐겁고 보람차게 만드는 것은 꽃씨를 심어 앞마당을 아름다운 꽃밭으로 만들기 위함임을 알 때입니다. 아무리 순간순간의 의미와 보람을 찾으려고 애써도 목적있는 삶이 주는 의미와 기쁨을 대신할 수 없기에 종교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4.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교회
    자, 종교의 미래는 그렇다치고 기독교와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기독교는 이런 순기능이 가장 크기에 당연히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뉴저지장로교회의 미래와 한인사회의 교회 그리고 자녀들이 다닐 미국땅의 교회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될까요? 여전히 우리가 명실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넘어 진리를 품은 참교회로서 사명을 감당키 위해 우리가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그것은 참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참교회가 품은 진리를 보여줍니다. 14절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분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며 또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는 은혜가 가득하며 또 진리가 가득합니다. 이 가득한 은혜와 진리는 그 분의 몸인 교회 안에도 가득합니다. 
    (엡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예수님은 당신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은혜와 진리의 진주를 품은 조개와 같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을 복받게 하시겠다는 약속처럼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에 은혜와 진리를 충만히 부으십니다. 이 사명을 감당할 때 참교회는 비로소 존재의미를 갖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 한 참교회는 위기를 만나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당장 한국과 미국의 교회가 위기를 만난 듯 보이지만 진짜 문제는 ‘외부에서 어떤 도전이 있느냐’가 아니라 ‘은혜와 진리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이 사명을 감당하고 있느냐’는 내부의 사명입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는 바로 이것에 의해 좌우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5.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
    그러므로 우리
    44 min
  • 20230806 은혜로 사는 남자 / 룻 2:4-17
    룻 12:4-17/은혜로 사는 남자
    230806 주일설교
    1. 우리 곁에 낯선 이
    오늘 설교는 퀴즈로 시작합니다. 이제 보여드릴 조각상이 묘사하는 성경구절을 맞추는 것입니다. 주소를 말씀하시거나 그 내용만 비슷하게 맞추셔도 제가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이 청동조형물은 2019년 9월 29일 제105회 세계이민의날을 기념하여 성베드로광장에 처음 설치되었습니다. 캐나다 예술가 티모시 슈말츠(Timothy Schmalz)가 제작한 이 조각상은 현재까지 전 세계 90개국 이상에 설치되었습니다. 보시는 사진의 조각은 5시간 정도 차로 북쪽으로 올라가 캐나다 국경을 넘으면 만나는 몬트리올 성요셉성당 마당에 있습니다. 조각상 하부는 배를 묘사합니다. 배 위에는 실물크기의 체로키인디안, 아프리카노예, 어린이, 임산부 등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난민, 이민자들이 타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두 개의 날개가 삐죽 하늘로 솟아 있습니다. 이 날개는 그들 중 천사가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조각상의 제목은 ‘Angels Unawares-숨겨진 천사들’입니다. 자, 이 조각상이 묘사하는 성경구절은 무엇일까요? 답은 히 13:2입니다.
    (히 13:2) 손님(strangers)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한글성경은 손님이라고 번역해서 귀한 이 대접을 강조하는듯 보이지만 영어성경은 원어에 좀 더 가깝게 strangers라고 번역하여 ‘낯선 이, 나그네, 약자를 환대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강조합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대접하다가 천사들을 환대한 창 18장 사건입니다. 한 가지 더 퀴즈를 냅니다. 이 배에는 모두 몇 명이 타고 있을까요? 짐작해 보십시오. 정확히 140명입니다. 보기보다 많지요? 우리 곁에도 몰라서 그렇지 생각보다 많은 이민자, 난민, 고난의 바다 위를 위태로운 인생의 배를 타고 떠도는 이웃이 있습니다.
    이 말씀과 조각은 난민과 이민자 문제로 큰 갈등을 겪는 이 시대에 중요한 도전을 줍니다. 그리고 타인과 낯선 이에게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의 성공을 삶의 목적이라고 외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이 시대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본문의 주인공 보아스가 그 답을 들려줍니다.
    2. 하나님의 사람으로
    본문 4절은 보아스가 일꾼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묘사하는데 이는 동시에 그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도 알려줍니다.
    (룻 2: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보통 유대인들의 인사는 ‘샬롬’ 우리 식으로는 ‘안녕하세요?’ 정도이고 성경은 제한된 지면에 의례적인 인사를 거의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4절은 굳이 보아스와 일꾼들의 인사하는 장면을 소개하고 그 인사도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교회에서나 들을법한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인사에 일꾼들도 낯설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정중하고도 은혜로운 인사로 답하는 것은 그들이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인사해 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인과 종들,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는 늘 어느 정도 긴장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갑인 주인은 을인 종들에게 종종 고압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정중하고 친절하며 진심으로 축복을 건낼 만큼 호의적입니다. 이는 누가복음 7장에서 병든 하인을 고쳐달라고 주님을 찾아와 간청한 로마의 백부장을 연상시킵니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 약자인 일꾼, 하인에게 인간적 존종과 배려, 애정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율법의 방식 곧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좇는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율법은 왕, 주인, 지주가 세상에서 생각하듯 권력과 지위와 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 모든 힘과 권위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잠시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왕조차도 고대의 모든 다른 나라와 달리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갖지 못 합니다. 율법이 정하고 가르치는 대로 백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사실상 인류최초의 법치주의입니다. 주님이 명하신 것처럼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는 자신이 권력자가 아니라 청지기 곧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의 매니저임을 깨닫고 형제, 자매를 대합니다.
    보아스는 율법의 시선 곧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과 일꾼을 보았고 그렇기에 그들에게 절대 고압적일 수 없으며 존중과 친절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습니다. 사람의 시선으로는 절대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의인과 죄인을 동일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시선으로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긍휼이 필요한 죄인임을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모두를 보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런 보아스의 마음가짐은 낯선 이민자를 대하는 자세에서도 드러납니다. 5절입니다.
    (룻 2: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부자에게 이삭을 주우러 온 가난한 여자는 손해를 끼치는 귀찮고 성가신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이에게 관심 따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관심을 가집니다. 온통 자신의 필요만 몰두하는 이들은 다른 이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 합니다. 그는 룻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멸시받는 이방여인인 것을 안 후에도 여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대합니다. 11절입니다.
    (룻 2: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이방여자가 염치없이 이스라엘 여자들 사이에서 이삭을 줍느냐? 남편 죽게 만든 여자가 무슨 염치로 빈 손으로 와서 시모와 빌어먹느냐? 왜 하필 내 밭에서 이삭을 축내느냐?’ 온갖 부정적 시선으로 그녀를 대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룻의 잘한 점을 정확히 묘사하며 칭찬합니다. 이것이 쉬워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약점, 문제, 허물을 찾아내는 은사를 가졌습니다. 자연인으로 우리는 늘 누군가를 험담하고 불평하고 비난하는데 익숙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마치 의로운 존재요, 재판관과 같은 존재라는 자존감을 갖게 해주기 때문입니다만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인간의 본성적 원죄입니다. 반면 타인의 장점, 공로, 가치를 보는 능력이 없습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대부분 우리에게 없는 엄청난 능력입니다. 이는 우리의 무서운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씻으시고 그 분의 의로 덮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특별한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들이 이웃에게 가질 수 있는 태도입니다. 비판과 정죄 대신 사랑과 긍휼의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4. 은혜와 축복을
    보아스는 그런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은혜를 베풉니다.
    (룻 2: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룻 2: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룻 2: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그는 손해를 감수해가며 그녀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그리고 그녀를 축복합니다.
    (룻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축복이 돈드는 것도 아닌데 뭐 어렵나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가 축복을 많이 하는지, 저주를 많이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주머
    44 min
  • 20230730 당신을 덮는 은혜의 날개 / 룻 1:22-2:13
    룻 1:22-2:13/당신을 덮는 은혜의 날개
    230730 주일설교
    1. 유기견처럼 처량한
    요즘 제 마음을 울리는 영상이 있습니다. 바로 유기견 구조 이야기입니다. 짧은 영상을 보겠습니다. 본능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개가 사람의 눈을 피한다는 것은 유기되기 전 많은 학대를 당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불쌍한 아이입니까! 이 영상에 감정이입을 해보세요. 내가 저 상황이라면… 여러분에게 여건이 된다면 이런 불쌍한 강아지를 모른 척 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어지간히 개를 싫어하거나 냉정한 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이 강아지를 불쌍히 여기고 돕고 싶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감정이입을 해보십시오. 혹시 구조한 이가 아니라 저 유기견에 감정이입을 해보신 분은 없습니까? 자신이 세상에 학대받고 버려져 저 유기견 같이 처량한 신세라고 여긴 분은 안 계신가요? 한 번 쯤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는 분들은 틀림없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저 유기견처럼 불쌍한 모습으로 찾아온 자녀를 자비로우신 주님은 어떻게 대하실까요? 냉정하게 모른 척 하실까요? 주님이 어떻게 하실지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보아스의 덕담이 이렇게 알려줍니다.
    (룻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하나님은 당신의 날개 아래 보호 받으러 오는 자녀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고 품으시고 상주십니다. 이 말은 그저 보아스의 덕담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보아스의 신앙고백이며 이 믿음이 진리임을 본문이 증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가 항상 당신의 자녀들을 품으신다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은혜의 날개를 펴서 자녀들을 품으십니까?
    룻기로 돌아와서 2장 전반부를 읽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운명에 학대당하고 버림받은 유기견처럼 처량한 모습으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타지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늙고 가난한 몸으로 외국인 며느리 하나만 달랑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몸과 마음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고향사람들이 몰라보게 상한 얼굴을 보고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나오미’ 곧 즐거움이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 곧 고통이라고 불러달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룻 역시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늙고 가난한 시모를 모시고 낯선 타국에서 아무런 보호도, 돌봄도 없이 외국인 여자의 몸으로 극빈층으로 살아야 합니다. 얼마나 처량합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어미새가 새끼를 날개로 품어 돌보듯 고통에 지친 그들을 은혜의 날개로 포근히 품는 분이 계신다고 강조합니다. 능력의 창조자이시자, 은혜의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은혜의 날개를 펴서 그들을 포근히 품으십니다.
    2. 은혜로운 법의 날개로
    그 날개는 은혜로운 법의 날개입니다. 2절입니다.
    (룻 2: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여기 무슨 법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법이 있습니다. 추수 때에 베들레헴에 도착한 룻은 시모와 함께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밭으로 가서 이삭을 줍겠다고 하고 나오미는 자연스럽게 가라고 합니다. 밭에 가면 먹을 것이 생깁니까? 이삭을 줍도록 밭주인이 내버려 두겠습니까? 아침부터 재수없이 여편네가, 욕하고 쫓아내지 않으면 다행 아닙니까? 그런데, 그럴 수 없습니다. 밭주인은 가난한 여자라고 무시하고 쫓아낼 수 없습니다. 그녀는 이삭을 주울 수 있고 먹을 것이 생깁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두신 은혜의 법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율법을 들어 보십시오.
    (레 19: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레 19: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땅주인에게 땅이 없는 빈곤층과 나그네들을 위해 추수를 남김없이 구석구석까지 하지말고 땅에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의무를 부과하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에게 이익의 극대화보다 더불어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명하실 수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모든 땅의 주인은 하나님 당신이며, 땅을 받은 모든 백성은 지주이신 하나님에게 임대받은 소작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주라는 이들도 사실은 진짜 지주이신 하나님의 소작인이며 그러므로 진짜 지주의 명대로 빈자와 나그네들은 수치심 없이 추수밭에 들어가 이삭을 주워 생존할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세상 모든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땅의 모든 약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생존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불운과 불행, 재앙과 실패로 쓰러진 인생을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운 법의 날개로 품고 계십니다.
    룻은 자신의 고향 모압에는 없는 이런 놀라운 은혜의 법을 듣고 밭으로 나가보겠다고 했고 나오미는 그 법을 의지하여 며느리가 수치를 겪지 않고 곡식알갱이를 주워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보내주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은혜의 법이 없었다면 룻이 밭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녀를 그토록 염려하던 나오미가 선듯 가라고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밭주인들은 하나님의 이 은혜의 법을 의지하여 나온 빈자를 멸시하거나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더 많은 수확을 기대하고 땀흘려 열심히 농사지은 이들은 곳곳에 피같은 이삭을 흘리고 줍지도 못 하면 손해를 보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그들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은혜로우십니다. 신명기를 보십시오.
    (신 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묶음을 밭에 두고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만물로 주관하시는 신실하신 참지주 하나님은 순종하는 이들의 모든 일에 복을 내리셔서 이웃을 위해 흘리고 내버려두고 나눈 것보다 더 크고 많은 것으로 갚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베푸는 이나 받는 이 모두를 돌보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넘어진 이를 돌보셔서 다시 일어나 다른 이들을 일으킬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기를 선택한 이들에게는 더 큰 복을 베푸셔서 갚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법은 이렇게 은혜로운 법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법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순종이 아닌 죄악을 선택한 인간의 미련함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창조시 하나님이 주신 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 반면 ‘동산 모든 실과를 마음대로 먹으라.’ 선악과 금지는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생명과 복지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한 울타리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에 굴복하여 이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순간 악의 쓰나미가 인생에 밀어닥쳤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울타리를 스스로 무너뜨려 인생의 모든 면이 죄와 악에게 침범당했기 때문에 이제 더 많은 울타리가 부득이하게 필요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모든 법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자녀를 사랑하여 생명과 복지를 주심입니다. 하나님의 이 은혜로운 법의 날개가 오늘도 변함없이 여러분의 삶을 포근히 덮고 계십니다. 그 날개 아래서 안식을 얻으시길 축복합니다.
    3. 은혜로운 섭리의 날개로 
    그럼 하나님이 은혜의 법을 이렇게 잘 만들어 두셨으니 이 법으로 모든 이들이 생존할 뿐 아니라 복지를 누리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실까요? 이런 생각을 이신론이라고 합니다. 한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지만 자연법칙에 의해 우주가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시고 더 이상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우주의 자연법칙이 신의 노릇을 한다고 믿는 이신론입니다. 오늘날 창조주를 인정하나 인생은 각자가 알아서 잘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 묵시적 이신론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37 min
  • 20230723 제자를 삼는 교회 / 마 28:16-20
    마 28:16-20/제자를 삼는 교회
    230823 주일설교 일대일수료식
    1. 미얀마 세계로선교대학
    지난 6월 초에 저는 이은상 선교사님의 미얀마 선교지를 방문했습니다. 지난 3월에 있었던 세계로선교대학 헌당예배에 꼭 좀 참석해 주기를 요청해 오셨는데 당시 일정이 여의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6월에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카타르 도하와 태국 방콕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서 26시간이 걸린 끝에 미얀마 수도 양곤에 도착해서 신학교와 사역지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선교사님이 헌당예배참석을 요청하신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리 뉴저지장로교회가 이 신학교건물건축을 돕도록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1989년 교수였던 이선교사님 내외는 소명을 받고 목회를 하다가 후에 오지선교사로 부름받았습니다. 2007년부터 미얀마 선교를 시작했는데 남편이 혈액암으로 별세한 후 홀로 젊은이들을 전도하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위해 양곤에 세계로신학교를 세웠는데 건물이 없어 이곳저곳 세를 들어 다녔습니다. 2019년 한국의 한 기도모임의 후원을 받아 드디어 학교건물공사를 시작했는데 팬데믹이 터지면서 시공사가 부도가 나버렸습니다. 공사는 중단되고 돈도 다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상황에서 작년 초 우리 교회 부흥회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부흥회 후 당회원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여 50주년기념사역펀드 중 일부로 건축을 돕기로 하였습니다. 그 후원으로 공사가 재개되었습니다. 그 후 예상치 못한 다른 곳에서도 후원이 들어오면서 1년 만에 마침내 올 초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교회가 공사재개에 큰 힘이 되어주었기에 헌당예배에 꼭 좀 참석해 주기를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이번 방문에도 그간 교우들이 이선교사님을 지정하여 드린 헌금을 모아서 전달하였습니다. 15년이 다 되어가는 선교사역에 적지않은 후원이 있었지만 여전히 선교사님은 차 없이 택시나 제자들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고 숙소도 허름한 모텔방 하나를 장기임대하여 살고 계셨습니다. 신학교건물도 이제야 완공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선교의 첫째 가는 사명은 먼저 일꾼을 세우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모든 자원을 사람을 전도하고 양육하는데 투자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건축도 미루고 차도 없이 지금까지 120여 명의 신실한 제자들을 가르치고 졸업시켜 미얀마 오지 곳곳으로 파송해 왔습니다.
    2. 일꾼을 세우신 예수님
    일꾼을 세우는 것이 먼저라는 이은상 선교사님의 사역철학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의 사역철학이요, 선교와 목회의 대원칙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내내 열두 명의 일꾼을 가르치고 양육하여 제자로 세우는데 전념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 지상대명령을 통해 그들을 보내시며 조직을 만들어라, 땅을 사고 교회건물을 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하신 것처럼 제자를 삼고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 즉 신실한 일꾼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가르침을 이어받은 제자들도 가는 곳마다 조직을 만들거나 건물을 사지 않고 사람을 전도하여 양육하여 복음을 깨닫고 복음으로 살며 복음을 전하는 일꾼을 만들었습니다. 그 일꾼들이 모여 전도하다보니 교회가 탄생하였고 더 효과적으로 사역하려고 조직이 이어서 생겼고 집에서 모이던 이들이 규모가 더 커진 한참 후에야 전용건물 즉 예배당이 생겼습니다. 교회당이 없어져도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조직이 없어져도 다시 만들면 됩니다. 하지만 복음의 일꾼이 사라지면 교회도 사라집니다. 교회는 참된 성도들의 연합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로 세운 디모데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딤후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딤후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충성된 일꾼을 세우는 것, 이것은 모든 시대 교회의 사역과 선교의 핵심가치입니다.
    3. 일꾼을 세우는 선교
    우리 교회를 포함하여 미국의 한인교회가 주력하고 라틴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선교지를 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종교분포가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략 40% 카톨릭, 40% 개신교 그리고 나머지 토착종교를 모두 포함하면 20% 정도가 됩니다. 미국도 개신교 비율이 최근 40% 정도로 떨어졌고 한국은 20% 정도입니다. 이 지역들 대부분이 한국보다 훨씬 높고 미국과 비슷합니다. 이미 복음화된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서구선교사가 가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일단 가성비가 무척 떨어집니다. 선교사 한 가정이 현지에서 사는데 요즘은 어느 지역이든 산업화된 서구사회와 비슷하게 듭니다. 아무리 가난한 나라도 외국인들이 사는 지역의 물가는 선진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비쌉니다. 그렇게 정착한 선교사가 현지인 교회를 세워서 섬기려면 언어와 문화와 생활수준의 엄청난 벽을 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해야 하고 그렇게 노력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큰 목회의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현지인 사역자는 선진국 선교사의 적게는 10분의 1의 생활비로도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어, 문화, 생활수준의 벽이 없이 즉각 성도들의 삶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성비가 엄청나게 높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현지인 교단에 의해 이미 개신교 인구가 40%를 넘어 계속 성장 중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는 더 이상 선교사가 필요없는 것이 아닙니까? 실제로 전체 교회를 놓고본다면 선교자원을 아직도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이슬람국가나 오지에 투입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틴과 남아메리카에서 여전히 서구선교사들의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지도자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지역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이 정규신학교를 나오지 않았거나 나왔더라도 그 신학교의 수준이 무척 낮습니다. 신학교는 수도와 일부 도시 인근에만 있기에 많은 지방사역자가 대부분 신학교를 가본 적이 없습니다. 선교사를 따라다니거나 교회에서 좀 열심히 섬기던 이들이 어느 날 자신을 파스토르라고 부르며 목사가 됩니다. 그렇다보니 성경과 교회에 대한 이해없이 남미카톨릭처럼 토속신앙과 혼합되어 신비적이고 기복적인 방식의 목회를 합니다. 이들 교회가 복음적이고 건강한 교회가 되는 지름길은 그 지도자들이 제대로 된 신학교육과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서구선교사가 비싼 비용을 들여 이 지역에서 땅사고 건물지어 교회세우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그렇게 세운 교회를 방문하여 몇십 명 모이지 않는 곳을 돌아서 나오면 다음 골목에서 현지인 사역자가 섬기는 몇 백 명 교회, 몇 천 명 교회를 만나는 일이 허다합니다. 같은 자원을 투자해서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훨씬 전략적 이익이 높다는 뜻입니다.
    4. 성경적 선교원리
    이는 성경적인 원리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최초의 교회파송공식선교사인 사도 바울은 한 지역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시를 중심으로 로마제국 각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믿는 자들이 나오면 그들 중에서 리더를 세우고 즉시 다음 도시로 갔습니다. 그리고 도시에서 성장한 교회가 주변 시골지역을 전도하도록 맡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교원칙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15:20) 또 내가 (이미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한마디로 이미 전도된 지역에는 가지 않고 미전도지역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선교전략이 가능하려면 또 하나의 필수전략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에 일꾼을 세워 지도력을 위임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도하여 개척한 교회에 머무르지 않고 현지사정에 밝은 리더를 세우고 다른 지역을 전도하기 위해 그 지역을 신속히 떠났습니다. 그렇게 선 이들이 신약성서의 주인공들인 디모데나 디도, 빌레몬, 아볼로, 브리스길라와 아길라 등입니다.
    일꾼을 세우는 것의 중요
    41 min
  • 20230716 모든 민족의 소망 / 룻 1:14-22
    룻 1:14-22/모든 민족의 소망
    230716 주일설교
    1. 당신이라면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나오미가 모압을 떠나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의 앞날을 생각하여 자신과 동행하지 말고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서 재혼하여 잘 살라고 두 번이나 강하게 권합니다. 결국 큰며느리 오르바는 돌아가지만 룻은 그럼에도 나오미를 떠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딸이나 여동생이 있다면 혹은 여러분이라면 이 상황에서 두 며느리 중 어느 쪽을 권하고 선택하시겠습니까? 지난 화요일 일꾼모임에서 질문했더니 7:1의 압도적인 비율로 오르바를 선택하겠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도그럴것이 안전한 부모의 집과 재혼의 가능성을 모두 포기하고 누가봐도 고생길만 훤한 극빈층으로 전락하는 삶을 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모르긴해도 모압에 있던 룻의 부모도 결사반대를 했을 것입니다.
    2. 참된 사랑 
    도대체 왜 룻은 이런 어려운 선택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룻에게 이런 희생을 가능케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를 14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룻 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דבק).
    붙좋았더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다바크(דבק)는 창세기 2장에서 남자와 여자가 연합한다고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דבק)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즉 룻이 나오미를 따라나선 것은 부부의 연합을 만들어내는 사랑만큼이나 뜨거웠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연민이나 긍휼을 넘어서 한 인간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리킵니다. 룻의 마음에 가득한 나오미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대목이 세 번째로 나오미가 룻에게 돌아가라고 권한 후 한 답변에서 드러납니다. 이 룻의 답에서 어머니란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를 세어보십시오.
    (룻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8번입니다. 현대정신의학의 시조라 할만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무의식 중에 내뱉는 단어를 분석하는데서 시작합니다. 반복해 말하는 단어는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가득 차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룻의 마음은 어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자신의 필요와 의지와 요구보다 어머니의 그것을 더욱 앞세웁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들려주신 어리석은 부자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의 말에 무슨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보십시오.
    (눅 12:17) (그 부자가) 마음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눅 12: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나’를 6번 반복합니다. 그의 마음엔 자기가 가득합니다. 룻의 마음에는 자기보다 어머니가 가득합니다. 룻과 같은 마음을 고린도전서 13장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고전 13:5) (사랑은) …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 늙고 가난한 어머니를 붙좇는 사랑, 어머니로 그 마음이 가득한 사랑,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어머니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은 죄인인 우리를 영적 신부로 삼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동시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명하신 온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신 그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우리 주님이 이런 사랑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3. 믿음의 열매
    이런 참된 사랑은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룻 1:16) …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당연히 그녀가 여호와 하나님에 관해 깊이 알고 신앙고백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어머니의 신앙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처음 교회 올 때 성경에 대해 박식해서 신앙고백을 하고 온 것이 아니지 않던가요? 아내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혹은 친구와 지인에 대한 신뢰 때문에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주님을 만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습니까?
    룻의 이 사랑과 믿음은 유대인들에게 충격과 놀라움을 던져주었을 것입니다. 사실 멸시받던 이방인에게서 택함받은 선민 이스라엘 못지않은 때로는 그보다 더 큰 사랑과 믿음을 발견한다는 것은 성경이 강조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4. 이방인에게도 주시는 은혜 
    예수님이 들려주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만난 이를 긍휼히 여겨 위험과 손해를 무릎 쓰고 사랑을 베푼 이는 경건하다 자부하는 이스라엘인이 아닌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가버나움의 한 이방인 백부장은 자기 가족도 아닌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와서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시자 그는 예수님이 말씀만으로도 하인의 병을 고치시는 권위와 능력을 가졌다고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이 놀라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모압사람 룻과 사마리아인과 로마인 백부장 등의 이방인들에게서 이런 사랑과 믿음이 발견된다는 것은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결코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을 향하여 흘러가는 강물처럼 구원역사가 퍼져간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창 12:3) “… 땅의 모든 민족이 너(아브라함)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5. 차별없는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택하심과 긍휼은 결코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로마인 백부장 고넬료의 회심사건을 통해 깨달은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행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행 10: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냐, 이방인이냐를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겉으로 보이는 인종, 성별, 지위, 출신, 국적 등도 따지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직분, 경력, 학력, 재능 등 그 무엇도 따지지 않으십니다. 모든 이들에게 차별없이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역시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이방인으로 구성된 오늘날의 튀르키에, 소아시아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하나님은 룻의 마음에도, 가버나움의 백부장, 백부장 고넬료의 마음에도 착한 일 곧 사랑과 믿음의 씨앗을 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씨앗이 30배, 60배 그리고 100배의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이 선한 일이 룻의 마음에서 사랑과 믿음으로 자라나 마침내 그녀를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가게 만드셨습니다. 룻의 손자가 이새요, 증손자가 다윗왕입니다. 또한 다윗의 후손에서 인류를 위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십니다. 이방여인 룻에게서 메시야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구원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한 일은 기적같은 구원의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룻의 후손으로 나신 예수님은 모든 민족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며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롬 15:12) 또 이사야가 이르되
    38 min
  • 20230709 추락하는 인생에 찾아오신 헤세드 / 룻 1:1-14
    룻 1:1-14/추락하는 인생에 찾아오신 헤세드
    230709 주일설교 룻1장
    한 줄기 빛 같은 책
    전쟁과 기아, 살인과 마약… 매일 쏟아지는 끔찍한 뉴스에 질린 분들을 위한 성경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룻기입니다. 룻기는 봄햇살처럼 따뜻합니다. 단 한 명의 악인도, 끔찍한 범죄도 등장하지 않는데다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룻기는 끝없이 추락만 거듭하는이들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역전의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있어? 뭘 하신단 말이야? 원망하는 이들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인생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이 더 놀랍습니다. 1절은 그 때를 사사시대라고 설명합니다.
    (룻 1: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
    사사시대가 어떤 시절입니까?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살았기에 온갖 끔찍한 일이 쉼없이 벌어지던 때가 아닙니까?
    (삿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그런 시대에조차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결코 꺼지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법을 따라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책이 바로 이 룻기입니다. 아무리 암울한 현실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하며 아무리 어지러운 시기에도 하나님을올곧게 쫓기를 멈추지 말아야 함을 깨우쳐 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들음으로 시작되는 반전
    이야기는 베들레헴 출신 여인 나오미를 주인공으로 시작합니다. 그녀는 복받은 여자였습니다. 결혼하고 두 아들을 두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런 인생이 흉년 때문에 모압으로 이주하면서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모압은 베들레헴에서 요단강을 동쪽으로건너면 바로 만나는 이방땅입니다. 10년의 이주기간에 먼저 남편이 죽습니다. 모압여자와 결혼한 두 아들도 죽습니다. 결국 이방 며느리둘과 남습니다. 한 번 잘 살아보겠다고 미국이민 왔는데 남편 죽고 두 아들 죽고 백인 며느리, 히스패닉 며느리 둘만 여러분 곁에 달랑 남았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이민생활에 기가막힌 일이 한둘이겠습니까? 나오미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추락을 거듭하던 그녀의 삶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 반전이 어디서 시작됩니까? 6절입니다.
    (룻 1:6)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
    그녀는 하나님의 은총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절망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이 소식이 한줄기 빛이 비추었습니다. 인생은 누구의 말을 듣느냐, 어떤 소식을 듣느냐에 따라 생명과 죽음으로 나뉩니다. 마귀의 거짓말을 들은 아담과 하와는 낙원을  잃어버렸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믿은 아브라함은 영원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생명 주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곧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귀의 거짓말이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이들은 영생을 얻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돌아가는 이에게 열리는 구원
    그래서 그녀는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룻 1:6) … 이에 (나오미가)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בושׁ) 하여
    여기서 ’돌아오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슈브’는 구약에서 ‘포로상태에서 돌아오다’ 혹은 ‘우상숭배에서 회개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양식을 얻고자 약속의 땅을 떠난 그녀가 돌아온다는 표현은 아버지를 떠나 자유와 즐거움을 구했다가 돼지우리까지 추락했던 탕자가’깨닫고 일어나 돌아갔다’는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키로 한 결정은 분명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반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여호와의 은혜의 날개 아래 돌아가기로 하자 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돌아온 베들레헴에서도 극빈층의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고 벗어날 소망도, 어떤 다른 희망도 없었지만 룻기를 끝까지 읽은 이는하나님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극적으로 역전시키시는지 압니다. 그녀 자신은 깨닫지 못 했지만 하나님께 돌아가기로 한 순간 절망적 삶에반전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 돌아온 삶은 이미 역전이 시작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곁에 있는 하나님의 헤세드
    그녀가 받은 은총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들 곧 이방인 며느리에게서 왔습니다. 보통 10대 초반에 결혼하는 당시 풍습과 10년의이주기간을 고려하면 두 며느리는 대략 10대 중후반에서 많이 잡아야 20대 초반이 넘지 않는 과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들은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 재혼할 기회를 내버리고 늙고 가난한 시어머니를 섬기기 위해 그녀들에게는 낯선 이방땅 이스라엘로 이주하겠다고 따라나선것입니다. 나오미는 그녀들로 인해 얼마나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며느리들이 어디 있습니까! ‘목사님, 우리 며느리가 이 성경을 좀 봐야 돼요.’ 그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은혜는 며느리들에게서 나오미에게로만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들이 이유없이 나오미를 따라나선 것일까요! 나오미 역시 며느리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십시오.
    (룻 1: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너희를 선대(חֶסֶד)하시기를 원하며 (룻 1:9)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사람이 물에 빠지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살기 위해 무엇이든 붙잡고 늘어집니다. 나오미는 지금 남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늙고가난한데 젊은 며느리가 둘이나  있으면 어떻게든 입에 풀칠하는데 도움이 되면 되었지, 손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불행으로 그녀들까지 고통을 당할까 그녀들을 더 염려합니다.
    (룻 1:13) …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그녀는 자신이 물에 더 깊이 빠져들어가는데도 며느리들을 밀어 올려 살리려 애씁니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식에게도 그렇게 하지 못 합니다. 나오미는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며느리들에게 은총을 베풀고 있습니다. 한국 시어머니였다면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고 욕을, 욕을했을 법도 합니다만 나오미는 그보다 훨씬 분별력 있고 너그럽습니다. 자신의 고난을 ‘여호와께서 자신을 치신 것이라’하고 며느리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럼 여호와를 원망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이것은 원망이 아니라 고난마저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아래 있다는 믿음의고백입니다. 어떻게 압니까? 그녀가 ‘여호와께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나 며느리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여호와를 원망했다면 여호와의 은총을 입으러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지도 않았을 터이고 며느리들을 이렇게 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는 사람도 원망합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당시 이방인을 저주의 대상으로 여겼던 이스라엘 사람과 달리 세상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아야 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였습니다.
    (창 12:3) “… 땅의 모든 족속이 너(아브라함)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그녀는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리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8절에서 여호와께서 며느리들을 선대하기를 원한다는 표현에서 ‘선대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자비, 긍휼, 사랑 등으로 번역됩니다. 이 헤세드는 룻기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자비 혹은 그 자비에서 나온 성도의 자비를 묘사하기 위해 등장합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서로에게 보여주는 이 애정과 헌신은 하나님의 은총이 고난 중에도 사실은 우리 곁에 늘 머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하고 며느리들 역시 나오미에게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습니다. 나오미는 특히룻에게서 이 헤세드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42 min
  • 20230702 나는 신이다 / 눅 14:25-35
    눅 14:25-35/나는 신이다
    230702 주일설교
    전능감의 갈구
    최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한국 드라마 the glory는 학창시절의 왕따와 괴롭힘을 소재로 합니다. 이제 전세계적으로 일반명사가 된왕따는 미국에서 Bullying, 일본에서는 이지메라고 합니다. 왕따가 없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왕따와 괴롭힘, 학교폭력 등으로 자살하는학생의 뉴스가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이런 일을 뉴스로 듣고 또 실제로 겪으면 도대체 왜 이런 악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이지메의 구조’는 왕따의 원조국이라 할 일본에서 평생 이지메 문제만을 연구하며 이지메학을 창시했다고 평가받는 ‘나이토아사오’가 그 이유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지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교실 안에서 학교, 사회의 공식적 질서와 다른 그들만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가해자와 이를 묵인하는 동조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질서를 만들고 피해자를 가혹하게 괴롭히는 가해자들은 인터뷰에서 타인을 자신의 의지대로 조종하고 통제할 때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이 사라지고 강력한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이든다고 답했습니다. 저자는 이런 느낌을 전능감이라고 정의하며 가해자는 불안감에 해소하기 위해 전능감을 갈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들이 느끼는 전능감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각각 파괴하는 신, 소유하는 신 그리고 장난치는 신입니다. 저자는 이런 전능감을 갈구하는 심리가 싸이코패스나 연쇄살인범에게서도 발견되고 군대에서의 가혹행위, 직장에서의 갑질의 이유이기도 하다고 설명합니다.
    자아실현의 바람
    그럼 전능감의 갈구는 이런 문제 많은 사람에게서만 발견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철학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니체는 인간이 이제 초인 super human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 초인은 도덕과 의미와 목적을 더 이상 신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가 정하는 존재입니다. 곧 인간이 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니체의 주장을 받아들인 영국철학자 토마스 힐 그린은 인생의 목적은 자아실현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누구나 쓰는 용어인 자아실현은 자신의 잠재력과 욕구를 모두 실현하는 것입니다.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 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 현대인이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용어 자아실현 욕구 역시 전능감의 갈구와 그 뿌리가같습니다. 그것은 신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야말로 태초부터 인간을 유혹해온 가장 근원적인 욕구이자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쓴 이 표현을 들어보십시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 그래서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싶다. 하나님에게 의존하여 살지 않고 나도 스스로 있는 존재처럼 살고 싶다. 이것이 태초부터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근원적 욕망입니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에 나오는 이단교주만 신이 되고 싶은 것이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신이 되고 싶습니다. 왕따 가해자나 군대의 악독한 상관, 직장에 갑질하는 상사나 진상고객들이 신이 되고 싶은 것처럼 우리는 가정이나 일터, 심지어 교회에서도 신이 되려고 합니다. 아이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은 부모도 사실은 신이 되고 싶습니다. 부하직원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때 화가 나는 상사도 사실은 신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향해원망과 분노를 쏟아놓는 신앙인도 사실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도 깨닫지 못 하지만 사실은 ‘나는 신이다, 나를 경배하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것은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그러므로 신이 되려는 마음이야말로 현대인이 참된 기독교신앙을 갖기 어렵게 만드는 진짜 이유입니다. 자아실현과 하나님의 뜻은 충돌합니다. 전능감을 갈구하는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굴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같이 되고 싶은 이는 자신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의 마음 속에는 크든작든 이 전능감의 갈구가 있습니다. 전능감을 갈구하니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 꿇지 못 합니다. 몸은 교회에 나와있어도 마음은 자아실현을 구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교회에 다니다가 그 대가로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신이 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참신이신 하나님의종이 되기를 결단하고 자아실현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구하는 삶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받은 삶이며 영원히 구원받을 삶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당신을 따르는 많은 무리에게 제자의 길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눅 14:2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예수님이 가시는 길로 함께 간다고 해서 제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수많은 무리일 뿐입니다. 무리는 안타깝지만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곁에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욕망과 계획을 섬기는 이들입니다. 제자는 그들과 다릅니다. 제자라야 예수님과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 제자의 길은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첫째는 자신에게 소중하던 그 어떤 것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는 곧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다른 버전입니다. 소중한 가족도, 자신의 생명까지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이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둘째는 제자의 길에 부과되는 희생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죽음으로 사는 길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죽습니까? 신이 되려는 자아가 죽습니다. 자아실현을 바라는 욕망과 계획이 죽습니다. 그럴 때 신이 되려는 헛된 욕망을 버리고 참신이신 하나님의 종으로, 자아를 실현하려는 헛된 바람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다시 태어납니다. 죽으면 성도는 부활합니다. 죽어야 성도는 부활합니다. 예수님은마태복음에서 이 진리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어도 예수님을 따르면 참생명으로 살아납니다. 이 진리를 믿고 체험하는 이들은 살아나기 위해 날마다죽습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신이 되려는 자아를 죽이는 길이야말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참으로 사는 길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령으로 거듭난 제자
    그러나 이 진리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신이 되려는 마음으로 몸만 교회를 드나듭니다. 그러면죽어서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리라 막연하게 기대합니다.
    그런 제자가 아닌 무리에게 예수님은 진지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대해 생각하라고 두 비유를 들어 도전하십니다. 망대를 세우려는 자가 충분한 돈이 있는지 계산도 하지 않고 시작했다가는 결국 공사도 끝내지 못 하고 웃음거리가 되고야 말지 않겠느냐? 전쟁에 나가려는 왕이 충분한 군대가 있는지 헤아려보지도 않고 나갔다가는 전쟁에도 지고 목숨도 잃지 않겠느냐? 망대짓기가 많은 비용이 들고 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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