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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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pisodes

  • 20230319 피해자로 살지 않기 / 요 15:9-17
    요 15:9-17/피해자로 살지 않기
    230319 주일설교
    1. 피해자로 살지 않기
    연진아, 설교 시작했어, 잠에서 깨야지… 요즘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한국드라마 ‘더 글로리’가 화제입니다. 무서운 학교폭력으로 삶이 망가진 한 여인이 가해자들을 철저히 응징한다는 복수이야기입니다. 시청자들은 피해자에게 감정이입하면서 현실에서도 이런 사이다같은 정의실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드라마 말미 복수에 성공한 주인공은 건물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 장면은 복수에 성공했음에도 그녀의 지옥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복수심은 복수성공여부와 상관없이 지옥을 살게 만듭니다.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인 이지선 씨는 23살에 음주운전자가 일으킨 교통사고로 전신 3도 화상을 입고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40번이 넘는 수술을 지금도 계속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사고 후 23년이 지난 올 해 46세가 되어 모교인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돌아왔습니다. 자신을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사고 2년 후 남은 평생을 음주운전가해자의 피해자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원망하고 괴로워하며 살기 싫었습니다. 그 비극이 자신을 더 이상 괴롭히도록 못하도록 음주운전자를 용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녀는 피해자가 아닌 하나님의 딸 이지선으로 살기를 결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녀는 과거와 잘 헤어졌고 건강한 모습으로, 남들의 눈에는 여전히 아프지만, 살았고 밝은 모습으로 모교에 교수로 돌아왔습니다.
    2. 사랑으로 치유하기
    그녀로 하여금 사고와 잘 헤어져 피해자가 아닌 승리자로 살도록 만들어준 힘이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랑만이 우리 삶을 모든 과거의 상처, 현재의 비극,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구원해 줍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만큼 많은 것을 해결해 주는 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할 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본성은 사랑보다는 미움, 감사보다는 불평, 축복보다는 비방을 하는데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 사랑하고 미운 원수와 아픈 과거까지 사랑합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사랑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의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누린 아들 예수님은 배운 대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을 보고 배워서 아들 예수님 안에 거합니다. 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들은 또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입니다. 그 계명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누립니다. 그 사랑의 힘은 얼마나 큰 지 제자들에게 스스로의 힘으로는 꿈도꿀수없는 기적을 가능케 합니다. 그 사랑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제자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은 줄 믿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할 힘을 얻습니다. 순종하여 서로 사랑할 때 주님의 더 큰 사랑을 받습니다. 이 큰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길 축복합니다.
    3. 충만한 기쁨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넘치는 복을 부어주십니다. 첫째는 넘치는 기쁨입니다.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인생에서 진정한 기쁨을 주는 것을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대가없는 순수한 참 사랑만큼 순수하고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이 사랑은 보답여부와 상관없이 사랑함 그 자체로 기쁨을 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인인 인간을 영원히 사랑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체가 사랑이시기에 죄인을 긍휼히 여기실 때, 죄인을 사랑하실 때 당신은 큰 기쁨을 누리십니다. 그래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죄인이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큰 슬픔과 고통을 느끼십니다. 그 슬픔은 그 죄인이 사랑에 보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음으로 멸망을 피하지 못 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요, 고통입니다. 사랑은 생명의 가장 큰 동력이요, 생명의 목적이며, 생명의 징후입니다. 우리는 더 사랑할수록 더 생명을 충만히 누립니다. 더 사랑할수록 더 하나님을 닮습니다. 반면 사랑없는 생명은 그러므로 사실상 죽은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떠난 이는 그래서 영적으로 죽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모르는 이는 영적으로 죽은 이입니다.
    아무리 작은 사랑도 큰 기쁨을 줍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닮은 참사랑을 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릴지요! 여러분 모두 이런 사랑으로 충만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4. 친밀한 관계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두 번째 복은 친밀한 관계입니다.
    (요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예수님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는 이는 주님과 친구가 됩니다.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종은 그저 복종할 뿐입니다. 주인은 그저 명령할 뿐입니다. 하지만 친구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동의를 구하고 도움을 부탁합니다. 주님은 서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친구로 대하십니다. 그들은 사랑을 통해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이해합니다. 그런 이는 종처럼 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닮은 이들을 이렇게 특별하게 대하십니다. 모세를 어떻게 대하셨나 보십시오.
    (출 33: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렇게 친밀한 친구처럼 대하셨다는 출 33장 이전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32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율법을 받으러 올라가 있는 동안 산 밑에서 백성이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 우상숭배를 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들을 멸망시키고 노아와 아브라함을 새로운 시조로 새운 것처럼 모세를 시조로 새로운 민족을 만들겠다고 하시자 모세는 두 번이나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기를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고 대신 그들의 죄를 사하여달라고 합니다.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킨 후에 33장으로 넘어옵니다. 모세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간구하였을 때 그는 생명을 실제로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닮은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친구처럼 대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주님을 닮고 주님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교제를 누립니다.
    백악관 구경을 가려고 입구에서 서류작업을 하고 기다리고 인터뷰를 하는데 대통령이 나와서 ‘미스터 김, 그것 필요없어요. 바로 들어와요.’하고 ‘내 친구야.’ 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 구원주 그리스도께서 친구로 대해주신다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서로 사랑하는 제자되어 주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5. 응답받는 기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세 번째 복은 응답받는 기도입니다.
    (요 15:16) …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주님처럼 사랑하는 이는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
    35 min
  • 20230312 붙어있는 깨끗한 가지 / 요 15:1-8
    요 15:1-8/붙어있는 깨끗한 가지
    230312 주일설교
    1. 열매맺는 인생
    여기 크고 풍성하고 달콤한 포도와 작고 부실하고 맛없는 포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드시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이 이 풍성한 것과 부실한 것 중 어느 것이 되기를 바라실까요? 바보같은 질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렇게 풍성한 열매맺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까?
    지난 주에 이어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 후반부를 살펴봅니다. 지난 주에는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돕는 두 분을 소개했습니다. 한 분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요, 또 한 분은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두 분은 사랑과 인내로 우리의 삶이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도우십니다. 오늘은 두 분의 도움을 받아 풍성한 열매맺는 두 가지 조건을 살펴 봅니다. 어떤 조건이 갖춰지면 우리 인생은 풍성한 열매를 맺을까요?
    첫 번째 조건은 열매가 달리는 가지가 깨끗해야 합니다. 깨끗함은 정결함을 의미합니다. 지저분한 가지 곧 정결하지 못 한 성도는 열매를 많이 맺기 어렵습니다. 열매맺기를 방해하는 잔가지 즉 죄악와 나쁜 습관과 중독, 마음의 응어리와 원한 등을 다 쳐내고 하나님이 주신 목적과 비전을 향해 쭉 뻗어있는 가지라야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2. 말씀으로 깨끗하라
    그럼 이렇게 깨끗한 가지가 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본문 3절입니다.
    (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예수님의 말씀엔 성도의 마음과 행실을 정결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햇살이 곰팡이를 죽이고 락스가 세균을 죽이듯 말씀은 죄와 악을 소멸시킵니다. 말씀의 빛이 영혼에 뿌려지도록 성도가 마음을 열 때 곧 온전히 믿을 때 정결케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요 5:24) “…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온전한 믿음으로 응답하면 속사람이 정결케 되고 행위까지 깨끗하게 변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도 정결해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믿는 사람만이 완전히 순종합니다. 세계최고의 감독이 선수에게 작전지시를 합니다. ‘공이 오른쪽 윙으로 연결되면 너는 무조건 왼쪽으로 달려들어가, 그럼 센터링이 올라갈거야.’ 지시대로 죽어라고 뜁니다. 반면 경력도, 실력도 없는 감독이라 생각하면 몸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아이고, 이런 큰시합에서 뛰어보기라도 했나? 작전도 어설퍼 보이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이만이 그 말씀을 온전히 순종합니다. 이 믿음과 순종이 성도를 정결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정결한 성도라야 열매맺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3. 고난으로깨끗하라
    깨끗한 가지가 되는 길이 또 하나 있습니다. 2절로 돌아갑니다.
    (요 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열매를 맺지 못하여 잘려나가 가지는 누구일까요? 가까이는 열두 제자 중 마귀에게 속아 멸망으로 떨어진 가룟 유다요, 멀리는 욕심을 내려놓지 못 해 주님을 찾아왔었지만 결국 떠나간 부자 청년이요, 한 때 주님을 따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한 수많은 이들입니다. 그들과 달리 예수님 앞에 끝까지 남은 이 열한 명 제자는 열매맺는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가지치기로 이들을 더욱 깨끗하게 만든다고 지난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으로 이들의 잔가지, 죄와 나쁜 습관과 중독과 고집을 잘라내십니까? 바로 고난의 가위를 통해서입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의 가위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해가 되는 온갖 잔가지를 깨끗이 잘라냅니다. 우리에겐 이렇게 잘려나갈 잔가지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가 기꺼이 이 가지치기를 잘 견디도록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견디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히 2:10) …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예수님)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자 큰 사랑과 세심한 계획으로 고난의 가위를 들이대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난을 원망과 탄식으로 맞이하지 마십시오. 믿음과 감사로 감당하는 이는 마음과 입술과 행위가 정결케 되는 놀라운 은총을 누립니다. 고난은 우리를 깨끗게 하는, 위장된 축복입니다. 우리를 깨끗게 하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고난 중에도 기뻐함으로 풍성한 열매맺는 정결한 가지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붙어있으라
    풍성한 열매맺는 두 번째 조건은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4-5절입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깨끗한 가지가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비로소 양분을 넘치도록 공급받아 열매를 풍성하게 맺습니다. 아무리 깨끗해도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양분을 전혀 공급받을 수 없기에 이렇게 됩니다.
    (요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그러므로 풍성한 열매맺는 가지의 두 가지 조건은 깨끗한 가지가 참포도나무에 견고하게 붙어있는 것입니다. 이 붙어있으라는 명령의 의미는 열매맺음이 우리 자신의 자원과 노력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종교적 삶과 복음적 삶의 가장 큰 차이가 이것입니다. 종교적 삶은 선하게 살아 신을 만족시키고 구원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적 삶은 선하게 사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도, 구원의 자격을 얻는 것도 모두 불가능함을 깨닫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에 그 분을 의지할 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공급되는 넘치는 은혜의 양분으로서만 우리는 선한 삶과 아름다운 믿음의 풍성한 열매맺을 수 있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자원이 어디서 나오느냐가 완전히 다르고, 그 삶의 충만한 기쁨이 있느냐, 없느냐가 다르고, 그 결과 생명이냐, 멸망이냐로 완전히 달라집니다. 주님은 그 분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기쁨을 우리에게 날마다 공급해 주기를 바라시기에 당신에게 늘 붙어있으라고 하십니다.
    5. 말씀과 기도로
    그럼 붙어있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7절입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말씀을 늘 묵상하고 입술로 고백하고 순종하여 사는 것이 곧 주님 안에 거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이든 기도하는 대로 이루십니다. 이런 상태가 주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어렵지 않습니다. 고집불통에, 통제불능에, 번번이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직원이 제안을 합니다. 사장님, 이번 가을 패션쑈에는 이런 제품을 내보면 어떨까요? 글쎄, 별로 같은데, 생각해 봅시다. 충성스럽고 늘 좋은 아이디어와 성실함으로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 주고 회사를 사랑하는 직원이 제안을 합니다. 자네 말대로 하세. 팍팍 밀어줄테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이 사장은 늘 그 충성스러운 직원을 마음에 담고 삽니다. 다음 번 인사에 저 친구를 승진시켜야지. 언젠가 이 내 파트너로 삼고 나중엔 이 사업을 넘겨줘야지.
    이런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상태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성도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기도를 즐거워하는 제자라야 주님을 기뻐합니다. 또한 붙어있으라는 명령은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와의 연결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몸과 떨어지면 당연히 주님께로부터 떨어집니다. 교회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늘 주님께 붙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6. 주님께 영광과 기쁨을
    이렇게 주님에게 붙어있으면
    42 min
  • 20230305 가지치기하는 농부 / 요 15:1-8
    요 15:1-8/가지치기하는 농부
    230305 주일설교
    1. 최고의 포도
    저는 과일이 주식이라 할 만큼 좋아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포도를 참 좋아합니다. 굵고 싱싱하고 달콤한 한국산 포도와 비길만한 것은 세상에 별로 없습니다. 이런 포도는 당연히 저절로 생산되지 않습니다. 농부의 큰 정성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좋은 포도를 얻기 위해 농부는 어떤 수고를 할까요? 이 농부의 수고를 잘 이해하면 우리 영성에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한 요한복음 15장부터 17장까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 시내의 최후의 만찬 자리를 떠난 직후부터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기 전까지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마 어두운 예루살렘 시내를 걸으시거나 예루살렘과 겟세마네 동산 사이의 기드론 골짜기를 지나실 때 하셨다고 봅니다. 본문 1-8절에서 예수님은 당신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들려주십니다. 이 본문을 두 주에 걸쳐 묵상합니다.
    2. 참포도나무
    1절에서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7번이나 반복하신 ‘에고 에이미’ 곧 ‘나는 무엇이다’란 표현의 마지막 7번째 말씀을 하십니다.
    (요 15: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당신을 포도나무 그 중에서도 참포도나무라 비유하신 것은 왜일까요? 생각해 보니 ‘이 교훈을 가르치기에 포도나무가 좋은 비유가 될 것 같아’서였을까요? 늘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신약의 교훈은 모두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구약 이사야서에서 포도나무의 이미지를 차용하셨습니다.
    (사 5: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사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이스라엘)를 심었도다.
    땅을 개간해 심은 이 극상품 포도나무는 여호와께서 가나안땅에 이주시킨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기대하신 바가 무엇이었다는 말입니까? 바로 극상품 포도나무입니다. 곧 세상에서 가장 보배롭고 거룩한 당신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그저그런 인생을 살라고, 등따시고 배불러 걱정이 없는 인생을 살라고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인생, 극상품 포도나무 같은 인생을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포도나무 비유는 시편에도 나옵니다.
    (시 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이스라엘)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시 80:9)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시 80:10)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시 80:11)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그 땅에서 깊이 뿌리내리고 복을 누려야 했고 또 그 복을 온 세상에 전하여야 했습니다. 이 역시 오늘날 성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복을 누리며 그 복으로 인해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어 세상에 그 열매를 퍼뜨리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애초에 이 복과 사명을 부여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나 죄악으로 실패하고 남북으로 분열되더니 멸망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참포도나무가 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내팽개친 하나님의 복과 사명을 이루실 이가 바로 당신이라는 뜻에서 참포도나무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새이스라엘 민족인 교회가 당신을 통해 그 복과 사명을 이루도록 하시려고 당신에게 붙어있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사명을 이루실 진짜 이스라엘, 참포도나무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지 않는 이는 복과 사명을 누리고 이루지 못 합니다.
    3. 농부와 성장
    또한 주님은 1절에서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요 15: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포도나무를 자라게 하는 농부처럼 하나님은 성도를 자라게 도우십니다. 이 점을 신약 곳곳에서 강조합니다.
    (고전 3:7) 그런즉 심는(복음 전하는) 이나 물 주는(가르치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골 2:19) … 온 몸(교회)이 머리(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은혜의)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하나님은 은혜를 넘치도록 주셔서 성도를 자라게 하시는 영혼의 농부이십니다. 영적 성장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성장해야지, 작정한다고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은총의 열매는 보통 우리 노력에 비례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올라갑니다. 특별은총의 열매는 우리의 노력 외에 특별한 은총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기도한다고 믿음이 깊어지고, 열심히 성경 읽는다는 더 지혜롭게 되는 게 아닙니다. 바리새인만큼 열심히 기도하고 부지런히 율법을 암송한 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 하는 인간의 노력은 오히려 교만과 위선을 낳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기도하고 성경읽는 이가 진정한 성장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노력과 수고를 하든 늘 겸손하고 진실하게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신약성경은 성도의 두 가지 열매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거룩한 삶의 열매입니다. 갈 5:22-23을 보십시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 아홉 가지 열매는 모두 성품과 관계, 삶에 맺히는 열매입니다. 두 번째는 전도와 선교의 열매입니다.
    (막 4:29) 열매(영혼)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구원) 때가 이르렀음이라.
    4. 가지치기
    그럼 농부되신 하나님이 이 성품과 선교의 열매를 맺도록 무엇을 하십니까? 바로 가지치기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치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나옵니다.
    (요 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첫째는 굵은 가지 중 열매맺지 않고 양분만 섭취하는 가지를 잘라내서 양분이 열매맺는 가지에게 가도록 하는 것이요, 둘째는 열매맺는 가지에서 열매가 달린 부분을 제외한 잔가지를 깨끗하게 잘라내서 양분이 열매에게 집중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첫째 열매없는 가지치기는 교회에 몸을 담고 있는 듯 보이나 아무런 거룩의 열매도, 선교의 열매도 맺지 않는 이를 가리킵니다. 잘라버리신다는 표현은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요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불은 성경에서 늘 심판의 이미지로 쓰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이보다 더 불쌍한 이가 주여, 주여 하고도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 하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는 저주의 음성을 듣는 이입니다. 매주 복음을 듣고도, 복음을 공부하고 실천할 기회가 주변에 널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모른 채 살아서 아무 열매를 맺지 못 하는 이들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런 이들이 단 한 분도 없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열매맺는 가지를 깨끗게 하신다는 말씀은 우리의 성품과 삶을 더 정결하고 성숙하게 다듬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양분을 빼앗는 잔가지를 깨끗히 쳐내서 열매가 더 굵고 달콤하게 만드시는 것처럼 우리 성품과 선교의 열매를 방해하는 온갖 것들을 깨끗히 정리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에 주님이 쳐내기를 원하시는 불필요한 잔가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봉사할 시간, 전도할 시간, 양육받을 시간, 단기선교 갈 시간이 부족하시죠? 혹 유투브 보고 넷플릭스 보고 수다 떨고 골프 치느라 시간을 다 써버렸기 때문은 아닙니까? 십일조할 돈도, 선교헌금할 돈도 늘 부족하시지요? 혹 더 좋은 차를 바꾸느라, 더 큰 집 페이먼트 내느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쓸 돈이 남아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40 min
  • 20230226 세상에 없는 사랑 / 롬 9:1-5
    롬 9:1-5/세상에 없는 사랑
    230226 3.1절
    1. 우크라이나 전쟁
    지난 금요일 2월 24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금까지 러시아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골리앗 앞에 선 다윗과 같습니다. 지난 1년 간 민간인 4만 명, 우크라이나 군인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약 3천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지금도 전장에서는 계속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그냥 러시아에 항복하고 속국으로 살면 안 되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속국이 되면 차별과 멸시, 억압과 착취를 피할 수 없기에 맞서싸운다고 하지만 죽으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차별이나 멸시를 받아도 사는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들은 목숨을 걸고 여전히 싸우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자신의 안위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기적 인간이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족과 조국을 향한 사랑입니다. 비록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해도 조국을 지키고 동족들이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면 결코 아깝지 않다는 마음 곧 조국사랑, 동족사랑입니다. 우리는 총을 들고 사선을 누비는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이들입니다. 조국의 해방과 동족의 안녕을 위해 숱한 순교의 피를 뿌린 선조들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2. 삼일절
    오늘은 해외한인장로회 산하 모든 교회가 매년 지키는 3.1절 기념주일예배입니다. 지금부터 104년 전 3월 1일에 일제식민치하의 우리 선조들은 고종장례일인 3월 1일에 맞추어 자주독립을 요구하는 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3개월간 106만 여명이 참여하여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47,000여 명이 구속되고 9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3.1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일제는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이전의 무단통치를 일명 문화통치로 전환하였습니다.
    3.1운동에 기독교는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민족대표 33인 중 절반에 해당하는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만세운동 직후부터 5월까지 구속된 이들의 22%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서울 외 지방 만세운동은 대부분 교회가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구는 약 20만 명으로 1,600만 인구의 1.5% 정도였지만 참여도는 그 열 배가 넘었습니다. 당연히 가장 큰 탄압을 받은 조직이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우리 선조들의 희생으로 오늘 우리는 자유롭고 번영한 조국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갑니다. 비록 이국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지만 이토록 자랑스러운 뿌리를 가졌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전세계에서 경제, 문화, 정치분야의 선진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작년 미국의 한 시사주간지는 전세계국가의 국력순위를 매기면서 한국을 당당히 6위에 올려두었습니다. 전년대비 2계단이나 상승한 것으로 일본과 프랑스보다 국력이 더 큰 것으로 나왔습니다. 불과 반세기 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면 아마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우크라이나를 위해 피흘리고 기도하는 이들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나라에 일어난 기적이 우크라이나에는 왜 일어나지 못 하겠습니까? 선교지를 방문하여 설교할 때마다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나라 한국은 지금 여러분의 나라보다 훨씬 가난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만 지금은 세계적인 강국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나라에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지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자신의 위성국가 쯤으로 취급합니다만 사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기원이 된 나라입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의 기원이 된 키이우루시공국이 바로 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의 러시아땅은 당시 키이우루시공국의 통치지역 변방이었습니다. 역사는 돌고돌아 변방의 땅이 거대한 러시아제국이 되어 오히려 우크라이나땅을 짓밟고 있습니다. 그 반대의 일도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에 편에 선 이들은 잠시 패배하는 듯 보여도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이 소망을 붙들고 의를 위해 고난당하기도 두려워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을 믿는 이들에게는 조국사랑, 민족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3. 성도의 조국사랑
    오늘 본문은 동족사랑에 애끓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잘 표현해 줍니다. 그는 동족으로 인해 크게 근심합니다.
    (롬 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동족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고 교회를 탄압하는 죄를 짓고 그 대가가 영원한 멸망인 것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에 큰 근심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동족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그 심판을 대신 받겠다는 마음입니다. 동족으로 인한 이런 근심은 참 신앙인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모세도 동족이 큰 죄를 지었을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출 32: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출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느헤미야 역시 동족의 죄와 비참한 현실을 탄식하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느 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 1: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느 1: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동족의 죄를 슬퍼하며 회개합니다. 자신을 희생해서까지라도 그 죄를 사하여 구원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이들은 왜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동족과 조국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참 신앙인은 그 삶의 방식이 사랑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도의 조국사랑은 다른 이의 그것과 다릅니다. 이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4. 사랑으로 살기
    사람들의 ‘조국사랑’의 방점은 ‘조국’에 있습니다. 성도의 방점은 조국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조국에 방점이 찍힌 조국사랑은 그 대상이 자신의 조국이기에 사랑하는 것으로 당연히 배타적입니다. 조국이 아닌 나라, 동족이 아닌 민족은 사랑의 대상일 수 없고 조국을 괴롭히는 나라는 원수가 됩니다. 이런 조국사랑은 종종 배타적 민족주의로 발전하여 갈등을 일으키고 힘이 생기면 조국의 영광을 위해 타국을 짓밟을 수도 있는 제국주의로 발전합니다. 세상의 모든 조국사랑, 민족사랑은 이런 방식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조국사랑은 대상이 조국이라는 점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사랑이란 점에서 시작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 부름받았고 거듭났습니다. 이 사랑이 사명이자 특권이자 삶의 방식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조국도, 동족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은 다른 나라라고 해서 미워하거나 착취할 수 없으며 다른 민족이라고 해서 차별하거나 멸시할 수 없습니다. 이 런 사랑이라야 진정으로 이웃사랑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참 하나님의 자녀라면 바울과 모세와 느헤미야처럼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조국과 동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조국과 동족을 위해 타국과 타민족을 짓밟는 배타적 사랑이 아니라 조국과 동족의 번영이 이웃나라, 민족에게도 복이 되는 그래서 더불어 살아가는 참된 번영을 추구합니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이 시대를 구원한 사랑이요, 우리 삶을 구원할 사랑입니다. 그래서
    25 min
  • 20230219 세상에는 없는 평화 / 요 14:25-31
    요 14:25-31/세상에는 없는 평화
    230219 주일설교
    1. 마음의 감기
    이런 상상을 해보세요. 힘든 생업에서 벗어나서 원하는 여행지를 어디든 가서 맛있는 것을 먹고 사람들을 만나고 신나게 놀고 오는데 여러분에게 엄청난 돈까지 줍니다. 아마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삶일 것입니다. 이런 삶은 산 사람을 소개합니다. 미국의 백종원이라 할 만한 앤서니 보데인이 바로 그입니다. 유명쉐프, 베스트셀러 작가, 여행작가, 두 번의 에미상을 수상한 CNN의 스타방송인인 그를 수많은 사람이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을 정도로 성공한 그는 그러나 지난 2018년 6월 8일 여행 중이던 프랑스의 한 호텔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어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인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입니다. 이런 사람이 뭐가 아쉬워 우울증을 앓을까 싶지만 성공한 사람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미국의 CEO들이 일반사원에 비해 우울증을 앓을 확율이 5배가 높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미국 보건복지부는 팬데믹 이후 미국성인 다섯 명 중 두 명이 불안감과 우울감으로 고통받는다고 발표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팬데믹으로 불안증과 우울증 환자가 세계적으로 이전 해에 비해 25% 늘어났다고 발표했습니다. 건강상실의 두려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불안, 고립으로 인한 불안은 노인을 더 빨리 쇠약하게 만들고 젊은이들도조차 지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우울감은 마음의 감기라고 합니다. 감기를 방치하면 폐렴이 되듯 우울감을 방치하면 우울증이 됩니다. 과로하면 몸삼감기에 걸리듯 마음이 과로하면 우울감을 느낍니다. 병을 고치려면 약을 먹을 뿐 아니라 음식을 조절하고 생활습관을 바꾸고 운동을 하는 등 종합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울증 극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활동량을 늘이고 운동을 하거나 약이 필요할 수도 합니다. 휴식과 좋은 관계, 진솔한 대화를 통해 압박감과 긴장을 낮추는 등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더해 영적인 측면에서의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어떤 해결책입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해답입니다.
    2. 세상에 없는 평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떠난다는 말을 듣고 근심과 불안에 휩쌓인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당신이 누리는 평안을 제자들에게도 나누어 주십니다. 이 평안을 누리면 근심도 두려움도 벗어납니다.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의 평안과 주님의 평안은 어떻게 다를까요? 빌립보서 4장입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표준새번역은 7절을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평화’라고 번역합니다. 그럼 사람의 헤아림에 의존하는 평화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곰곰히 생각하는 것, 헤아려 보고 누리는 평화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건강하고 돈을 벌고 성공하고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져 아무 걱정거리가 없구나, 그러니 마음이 평안하네.’ 이런 것이 사람의 헤아림에 의존하는 평화요, 조건이 주는 평화 곧 세상이 주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이런 완벽한 조건을 누리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며, 그런 이라 할지라도 일생 내내 그런 상태에 머무는 이가 과연 있을까요? 그런 상태가 아닌데도 즉 건강을 잃고 돈을 못 벌고 실패하고 바라는 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는데도 마음이 평안한 상태,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 봐도 걱정할 것밖에 없는데 마음은 평안한 상태, 이것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평화, 모든 지각을 초월한 하나님의 평강,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돈을 벌든 못 벌든, 건강하든 못 하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누리는 진정한 평안입니다.
    물론 이는 사고와 질병, 실패를 겪어도 전혀 아프거나 고통스럽거나 걱정이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무념무상의 상태 곧 아무 생각이나 감각이 없는 상태로 제 생각에는 일종의 자기최면상태입니다. 그와 반대로 주님의 평화는 우리의 모든 감각과 감정이 생생이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마음이 괴롭다고 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괴로워하며 기도하셨지만 곧 평안을 회복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사랑과 비슷합니다. 자녀가 속을 썩일 때 화가 나거나 야단을 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자녀 사랑하기를 멈춘 것이 아닌 것처럼 참 평안도 아프고 힘들고 두려울 때도 있지만 그 기초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사라지지 않기에 결국 평안을 회복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평안을 누립니까?
    3. 깨닫고 믿게 하시는 분
    먼저 이런 평안을 누리려면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성령님과 예수님이 도우십니다. 26절의 성령님이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님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의 의미를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곧 깨닫게 하십니다. 29절에서는 예수님도 도우십니다.
    (요 14: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일은 이제 날이 밝으면 시작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재림의 모든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일을 미리 예고하셔서 제자들이 믿도록 하십니다. 즉 예수님과 성령님은 연합하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깨닫고 믿도록 도우십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믿어야 하기에 예수님과 성령님이 도우시는 것입니까? 그 깨닫고 믿어야 하는 진리를 설명해 주십니다. 30절입니다.
    4. 주권자 하나님
    (요 14: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세상임금이란 죽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마귀를 가리킵니다. 지금도 마귀는 우크라이나와 미얀마와 세계 곳곳에 전쟁을 일으킵니다. 마약을 퍼뜨려 인생을 망치고 생명을 빼앗고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거짓과 탐욕으로 가정과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그런데 ‘그 마귀는 주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마귀의 계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주님의 패배가 아니며 마귀의 승리가 아닙니다. 마귀의 모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왜 예수님은 고난당하고 죽으십니까? 31절입니다.
    (요 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즉 예수님은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과 사랑으로 주님은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마침내 그 계획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패배인 줄 알았던 고난이 사실은 승리요, 절망인 줄 알았던 죽음이 사실은 부활의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시요,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가 다 망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살리시고 구원하십니다.
    바로 이 진리를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 했지만 오순절에 오신 성령님이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다시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마침내 믿게 하셨습니다. 이 깨달음과 믿음으로 제자들은 인간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평안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이 사실을 깨닫고 믿게 하시려 역사하십니다. 우리 역시 오순절 이전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도, 믿지도 못 하여 불안하고 근심하고 우울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5. 나의 평안을 주노라
    급성패혈증으로 열흘 동안 사경을 헤매다 두 다리와 왼팔을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고나서야 생명을 건진 이홍승 집사란 분이 있습니다
    42 min
  • 20230212 하나님을 보는 법 / 요 14:18-24
    요 14:18-24/하나님을 보는 법
    230210 주일설교
    1. 신비와 연합
    1980년대 캘리포니아에서는 소위 빈야드운동이란 기독교신비주의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에너하임 빈야드처지의 존 윔버가 인도한 집회에서 사람들이 몸을 떨거나 뒤로 쓰러지고 웃고 울고 부르짖는 등 신비한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났고 이는 성령의 역사라고 알려졌습니다. 한동안 세계 곳곳으로 퍼져간 빈야드운동은 그러나 점점 비성경적 교리와 현상이 나타나면서 여러 교단으로부터 이단 내지는 사이비로 경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빈야드운동은 기독교신비주의 운동의 한 형태로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닙니다.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신비주의의 뿌리는 깊습니다.
    기독교에는 분명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신비한 진리가 있고 신비한 사건도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죄사함의 죽으심보다 신비한 진리가 어디 있으며 부활과 승천보다 신비한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주관하시는 이 신비를 인간이 주관하려고 추구하면 소위 신비주의가 됩니다. 신비주의는 비성경적인 길로 빠질 위험이 아주 큽니다. 이는 마치 격렬한 운동 후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면서 느끼는 쾌감을 운동하지 않을 때도 느끼려는 것과 유사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가장 빨리 엄청난 양의 도파민이 쏟아지듯 분비시키는 방식이 마약입니다. 그 결과는 중독과 멸망입니다. 성령님께서 주도하시는 신비한 경험을 인간이 주도하고 추구하려는 결과도 이와 유사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신비한 체험을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모든 종교인과 마찬가지로 신과의 더 깊은 연합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망이 오순절교단이 성장하는 배경입니다. 오순절교단은 열광적인 찬양, 기도, 예배로 유명합니다. 방언이나 신비한 은사체험도 강조합니다. 오순절교단의 영향으로 전통적으로 엄숙한 분위기가 특징인 장로교단도 열광적인 열린예배, 찬양예배를 드리는 곳이 많습니다. 열광적 예배는 분명 하나님을 경험하는 매우 중요한 방식입니다. 구약에는 찬양이나 기도 중 하나님과 교감하는 선지자들의 예가 여럿 등장하고 신약에서도 성령세례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찬양과 기도에 전념할 때 일어나고 사도들은 기도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런 열광적 분위기나 신비한 체험이 하나님을 만나는 성경적인 방식은 아닙니다. 사울왕도 신비체험하고 예언도 하지만 실패한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당신의 이름으로 선지자가 되고 귀신을 내쫓고 권능을 행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저주를 선언하기도 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기 위해 열광적 예배나 신비체험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능력이나 체험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나고 연합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답입니다.
    2. 하나님을 만나려면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승천과 재림의 약속을 주시며 그 때를 기다리며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18절은 재림의 약속입니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얼마나 큰 은혜와 소망의 약속입니까? 현대 무신론은 우리가 고아처럼 이 우주에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이 우연히 출현했고 죽음으로 다시 영원히 소멸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기억도, 수고도, 삶도 다 아무 의미없이 소멸됩니다. 옳고 그름도, 의도 불의도 의미없이 소멸될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영접하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삶도, 기억도, 관계도, 헌신도 모두 소멸되지 않고 영원과 연결되어 영생을 풍요롭게 만들 재료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요, 고아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고아처럼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보지 못 하는 그 주님을 성도들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주님은 승천하셔서 육체로 보지는 못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성령으로 예수님과 연합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십니다. 성도들도 성령으로 거듭나 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조금 더 보십시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것이 성도가 하나님과 참으로 연합하는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바로 다음 절이 명쾌한 답입니다.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무나 명확해서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습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연합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 이런 완전한 경험을 하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을 보시기를 축복합니다.
    3. 서로 사랑하라 
    지난 주간에 노회원들과 선교지탐방을 다녀왔습니다. 쿠바의 이범찬 선교사님의 안내를 받으며 쿠바의 상황을 듣고 현지교회를 방문하고 목회자들을 만나는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선교사님의 간증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밀워키에서 이민교회 목회를 하던 중 미국의 한 선교단체와 함께 쿠바를 방문했습니다. 선교단체회원들이 아침을 먹는데 잘 먹어야 선교도 힘있게 한다며 얼마나 많이 싸왔는지 정말 맛있고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교회가 연합한 단체이다보니 어떻게 선교해야 하는지 이견이 분분해서 잘 먹고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다음 날은 협력하는 현지 신학생들과 아침을 먹는데 빵 하나 커피 하나가 전부더랍니다. ‘아이고, 젊은이들이 이걸 먹고 어떻게 선교를 돕겠나’, 걱정이 되는데 그들은 빵을 들고 얼마나 감사하며 맛있게 먹는지 또 얼마나 뜨겁게 기도하고 서로를 좋아하고 기쁘게 협력하는지 ‘아, 여기가 천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쿠바를 위해 기도하고 그 신학생들을 생각하노라면 자꾸 마음이 설레고 기뻐서 주님께 쿠바로 부르시는 것인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소명을 깨닫고 목회를 접고 선교사로 쿠바로 건너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풍요롭고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 천국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는 그 곳이 천국이요, 그 곳에서 제자들을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과 연합하고 천국을 경험하려면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사랑 없이 하는 신앙고백, 헌신, 봉사, 충성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이는 예수님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보지 못 합니다. 하나님과 연합하지도 못 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우상일 뿐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주여, 주여 부르고 기적까지 행하는 이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셨습니다.
    (마 7: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지만 악한 이들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이조차 사랑하고 복을 빌 때 하나님은 우
    49 min
  • 20230205 더 큰 일을 하리라 / 요 14:12-17
    요 14:12-17/더 큰 일을 하리라
    230205 주일설교
    1. 더 큰 일을 하리라
    작년 10월 피겨여왕 김연아의 결혼식에서 시아버지 고경수 목사의 축사가 화제라 하여 들어보았습니다. 한 대목에서 웃음이 나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얼마 전부터 사람들이 저를 우림이 아빠가 아닌 연아 시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왕님을 며느리로 맞이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어려웠습니다.” 이 목사님은 며느리에게 물 좀 떠오라고 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숱한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메달을 따고 여자싱글피겨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지금도 각종 단체의 홍보대사와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는 세계적 영웅이 아닙니까? 아무리 시부모들이라 해도 그녀에게 허드렛일을 시키기가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왜입니까? 큰 일을 이룬 그녀를 존중하는 마음 때문 아닐까요? 큰 일을 하는 이들 예를 들어 정부의 고위직, 기업의 고위임원, 조직의 지도자들을 대할 때 우리는 아무래도 존중하고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큰 일에는 더 큰 책임과 희생과 수고와 열매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도 더 큰 일을 하는 가치있는 사람이 되고자 바랍니다. 젊은 시절에 내가 좀 더 잘 해서 이런저런 큰 일을 했었더라면 아쉬워하고, 자녀들에게 더 큰 꿈을 품으라고 권하는 것도 같은 이유 아닙니까? 늦지 않았습니다. 여기 그 누구보다 더 큰 일을 하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당신의 승천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약속으로 시작합니다. 12절입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이 없는 세상에서 제자들이 작은 자로 고난과 시련을 겪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할 뿐 아니라 더 큰 일까지 한다는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이 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합니까? 이 약속을 모른 채 사는 교인들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고치고 살리시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들의 죄를 깨끗이 씻으셨습니다. 제자된 우리도 이 일은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함으로써입니다. 복음이야말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선한 일이 재현하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고치고 살리고 죄를 씻어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 이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는데 예수님보다 더 많은 이에게, 더 넓은 곳으로 나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온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당신의 모든 가르침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일입니다.
    이 세상에 큰 일이 많지만 가장 큰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이 복음전파입니다. 돈을 아무리 벌고 아무리 큰 발명품을 만들고 아무리 큰 사업을 해도 그것이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영원히 멸망할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복음전파가 가장 큰 일인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런 막중한 사명,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을 위임받았습니다.
    요즘 말로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막중한 부담감도 생깁니다.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큰 일을 하나? 막막하고 답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2. 기도로 하리라
    우리는 어떻게 이 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없는 능력을 더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은 바로 기도입니다. 13-14절입니다.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이 약속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행하는 비밀이 여기 기도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큰 일을 하려면 재능이나 학력이나 가문이나 뛰어난 외모나 엄청난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자라도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바로 기도를 드림으로써입니다. 기도하는데 무슨 재능이나 학력이나 자질이 필요합니까? 기도는 물이나 공기처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복이요, 아무도 막거나 금지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감옥에 가두어도, 총으로 위협하여도, 심지어 입을 틀어막아도 기도드리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기도하면 구하는대로 다 행하신다니 이보다 더 큰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렇지만 기도해도 아이비리그 안 되던데요? 기도해도 병이 안 낫던데요? 왜 그런 걸까요? 오해한 것입니다. 다시 보십시오. 두 번이나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단지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란 문구를 덧붙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을 위해 예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사명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비유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의 중요한 고객사와의 거래를 성사시키려고 사장이 과장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김과장, 이번 거래가 우리 회사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가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계약을 따내고 오게. 내가 뭐든지 다 지원해 줌세.” “정말입니까? 뭐든지 지원해 주신다고요?” ‘그럼, 염려말게나.” “사장님, 그럼 먼저 LA 호텔을 5성급 팬트하우스로 바꿔주세요. 비행기는 퍼스트 클래스로 바꿔주시고요. 렌트카는 벤츠로 바꾸고 식사는 미슐랭 별 다섯 개 짜리 식당에서만 하겠습니다. 패블비치 최고급 골프장 회원권도 끊어주세요. 양복도 크리스챤 디올로 네다섯 벌 맞춰야 겠어요. 구두는 최고급 가르디망디로 사주세요.” “아니, 그게 왜 다 필요한가?” “뭐든지 해주신다면서요?” “거래를 성사시키는데 필요한 것이라면 말일세. 명품 사고 골프 여행하는데 필요한 게 아니라…”
    주님의 약속은 주님이 명하신 세계선교의 사명을 이루는데 필요한 간구라면 무엇이든 들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더 편하고 배부르게 사는데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오해하여서 사람들은 기도를 소원성취의 마술방망이처럼 오해합니다. 지난 주간에 미국의 어느 유명스타목사의 설교를 잠깐 들었습니다. 내용이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언제까지나 가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언제까지나 작은 집에서 살 것이라 생각합니까? 언제까지나 부자가 되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왜 하나님을 믿지 못 하십니까?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런 목사가 인기를 얻고 그 메시지에 열광하는 것이 과연 기독교일까요? 맘몬을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사명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보니 어떤 이는 더 잘 생기고 머리가 좋고 신체가 건강한 것처럼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감사하고 누리고 나누는 것이지, 우리가 구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생명을 살리는 복음전파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할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들으시겠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뜻대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비유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세계최고의 명문 하버드대학이라도 아인슈타인의 추천서를 받은 학생이라면 당연히 입학시키겠지요. 하지만 그 추천서를 받은 학생에게 다른 학생이 돈 주고 사서 들고 왔다고 합시다. 입학하지 못 합니다. 왜입니까? 추천서를 들고 왔지만 그는 아인슈타인이 추천할 만한 재능을 가진 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추천서는 주문이나 부적이 아닙니다. 추천서 종이에 마술적 힘이나 권위가 있는 게 아니라 그 학생의 재능을 인정한 아인슈타인의 존재가 권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도 자신의 추천서를 사서 입학하려 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기도도 그러합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을 인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응답하지는 않으십니다. 예수님 이름도 부적이나 주문이 아니기
    38 min
  • 20230129 하나님을 보여주세요 / 요 14:1-11
    요 14:1-11/하나님을 보여주세요
    230129 요한복음
    1. 근심하지 말라
    신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세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교회밖 사람들은 늘 ‘하나님을 보여줘 봐. 그럼 믿을게. 믿고 싶어도 신을 볼 수가 없으니 믿음이 안 생겨.’라고 합니다. 교회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믿고 천국에 이를까?’하고 궁금해 합니다. 교회 안이나 밖이나 모두가 가진 의문으로 ‘이 걱정근심 많은 세상을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까?’ 하고 또 의문을 던집니다. 오늘 본문은 감사하게도 이 세 가지 의문 모두에 명쾌한 답을 줍니다. 세 번째 질문부터 거꾸로 답을 들어 봅시다. 먼저 걱정근심에 짓눌려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답을 주십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고 걱정하였습니다. 제자들 중 누군가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도 충격적인데 자신들이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예수님이 떠나신다니 자신들의 처지가 어떻게 될 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자들도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또 예수님은 무엇을 하실 것이기에 믿으면 근심을 멈출 수 있을까요?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하나님은 자녀들을 위해 거할 곳 곧 하나님 나라의 자리를 준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떠올릴 수 있는 최고의 좋은 집은 어떤 곳입니까? 아마 헐리우드 배우들의 대저택이 아닐까요? 그보다 더 좋은 집을 하나님이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제자들 곁을 떠나는 이유는 그 집을 준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준비가 다 되면 어떻게 하십니까?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2천 년 전에 오셨듯 다시 오십니다. 자녀들을 영접하셔서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십니다. 이 약속을 주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을 믿을 때 제자들은 근심에서 벗어납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모든 고난과 문제가 심지어 죽음까지 완전히 극복되고 해결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걱정하고 왜 근심할까요? 여러분, 걱정과 근심은 주님의 이 약속을 믿지 못 하기 때문에 겪는 괴로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으심으로 모든 걱정, 근심을 벗어버리시길 축복합니다.
    2. 아들을 믿으라
    이제 예수님은 당신이 가는 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요 14: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예수님이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당신의 길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물론 아직 제자들은 배우고도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요 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의 이 질문은 서두의 두 번째 질문과 같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까? 우리는 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을 배우면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갑니까, 물으면 우물쭈물 합니다. 잘 믿어야지요, 열심히 봉사해야지요, 선하게 살아야지요, 기도를 많이 해야지요… 확신 없는 대답이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곧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닫혀있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이 곧 진리입니다. 인간이 붙들어야 할  영원히 변치않는 진리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진리를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이런 선언이 현대인에게 다소 오만하게 들립니다. ‘왜 기독교는 그렇게 배타적이고 독선적입니까? 불교나 힌두교는 얼마나 많은 신을 포용하는지 보세요. 크리스마스에는 절에 성탄축하 메시지를 달지 않습니까? 종교간 화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너그럽습니까? 기독교 안에서도 카톨릭은 타종교와 대화하려고 노력하던데 유독 개신교는 그렇게 혼자 잘났습니까?’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다원화된 사회의 일원으로서 타종교인에 대한 예의와 포용은 보수개신교일수록 부족한 덕목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의를 지키고 관용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해도 진리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2 더하기 2는 무엇인가요?’ 4라고 이 인간아, 그걸 꼭 말해 줘야 아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정중한 태도로 답하면 됩니다. 4입니다. 죄송하지만 3이 아니고 5도 아닙니다. 4라고 답하는 것 자체가 무례입니까?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3일수도 있고 5일수도 있다고 해야 할까요? 우주왕복선의 궤도를 계산하면서 설계부의 입장을 고려해서 3이라고 해, 기계부의 입장을 고려해서 5라고 해라고 할까요? 미안하지만 이건 4입니다. 그래야 우주인들이 우주미아가 되지 않고 무사히 왕복선을 몰고 지구로 돌아올 수가 있어요. 이것이 무례하고 독선적인가요? 그렇다면 진리는 거짓 앞에 무례하고 독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분이 제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한 분입니다. 저 분은 저에게 친절하지만 옆집 아저씨예요. 이 분은 학식이 뛰어나지만 스승입니다. 아버지는 이 분이세요. 미안하지만 이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례이고 독선입니까? 그렇다면 진실은 무례하고 독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죄와 죽음을 해결했다고 선언하는 어떤 메시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큼 명쾌하며 어떤 사건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큼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말씀과 행함으로 믿으라
    이런 진리를 현대인들이 왜 믿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짠 하고 나타나서 내게 말씀해 봐, 그럼 내가 왜 안 믿겠어? 못 나타나? 그럼 없는 거지.’ 이런 생각은 물론 현대인들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제자인 빌립도 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요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러 가시고 다시 오시리라는 약속, 당신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언. 이 놀라운 메시지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 나라가 실재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그 나라를 열어주시리라는 약속을 믿으려면 하나님 아버지를 눈으로 봐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요? 당신 자신을 통해서입니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이미 임재하여 계십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입니다.
    (요 14:10) …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그 말씀이 하나님이 주신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이는 마치 안목있는 화가가 그림을 보는 순간 위대한 작가의 작품인지, 섣부른 연습생이 흉내낸 모사품인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뛰어난 성악가가 오디션장에서 노래를 듣는 순간 이 사람이 얼마나 숙련된
    39 min
  • 20230122 영광의 비전 / 요 13:31-38
    요 13:31-38/영광의 비전
    230115 주일설교 요한복음
    1. 영광스러운 패자들
    텍사스주는 원래 멕시코 영토였습니다. 1836년 텍사스독립전쟁 후 미국영토가 되었습니다. 이 독립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가 바로 알라모전투입니다. 텍사스 주민 186명은 알라모요새에서 열 배가 넘는 1,800명의 멕시코군을 맞아 후퇴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원전사했습니다. 이를 전해들은 텍사스주민들은 격분한 나머지 너도나도 자원하여 독립군에 입대하여 ‘Remember the Alamo, 알라모를 기억하라’고 외치며 결사항전에 나섰습니다. 결국 텍사스주민들의 기세에 눌린 멕시코군은 많은 병력과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연전연패한 끝에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샌안토니오에 있는 알라모국립공원의 이 요새유적은 텍사스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이 전투는 여러 번 영화로 만들어져 미국인에게 자부심을 고취시켰습니다. 186명의 전사자는 국립공원 안 박물관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전투에서 패했고 모두 죽었습니다. 왜 미국은 패한 전투와 전사한 이들을 이토록 기리고 존경해 마지 않는 것일까요? 그들의 희생이 독립이란 고귀한 이상실현의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기고 사는 것이 영광이요, 지고 죽는 것은 수치라고 여기지만 종종 그 반대의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역설을 이해하는 핵심원리입니다. 지고 죽어서 오히려 영광을 얻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그것입니다.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가룟 유다가 나가고 난 직후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13장 후반부인 이 부분부터 시작해서 17장까지 예수님의 고별설교와 기도가 이어집니다. 유다가 나가기 전과 후의 예수님의 어조가 확실히 다릅니다. 유다가 나가기 전에는 가르치시는 중간중간 너희 중에 깨끗지 않은 자가 있다, 내가 택하지 않은 자가 있다, 나를 팔 자가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침통한 분위기가 흘렀으나 나간 후에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비장함 가운데 영광에 대한 기대와 순수한 기쁨이 말씀에 묻어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이제 제자들을 어떤 삶으로 인도하실지를 가르치십니다. 이는 곧 주님이 우리를 어떤 삶으로 인도하시는지도 깨닫게 해줍니다.
    2. 영광의 삶으로 
    첫째는 영광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31-32절입니다.
    (요 13:31) 그(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요 13: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두 구절에 영광을 네 번이나 언급하십니다. 인자 곧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동시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만드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리합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으로 세상죄를 모두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앞에 무릎 꿇고 그 분을 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부활시키고 승천시키셨습니다. 부활과 승천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셨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모든 약속이 진리임을 증명하셨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과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역시 아들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영광의 삶으로 초청받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사람의 제일되는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현대인은 이런 믿음을 낯설어 합니다. ‘왜 인간이 신을 위해 살아야 해? 자신을 위해 살아야지?’ 이 생각이야말로 비극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살면 역설적이게도 행복을 누리지 못 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위해 살면 하나님이 그를 복되게 하십니다. 이런 역설을 만드는 비밀이 바로 사랑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이 관계가 진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신이 행복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결혼한 사람의 가정은 바로 모두가 불행합니다. 배우자가 불행하고 자녀도 불행하고 그 자신도 불행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 결혼한 사람의 가정은 모두가 행복합니다. 배우자도 행복하고 자녀도 행복하고 당연히 그 자신도 행복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구하는데 오히려 자신이 더 행복해지는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아무리 보잘것없고 수치스럽고 실패했다 여길지라도 예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높이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영광스럽게 만드십니다. 이런 영광의 삶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복합니다.
    3. 사랑의 삶으로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33절입니다.
    (요 13: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이 말씀에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심으로 떠나신 후 예수님 없는 세상에 홀로 남을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애정이 묻어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없는 세상에서 작은 자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오해받고 비난받고 박해받기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고난과 순교를 당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들을 위해 예수님은 여러가지 특별한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 중 한가지가 바로 이어지는 34절입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의 계명을 주심입니다. 구약성경 내내 선포되었던 사랑이 왜 새계명입니까? 옛계명이 아니던가요? 그 이유는 그 사랑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마지막까지 사랑하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13장 1절로 돌아가 봅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받은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 그들은 세상을 이깁니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 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들을 세상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살이가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렵습니까? 왜 세상은 교회를 미워하고 공격합니까? 왜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지 못 합니까? 세상을 이기는 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죽어도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이깁니다.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함으로써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변화된 삶으로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36절입니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십자가의
    31 min
  • 20230115 우리가 모이는 이유 / 행 2:37-47
    행 2:37-47/우리가 모이는 이유
    230115 주일설교 소그룹
    1. 소그룹의 가치
    여러분, 팬데믹으로 가정에 여러 면으로 얼마나 타격이 컸습니까? 인류 전체가 이처럼 전지구적 재앙을 만난 적이 또 있었던가 싶습니다. 팬데믹으로 교회가 입은 가장 큰 타격은 무엇일까요? 제 판단에는 소그룹사역 곧 구역모임입니다. 한국의 목회데이터연구소 지용근 대표에 의하면, 팬데믹 중 대부분의 교회가 온라인으로라도 예배를 이어갔지만 소그룹사역은 70%의 교회가 중단하였습니다. 팬데믹 이후 대부분 교회의 예배가 6-70% 수준으로 예배인원은 회복했지만 소그룹사역은 이 정도로 회복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이런 추세가 교회의 선교사역에 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그룹사역이 주는 엄청난 역동성을 교회가 잃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소그룹참여자의 사역참여율이 비참여자에 비해 월등히 높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격차는 전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그룹참여자는 비참여자에 비해 전도사역에 참여하는 비율이 5배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소그룹 사역의 위축은 곧 교회의 전반적 사역 특히 전도사역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통계로도 드러납니다. 코로나 이후 각 교회의 새신자등록비율은 이전에 비해 같은 기간 약 16% 밖에 되지 않습니다. 코로나 이전에 100명이 등록할 기간에 이후에는 16명 밖에 등록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시대 교회가 주님이 주신 선교사명, 온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코자 한다면 이 소그룹사역의 회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팬데믹 중 구역모임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2023년 우리 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체질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건강한 구역모임의 회복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지난 화요일 구역일꾼모임은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현장에 모여 활발한 토론을 하였습니다. 건설적인 제안이 많이 나왔고 일꾼들의 마음을 다잡는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매월 예전처럼 현장에 모여 일꾼모임을 하겠습니다. 기존의 지역별, 연령별 구역모임 외에도 사역별 구역, 학부모 구역, 양육구역 등 다양한 소그룹모임을 시도코자 합니다.
    건강하고 성경적인 소그룹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보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구역모임을 왜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에서 소그룹모임이 처음으로 시작된 장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소그룹의 탄생
    오늘 본문은 오순절성령세례를 받은 사도들이 복음전파를 시작하자 3천 명이 세례를 받고 최초의 교회가 탄생하는 장면입니다. 소그룹은 교회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3천 명의 회중은 안식일에는 성전에 모여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날에는 집에서 모였습니다. 문제는 3천 명이 누구 집에 모였겠느냐 입니다. 당연히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집은 없었고 오늘날 우리 집보다 훨씬 작은 집에서 살았던 당시 사람들은 소그룹으로 나누어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2-30명을 수용할 큰 집을 가진 부자가 많지는 않았을테니 평균 한 집에 10명 씩 모였다고 가정하면 300채의 집에 나누어 300개의 소그룹이 생긴 셈입니다.
    이처럼 소그룹은 교회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건강하고 성경적인 교회, 신앙에 소그룹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예배는 드리되 소그룹은 원치 않는 예가 많습니다. 대체로 한인교회 소그룹모임 참여비율은 예배출석인원의 40% 선입니다. 열 명 중 6명은 예배만 드리고 소그룹은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앞선 통계에서 보았지만 소그룹비참여자의 사역참여비율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이라 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26년간 스타무당으로 살다가 회심한 심선미 성도의 간증을 최근 들었습니다. 처음 회심하고 교회에 나갔다가 깜짝 놀라고 당황해서 급기야 교회를 옮기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은 목숨을 걸고 귀신을 섬기다가 예수님을 만나 역시 목숨을 걸고 귀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러 교회에 나와는데, 정작 먼저 믿은 교인들은 목숨은커녕 아무 것도 걸지않은 채 슬렁슬렁 교회를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그렇게 귀신을 섬겼다면 벌써 귀신의 노여움을 사 저주를 받아 죽었을텐데 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무서워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나니 자신이 섬기던 귀신과 달리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귀신처럼 저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렇다해도 이런 큰 사랑을 받았다면 하나님을 그렇게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간증을 듣다보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악용하는 악한 이들이 아닌가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배는 좋고 은혜로운 찬양과 위로의 말씀도 좋지만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가고 갈등과 수고를 피할 수 없는 소그룹은 피하고 싶다면 자신의 신앙이 과연 건강한지, 주님이 어떻게 여기실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3. 소그룹의 목적
    이렇게 탄생한 소그룹이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먼저 소그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십시오. 41절입니다.
    (행 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 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복음전파의 결과 세례받은 이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교회가 시작되고 그들로 또한 소그룹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소그룹의 결과를 보십시오. 47절입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 결과는 구원받는 이들이 날마다 늘어나는 것입니다. 즉 소그룹은 태생부터 복음전파의 결과로 태어났고 복음전파를 열매로 맺습니다. 소그룹은 복음전파를 그 목적으로 합니다. 이 목적을 잃어버리면 소그룹이 방황합니다. 많은 소그룹이 그래서 모임의 의미를 찾지 못 한 채 위축되거나 생명력을 없는 모임을 이어갈 뿐입니다.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어린 낙타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왜 우리는 등에 혹이 있어? 응, 이건 사막을 건널 때 물을 저장하라고 창조주께서 만들어 주신 거란다. 그럼 우리 발굽은 왜 넓고 평평해? 응, 그건 사막을 건널 때 발이 빠지지 말라고 창조주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란다. 그럼 우리 눈썹은 왜 이렇게 길어? 응, 그건 사막의 모래바람으로부터 눈을 안전하게 지키라고 창조주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란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우린 동물원에서 뭐하는 거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동물원에 갇힌 낙타와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마귀의 악한 화전을 물리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생명을 구원하는 천국의 군사로 창조되고 부름받았는데 안전지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의 소그룹은 복음전파의 목적은 잃어버린 채 그저 외로움과 심심함을 달래주는 친교모임으로 전락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성령의 능력은 복음전파를 위해 주신 것이고 복음을 전파할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막을 건너지 않을 때는 아무 필요가 없는 낙타의 능력처럼 복음전파의 목적을 잃어버린 모임에서는 성령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4. 소그룹의 요소
    그럼 복음전파로 탄생하고 복음전파를 위해 존재하는 소그룹에서는 어떤 활동이 일어납니까? 본문 42절입니다.
    (행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가지 활동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 가르침은 생명의 복음이며 또한 복음으로 살아가는 법 곧 교훈입니다. 복음과 교훈을 받아야 건강한 공동체가 됩니다. 이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이단으로 빠지거나 생명력을 잃거나 인간의 욕심과 흥미를 좇는 세속적 모임으로 전락합니다. 이는 마치 국가의 법이 있고 학교에 교칙이 있고 하다못해 친목회에도 회칙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떠난 소그룹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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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누리고 천국을 세우고 천국을 전하는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