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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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장로교회 김도완 목사 주일 설교 episodes

  • 20221023 누가 탕자인가 / 눅 15:1-3, 25-32
    눅 15:1-3, 25-32/누가 탕자인가
    221023 주일설교
    1. 주인공은 누구인가
    오늘 읽은 본문은 유명한 ‘집떠난 탕자’ 비유의 배경과 결말부분입니다. 대부분의 교우들이 기억하는 비유 내용은 오늘 읽지 않은 가운데 부분입니다. 한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방탕하게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그를 용서하고 따뜻하게 맞아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정말 감동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비유의 배경이나 후반부 결말은 대부분 잘 모릅니다. 그 결과 비유를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 해 진짜 메시지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먼저 비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비유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탕자인 둘째 아들, 그를 용서한 아버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못 마땅한 첫째 아들. 셋 중 누가 주인공일까요? 이 답을 얻으려면 비유의 배경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배경에도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1-3절입니다.
    (눅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 15: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여기 멸시받는 세리와 죄인들이 있고 그들을 따뜻하게 영접하는 예수님이 계시고 이 모든 것이 못마땅해 수군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두 부류 중 누가 들으라고 하셨습니까? 불평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아닙니까? 비유 밖의 세 부류와 비유 안의 세 사람을 서로 대응시킬 수 있다면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누구와 대응될까요? 바로 큰아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비유는 세리와 죄인들을 따뜻이 맞아들이신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들으라는 말씀이며 그 비유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큰 아들의 모습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시에 현실에서는 매주 열심히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들을 말씀일까요, 교회 밖에서 방황하는 불신자들이 들을 말씀일까요? 네, 바로 큰아들처럼 집을 떠나지 않는 우리가 들을 말씀입니다.
    2. 큰 아들
    그럼 큰아들의 상태는 어떠한지 25-28절을 보십시다.
    (눅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눅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큰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곧 방황치 않고 열심히 충성봉사합니다. 그런데 그는 동생이 돌아온 것이 기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환대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잔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에 몸담고 열심히 봉사도 하지만 천국잔치에는 들어가지 않고 천국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왜 이런 상태에 있습니까? 29절입니다
    (눅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는 자신의 충성봉사에 대가를 받지 못 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공로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의 예배생활, 봉사, 헌금, 선교, 희생을 차곡차곡 마음의 노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보상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땅히 자신에게 구원, 성공, 건강, 자녀의 복, 장로, 집사, 권사자리를 주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공로의식과 보상의식을 묶어서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모든 종교를 지탱하는 뼈대입니다. 인간이 세우는 공에 걸맞는 은혜를 신이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인간의 의라고 부릅니다. 기독교와 아무 상관이 없는 가르침입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 가치있으며 인간의 모든 의를 다 합쳐도 그 무가치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와 비할바가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롬 1:17입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초대교회에나 오늘날 현대교회에서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인간의 의가 하나님의 의를 대체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얼마나 수고했는가를 자랑하고 그러니 마땅히 장로, 집사, 권사가 되어야 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면 교회의 주인인양 행세하며 세도를 부리는 것이 마땅하다 여깁니다. 복음은 사라지고 기독교를 수많은 종교 중 하나로 전락시키는 율법주의의 오염된 교회입니다.
    3. 율법주의
    신앙의 동기수준 중 가장 저급한 것이 두려움입니다. 그보다 조금 나은 것이 보상이고 그보다도 조금 나은 것이 의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동기는 모두 세상 모든 종교가 사용하는 것이요, 율법주의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동기로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것이 율법주의와 복음의 차이입니다. 큰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은 이유, 보상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하여서 섬긴 것이 아님을 자신의 말을 통해 드러냈습니다. 기대만큼 보상을 받지 못 하자 그는 화가 났고 아버지를 사랑하거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천국잔치 따위에 관심도 없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이 비유의 제목은 그러므로 ‘집떠난 탕자’가 아니라 ‘집 지키는 탕자’가 맞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는 이 큰아들처럼 교회 지키는 탕자는 없습니까? 열심히 교회봉사는 하는데 천국의 기쁨은 없고 천국잔치에도 들어갈 생각이 없으며 수고만큼 대접받지 못 해 화가 난 사람들 말입니다.
    율법주의가 얼마나 깊이 우리 삶에 스며들었는지를 측정하는 또 하나의 척도가 여기 있습니다. 바로 형제, 자매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30절입니다.
    (눅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동생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동생을 동생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홍길동입니까? 동생을 동생이라 부르지 못 하고… 동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우리의 시선을 정죄와 비난으로 가득 채웁니다. 고개를 들어 교회를 보니 하나같이 문제투성이입니까? 이 사람도 문제, 저 사람도 문제, 이 부서도 문제, 저 부서도 문제… 나홀로 의인인 것 같지 않습니까? 주머니에 자를 넣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측정해보고 문제투성이라고 탄식하지 않으시나요? 율법주의 바이러스에 깊이 물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살벌해집니다. 서로 정죄하는 사람들로 가득해집니다. 복음이 충만한 교회는 그 반대입니다. 은혜가 넘칩니다. 이 교회에서 가장 문제는 나지, 나라도 바르게 살자, 나같은 인간을 모른다 하지 않고 이 교회가 받아주니 얼마나 감사한가… 이런 교회는 죄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줍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받아주었듯이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율법주의가 가득한 교회입니까, 복음이 가득한 교회입니까?
    4. 성도의 복
    성도의 진정한 복은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하나님과 항상 함께 있는 것, 이것이 성도의 가장 큰 복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녀는 그 모든 것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37 min
  • 20221016 다급한 인생이 달려갈 곳 / 삼상 30:1-20
    삼상 30:1-20/다급한 인생이 달려갈 곳
    221016 주일설교
    1. 크게 다급할 때
    제가 아는 어느 성도님이 아내와 세 아이와 함께 인도네시아 여행을 갔는데 은행에 잠깐 환전하러 들어간 사이에 가족을 태운 택시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경찰서를 2주나 드나들면서 몸값을 요구하는 납치범들을 잡으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경찰이 하는 말이 인도네시아엔 워낙 작은 섬이 많아서 납치범들이 섬으로 들어가 버리면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가막혔지만 아무튼 몸값을 만들어 오려고 귀국하는데 미국 공항에서 FBI가 자신을 체포하는 것입니다. 알고봤더니 동업자가 사업체를 싹 다 팔아버리고 이 성도 이름으로 온갖 곳에서 큰돈까지 빌린 채 도망쳐 버린 것입니다. 살던 집까지 다 날리고 사기죄로 재판을 받는데 직원들까지 임금체불했다며 고소를 하고 매일 사채업자들이 와서 돈 갚으라며 두들겨 패고 죽인다고 위협하여 여기저기 도망다니며 사는데 잘 나갈 때 간이라도 빼줄 것 같던 친구도, 동업자들도 다 모른 척 해서 하루하루 노숙하며 살아갔습니다. 아침에 도로가에 서 쌩쌩 달리는 차를 보면 ‘저기 뛰어들면 이 모든 고통이 끝나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여러분이 이런 일을 당하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성도가 겪은 일 중 한 가지만 당해도 많은 이들이 극복할 용기를 잃어 버리곤 하지 않습니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사람이 본능적으로 택하는 반응을 방어기제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 방어기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도피입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현실을 부정하거나, 쾌락으로 도피하여 잊어버리려 하거나, 물리적으로 그 자리에서 도망치거나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으로 삶에서 도피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원망입니다. 이 상황의 원인을 사람이나 세상이나 심지어 하나님께 돌리고 탓과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늘 입에 욕을 달고 삽니다. 욕은 저주이자 비난입니다. 셋째는 자책입니다. 원망이 타인을 향한 공격이라면 자책은 자신을 향한 공격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고 여기고 자신을 비하하거나 학대합니다. 자기를 괴롭히고 무기력한 늪에 밀어넣곤 합니다. 이런 반응은 모두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킵니다.
    2. 어떻게 반응하는가
    앞서 소개한 성도는 어떤 반응을 택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이 성도님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이 성도의 이야기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 다윗이 겪은 일을 현대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의 추격을 피해 블레셋의 영토 시글락에서 일종의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늘 긴장의 연속입니다. 언제 사울의 추격대가 자신을 죽이러 달려올지 모릅니다. 그를 받아준 블레셋도 언제 돌변할 지 모릅니다. 다윗이 한창 주가를 높이던 시절에 백성들이 외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의 그 만만은 죽은 블레셋의 병사를 말하였습니다. 이미 현실이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같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나날인데 거기에 더해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그를 덮칩니다. 다윗과 부하들이 블레셋의 전투를 도우러 나갔다가 사흘길을 걸어 거주지 시글락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이 마을을 비운 사이 남쪽 광야에서 약탈을 하며 살아가는 아말렉족이 쳐들어와 불을 지르고 여인들과 아이들을 다 노예로 팔려고 잡아간 것이었습니다. 이대로도 기가막힌데 이번에는 따르던 부하들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돌로 치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다 기가막히고 답답하고 다급하였을까요? 그는 집과 재산과 가족을 다 잃어버리고 하나 남은 몸뚱아리마저 돌에 맞아 죽게 생겼습니다. 다윗은 이 다급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였습니까? 도피를 택했습니까? 원망이나 자책을 택했습니까? 6절은 다윗은 반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삼상 30:6)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은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이에게라도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는 어떤 고난도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를 얻으면 절망을 이기지 못 할 사람이 없습니다.
    3. 하나님을 힘입으라
    그럼 다윗이 ‘하나님을 힘입었다’는 표현은 무슨 뜻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수많은 약속을 주십니다. 이 약속을 들어보십시오.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 약속을 신뢰하는 이는 하늘로부터 오는 용기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이는 말할수없이 큰 유익을 얻습니다. 큰 고난을 만나면 성경 읽고 기도할 힘도 없습니다. 그럴 때 마음에 묵상하고 암송한 말씀이 있으면 자동으로 그 말씀이 떠올라 용기를 줍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신뢰하고 고난을 이길 넉넉한 용기를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힘입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어왔습니다. 어린 시절 양떼를 공격하는 곰과 사자를 물맷돌로 물리칠 때부터 역시 골리앗을 물리칠 때, 블레셋과의 수없는 전투 그리고 사울왕의 추격대를 피해 광야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을 때 그 때마다 죽을수밖에 없는 고비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겨왔습니다. 그런 구원받은 경험에서 나온 신앙고백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찌라도 내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시입니다. 그 구원의 기억을 떠올림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신뢰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힘입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 12: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린다 즉 구원하신 기억을 다시 떠올려 기쁨으로 찬양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도 지나온 세월 우리를 지켜오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우리를 온갖 고난에서 건지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하나님, 그 분이 나를 망하게 하시려고 여기까지 인도하셨겠나? 이 신뢰야말로 지금 닥친 고난도 거뜬히 이기게 하시리라는 신뢰와 용기를 회복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늘 새롭게 떠올려 묵상할 때, 찬양할 때, 예배할 때 감사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런 구원의 기억이 날마다 여러분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힘입었다는 표현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제사장에서 에봇을 가져오게 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삼상 30: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고 이것이 그가 용기를 내어 추격을 시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말씀묵상과 더불어 기도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리도록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용기를 부어주고 싶으셔도 우리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비오는데 물저장고의 뚜껑을 닫아놓은 것과 같습니다. 활짝 열어놓아야 비가 저장고에 고이듯이 우리도 마음을 열어야 용기가 쏟아져 들어옵니다.
    목사님, 우리도 기도하면 다윗처럼 응답을 받습니까? 저는 기도해도 ‘쫓아가라, 마라’하는 식의 답이 들리지 않던데요? 하나님이 음성듣는 법에 대해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답은 여러 경로를 통해 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응답이 올 때 우리에게 확신과 함께 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확신이 우리 마음에 쏟아져 들어올 때까지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간절하면서도 겸손한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용기가 여러분 마음에 쏟아져 들어오도록 기도를 쉬지 않으시기를 축복합니다.
    4. 순종으로 달려가라
    말씀으로 용기를 얻고 기도로 응답의 확
    44 min
  • 20221009 날 고치지 마세요 / 요 12:34-43
    요 12:34-43/날 고치지 마세요
    221009 주일설교
    1. 무지의 어둠
    베트남전쟁은 미국인에게 매우 아픈 기억입니다. 미국역사 최초의 패전일 뿐 아니라 시작부터 조작된 통킹만 사건으로 일으킨데다 50여 명의 유아를 포함한 500여 명 이상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미라이학살사건을 비롯한 여러 전쟁범죄를 자행한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정신과의사 스캇 팩은 책 ‘거짓의 사람들’에서 이런 전쟁범죄 뿌리에는 미국인들의 무지가 자리잡고 있다고 일갈했습니다.
    “미국 국민은 무지 때문에 악인이 되었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파병미군 중 사병들은 거의 베트남전의 의미를 알지 못 했고 장교들은 10% 정도만이 안다고 답했지만 그들의 앎 조차도 군사령부가 홍보한 정훈자료가 전부였습니다. 즉 미군들은 베트남전의 의미와 목적도 모른 채 베트남인들을 악마화한 채로 총을 쏘았고 이런 상황에서 종종 양민학살을 자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것입니다. 이 점은 당시 미국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미국인 대부분은 수렁으로 빠져든 베트남전에 투입할 병사들이 부족해 모병제가 징병제로 바뀌어 자신의 아들이 끌려가기 전까지 전쟁에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때까지 미국은 개국 이래 단 한 번도 전쟁에서 진 적이 없었고 미국은 항상 옳다고 믿었기에 베트남전에서도 당연히 옳고 당연히 금방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부관료조차도 공산화를 막는다는 피상적 명분 정도 외에 베트남의 사정이나 역사적 상황도 제대로 알지 못 한 채 전쟁을 시작했다고 그는 일갈합니다. 미국정부, 미국인, 미군 모두가 베트남에 대해 철저히 무지했음이 전쟁 후 많은 보도와 연구를 통해 낱낱히 드러났습니다. 무지는 베트남전 당시 미국인 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악으로 이끄는 동력입니다. 예수님 앞에 모여있던 무리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 완고함
    오늘 본문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몇 사람이 헬라인의 방문을 받으신 후 무리와 나눈 대화의 마지막 부분과 그에 대한 평가입니다.  37절은 예루살렘 입성시 예수님을 향해 그토록 환호했던 이들이 그 많은 표적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믿지 못 했다는 안타까운 결론을 내립니다.
    (요 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물을 포도주를 바꾸시고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시고 걷지 못 하는 이를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눈먼 자를 눈뜨게 하시고 급기야 죽은 지 4일이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무지 때문입니다. 34절입니다.
    (요 12: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매달려 고난받아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메시야가 누구인지도, 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사야와 시편에서 메시야가 영원히 당신 백성을 통치하신다고 예언한 말씀은 이해하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고 예수님도 여러 차례 언급하신 메시야가 고난을 받는다는 말씀은 전혀 깨닫지 못 했습니다. 이 무지야말로 악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무지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고 무지함으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스데반도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 한다’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럼 베트남전 당시의 미국인들과 예수님 앞의 유대인들 그리고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세대 사람들을 뒤덮고 있는 이 무지의 어둠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인간의 완고함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39절 이하입니다.
    3. 게으름과 나르시시즘
    (요 12:39) 저희가 능히 (깨닫고)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요 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언듯 읽으면 하나님이 그들을 완고하게 만드셨다는 의미 같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이 완고하여 고침받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완고함은 자기 고집대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대개 청년 때에는 자신을 새롭게 바꾸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얼마못가 사라지고 만사귀찮으니 그냥 이대로 살고 싶습니다. 스캇 팩은 이런 마음에서 악이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악의 뿌리에는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자아도취)이 자리잡고 있다.’
    게으름? 난 열심히 일하는데? 이 게으름이란 자신을 돌아보기를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생각, 태도, 가치관이 과연 옳은지 검토하는 것은 대단히 수고롭고 피곤합니다. 바로 이것이 QT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은 평소 하지않는 깊은 사고와 영적 분투, 거울 같은 정직함을 동원해야 하는 무척 피곤한 일입니다. 그런 고민 없이 단순하게 반복할 수 있는 청소나 설겆이가 훨씬 쉽습니다.
    게으름보다 더욱 사람을 완고하게 만드는 것이 나르시시즘입니다. 그리스신화의 나르시스가 연못에 비췬 자신을 보고 사랑에 빠져 그 누구와도 사랑하지 못 하다가 빠져 죽어 연못가의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기원한 나르시스즘, 자아도취는 자신은 늘 옳다는 생각입니다. 성공한 사람, 일이 잘 되어가는 사람일수록 더욱 나르시시즘이 강합니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바꿀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이 옳지 않았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아만족감에 엄청난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니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고수합니다. 이 생각에 위협이 되는 도전은 거칠게 저항합니다.
    게으름과 자아도취는 모래와 시멘트처럼 섞여 마음을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고 완고하게 만듭니다. 이런 완고함에 강도를 더하게 붓는 것이 비겁함입니다. 42절입니다.
    (요 12: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 중에는 희미하게 진리를 깨달은 이들도 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왕따당하고 불이익을 받는 것이 두려워 진리로 나오기보다 안전하지만 어두운 거짓의 편에 서기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들의 비겁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보다 세상이 주는 보잘것없는 안전과 안락을 더 사랑합니다. 43절입니다.
    (요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오늘 우리도 혹시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을 바꾸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은 아닐까요?
    4. 진리의 심판
    예수님이 이 마음이 완고한 이들을 보시고 탄식하신 이유는 그 결말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48절입니다.
    (요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판사님, 왜 나를 심판하십니까? 나하고 무슨 원한이 있다고? 내가 당신을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형법이 살인자에게는 이런 형벌을 가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무신론자들은 사람들을 영원한 지옥에 내던지는 신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냐, 그런 신이라면 자신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얼마나 큰 무지입니까? 사람들을 지옥에 내던지는 것은 그들의 죄와 은혜를 외면하는 불신앙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죄가 의와 함께 할 수 없고 불신앙이 은혜를 가로막는다고 분명히 가르침에도 그들이 도무지 듣지않기에 결국 그 진리의 말씀에 의해 정죄되고 심판받는 것입니다. 마치 형법에 의해 살인자가 심판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으로 끝까지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구원하시려 하는 하나님에게 오히려 비난을 돌리니 이 얼마나 큰 무지요, 반역이요, 몰염치입니까?
    5. 빛이 있을 동안에  
    이런 무지, 고집, 비겁함의 어둠 속에 갇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 하고 외면하는 이들로 인해 예수님은 크게 실망
    32 min
  • 20221002 천둥소리만 듣다 / 요 12:20-33
    요 12:20-33/천둥소리만 듣다
    121002 주일설교
    1. 황소개구리
    1990년대 한국에 계셨던 분들은 황소개구리 사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미 동부가 원산지인 이 커다란 개구리는 고소한 맛이 좋아 식용으로도 쓰입니다. 한국에서는 1973년 새마을운동 농가소득증대사업의 일환으로 일본에서 들여왔지만 생각만큼 수익이 나지 않자 양식업자들이 하천에 풀어놓아 버렸습니다. 덩치가 크고 먹성이 좋은데 천적은 없었던 황소개구리는 엄청난 속도로 번식하며 닥치는 대로 토종어류, 양서류를 먹어치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천과 호수, 저수지마다 황소개구리가 그득하여 황소처럼 시끄럽게 울어대자 급기야 1997년 환경부는 이를 생태계교란종으로 지정하고 언론은 공공의적으로 홍보하며 황소개구리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포상금을 주고 군인, 공무원, 지역주민들을 동원하고 대대적인 언론캠패인을 하고 어떤 저수지는 황소개구리를 없애려고 아예 물을 다 빼내고 새로 채우곤 했지만 번식속도를 쫓아갈 수가 없어서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2000년 대 접어들면서 황소개구리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한국하천의 최강자 가물치가 등장했습니다. 미국에 황소개구리가 있다면 한국에는 가물치가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한국의 가물치는 미국하천에서 괴물물고기로 불리며 생태계교란종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K-fish입니다. 미국사람들이 K푸드에 맛들이듯이 가물치가 US푸드인 황소개구리 알과 올챙이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가물치를 필두로 뱀, 백로, 왜가리 등 토종생물이 닥치는 대로 먹어대자 어느 새 황소개구리의 개체수가 줄어들어서 이제는 다른 개구리처럼 ‘겸손하게’ 한국토종생태계 한 자리에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것입니다. 수량이 풍부한 하천에는 자정작용이 있듯 균형잡힌 생태계는 외래종의 위치를 조정해 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다만 그 조정시간이 수십 년씩 걸릴 뿐입니다. 자연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당장 오늘내일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조급하고 불안해 견딜 수가 없지만 자연은 수십 년에 걸쳐 천천히 그러나 훨씬 더 정교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사람은 자연 앞에서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할까요?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면 자연의 창조자 앞에서는 더욱 겸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급한 우리의 시간과 크신 하나님의 시간이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차원이 다른 시간대가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과 인내를 배우도록 가르치십니다.
    2. 하나님의 때
    지난 주 설교에서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배웠습니까? 아무리 용을 쓰고 몸부림을 쳐도 사람의 바람과 계획은 다 무산되고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그 하나님의 뜻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이해하려 합니다.
    오늘 본문은 유월절을 지키러 온 헬라인들을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당시 로마제국에 널리 퍼져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해 율법과 유대교의 높은 수준의 가르침을 접하고 유대교에 입교하기 위해 율법을 배우고 지키는 삶을 살던 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직접 만나보려고 빌립을 찾아왔고 빌립은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에게 이들을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헬라인들이 모든 이방인의 대표로 자신에게 나온 것이며 이 사건이야말로 당신이 고난을 겪고 부활의 영광을 얻을 때가 된 것의 증거라고 선언하셨습니다. 23절입니다.
    (요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는 지금까지 주님의 태도와 사뭇 다릅니다. 주님은 계속 당신에게 그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요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 7: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이랬던 예수님이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계속 이 때를 기다려오셨습니다. 이 기다림은 예수님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눅 12:50을 보십시오.
    (눅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그럼에도 예수님은 인내를 가지고 사람들의 오해와 비방, 위협을 견디며 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오셨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이 인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 때는 우리의 때와 반드시 다릅니다. 오목이나 두는 바둑초보와 조훈현 9단이 그리는 결정적 수가 같을 수 없고 바닷가에 모래성을 짓는 아이의 그림과 100층 고층빌딩을 짓는 건축가의 설계도가 같을 수 없듯 우리가 최선이라고 여기는 때와 하나님이 최선이라고 여기시는 때는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사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생각의 격차, 수준의 격차를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때보다 하나님의 때가 더 적기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지금 응답되지 않고 여러분의 바람이 지금 이루어지지 않아서 조급하고 불안하고 답답해하는 분들이 계신지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때보다 훨씬 좋은 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인내와 평안 가운데 이기시기를 축복합니다.
    3.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음을 선언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하나님의 뜻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질지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방법도 우리의 생각과 사뭇 다릅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공’입니다. 우리가 돈을 벌어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교회가 크게 성장해서, 자녀들이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어서, 언론에 얼굴을 장식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린다.’ 솔직히 방점이 성공에 찍혀있습니까, 하나님께 찍혀 있습니까? 하나님은 포장지이고, 내용물은 성공이 아닙니까? 얼마나 이 세상의 방식과 닮았는지요? 그렇기에 아무리 우리가 입으로 하나님, 하나님 노래를 불러도 진정한 울림이 없습니다. 세상사람들도 다 압니다. 포장지는 다르지만 내용물은 자기나 우리나 성공만 목매는 인생이란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도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24-26절입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의 방법은 성공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 죽으셨고 생명을 얻기 위해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땅히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죽음과 버림입니다. 그럼 죽는데 어떻게 살고 버리는데 어떻게 얻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신비이고, 이런 신비가 가능한 것이 하나님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께서 이런 신비, 기적을 가능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살고 버림으로 얻는 순종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만 가능합니다.
    살기 위해 성공하고 얻기 위해 움켜쥐라는 세상의 외침과 죽음으로 살고 버림으로 얻으라는 그리스도의 부름 중 어느 음성에 응답하느냐가 곧 오늘 우리가 어디에 속한 사람이냐를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4. 하나님의 음성
    예수님은 세상의 음성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심으로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보여주셨습니다. 27절을 보면 예수님에게도 십자가의 순종은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 12: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34 min
  • 20220925 계획 너머에 있는 것 / 요 12:9-19
    요 12:9-19/계획 너머에 있는 것
    220925 주일설교
    1. 사라지지 않는 불안
    한국의 종교인 통계를 보면 인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통계연도가 달라 오차는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목사가 약 14만, 승려가 4만 7천 그리고 신부가 1만6천 명 정도인데 비해 무당과 역술인 소위 무속인은 등록자만 2016년 약 60만 명에 이릅니다. 무속인의 특성상 한국의 대표적인 두 개 무속인단체인 대한경신연합회와 한국역술인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비회원을 더한 추산치는 최대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는 2006년에 비해 10년 만에 두 배 넘게 성장한 결과입니다. 21세기는 소위 과학과 진보의 시기가 아니던가요? 종교는 소멸할 것이란 예언이 쏟아지는 이 시기에 무속인이 이렇게 느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아마도 해결되기는커녕 점점 더 느는 사람들의 미래에의 불안, 염려,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건강과 직장, 가정과 자녀의 미래가 궁금하고 어렵게 될까봐 불안합니다. 미국의 경기, 금리동향, 주식동향, 부동산동향도 궁금하고 11월의 중간선거결과도 궁금하고 바이든이 재선할지, 트럼프가 다시 나올지도 궁금하고 한국의 다음 대통령도 궁금하실 겁니다.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과연 우리 인생과 자녀와 가정과 이 나라와 이 시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이런 불안과 염려는 떠안고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본문말씀에게 물어봅시다.
    2. 순례자들과 대제사장의 계획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었던 베다니 식사의 다음 날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다양한 기대와 계획을 가진 것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부류는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모여든 순례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확신하고 예수님을 앞세워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해방을 되찾으리라고 계획했습니다. 그 확신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9절을 보면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길에 있던 베다니에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고, 적지않은 이들이 직접 베다니로 내려가 예수님과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나사로는 베다니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유지였고 그의 죽음과 되살아남은 나사로 본인 뿐 아니라 장례식장에 모여들었던 베다니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습니다. 18절을 보면 베다니 주민들과 예수님을 믿은 이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이를 전했고 예루살렘에 구름처럼 모여든 순례자들 사이에는 ‘이 분이 그토록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해방을 가져다줄 왕이 아니냐’는 기대와 믿음이 퍼졌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은 개선장군을 환영하듯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13절을 보면 호산나 곧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영접하였습니다. 과연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졌을까요?
    또 한 부류의 사람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예수님과 나사로를 죽여서 혁명의 불씨를 꺼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가 되살아난 이후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급속도로 늘어나자 예수님을 죽이고자 마음먹었습니다. 대중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뭉쳐 반로마저항세력으로 뭉치기라도 하면 소요사태가 일어날 수 있고 자칫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이 위협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문을 듣고 나사로를 보러왔다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더욱 늘어나자 그들은 나사로마저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큰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몰려든 순례자들의 규모와 지지세를 보고는 그만 기가 질려버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시도는 성공했을까요?
    3. 제자들의 깨달음
    결론은, 순례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계획은 다 실패하였습니다. 순례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로마를 몰아내기는커녕 로마군병들에게 잡혀왔고 실망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폭도로 돌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대제사장과 함께 예수님을 로마군병에 넘겨 죽이는데 성공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려던 기득권은 AD 70년 전쟁으로 예루살렘과 함께 잿더미에 묻혔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전하는 제자들로 인해 교회가 온 세상으로 퍼져갔습니다. 모두의 계획이 다 실패했다면 도대체 누구의 계획이 이루어졌습니까? 그 답은 바로 제자들의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당시에는 상황이 어디로 흘러갈지 도무지 몰랐던 제자들이 마침내 진실을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16절입니다.
    (요 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요 12:15) 이는 (슥 9:9에)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도, 순례자들이 예수님께 열광한 것도, 순례자들을 열광시킨 나사로를 살리신 일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을 제자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또한 그제서야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일부러 지체하신, 그 이해할 수 없던 주님의 행동의 의미도 깨달았습니다. 11장으로 돌아갑니다.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나사로를 그냥 고치지 않으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리셔서 제자들과 순례자들이 믿도록 만들게 하시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입성 뿐 아니라 나사로의 살리심, 그 이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부터 모든 일은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에 의해 오래 전부터 준비되었고 준비된 대로 진행되었고 계획대로 이루어졌음이 드러납니다. 이 모든 일을 준비하고 진행하신 이가 누구입니까?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4. 일하시는 하나님
    순례자들도, 바리새인들도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다 자기 계획이 있었지만 이 모든 일의 준비도, 진행도, 결말도 여호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되었습니다. 모든 눈에 보이는 일 뒤에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일은 사람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힘모아 죄악을 만드는 인간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 아래 놓여 있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 중이고 그 뜻대로 완성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미얀마에서도, 한국에서도, 여기 미국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의 모든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돈을 버냐, 못 버냐, 원하는 학교, 직장에 가느냐, 아니냐에 집착하고 거기에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합니다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 판단과 반대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의 성공과 실패가 영원한 성공과 실패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진리를 쉽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숲 안에서는 숲을 못 보고 산 속에서는 산을 못 보듯 삶의 한 가운데서는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도 나중에야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떠올리고 이 순간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았습니가? 창세기를 보면 요셉도 자신이 형들의 악행으로 노예로 팔린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후에야 떠올리지 않았습니까?
    (창 42: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우리도 지금 당장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괴롭고 힘들고 슬프고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에 우리 생각과
    38 min
  • 20220918 사랑의 아로마떼라피 / 요 12:1-8
    요 12:1-8/사랑의 아로마떼라피
    220918 주일설교
    1. 향기치료
    향기는 우리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합니다. 심신안정, 흥분진정, 스트레스완화, 작업효율향상, 면역향상, 수면촉진에 심지어 다이어트와 변비개선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이런 향기의 효과를 이용하는 아로마떼라피 곧 향기치료는 20세기에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지만 그 개념은 고대로부터 어느 문명 할것없이 모두가 사용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향이 나는 식물을 채취해서 기름을 만들어 제사, 예식, 치료, 미용 등의 목적으로 썼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방부효과가 있는 유향과 몰약을 시체를 미라로 만드는 데 썼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수도원이 특히 방향식물의 재배와 이용기술을 발달시켰고 아라비아에서는 의학발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르네상스시대에 다양한 향수가 계발되고 19세기에 합성향료가 발명되면서 비로소 누구나 향수를 사용할 수 있기까지 향수는 대단히 비싸서 부유한 가정이 아니면 꿈도 꾸지 못 하는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대에는 파티를 연다해도 온 집안을 향기로 가득 채우는 것은 부유한 가정에서도 정말 특별한 때, 특별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큰마음을 먹고 큰 돈을 쓰지 않으면 시도할 수 없는 사치였습니다. 일 년 치 연봉을 쏟아부어 이런 이벤트를 열기로 작정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그녀입니다.
    2. 가득한 사랑의 향기
    두어 달 만에 요한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7월 말까지 요한복음 9장과 10장에 걸쳐 안식일에 시각장애인을 고치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은 11장을 볼 차례인데 이 장의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2년 전에 3주에 걸쳐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11장을 건너뛰고 12장으로 들어갑니다. 무대는 되살아난 나사로의 동네 베다니입니다. 시점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유월절 6일 전입니다.
    어느 집에서 예수님을 초대하여 잔치를 열었는데 거기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도 초대받았습니다. 이 잔치 참석자들은 왕궁에서도 맡아보지 못 할만한 강렬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온 집을 가득 채우는 행복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 일은 마리아의 돌발행동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삼백 데나리온,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일년 치 수입에 해당하는 값비싼 향유 항아리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더니 자신의 머리로 발을 닦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관습에 주인은 귀한 손님이 오면 종들을 시켜 물로 그 발을 씻겼습니다. 그보다 더 극진하게 대접하고 싶으면 향유를 꺼내와 그 머리에 한두 방울 떨어뜨려 손님의 기분을 좋게 하였습니다. 한두 방울만 떨어뜨린 이유는 너무 비쌌기 때문입니다. 부자집에서는 이런 용도로 향유를 담은 작은 항아리를 보관했고 더 부유할수록 더 많은 향유를 보관했습니다. 아마 마리아가 들고온 향유는 그 집에서 보관하던 향유 전부였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런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가 아닌 발에, 한두 방울이 아닌 전부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종에게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그 머리칼을 풀어 발을 닦았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는 이를 낭비라고 비난하며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옳다고 그녀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녀는 왜 이런 결정을 한 것일까요? 유다는 또 왜 그녀를 비난할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이해가 되십니가?
    3. 지극한 사랑의 이유
    복음서를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듣기를 즐거워했습니다. 세상에 오신 구주시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기꺼이 그녀의 가족은 예수님과 그 일행을 극진히 섬겼습니다. 그러나 오빠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예수님이 늦게 오시자 실망과 원망이 솟아 올랐습니다. 그 순간 주님이 세상의 구주시란 사실을 의심했습니다. 그랬기에 죽은 나사로를 눈 앞에서 살려 주셨을 때 그녀의 놀라움과 더불어 한없는 죄스러움이 마음에 교차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주님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주님을 향한 감사와 감격, 사랑이 주체할 수 없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녀는 주님께 가장 좋은 것을 아낌없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베다니에 오셔서 잔치가 열렸을 때 주님을 가장 극진히 대접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언니 마르다처럼 요리를 잘 하지도 못 하는 그녀는 자신이 늘 고이 간직하며 귀한 손님께만 사용하던 향유 항아리를 들고 나왔습니다. 다른 손님들에게 하듯 머리에 한두 방울 떨어뜨리는 것으로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집 주인이 종들을 시켜 주님 발을 씻기지 않은 사실이 화가 났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주님이 어떤 대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인지, 또 자신이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여주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한 일은 그 비싼 향유 항아리를 아낌없이 주님 발에 부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찾지도 않고 자신의 머리칼을 풀어 주님의 발을 정성껏 닦았습니다. 온 집 안에 가득한 놀라움의 공기를 한 번도 맡아보지 못 한 진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덮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사랑의 향기요, 믿음의 향기요, 헌신의 향기였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이가 많이 사랑합니다. 큰 용서를 받은 이가 더 많이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상황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7: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눅 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기에 앞서 주님의 사랑을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마리아는 늘 주님 발 앞에서 그 말씀 듣기를 즐거워하던 여제자였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큰 사랑을 깨닫게 하는 은혜는 겸손히 듣는 말씀과 기도와 순종을 통해 옵니다. 주님 알기를 더욱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많은 교회에는 그 잔치집처럼 사랑의 향기가 가득 합니다. 사람들이 그 향기를 맡고 위로와 평화를 얻습니다. 세상 어떤 아로마떼라피, 향기치료도 이 사랑의 향기만큼 치료효과가 큰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집과 일터에, 우리 교회에 이런 사랑의 향기가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4. 위선의 악취
    마리아처럼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들은 그런 헌신을 이해하지 못 합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지극히 옳은 말을 합니다. 5절입니다.
    (요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하지만 그 의도는 순수한 것이 아닙니다. 6절입니다.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는 주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그의 동기는 욕심입니다. 겉으로는 바른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른 이들 정죄하며 욕심을 채우는 바리새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 자신의 의와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이처럼 바리새인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교회에 바리새인의 누룩이 퍼지는 것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옳은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옳은 때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습니다. 8절입니다.
    (요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가난한 자를 외면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좋은 일에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니 할머니에게 자녀를 가지라고 하는 말은 모욕입니다. 인내하고 부지런해야 하니 병자에게 일어나 일하라고 하는 것은 조롱입니다. 결혼잔치에 가서 좀 덜 먹고 아끼자고 하는 것은 남이 기쁨에 재를 뿌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을 아는 이는 옳은 말을 옳은 때에 옳은 방법으로 합니다. 주님을 모르는 이는 그저 자신의 의를 드
    35 min
  • 20220911 사랑하는 교회 / 마 18:21-35
    마 18:21-35/사랑하는 교회
    220911 주일설교
    1. 사랑의 원자탄
    초기 한국교회 위대한 순교자로 존경받는 손양원 목사님의 별명은 사랑의원자탄이었습니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공산주의자 반란군 안재선은 예수쟁이란 이유로 손목사님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을 총살하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목사님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지내다가 어느 부흥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다시 기운을 차렸습니다. 아들 죽인 원수 안재선이 사형선고를 받자 목사님은 적극적으로 구명활동을 벌여 사형을 막고 자신의 양아들로 받아들여 데리고 살았습니다. 가족도 목사님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양아들이 된 안재선은 손목사님의 바람대로 신학을 공부하였지만 ‘누가 자신같은 목사의 설교를 듣겠느냐’며 평신도로 살다가 아들에게 자신 대신 목사가 되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안재선의 아들 안경선 목사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목회를 하다가 2020년 아프리카 부른디 선교사로 떠나 할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처럼 한센씨병 환자들을 돌보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도대체 어떻게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원수는커녕 작은 상처를 준 가족, 친구, 이웃도 용서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에서, 일터에서 심지어 교회에서도 얼굴을 똑바로 보기 싫은 이들과 마주쳐야 하는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2. 어떻게 가능한가
    먼저 어떻게 원수사랑이 가능한가를 생각해 봅시다.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이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랑할 대상이 절대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다음으로 사랑할 주체에게도 사랑의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어떻게 생각해도 원수사랑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원수사랑이 가능하다고 하십니까? 성도에게 그 사랑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과 용서받은 죄인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자신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짐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답은 비유입니다.
    어떤 이가 왕에게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5천 억의 갚을 수 없는 수준의 빚을 졌지만 왕의 긍휼로 거저 채무변제를 받습니다. 그가 후에 자신이 면제받은 빚의 5만 분의 1인 천 만원을 빚을 자신에게 진 친구를 만났지만 긍휼을 베풀지 않고 감옥에 넣어버립니다. 이 사실을 안 왕이 화가 나 그에게 베푼 채무변제를 취소시키고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비유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성도는 자신이 이미 무한한 용서를 받은 이이므로 이웃도 용서할 의무가 있다는 점입니다. 용서는 하는 이의 너그러움이나 받는 이의 자격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명령을 받을 때 사람을 봅니다. 그래서 용서가 안됩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능합니다. 본문 33절입니다.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용서는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은혜가 아닙니다. 용서는 죄인이 하나님께 은혜를 갚는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은혜를 입은 성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은혜입었음의 증거입니다. 끝까지 용서를 거부하는 이는 하나님께도 용서받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사람을 바라보지 마시고 우리가 입은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시기 축복합니다.
    3. 어떻게 사랑하는가
    다음으로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수준의 사랑을 기대하시는지 정확히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입니다.
    (눅 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눅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분명 원수사랑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원수사랑은 손양원 목사님 같이 특별한 분만 아니라 평범한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럼 원수사랑은 어떻게 합니까? 원수를 보면 손주 얼굴 보듯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것은 분명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35절입니다.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예수님이 예를 들어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입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사랑과 원수 위한 기도가 나란히 병렬이 되어 나옵니다. 무엇이 먼저일까요? 무엇이 먼저라 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긍휼히 여기기 시작하면 기도가 나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를 시작하면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긍휼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하셨고 스데반 집사도 이렇게 하였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억지로 가서 웃으며 ‘사랑합니다’ 하고 ‘용서합니다’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영혼을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럴 마음이 안 생겨도 순종으로 기도하면 긍휼이 마음이 따라옵니다. 원수를 좋아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도를 시작하면 됩니다. 성령님이 일하심을 신뢰하고 기도로 순종하시기를 축복합니다.
    4. 사랑의 결과 
    이렇게 순종하여 사랑과 용서를 결단하고 기도를 시작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기적같이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까요? 당장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결과를 이유로 결단을 망설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내가 용서한다고 저 사람이 바뀔까요? 용서하는 나만 바보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면 제자들의 이런 고민을 주님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똑같은 명령을 하시는데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문맥이 묘하게 다릅니다. 누가복음은 회개하는 이를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눅 17:3) “…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그런데 오늘 본문엔 ‘회개’를 조건으로 내걸지 않습니다.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용서에는 여러 가지 상황과 방식이 있습니다. 공적인 처벌을 면제하는 것에는 회개의 조건이 반드시 따릅니다. 오늘 본문의 전문맥도 이를 명시하고 있고 어느 교단 할것없이 모든 교회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적 관계에서 미움과 원망을 내려놓고 긍휼히 여기는 것은 원수의 회개 없이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서 살펴보았듯이 성도의 사랑과 용서는 인간의 너그러움으로 일어나거나 인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회개하든 말든, 너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용서하라’고 주님이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녀들의 거룩입니다. 누가복음 6장을 다시 보십시오.
    (눅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하나님은 자녀들이 당신을 닮기를 원하시기에 사랑과 용서를 명하십니다. 사랑과 용서는 그러므로 성도의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30 min
  • 20220904 섬기는 교회 / 막 10:35-45
    막 10:35-45/섬기는 교회
    220904 주일설교
    1. 고객이 된 교인
    목사이자 심리학자인 로버트 랜달의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무엇을 원하는가’란 책은 그의 전공을 십분 살려 교인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분석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주장하기를, ‘현대인은 이해받고 싶은 욕구, 소속하고 싶은 욕구, 의미와 희망을 찾고 싶은 욕구 그리고 돌봄받고 싶은 욕구가 있으며 교회가 이런 욕구를 채워줄 때 사람들은 기꺼이 교회로 발걸음을 옮긴다.’고 합니다. 이 책의 주장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언듯 들으면 틀린 것이 하나 없는 구구절절이 맞는 말입니다. 아니, 깊게 생각해 봐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전혀 모르겠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들리는 이유는 이 주장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매년 숱하고 쏟아져 나오는 비슷비슷한 목회지침서 중 하나인 이 책의 주장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전형적 사고방식입니다. 소비사회라 불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자, 고객을 왕으로 대접하는 곳입니다. 고객은 모든 것의 중심입니다. 고객이 생각하고 바라고 욕망하는 바를 가장 잘 이해하는 회사가 성공하고 이해하는 정치인이 지도자가 됩니다. 한마디로 이런 생각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결코 교회가 닮아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 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현대교회가 얼마나 세상풍조에 물들어 있는지를 이 책과 이 책에서 감동을 받는 교회 지도자, 교인들이 잘 보여줍니다. 그 결과 오늘날 기독교인은 교회라는 기업이 잘 대접하여서 교회로 몰려와 헌금하게 만드는 고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선택할 때 무엇을 고려하셨습니까? 2주 전 사경회에서 강사님이 지적하시기를, 이민자들이 교회를 고를 때 고려하는 세 가지가 이러했습니다. 따뜻한 교제, 감동적 예배, 자녀교육 프로그램. 정서적 필요를 교제로 채웁니다. 영적 필요를 예배로 채웁니다. 자녀교육의 필요를 교육부 프로그램으로 채웁니다. 이런 필요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불만이 터져나옵니다. 이 교회는 왜 이렇게 차가워? 새교인에게 관심이 없어. 예배는 왜 이렇게 지루해. 교육부는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들어? 익숙하지 않습니까? 왜 이 식당 음식맛이 이래? 이 가게는 왜 이렇게 더워? 이 학교는 아이들 교육을 이렇게 시켜? 바로 대접을 받으러 식당과 가게, 학교를 찾는 고객의 자세입니다.
    대접을 받고 필요를 채우려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는 세태야말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엄하게 경계하셨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세태를 경계하셨습니까? 성도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2. 섬기러 오신 주님
    오늘 본문은 제자들의 다툼으로 시작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을 따로 찾아와 왕이 되시면 자신들에게 총리와 장관자리를 주십사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들은 열두 제자 중에서도 일찍 부름받았을 뿐 아니라 그 어머니가 예수님 일행을 열심히 대접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여겼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들은 나머지 열 제자들이 화가 났습니다. 선수를 빼앗겼던 것이 분했습니다. 그들은 아마 공평하게 경쟁해서 총리와 장관직을 차지해야 하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비겁한 수를 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제자와 나머지 열 제자 사이 갈등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입니까? 모두의 마음에 예수님을 따라다닌 대가로 높은 자리를 얻으리라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모든 다툼은 바로 이 욕망에서 시작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은 교회에 있으나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 있으면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다툼을 일으킵니다. 이건 2+2=4인 것처럼 콩을 심은 곳에 콩이 자라고 팥을 심은 곳에 팥이 자라듯 자명한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욕망에 사로잡힌 마음을 버리라고 꾸짖으셨습니다. 43-44절입니다.
    (막 10: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는 세상과 같아서는 안 된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서 크고 으뜸이 되기를 바라라. 그러기 위해서 세상에서는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 제자공동체는 세상과 다른 가치를 좇으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이 그렇게 악하고 어리석은데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나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좇는 것입니다. 45절입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3. 예수를 바라보라
    예수님은 지극히 높은 보좌에서 지극힌 낮은 이 땅에서도 가장 낮은 십자가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죄인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대속물이 되어 고초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죄인들을 위한 가장 큰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믿는 제자들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 섬김의 주님을 매일 바라보고 좇는 이들을 성경은 제자요, 성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거듭난 성도입니까? 예수님을 좇는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입술로 주여, 주여 하는 것 말고 진짜 증거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바라보고 그 뒤를 좇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전합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처럼 낮아져서 죽기까지 복종하려 하지 않는 이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누구입니까? 십자가까지 내려가서 죽으신 예수님이십니까? 높은 자리, 부유한 자리, 성공한 자리에 올라가서 살아서는 세상영광을 다 누리고 죽어서는 천국티켓까지 보장받은 남부럽지않은 성공한 기독교인입니까? 많은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세상풍조를 좇으며 후자의 삶을 바라고 좇아갑니다. 부활의 영광은 바라지만 십자가의 고난은 바라지 않습니다. 교회에 이 욕망에 발맞춰 십자가 없는 부활을 외치며 고객들을 끌어모읍니다. 넓은 길, 편한 길, 멸망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섬김의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꿈꾸는 이들이 되지 않으시기를 축복합니다.
    4. 섬기는 예배
    예수님의 섬기는 마음을 품어야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 혹은 service라고 합니다. service는 예배가 곧 봉사요, 섬김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배에서 누구를 섬깁니까? 당연히 예배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종종 예배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사람을 섬깁니다.
    목사를 섬기는 예배가 종종 있습니다. 목사의 언변, 카리스마에 집중합니다. 목사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번 집회는 어느 어느 유명 목사님이 오십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한 번 들어보세요. 우리 목사님은 이런 치유은사, 저런 예언은사, 이런저런 일에 탁월합니다 라고 광고하며 교인을 끌어모읍니다. 집회가 끝나면 목사가 박수를 받습니다. 영광을 누립니다. 누가 service를 받았습니까? 목사입니다.
    반면 교인들을 섬기는 예배가 종종 있습니다. 목사는 교인들이 듣기 불편한 죄와 심판과 경고는 다 발라냅니다. 듣고 싶은 위로와 희망과 축복의 메세지를 듬뿍 뿌려넣습니다. 교인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기대 앉아서는 설교를 품평합니다. ‘목사님, 오늘 은혜 있었어요.  아이, 오늘은 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낸 헌금이 좀 아까웠어요. 아, 에어컨이 왜 이렇게 약해요? 아, 오늘은 간식이 좀 아닌데… 우리 교회는 왜 이런 서비스 안 합니까? 저쪽 교회는 하던
    43 min
  • 20220828 전하는 교회 / 행 11:19-24
    행 11:19-24/전하는 교회
    220828 주일설교
    1. 박해받는 교회
    오늘 본문을 보고 의아하신 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 지난 주와 같은 본문이 아닌가? 잘 못 나온 것 아닌가?’ 물론 제 말씀을 듣고 방금 ‘지난 주에도 이 본문 했어?’라고 하는 분도 분명 계셨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축복합니다. 지난 주 사경회에서 강사님이 이 본문에서 강조하신 바는 ‘흩어진 자들이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였지만 후에 이방인에게도 전하기 시작했고 이는 교회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또 다른 중요한 메시지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흩어진 자들이 유대인에게든 이방인에게든 ‘아무튼 말씀을 전했다’는 점입니다.
    (행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이것이 이상한 일입니까? 네, 평범한 일은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이며 또 어떤 처지입니까? 스데반의 죽음을 계기로 일어난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입니다. 그 박해가 어떤 방식이었는지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 8:1) 사울이 그(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무서운 박해입니다. 옥에 갇히는 것은 오늘날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옛날에는 일단 들어가면 살아나온다는 보장이 없던 시절입니다. 말이 감옥이지 빛도 없고 화장실도 없이 쥐떼와 벌레가 우글거리는 토굴 같은 곳에 무한정 가두어 두는 것이었습니다. 가족이 음식을 가져다 두지 않으면 무작정 굶는 것입니다. 감옥의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인 환경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재판을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 한 채 병들거나 굶어서 죽었습니다. 그들이 흩어진다고 박해로부터 안전한 것이 여전히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흩어진 자들조차 추적하여 잡아 가두려 하였습니다. 거기에 앞장 선 사람 중 하나가 사울이었습니다.
    (행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행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그들은 환란으로 흩어진 자들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종교박해를 피해 망명한 난민들입니다. 갑자기 일어난 박해이니 준비나 잘 하고 피했을까요? 집과 재산과 가족과 삶의 터전을 모두 버려두고 먼 땅으로 피신한 난민신세이니 얼마나 처량하고 답답하고 막막하고 고생스러웠을까요? 우리가 그런 처지이고 여전히 우리를 잡으러 다니는 이들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우리 신분을 숨기고 숨어지내며 어떻게든 살 길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겠습니까? 우리 신분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말씀을 전하는 행위 따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위험천만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왜 흩어져 도망쳐서까지도 두려워하고 한탄하고 원망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까?
    2. 전하는 교회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삶의 목적이 바뀐 거듭난 성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천국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들도 주님을 만나기 전엔 여느 사람들처럼 제 한 몸, 자기 가족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상 삶의 목적이 없는 방황이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능이요, 욕망입니다. 하이에나도 잘 먹고 까마귀도 배부르게 사는 것을 바랍니다. 하이에나가 배룰 채우려고 시체를 물어뜯고 그 남은 고기로 배를 채우려고 그 위를 빙빙 도는 까마기를 보고 그 누구도 목적있는 삶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본능을 좇는 삶이라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왜 일어나고 왜 일터로 향하고 왜 무언가를 하셨습니까?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를 바래서였다면 하이에나와 까마귀의 그것과 우리의 삶이 무엇이 다를 바 있을까요? 그러나 주님을 만난 초대교회 성도들은 물과 성령의 역사로 거듭 났습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여서도 주님을 전했지만 흩어져서도 주님을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거듭난 성도들의 삶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성도의 목적입니다. 이런 성도의 연합을 가리켜 성경은 교회라고 부릅니다. 성령이 세우신 이런 교회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급속도로 복음을 로마제국 전역으로 전파하였습니다. 교회가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처음 태어난 기원후 30년 경부터 약 반 세기 정도가 지난 1세기 말 교회는 로마제국 곳곳에 교회를 퍼뜨렸습니다. 지도를 보십시오. 유대인들의 박해도, 로마제국의 박해도 기독교인들의 전도를 막을 수 없었고 복음이 퍼지고 교회가 서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태생부터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는 공동체였습니다.
    3. 전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
    그런데 AD 4세기 경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경 기독교를 제국의 합법적 종교 중 하나로 인정하였습니다. 이어서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80년 경 기독교를 아예 제국의 유일한 종교 즉 국교로 선포하였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박해받는 신앙이 로마제국을 점령하고 세계적 종교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한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하였습니다.
    반면 일부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이 맞이한 가장 큰 위기라고 보았습니다. 교회가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기독교인이 생기고 교회가 서는 이상한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칙령으로 이교도들의 공직진출이 금지되자 너도나도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귀족들은 막대한 재산에 면세혜택을 누리기 위해 사제가 되었습니다. 제국전역에 정부의 지원으로 이방신전과 관공서가 교회건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모르는 기독교인, 복음을 이해 못 하는 사제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때 참 성도들은 놀라고 당황하며 황제의 명령으로 세례받는 기독교인, 황제의 지원으로 세워지는 교회를 거부하고 광야로 들어가 성경을 읽으며 참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며 살려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수도원 운동이 4세기 경에 불붙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때부터 참 교회는 지하로 들어가 종교개혁 때까지 복음을 수호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의 출현으로 중세교회는 말로 다하기 힘들 정도로 타락하고 정치화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교회개혁이 시도되었습니다. 근대를 연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참 교회의 모델은 초대교회 곧 오늘 본문이 설명하는 ‘모이든 흩어지든 복음을 전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4. 복음이 없는 교회
    오늘날 한인이민교회는 이 교훈을 가슴 깊이 세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전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한 때 ‘이민오면 모두 교회에 간다’, ‘중국인들이 모이면 중국집을 차리고 한국인들은 모이면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힘겨운 이민생활의 정서적 결핍을 채우고 실질적 도움을 제공받는데 교회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외롭고 힘들고 심심하니 교회에 가서 위로받고 교제하고 힘도 얻으려고 교회에 갑니다.
    여기에 성장을 우상으로 삼은 한국교회의 이해도 맞아 떨어졌습니다. 고도성장시기에 함께 부흥한 한국교회는 ‘하면 된다’는 성장주의 슬로건을 성경적 용어로 포장하여 가르쳤습니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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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14 광복의 대가 / 딤후 1:7-8
    딤후 1:7-8/광복의 대가
    220814 광복절기념주일
    1. 박관준 장로
    1939년 3월 24일 금요일 오후 1시경 일본제국 국회의사당에서 신종교법안이 심의되던 찰나 2층 방청석에 앉아있던 65세의 박관준 장로는 25세의 아들 박영창 전도사, 32세의 안이숙 선생과 함께 ‘여호와의 대사명이다’라고 외치며 신사참배항의서한과 경고성명서 뭉치를 의장단상을 향해 던졌습니다. 세 사람은 순식간에 달려온 경찰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40여 일간의 모진 취조를 당한 후 한국으로 강제송환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신사참배반대운동을 멈추지 않던 박장로는 다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취조를 당한 끝에 광복을 5개월 앞둔 1945년 3월 13일 형무소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박장로는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5천 여명, 주기철 목사와 함께 순교한 50여명의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박장로와 함께 국회의사당에서 항의서한을 투척하고 옥고를 치렀던 그의 아들 박영창 목사는 LA에서 목회를 하다가 지난 2015년 아버지를 따라 주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한국의 엘리야로 불린 박장로가 순교 전 옥중에서 남긴 한시는 참 성도의 고백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인생 일대에 한 번 죽음이 있으니(人生有一死) 어째 죽을 때 죽지 않으리요(何不死於死)
    그대 홀로 죽을 때 죽었으니(君獨死於死) 죽었어도 천추에 죽지 않었도다(千秋死不死)
    죽을 때가 와서 죽지 않으면(時來死不死) 살아 즐거움이 죽음만 못하리라(生樂不如死)
    예수께서 나 위해 죽으셨으니(耶蘇爲我死) 나도 예수님위해 죽으리라(我爲耶蘇死)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마땅히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을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기를 오히려 기뻐한 그는 진정 의를 위해 고난받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복의 대가
    오늘은 77주년 광복절 기념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 안녕과 복지는 우리 주님의 한없는 은혜입니다. 또한 선조들의 값진 희생의 대가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또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요!
    얼마 전 저희 집 큰아이 평화가 내년에 대학을 결정하고 나면 친구들과 한국에 놀러간다며 뭘해서 돈을 모을까 궁리하는 것입니다. 저희 집 아이 뿐 아니라 요즘 중고등부 아이들의 로망이 방학 때 한국에 놀러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어렸을 때도 상상도 못 하던 일입니다. 이런 변화는 당연히 한국사회의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성공 덕분입니다. 해방 후 전쟁의 잿더미에서 비약적 경제성장을 거듭하여 국내총생산 GDP 기준 세계 191개국 중 10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1인당 국민소득도 인구 5천 만명을 넘는 나라 중에서 세계 6위에 이릅니다. 이 뿐 아니라 군사, 문화, 의료 등 각 분야에서도 한국의 발전속도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은 이제 당당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우린 이민자로 살지만 여전히 조국의 발전상에 큰 혜택을 봅니다. 마음의 자부심은 당연하지만 타인종이 우리를 보는 시선도 크게 달라집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평가할 때 뼈대있는 가문에서 교육받았는가를 중요하게 여겼듯 국제사회에서도 선진국 출신이냐, 아니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이런 복된 삶은 당연히 선조들의 크나큰 희생을 대가로 지불한 결과입니다. 거저 얻는 복은 없습니다. 죄와 악으로 병든 세상에서 자유와 평화, 안녕과 복지는 절대 공짜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복의 삶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주 착각합니다. 오랫동안 안전한 땅에서 인류 대부분이 누리지 못 하는 평화와 복지를 누리다 보니 이것이 정상이고 고통과 결핍이 예외인 줄 압니다. 그래서 건강하다가 갑자기 아프거나, 부유하다가 가난해지거나, 평화롭다가 다툼을 겪으면 마치 겪지 말아야 할 상황을 겪는 것처럼 놀라고 당황하고 억울해 합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착각입니다. 일찍이 인류의 현자들은 인간 삶의 기본조건은 결코 안전이 아니라 위협이며 복지가 아니라 고통임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시작된 불교는 ‘인생은 고해’ 즉 고통의 바다라는 대전제 위에 시작합니다. 이 사실은 이 복된 나라 최강제국 미국에 사는 현대인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상담가이자 뉴욕타임즈최장기베스트셀러 기록을 가진 스캇팩의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첫 문장을 ‘Life is difficult’ 삶은 참 어렵다로 시작합니다. 이 안전하고 풍요롭고 복된 나라에서조차 삶이 어렵다면 다른 나라들에서는 도대체 어떠하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의 삶은 어려운 것이 정상입니다. 쉬운 것이 예외입니다.
    3. 성도와 고난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기본인 세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도의 삶이 세상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이는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삶과 같습니다. 물살을 타고 내려가기는 쉬운데 거슬러 올라가기는 몇 배나 힘이 듭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가기는 쉬운데 거슬러 가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참 성도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바울은 또 갈라디아지방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행 14:22) “…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 걱정, 근심, 염려에서 다 해방되는 삶을 기대한다면 이는 반쪽 진리입니다. 분명 참 믿음의 삶은 세상 염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만 반면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의를 위한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복된 성도의 삶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참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게 되고 이 삶은 의를 위한 박해를 예약합니다. 박해받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박해를 받습니다. 전혀 박해가 없다면 그것은 의를 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시련이 찾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이 정상입니다. 아무 고통이 없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아픈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고 경제가 어려운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고 가정에 갈등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고 교회에 시련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이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십시오. “왜 한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이제야 고난이 오는구나. 정말 다행이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정말 그렇게 반응했습니다. 회심과 헌신을 강조한 18세기 그의 복음전도사역은 형식화된 신앙을 고수하던 영국국교도로부터 많은 비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말을 타고 순회전도를 다니던 어느 날 밤 늦게 이웃마을로 들어가다가 그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그 누구도 그를 욕하거나 돌을 던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안한 마음에 말에서 내려 엎드려 기도하려는데 그 마을사람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 “빌어먹을 웨슬리, 우리 마을에서 꺼져라”하고 소리치더랍니다. 그제서야 그는 “주님, 오늘도 제가 주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 맞군요. 주님을 위해 욕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4. 고난을 대하는 믿음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세상염려를 내려놓는 대신 하나님 나라 위한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피장파장 아니냐, 고통의 총량은 똑같은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주님을 위한 고난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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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누리고 천국을 세우고 천국을 전하는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