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 연합 장로교회 말씀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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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타 연합 장로교회 말씀 강해 episodes

  • 마태복음 23 : 29-39 (정인수 담임목사님)
    마태복음 23 : 29-39 (정인수 담임목사님)
    마태복음 23장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또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특별히 이 말씀들은 예수님 시절의 서기관들과 바리새 사람들만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목회자들과 리더들에 대한 질타입니다.
    주님께서 23장 전체를 통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질타하신 첫째는 언행의 불일치였습니다. 말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표리부동한 사람이다 또 역시 위선자다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지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표리부동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말은 좋지만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주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 말씀 하시고 계신것은 외식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행동이 남들에게 보여지기 위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구제할 때 기도할 때 금식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읫기하면서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질책 하시기를 너희들은 명예욕과 교만이 가득찼다는 것입니다.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기를 원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시장에서는 문안받기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대한 질책임과 동시에 또 특별히 교계전반을 돌아보게 만드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네번째 주님의 질책의 말씀은 율법에 대한 근본정신을 잃어 버렸음을 질책하고 계십니다. 너희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지만 의와 신과 인을 버렸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의 대표적인 정신은 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근본 정신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공의와 인과 신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완성 시키고자 우리 주님 예수님을 보내시어 십자가를 감당케 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하나님께는 우리에게 당신이 베푸신 의와 신과 인을 따르도록 요구하고 계시다는것을 한시도 잊으면 안되겠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야단 치시기를 25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라고 하십니다. 너희들이 겉이 깨끗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너희의 속은 생각과 욕망과 원함이 더럽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속사람이 깨끗하지 못하고 악하다는 말씀을 하고 꼐신것입니다.
    또 27절에서도 야단 치시길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중동지역의 무덤은 아주 아름답게 외관을 꾸미고 또 회칠을 해서 도드라지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것은 이것이 부정한 무덤임을 모두가 알게해서 피하라는 경고인것입니다. 겉은 아름다우나 속은 썩은것들로 차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와 같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속이 더러운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도 주님께서는 29절과 30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말씀하시며 이 사람들이 실패한 역사의 전철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비판 하셨습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 시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헌금의 큰 부분을 사용해 자신들의 조상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장식하고 아름답게 치장하는데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이 선지자들을 해친 조상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강조하는 행위를 한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세상 역사상 가장 큰 선지자요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는데 가장 앞장을 선 사악한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선함을 가장하기 위해 선지자들의 무덤을 치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세례요한을 죽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밖게한 가장큰 원흉들임을 우리는 뼈져리게 느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그렇게도 자신들과 자신의 조상들과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다르기위해 나름 애를 썼어도 결국 이 자들은 이들의 조상들과 같이 사악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없이 우리의 의로 구별되려 해 봐야 우리의 사악함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32절의 우리 주님의 말씀이 정말 무섭습니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이 말씀은 너희 바리새와 서기관들이 너희 조상이 하던 그 악행의 분량을 마저 채우라는 이야기 이십니다. 이 자들에게 대한 주님의 분노가 어느정도였는지 또 이에 비례하는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하나님보시기에 가증했던것인지 잘 볼 수 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니 34절에 나오는 핍박이 주님의 제자들에게 또 우리에게도 임할것은 당연할것입니다. 이렇게 악한 세상이니 말입니다, 34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우리는 지금 미국에서 있기 때문에 정말로 피부에 느꼊지는 핍박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시리아에서 아프리카에서 중국에서 북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 대한 탄압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요전에도 중국에서 교회의 십자가를 철거하다가 마찰이 있던 대형교회의 목사님을 투옥시키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성도가 25000명이나 다니는 큰 교회의 영향력있는 목사도 이렇게 핍박을 받는데 다른 목사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형제들이 이런 고난을 당하는데 우리가 때때로 겪는 하나님의 자녀로의 고난은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으 또 35절에서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라고 질책 하십니다.
    의인의 피는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이 카인과 아벨의 예에서 잘 나옵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면 다 기억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심판의 큰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순교자가 뿌린 피가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이라는것이 계시록에 잘 적혀 있습니다.
    계시록 6장9,10절은 이렇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악인은 하나님께 참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의인이라야 하나님의 피로 씻은 자녀들이라야 탐원이 가능합니다. 오늘 순교자들의 피가 아직도 하늘에서 탄원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의 피가 지상의 악을 도멸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쉬지 않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로 이 땅의 악위에 도래하고야 맙니다.
    그러나 사실은 영죽을 우리가 희망을 가짐은 오직 우리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우리 죄가 씻음받고 그 공로로 인해 천국의 문이 우리에게 열렸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의인중의 의인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뿌리신 보혈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것이 부님의 은혜요 영광입니다. 이로 인해 오늘도 기뻐하시고 악을 경계하시고 하나님께 기도로 탄원하시는 연합의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8 min
  • 마태복음 23 : 23-28 (서석훈 목사님)
    마태복음 23 : 23-28 (서석훈 목사님)
    요근래 화제가 된 일이 있습니다 바로 페이스북이라는 소셜미디어에서 좋아요라는 버튼의 누르는 숫자가 올라가는 것에 매료되어서 아주 자극적인 사진과 동영상을 올리는 것으로 이 라이크수자를 높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극적이다 못해 위험한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누워있는 자신의 다리위로 자동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올린다던지 혹은 기차 선로사이에 누워서 자신의 위로 지나가는 기차를 찍고 다 지나간후에 무사하다는 것을 동영상으로 만들어서 올린다던지 하는 자신의 신체나 생명의 위협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소셜미디어의 본래의 목적은 사람들끼리의 소통이 목적이었습니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을 엮어 주고 그들의 생각과 소식을 나누게 하는 아주 건전한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셜미디어의 본질이 소통이라면 이것의 형식적인 부분중의 하나가 바로 이 좋아요 버튼 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형식이 본질보다 훨씬 더 중요해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현상을 일종의 나르시즘-자기애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자아도취적인 면이 이 현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나르시즘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유래를 했나하면 나르키소스라는 목동이 있었는데 이 청년이 연못에 비친 자기모습에 그만 반해버려 연못만 쳐다보다 자신의 모습을 만지려 연못에 들어갔다가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가 된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흥미로운것은 이런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을 심리를 분석해 보면 놀라운것은 이런 경우 극단적인 자기표현을 보이는 사람의 대부분이 자읫기이 현저히 낮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에대해 가지고 있는 자신감이 낮아서 오히려 그것을 보호하려는 보상심리의 발현으로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나오는 바리새파인들을 이런 나르시즘의 관점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면에서 바리새파인들은 매우 분명하게 나르시시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나르시시즘도 역시 본래의 취지와 의미보다는 형식적인 면을 부각시켜서 자신의 본질적인 빈약함을 가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질과 의미대신 형식과 껍데기만 부풀리는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야단치는 부류의 인간들은 서기과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둘은 행태적으로는 아주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그들이 하는 역활에 있어서는 다른 역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기관은 먼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연구대상은 모세오경입니다. 이 계명들을 철저하게 연구하는 현대에 있어서는 성서학자들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 당시의 지식인 계층이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이 뜻하는 그 의미를 분명하게하고 그 율법들을 사람들이 지킬 수 있도록 해석해 주는 현대의 신학자들의 역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는 쌀 몇톨까지도 십일조로 나눠 드리는 형식주의의 극단의 모습을 보이는데 겉으로 보기엔 이 사람들보다 더 경건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이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아주 호되게 본질을 망각했다고 정말 더 중요한 율법의 뜻인 정의와 긍휼을 잊어버렸다고 야단을 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킨다는 표현은 중동지역에서 포도주를 만들때 꼬이는 날파리는 음식안에 들어가면 부정하게 하는 곤충으로 율법이 정하고 있기 때문에 만드는 과정에서 걸러내도록 율법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정한 것들 중에 가장큰 낙타는 삼켜버린다는 말씀입니다.
    경건한척 하지만 재산이 될만한 낙타같은 것은 삼켜버린다는 의미도 될 수 있고 말씀드린대로 정의와 긍휼을 잃어버린 행위를 말씀하신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분명한 뜻을 우리는 주님께서 드신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의 경우를 보면 더 분명해 집니다. 그들은 길가에 있는 죽어가는 사람이 곧 죽을것으로 생각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면 안된다는 율법의식하나때문에 사람을 내버려 두고 피해가는 모습말입니다. 율법이 정의와 긍휼을 위해 잇는것이라면 이들은 정말로 잘못된 행위를 하는것이니까요.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화려하지만 껍데기로 채워논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의미가 없는 껍데기로 자신을 치장해 사람들의 존경과 환심을 사려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로 지켜야할 계명의 본질을 두가지로 명쾌하게 정리를 해 주십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로 두째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수평적 관계로 정리를 해 주십니다. 이것이 율법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안에 우리의 인생의 의미가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본빌적인 의미가 아닌 껍데기를 붙들고 껍데기에 이끄리어 산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자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모르는 자들이었던것입니다. 마치 페이스 북에서 이웃과 소통하는것이 목적이 아니라 좋아요버튼 클릭수자 올라가는데만 관심이 있는 빈약한 자의식의 자기도취를 즐기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계명의 본질을 깨달아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안의 구원의 기쁨이 넘쳐 우리가 감당하는 모든것들에서 기쁨과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으로 사는 모습에서 껍데기에 집착하는 가짜가 아닌 우리안의 생명의 기쁨으로 우리의 삶을 감당하는 진정한 삶의 모습이 드러나야겠습니다. 또한 섬기는 일에서도 그 기쁨이 드러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4 min
  • 마태복음 22 : 34-46 (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22 : 34-46 (정인수 담임 목사님)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의 모함을 물리치신후에 이제는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나아 옵니다. 이미 마태복음 12장에서 주님의 사역을 마귀의 힘을 빌어 하는 것이라 모함을 했다 쓴소리를 들어서인지 이번에 이들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자기들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높은 질문으로 찾아 옵니다. 그것은 계명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시대 아주 영향력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이들이 율법에 정통한데서 나왔습니다. 출신 지파에 관계없이 늘 율법을 연구하면서 특히 어느 율법이 더중요하고 어느것은 덜 중요한지를 따지는 것으로 이들안에서 파도 나뉘고 또 때로는 반목도 하는 그런 지식인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신명기 6장5절 말씀인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와 레위기 19장18절 말씀인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라는 말씀을 정확히 들어 대답을 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명확하게 구약의 성경구절을 근거로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 인들도 크게 토를 달 수 가 없이 그저 듣기만 하게되는 권위가 있으신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바리새인들의 대답과도 다르고 또 유대인들의 정통한 가르침과도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에 있어서는 어느 구절도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랑을 같이 놓고 가르친 구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이던 사두개 인이던 랍지들의 가르침에는 이웃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사랑의 계명을 지키기위해 이웃사랑은 안지켜도 된다는 핑계나 댔으면 댔을까, 이들에게 이웃사랑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모 사랑하기도 성전에 헌금을 낼 일이 있으면 고르반이라고 하면 안해도 된다고 가르치던 위선을 기억하시면 이해하시기가 쉬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종합하면 이 두가지 계명 곧 하나님 사랑하는것과 이웃을 사랑하는것으로 줄일 수 있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계명이 어떤것이 먼저고 나중되는것이 있는것이 아니라 둘의 중요성이 똑 같고 이 두 계명을 지키기 위해 나멉지 계명들도 있는것임을 분명히 해 주셨습니다. 또 이 두 계명은 동정의 양면과 같아서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난에서 떼서는 생각할 수 없는것이라는것, 바로 하나님 사랑을 오나성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웃 사랑을 해야하고 이웃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사랑을 해야만 하는 불가분의 현실을 역설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많은 계명중의 하나가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하신것은 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것에 대한 또다른 강조이신것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중에 가장 작은자, 힘없는 자, 돈없는 자, 여자와 아이들을 하나님자신과 예수님 본인과 동일시해서 생각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는 그리고 지금에도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을 당신의 말씀과 사역가운데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것이 곧 하나님 사랑이신것을 늘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것은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하나님 사랑이기도 하다는것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가운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구별되는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시대에 오면 기도 열심히하고 말슴 열심히 보는 경건의 삶의 정의에 실천적인 의미가 더해 집니다. 야고보서 1장27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가 있는것입니다.
    야고보사도는 경건에 대해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경건을 이야기 하십니다. 우리는 늘 인지적 관념적 경건에 머물러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천의 경지에 이른 경건을 늘 말씀 하십니다. 행함이 없는 경건과 믿음은 죽은것이라는 것입니다. 능력의 하나님의 계명은 행함으로 나타나야만 하는것임을 우리는 잊어버리면 않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께 사랑과 은혜를 받고 또 능력을 받아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받은 은혜를 나눠주는것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사랑의 영성이고 또 진정한 영성입니다. 그것이 신약에서 주장하는 관계의 영성이고 섬김의 영성이고 돌봄의 영성이며 바로 사랑의 영성인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웃을 사랑하는것으로 드러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올바르게 서 있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그리고 그 이웃사랑의 실천은 언제나 나의 삶속에서 어떤 경우라도 복음을 실천하고 전하는것으로 드러나야만 하겠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저 땅끝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실천이고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돌보고 섬기는 그러한 축복이 언제나 우리교회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교회에 투병하시는 분들중에도 시니어분들은 생활이 어려운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래서 어제도 심방을 하면서 얼마안되는 구제금을 전달해 드렸더니 그렇게 눈물을 흘리시는것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겪었습니다. 교회는 두기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의 기둥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관계의 영성의 기둥입니다. 이 둘은 구별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심으로 이둘의 실천을 완성해 주십니다.
    우리 아틀란타에 보면 가끔 기러기떼가 날라가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날아갈 때 v자로 날아가는데 그 이유가 이렇게 나를 때 앞에가는 기러기가 만들어 내는 상승기류로 이 뒤에가는 기러기가 힘을 받아 수월하게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 가던 기러기가 힘이 들면 뒤의 기러기와 자리를 바꿔서 힘을 비축하는식으로 한 마리의 낙오함도 없이 가기 위해서 V자형의 대열로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를 우리 연합교회의 교인들은 모두 다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도와주고 낙오하는 사람이 없도록 챙겨주는 진정한 관계의 영성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모두가 만나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욱 닮아가고 하나님께 크신 영광을 돌리시는 모두가 되시오록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 min
  • 마태복음 22 : 23-33 (김재홍 목사님)
    마태복음 22 : 23-33 (김재홍 목사님)
    오늘의 말씀을 보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주님꼐 나아와 역시 주님을 옭아맬 질문을 하고 있는것을 보게됩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모세 오경, 창세기, 출래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을 믿던 유대인의 한 지파로이사야서나 다니엘서에서 말씀하시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들이 질문하던것은 신명기 25:5절 말씀을 근거로 형제가 죽었을때 다른 형제가 그 아내와 결혼을 하는것이 법인데 만약에 부활이 있다면 이 여인은 다른 형제들과 결혼을 한 것이니 간음을 저지른것이 아니냐고 에둘러 주님을 압박하면서 부활을 부정하고 동시에 부활의 믿음을 설파하시던 예수님을 모함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두개인들이 크게 두가지를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였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였다라고 말씀하실때 πλανάω-플라나오라는 단어를 원어에서는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길을 잃고 헤메는 모습, 또 속아서 바른 정도를 벗어나게되는 모습을 말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할때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경험으로 창조주하나님을 잣대질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오늘 이 사두개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고 예수님꼐서는 이들이 갈바를 잃고 헤메고 있다고 속고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사야 55:8,9절 말씀을 보면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뛰어난것 같아도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모두의 생각보다도 넓으시고 깊으시고 높으십니다. 바로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인생에 보통 두셋의 자녀를 낳고 많아야 네다섯을 낳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아이들을 키우는데 얼마나 큰 힘이 들어가고 전력을 다 해야 잘 자랄수 있도록 이끌어 갈 수 있습니까? 또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생각과 아이들의 생각은 얼마나 다릅니까? 아이들의 미숙함을 넘어 부모들이 주의하고 경계하는 것은 얼마나 많으며 삶의 경험으로 자녀에게 조언할 일은 얼마나 많습니까?
    고작 몇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는 우리도 이런데 온 인류의 조상때부터 지금까지 만인의 부모되시는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현재만 보더라도 칠십억의 인구의 부모이신것이 아닌가요? 이런 하나님께서 얼마나 넓고 깊고 높은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해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라고 하신것은 우리가 천사가 아님으로 천사가 어떤지 알수가 없듯이 우리가 그 생활을 알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 짐작은 가능하겠지만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32절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시면서 출애굽3:6절을 인용하셔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먼저 부르시는 하나님이시고 부르시되 ㅅ간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며 모세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아직도 하나님안에서 살아있는것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죽음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생명의 하나님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숨을 불어넣으시매 인간이 생령이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생명의 주관자이시신 하나님은 살아있는것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속성이 생명이시므로 우리의 모든 기도에 생명으로 응답하시는 줄을 믿게 되시기 축원합니다.
    매주 목요일 권산님들과 집사님들과 같이 중보기도를 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로 강하게 인도하심을 체험할 수 가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어는 집사님께서 아파서 병원에 가셨더니 폐에 물이 차 있다는 진단을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기도를 하고 위로를 하고 그랬는데 이 주후에 이 분이 어시더니 병원에서 말하기를 그 물혹이 사라졌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연세가 많으셔도 하나님께서는 생명으로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의 성품이시고 속성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소멸이 아니고 죽음이 아닌 생명이신것입니다. 모든 기도에 생명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아브라함도 야곱도 이삭도 지금 하나님안에서 살아있다고 말씀 하시지 않습니까?
    또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6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하시면서 이 말씀은 단순히 육신의 생명만을 두고하신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우치고 영적으로 새생명을 얻게 되는 영적인 새생명을 또 말씀하시는것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새생명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우리가 이 생명으로 말미암아 즐겁고 기쁘고 그리고 또한 이 것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새생명을 누리지 않는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자가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든 영역가운데 경제, 건강, 관계의 문제에서도 생명으로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1 min
  • 마태복음 22 : 15-22 (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22 : 15-22 (정인수 담임 목사님)
    오늘의 말씀은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의 악의적인 질문에 하나님의 지혜로 대답하시는 우리주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이번에 나아온것이 바리새파 한 부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헤롯 당원들과 함께 나아 왔습니다. 세상의 악한 자들은 이익이 된다고 하면 언제든지 함께 편을 먹고 자신들의 신념과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걸 볼 수 있는데 바로 오늘 이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그러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평소에는 원수로 지냈습니다. 유대교의 회복을 주장하며 종교정결운동을 펼치던 바리새인들과 에서의 후예인 에돔족속으로 로마제국의 힘을 입어 유대인의 왕이된 헤롯에게 선을 대어서 로마와 헤롯에게 잘 보여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얻어 살려고하는 헤롯당원들이 원수인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런 원수들이 우리 주님을 모함하고 음모를 꾸며 말의 꼬투리를 잡아 곤경에 빠트리려고 특히 로마제국과 적이 되게하려고 합심을 해서 나아오는것을 봅니다.
    이게 악한자들의 행태요 또 마귀를 따르는 자들의 행태입니다. 이와같은것을 또 예수님을 죽이려고 헤롯과 빌라도가 연합한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기록하듯이 그들은 원래 서로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악을 위해서 연합하는데에는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악인의 습성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살펴볼것은 성도는 칭찬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헤롯당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올 때 예수님을 올립니다 “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우리가 좋은 말을 싫어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좋은 말도 우리가 가려서 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남이 우리에게 지나친 칭찬을 하면 우리는 경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원래 “선줄로 생각하는 자가 조심하라” 를 따라야 하는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든지 우리의 선한 이웃처럼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말로인해 자만하지 말고 그 안에 도사리고 있을 지 모르는 사탄의 계교를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14:8)” 우리가 주님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기뻐하게 해드리는것외에 우리의 살 길이 없으며 이것만이 우리의 진정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이 사단의 공격이 아주 간교한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질문을 다시 보면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이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질문 같은데 아주 치밀하고 고안된 말로만든 덫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자로 몰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직 강력한 군사력과 그 군사력을 유지하기위한 점령지에서 걷는세금으로 세상을 통치하던 로마제국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는 말보다 더 큰 위협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반대로 세금을 내라고 하시면 이것은 유대인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로마의 세금도 과중했고 또 헤롯이 걷어들이는 세금도 무거웠던 이 시대 유대인들은 소득의 거의 절반을 세금을 내고 정말로 힘들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방인 황제인 시저에게 세금을 내야 된다고 말하는것은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크게 듣게 될 말이었고 매국노로 몰리게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거나 올무에 걸릴 질문을 들고 이 악한자들이 예수님앞에 나아온것을 봅니다. 오늘 사탄의 성도에 대한 공격도 이렇습니다. 우리 머리로는 답이 없는 공격을 사탄은 가해 옵니다. 우리는 이 사탄의 술수를 알고 사탄의 공격을 우습게 여기면 안됩니다. 우리는 늘 기도로 주도 면밀한 사탄의 공격에 대비를 해야 하는것 입니다. 우리는 항상 사탄을 대적하도록 도우시는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질문이 악한것임을 단번에 아시고 하나님의 지혜로 이 질문에 대답을 하십니다. 오로지 성령 하나님의 지혜로만 우리도 주님과 같이 시험을 이겨 나갈 수 있음을 밑게되시길 축원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고 성령하나님안에서 깨어 있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사면초가와 같은 빠져갈 길이 없는 시험에서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시고 나아가시는 모두가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금으로 내는 돈을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의 초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을 들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물으시기를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주신 답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제3의 대답을 주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물론 이 말씀은 이 동전이 가이사의 것이라 답하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의 대답에 기인하셨지만 국가의 권력이 절대적인 이 세상의 현실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일종의 국가관을 우리에게 보여주신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심오하신 답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와 권세자의 권위를 성도들은 이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것이 아닌한 인정해 주고 이들이 부여하는 의무를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 이 정권을 세우신 하나님을 존중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현실을 부인하시지 않고 계시다는것을 우리는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예수님꼐서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세금은 국가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시민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지켜야 할 의무들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또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것 내 이웃을 나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것 그리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것 소득의 일부를 하나님앞에 제물로 바치는것. 또 우리의 생명을 허락하시고 유지시켜주심에 매일매일 감사함으로 주님앞에 나아가는것. 이 모든거을 예수님께서는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려움을 한나님의 지혜로 이겨 내셨습니다. 우리 역시 이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은 이미 악해 졌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악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또 그 수가 많습니다. 그런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없다면 어떻게ㅐ 살 수 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도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는 지혜를 알려 주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는 삶의 자세로 살아간다면 우리를 해하려는 악한세력으로부터 우리 주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지혜로 세상을 승리 하시면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리라 믿습니다.
    14 min
  • 마태복음 22 : 1-14 (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22 : 1-14 (정인수 담임 목사님)
    오늘 주신 말슴은 예수님께서 천국을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것에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니몎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천국,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설명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예화의 핵심 메세지는 초청과 거부에 있습니다. 이 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이 있고 또 그 초청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3절로 6절을 보면;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 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오늘의 본문을 유의깊게 읽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먼저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의 예식을 앞두고 적은 수의 귀빈만 초청 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을 초청했다는 것이고 또 이 초청을 이 예식에 앞서 아주 오래전에 이미 실행했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초청장을 많은 사람들에게 발송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초청한 날이 가까와 오면서 다시 종들을 보내기 까지 해서 초청받은 사실과 혼인잔치가 있음을 다시 상기 시켜 준다는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배경을 알 때 오늘의 본문의 왕이 누구이고 왕자가 누구이고 또 종은 누구이며 초청잗은 사람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이 예화의 진짜 의도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더욱 더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초청장을 보내신 왕은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 왕자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초청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이 혼인 잔치라는 것은 예수님이 주인공 되시는 잔치 그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는 구원의 잔치를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미리 초대 받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높임을 받으시기 위해서 유대인들을 가장 먼저 택정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예화를 이스라엘민족을 대표하는 제사장들에게 들려주시고 있는 성전 정화의 사건 이후의 일임을 기억한다면 이 먼저 초청 받은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들을 말씀하시는 것임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은 또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초청하신 사실로 확증 됩니다.
    그런데 혼인날이 되어서 미리 초청한 이 사람들을 오라고 하니까 핑계를 댑니다. 3절에서 5절을 다시 보시면 나와있듯이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되어있던 이 혼인의 날에 미리 초대받았던 자들이 더러는 자기 밭으로 일하러 가고 더러는 자기 사업하러 갔다고 되어있습니다. 기가막힌것은 이들중의 어떤이들은 이 종들을 핍박하고 능욕하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를 거부하는것으로도 모자라 그 동안 계속 보내어진 선지자들을 능욕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모습은 세례 요한의 죽음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로마의 황제의 권력과 유대의 백성들 그리고 자기가 섬기던 우상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헤롯과 또 인간의 뜻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뒤집어 백성들의 멍에를 만들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또 이들을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해 줄 그 욕심을 채워줄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확실히 자신의 욕심으로 자신의 잘못된 신앙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를 거부하던 먼저 초대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한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앞에서 나는 바쁩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정작 자신의 생명을 살릴 초대를 배척하고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불쌍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누욕에서 부교역자 시절에 담임 목사님꼐서 얼마안되는 교인들을 토요일마다 일일이 전화심방을 하시는것을 늘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지금은 은퇴하신 담임 목사님께서 정말로 공을 들여 열심으로 초대하고 권유하던 젊은 집사님이 한 분 있었는데 이 분이 아무리 초대를 해도 교회에 올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이 사업이 조금만 더 자리를 잡으면 나가겠습니다. 이 일만 마무리 지으면 나가겠습니다. 하고 핑계를 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담임 목사님이 광고를 하시는데 이 집사님이 그만 주일날 낙시를 가다가 사고로 사망했다는 광고를 하시는걸 보고 깜짝 놀란적이 있습니다. 인생 오는 순서는 나이순 이지만 가는 순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젊은 집사님이 먼저 그 길을 가실때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가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분이 구원을 받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평생 이 분이 거듭남의 간증을 입술로 증거하고 주님을 찬양하는것을 들어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두렵습니까… 또 이분의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안타깝고 괴롭습니까?
    그래서 아직도 전도는 제일로 중요한 교회의 사역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 그,냥 저대로 두면 안되는 많은 이웃들이 있지 않습니까?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역들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되고 구원의 기쁨을 그들도 누릴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는 그 무서운 결과는 7절에 나와있습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세례요한을 잡아죽인 유대인들이 결국 우리 주님도 십자가에 매달고 그 죄값을 어떻게 치루게 되었는가는 역사가 증언하는 일입니다. 헤롯이 다시 거대하게 지었던 성전이 기원후 70년에 무너지고 유대인들과 공존해 보려던 로마가 전략을 바꾸어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짖 밟습니다. 이 날이후로 유대민족들은 나라를 잃고 이 동네 저동네 이 나라에서 저나라를 떠도는 낭인의 삶을 1948년 다시 이스라엘이 건국되기까지 거의 이천년을 나라없는 백성으로 살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를 거부하고 박해한 자들의 말로는 이렇듯 파멸뿐임을 다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생명외에는 죽음뿐이듯 구원의 초대 밖에는 허무와 절망과 죽음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일이 벌어지기 전에 모든 사람들을 구원의 잔치로 초대하고 인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미룰수 있는 사역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가 보면 이런 능멸과 거절을 받은 후에 왕이 거리로 종들을 보내 누구나 초청에 응하는 사람들을 잔치에 오게 합니다. 이 사람들은 바로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미리 구원의 초대를 받았던 유대인들이 이 구원의 사역에서 수천년간 떨어져 나가게 되고 이 자리를 우리 이방인들이 차지하게 되는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것은 나의 가족이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되는것이 아니고 내 가문에 신앙의 역사가 있었어도 자신의 고백이 없이는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14절 말씀과 같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은 것입니다.
    또 오늘 예회중에 나오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내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두려운 이야기지만 교회안에는 예복을 입고 나아온 성도와 그렇지 않은 성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성도와 그렇지 않은 성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16장 10절에서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수치로 가득한 당신의 백성을 친히 옷을 입히시고 씻기시고 영광으로 두르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이 그러나 이 옷마저도 거부를 하고 다시 행음을 하며 타락을 하는 모습을 에스겔 선지를 통해 이야기 하고 계신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안의 교인은 다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께서 옷입혀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이 안에 하나님이 입혀주신 의의 옷을 벗어버리고 잔치에 나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경고는 이와 같은것입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담임 목사로써 주일과 주중의 삶이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이것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 하며 하나님이 입혀주신 의의 예복을 소흘히 할 수 는 없는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런 사람들에게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던 유대인들도 그 완악함으로 구원의 길 밖에서 이천년간의 수모와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물려 이방백성이었던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아버지의 생명의 길 밖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의 은혜를 지키고 우리주변의 이웃들을 구원의 역사가운데로 인도하는 전도의 사역을 감당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이 첫째 천국잔치에 초청을 하시는 분들이 되시는것과 두번째 우리 믿는 성도들도 주님의 부르심에 핑계대지 말고 입혀주신 의의 예복에 걸맞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9 min
  • 마태복음 21 : 33-46 (조무제 목사님)
    마태복음 21 : 33-46 (조무제 목사님)
    오늘의 본문은 포도원의 악한 일꾼에 배한 비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의 때와 열매맺는 삶에 대해서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기 원합니다.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잘 만들어 놓고 농부들에겟 세를 주고 외국에 갔습니다. 이에 때가 흘러 세를 받으러 종을 보내자 때리고 죽인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에 참다 자신의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자 농부들은 이에 상속자다 죽이고 우리가 포도원을 차지하자 하여 아들을 죽인다는 예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포도원 주인이 하나님입니다. 인내하시고 모든것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농부들은 그 시대의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들 또 종교 지도자들이 되겠습니다. 포도원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이 비유속에서는 이스라엘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주인의 아들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써 이해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이야기의 배경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합니다 왜 이런 대화가 시작 되었을까?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전에 성전에 가셔서 성전정화를 하신 후의 이야기로 마태는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를 입장에서는 예수님꼐서 소동을 일으키신 그 사건 후에 예수님꼐 따져 물으러 간것입니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냐고 채근을 하는 상황인것입니다.
    이런 제사장들의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 세가지 비유로 답을 하셨는데 오느르이 비유가 바로 그 두번째 비유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의 비유를 통해 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도 계신것을 살펴 보길 원합니다.
    오늘은 2월 29일입니다. 사년에 한 번 돌아오는 날입니다. 윤년이라고도 하는 오늘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이 정한 시간의 오차를 줄이기 위해 불가불 인간이 만들어놓은 날입니다. 그래서 생일이 사년에 한 번 돌아오시는 분들도 생기게되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때는 먼저 이런 인간이 정해놓은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말씀하시고 있는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34절은 열매를 거둘 때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때를 즈음해서 우리 주님이 오신것이라고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추수철 수확의 계절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종들을 보내신후에 우리 주님이 오신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의미를 분명히 오늘의 예회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오늘의 말슴으로 깨달을 수 있는 또 한가지는 하나님꼐서 축복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의 어느 시범에 분명히 열매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이 악한 종들과 같이 행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에 연관지어서 생각 할 수 있는 예화가 이미 나왔던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시장하신차에 열매를 찾으셨지만 열매가 없어 저주받아 말라죽은 무화과 나무에 관한 예화, 기억 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 볼 것은 예수님꼐서 무화과를 찾으신 유월절즈음은 무화과 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무화과가 필 계절이 아닌데 무화과를 찾으신것이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거세게 몰아치던 폭풍도 주님을 알아보고 순종하였고 배를 삼킬듯 달려들던 파도도 그러했으며 보리떡 두개와 물고기 다섯마리는 자기들을 불려 오천명을 먹이기까지 순종한일을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열매맺는 계절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꼐서 정하신 열매맺는 때인 카이로스가 훨씬 중요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 무화과 나무는 절대적인 카이로스의 현현이신 예수님앞에서 그 때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그 기가막힌 기회를 놓치고 마지막 기회되신 예수님의 때를 놓쳐 말라죽게 되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회로 우리에게 분명한 말세의 경고와 마지막 기회되시는 예수님의 은혜의 의미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자 그리고 오늘의 예화는 그 마지막 때를 몰라보는 인간의 군상의 악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지막 기회되시는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주인의 아들로 오셨을때 농부들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밥아 죽이게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대신 자신들이 하나님의 지으신 나라 이스라엘을 다스리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차지 하려고 하던 그 나라는 이방인의 손에 떨어지고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구원의 복음은 이방인된 우리들에게 들려지게 됩니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자가 먼저되는 일이 정말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때를 무시한 인간들에게 업한 심판이 이르고 마는것을 볼 수 가 있는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때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완악한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알 수가 없다는것도 잘 압니다 그래서 성경은 때를 얻던지 못 얻었던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던지 못 얻었던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살아 내는 데 힘써야 겠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임박한 심판을 피하는 법이요, 복받는 길이요, 나중되었던 자로 먼저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최선으로 살고 연약한 자에게 하나니므이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요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통해 오늘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고아인 서울대 생을 이끌어준 이 주인 아주머니, 사실 가능성이라고는 쌀 알 만큼도 보이지 않는 이 아이에게 가르침을 ㅈ주고 돌보아준 이 아준머니가 저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길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인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카이로스의 때를 대비하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생 가장 페이스북 사연 전문>
    동기들끼리 술을 마시다가 말이 나왔다.
    "야, 근데 너는 군대 안 가냐?" "군대? 가야지."
    나는 그리고 서둘러 잔을 들었다. "야, 잔 비었다 잔."
    나는 군대를 안 간다.
    못 간다고 쓸 수도 있는데, 그렇게 쓰기에는 군대를 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가장이다. 엄마아빠는 둘 다 고아라고 했다. 보육원에서 같이 자라고 결혼했다고.
    그리고 내가 열두 살 때, 두 분은 버스사고로 돌아가셨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었을까, 일곱 살짜리 동생과 두 살짜리 동생을 위해서.
    공부를 하고, 새벽엔 배달을 하고, 다섯 평짜리 방에서 셋이 잤다.
    학교에서는 장학금도 줬다. 수급자비도 정부에서 줬다.
    분유, 기저귀, 대부분 그런 걸 사는데 썼다. 물론 그 때는 지금보다는 쌌다.
    그래도 꼬박꼬박 저축도 했다. 한 달에 오만 원, 많은 돈은 아니었다.
    사실 그것도 주인집 아줌마 명의였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아줌마가 나를 앉혀두고 말했다.
    "너, 대학 갈 거니?"
    "아, 일하려고요."
    "아니야, 잘 들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 그래서 과외를 하렴."
    어린 나이에 몸이 상하면 나중에 더 먹고 살기 힘들다고 했다.
    몸도 커서 다섯 평에서 자기도 힘들 텐데, 돈 많이 벌어서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가라고.
    세상에 착한 사람이 있다는 걸 나는 이 아줌마 덕에 믿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믿기 어렵게도 이 대학에 붙었다. 물론 기회균등 전형이었지만.
    과외 전단지를 만들어 돌렸다. 한 달만에 내 손에 60만원이라는 돈이 들어왔다.
    학교에서는 생활비 장학금을 줬다. 정부에서도 아직 지원을 끊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이사를 했다. 아줌마한테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그리고 동생들과 며칠 전에 아줌마를 찾아갔다.
    뭘 사갈까 고민하다가 고구마케이크랑 음료 세트를 양 손에 들고 갔다.
    아줌마는 고생했다고 우리 등을 다독여주셨다.
    큰동생은 이제 고삼이다. 작은동생은 이제 중학생이 된다.
    그렇게 계산하더니 아줌마는 정말 빠르게 컸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괜히 눈물이 났다. 결국 우리 넷은 울었다.
    이 자리를 빌어, 페이스북을 하지 않는 아줌마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싶다.
    저는 이제 졸업을 합니다 아줌마. 다 아줌마 덕분입니다.
    사회에 나가서도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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