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 연합 장로교회 말씀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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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타 연합 장로교회 말씀 강해 episodes

  • 마태6:29-34: 김명룡 총장님
    마태6:29-34: 김명룡 총장님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30 min
  • 마태복음 15 : 21-28 (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15 : 21-28 (정인수 담임 목사님)
    어제 우리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비난하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말씀 속에서 살폈습니다. 그들은 해위로는 그럴듯하고 말로도 하나님을 ㄷ잘 섬겼고 또 사회적 신분으로도 지도자들이었지만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내면의 진정성이 없었음을 알 수 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명에 담긴 아버지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자신들이 이해하기 좋은 사람들의 계명을 만들고 따르고 또 그 계명으로 하나님을 믿고싶어하는 사람들을 핍박까지 하는 모습을 잘 봤습니다.
    오늘은 이와는 정반대의 이물이 나옵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인생을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사회적으로 멸시 천대를 받던 이방 여인이 나와서 어제의 종교인들과는 정 반대의 진정한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 보여줍니다. 이 두사건이 연달아 나오는 것은 분명한 대비를 통해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얼마나 종교인들의 믿음이 가식적이며 악위적인것인지 보여주려는 사도 마태의 집필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종종 제자들을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며 꾸짖으시던것을 우리는 기억 합니다. 자신의 삶을 바쳐 주님을 쫓아가던 제자들도 믿음으로 칭찬받지 못하는데 이 믿음으로 칭찬을 들은 두명의 이방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로마 백부장과 오늘의 본문의 가나안 여인입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하시며 크게 칭찬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사람이 아님 이 여인은 신앙의 배경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28절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말은 극상의 칭찬이십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의 딸이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나아오는 이유들은 다 제각각입니다. 너뮤도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뢰는것 건강을 구하는것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제목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기도의 제목은 가장 간절하게 기도의 자리로 나오게 붙드는 기도의 제목은 어머니의 자식을 향항 기도일것입니다. 가장 간절한 마음인 자식을 향한 마음 그 간절한 기도로 예수님을 믿게 된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여인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이방인이고 천대받는 여인이었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맘에 신분의 차이가 어디있고 이방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자식을 생각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온 이 여인이 주님앞에 울부짖습니다.
    15: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서 정신이 온전치 못할 때 이 어머니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오늘 이 여인에게 기적이 일어난 이유는 이 여인의 자신의 딸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어떤 멸시와 수모와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의 자녀를 위해 나아가겠다는 그 어머니의 사랑이 이 기적의 뒤에 있다는 것입니다.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그런데 이상한것은 이렇게 간절히 외치는 여인의 요구에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 응답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무나 쌀쌀맞게 이 불쌍한 여인에게 응대를 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이 이 여인의 울부짖음에 괴로움을 토로하는 지경까지 주님꼐서는 이 여인을 홀대 하십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의도가 있으십니다. 여인을 향한 냉대에는 주님께서 보시고자하는 목적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15: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심지어 위의 말씀과 같이 주님께서는 이여인을 개라고까지 칭하시며 이 여인에게 박정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주님의 이 말을 탁 받아서 27절에 대답합니다.
    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개라고까지 무르시면서 극단적으로 몰아세우십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그 시대 유대인들이 갖고있던 유대인은 선민이고 이방인은 개와 같고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구원관과 똑 같은 것을 알면 유대인들과 똑같이 구시는 주님이 더 야속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이 여인을 믿음으로 이끄시는 일종의 테스트 입니다. 과연 이 여인이 어떻게 반응하나 주님꼐서 지켜보고 계셨던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여러가지 시험을 맞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믿음의 반응을 하는가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유혹하는 시험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고자 하시는 시험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주님의 믿음의 테스트에 통과를 합니다. 주님의 차가운 침묵속에서도 이 여인은 물러남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듣기가 괴로와 주님에게 해 결해 달라고 대신 간청할 지경까지 이 여인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기도의 응답이 없는 시험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쉽게 절망하곤 합니다. 이 기도의 응답이 왜 빨리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자라서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는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실족하고 심지어는 믿음이 연약해 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변치않고 신뢰하는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침묵인 의도적인 연단과 성숙의 기회가 될 때가 있음을 꺠달아야 합니다. 또 그럴때 일수록 우리는 끈질기게 주님을 구해야 합니다. 거절같은 준미의 침묵뒤에는 주님의 미소가 숨어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주님의 은혜를 향한 도전을 끊지 않았던 이 여인의 믿음을 우리는 살펴볼 이유가 있습니다.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이 여인의 대답은 얼마나 재치있고 유머가 넘치는 대답인지요. 또 얼마나 큰 믿음을 품고 있는 태도입니까? 자기의 모든 자존심을 다 내려 놨습니다. 계속대는 냉대에도 이 여인은 예수님이 주인임을 계속해서 고백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고백하며 나아갑니다. 이방인에게도 부스러기같은 은혜가 임한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나아갑니다. 전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작은것일지라도 감사하겠다는 겸손의 마음으로 나아가고 주님을 절대로 놓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이 와도 말씀을 굳게 붇드는 견고함이 있는줄을 믿습니다.
    어떠한 말씀이라도 주님이 주시면 부스러기의 은혜라도 그 말씀을 받겠습니다 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런 부스러기까지도 소중히 여길 만큼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고 나갑니다. 부스러기라도 상관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고 나아가는 이 여인의 믿음앞에 주님은 부스러기의 은혜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살아계신 떡이신 우리 주님꼐서는 자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주십니다 주님의 은혜가운데에는 부스러기가 없습니다. 이 여인이 받은 은혜도 완전한 전체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실망없는 믿음앞에 기적이 일어 납니다 그 딸이 즉시 나음을 입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이 여인의 믿음을 더욱 높이시고 또 높여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우고 따라가게 하시는 믿음의 조상이 되는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이를 통해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여인의 믿음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어떤 믿음의 시험 앞에서도 우리 주님의 합격을 받는 귀한 연합의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5 min
  • 마태복음 15 : 1-20 (조근상 목사님)
    마태복음 15 : 1-20 (조근상 목사님)
    지금 우리가 읽고 묵상하는 마태복음은 28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예수님의 능력, 예쑤님을 왕으로 인정하는것이 주제로 나오고 여기에서 드러나는 모습들은 주로 예수님의 사역의 영광스런 모습을 다룹니다. 하지만 12장 부터는 말씀의 색깔이 바뀝니다. 본격적으로 원수 마귀가 사람들을 충동해서 예수님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고남을 주기 시작하고 음모가 시작되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15장에서는 이런 일련의 핍박의 사건 장로들의 정결법을 다루는 사건 중에 과연 무엇이 우리의 본질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십니다. 사람은 깔끔하게 살기를 원하고 규칙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룰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본질은 아닙니다 우리의 본질은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것이 우리의 진정한 본질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 살면서 받는 교육은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기 위해서 어떤 규칙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이 우리를 제한하는 박스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를 제한하는 틀이 되는 것입니다.
    15: 11,12: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열심히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매려옵니다. 그러고는 본질적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문제로 삼고나온것이 제자들이 손을 씾지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로 제자들을 힐난하고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식과 규율은 무엇을 위해 존제하는가? 본질과 내용을 담기위해 존재합니다. 규칙을 위한 규칙 내용을 오히려 죽이는 형식은 우리가 정말 피해야 할 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왜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과연 이것이 본질적인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왜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느냐며 따지고 나옵니다. 자기들이 지키던 형식을 왜 깨느냐?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고 물으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본질을 헛되게 하느냐? 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4절에서 6절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는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본질인데 너희는 고르반이라는 형식을 위해 부모공경의 하나님의 법을 깨느냐고 물으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이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음을 밝혀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내려오지마 목사가 있다고 합니다. 강대상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할 때만 괜찮은 목사를 이야기 합니다. 삶의 모습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강대상에서 안 내려왔으면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나가지마 성도가 있답니다. 교회안에서는 그래도 잘 사는것 같은데 교회 밖으로 나가면 삶이 엉망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농담같은 말이 이해가 가는것이 이민 사회의 수 많은 사기사건을 보면 그 많은 사기꾼들 중에 직분을 안 가진 사람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직분을 이용해 사기를 치는지 다들 교회를 나가고 교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인경우가 대부분이라는것입니다.
    이런 삶은 본질과 형식이 뒤집힌 삶입니다. 그 삶에서 본질과 형식이 충돌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은 가짜인 삶입니다. 연기하는 삶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20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의 마음의 문제를 다루 십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문제라고 지적하시는 것은 이런 본질적인것을 회복해야 한다는것과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연합의 성도들 께서는 이런 본질과 형식의 충돌이 우리 삶속ㅇ네 있음을 깨달아 진정한 본질이신 하나님께로 회귀하시는 귀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6 min
  • 마태복음 14 : 22-36(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14 : 22-36(정인수 담임 목사님)
    기독교는 이적과 기사가 넘쳐납니다. 그런데 이들 이적과 기사가 세상에서 나타나는 다른 경이로운일들과 비교하면 아주 두드러지는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이적과 기사는 이 적과 기사가 중요한것이기 보다는 이를 통해 전달되는 메세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적은 볼거리에서 그쳐버리고 만다면 성경의 이적과 기사는 특히 신약성경의 이적과 기사는 우리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하나님되시는 주님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이적과 기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경배하게 하는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13절로21절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 후에 사람들은 우리 주님을 왕으로 세우기 원하게 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이 장면을 다둘때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시도하는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는 이장면에서 다른것에 집중을 하는데 그건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후에 사람들로부터 떠나가서 산에올라가셔서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적이 일어났고 세상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칭송하고 왕으로 모시기를 원합니다. 이럴떼 예수님께서는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마음을 쓰시지 않고 산에 올라가 다시 하나님의 뜻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큰 역사가 일어난 후 얼마나 많은 유혹과 시험이 찾아 옵니까?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새 성전을 지은 후에 분란에 휩싸이게 되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것을 아시고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군중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에 오르시기 전에 미리 제자들을 당신이 사역하러 가실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에게 풍랑이라는 시험이 찾아 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물위로 걸으셔서 제자들에게 가시는 사건이 오늘 기록된 사건입니다.
    흥미로운것은 이미 마태복음 8장에서 한번 풍랑에 제자들이 빠질뻔 한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고 제자들을 구해주신 사건이 나온다는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록에서 예수님은 전혀 그런 액션을 취하지 않으시고 계십니다. 그저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시고 베드로와 대화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차이가 있다는것은 분명히 이 안에 주님께서 전하시고자 하시는 메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여기에는 그 정도 풍랑으로는 너희들이 해를 입지 않는다는 주님의 확신이 있는것입니다. 이미 풍랑을 해결 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으니 너희도 알아야 한다는 마음도 있으십니다. 거기에 비춰보면 우리는 참 걱정을 많이하고 삽니다. 더더욱 이민자들은 더 그렇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사업에 실패하는것은 아닌가? 내가 정말 비참하게 되지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삽니다.
    우리에게 풍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파도가 덮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얘들아 그 정도로 너희가 죽지 않는다! 걱정 말아라!는 것입니다. 조그만 일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풍랑이 주님의 발 아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로 앞으로도 잘 지낼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베드로의 행위를 보게 되면 우리는 믿음의 본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사건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위를 걸어 풍랑 사이로 호수위를 걸어오시는 그리고 자신의 제자인 베드로도 물위를 걷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결코 인간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자연을 컨트롤 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출발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에 우리의 신앙이 기초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가운데 겁먹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셔서 내니 걱정하지 날라고 하십니다. It is I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이것은 주님의 하나님 되심의 선포입니다. 바로 I am who I am 의 선포를 여기서 제자들에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원어로는 ἐγώ εἰμι-에고 에이미 로 표현된 이 말은 바로 자신의 하나님되심의 선포인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되시며 또 세상 모든것을 다시리시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정체성이 바로 여기에 잘 나타나 있는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믿음이 출발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베드로가 물위를 걷기전에는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후에는 풍랑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다 바람을 본것은 베드로였습니다, 바로 베드로가 스스로 불신앙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베드로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꼐서 배드로를 꾸짖습니다 “믿음이 작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다혈덕이고 충동적인 베드로의 기복이 큰 베드로의 믿음을 꾸짖습니다. 이미 모든 문제점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는데 스스로 다시 바람을 보고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는 문제있는 자세를 보인것입니다.
    믿음의 승리를 얻은 후 꼐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스스로 문제를 보고 문제가 해결되기전의 태도로 올아가 버리는 어리석은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베드로의 문제는 이미 해결 되었습니다. 새로 뎦쳐오는 파도도 없고 오히려 주님을 따라 물위를 걷고 있던 그가 다시 문제로 들어갈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뒤돌아 보는 자세는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예전의 문제를 향해 다시 돌아 가면 안됩니다. 이제 예전의 나는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처리 되었습니다. 그것을 믿고 나아갈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물위를 걸을 수 있고 풍랑도 사라지게 됨을 믿고 나아가시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6 min
  • 마태복음 14 : 13-21(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14 : 13-21(정인수 담임 목사님)
    예수님께서 지상의 공생애 사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것은 사람을 키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따라 살고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훈련의 방법으로 주님의 모든 사역의 장소에 제자들을 동행시키셔서 예수님께서 사역하기는 모든것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든 곳에 데리고 다니신것은 그 장소와 시점에 특별히 임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이 일어나는 그 모든 장소와 시점을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때 그 안에서 깨달을 수 있는 주님의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베스다 들판에 주님을 보러 나아온 수많은 무리들을 보시게 되었습니다.
    마태 14: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곳을 본문은 빈들이라고 말합니다 원어로는 ἔρημος-에레모스 광야라는 뜻 입니다. 어떤 번역은 광야를 고독한 곳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고립무원의 땅에서 느끼는 그 감정이 바로 고독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 결핍이 많은 곳,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곳 그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빈들은 나의 가진 모든것이 바닥이 난곳입니다. 나의 영혼에 각성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나에게 깨져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빈들에서 우리를 부리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광야에서 하나님앞에 겸손해지고 그래서 지존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관야에 서있는 수많은 무리를 보고 마음에 불쌍히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여기서 불쌍히 여기시다는 원어는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 라는 말로 창자가 끊어지는듯한 고통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꼐서 절망과 좌절로 그들의 관야에 서있는 백성들을 보시고 애간장이 끊어지는듯한 아픔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보시며 주님의 긍휼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기적은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에서 시작 됩니다. 기적은 언제나 하나님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시작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기적을 일으키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안에 기적으로 역사하시는것을 보시기 원한다면, 우리안에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내 주변의 사람, 또 나의 가정이 정말 치유되기를 원한다면 나의 고집과 생각을 내려놓고 나의 가족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우리 안의 작은 불씨가 되어 그것이 기적의 파동을 일으킬 줄로 믿습니다.
    인도의 어머니 마더 테레사는 서구의 가장 큰 병으로 자신을 원하고 사랑하고 돌봐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몸의 병은 치유할 수 있지만 고독과 절망의 병은 오직 사랑으로만 치유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도전을 하십니다.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 이라는 기도의 작가는 사랑없이 줄 수 있지만 주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는 금언을 남겼습니다. 사라은 주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병문안을 많이 가지만 그 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픈 성도들을 정말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작지만 진심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가가서 안수하고 기도하면 거기에 바로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랑의 마음으로 모두에게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사랑의 마음으로 나악ㄹ 수 있겠습니까?
    마태14: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말씀은 너희들이 책임지라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제자들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에서 보면 빌립의 계산으로는 200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것을 주라고 명하셨고 여기에 자신의 계산을 앞세웠던 빌립은 교회사에서 불신앙의 아이콘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도 이들과 같이 부족한 광야의 삶을 사는 백성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생며의 양식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고난받는자 어려운 자들에게 공금을 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 우리들은 사랑의 선교를 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치유의 은총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로 마을에가 스스로 먹을것을 구하게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처럼 비 현실적인 해결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갈것 없다 너희가 먹을것을 주라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가진것을 드리면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우리가 가진것은 어린 소녕이 가진 물고기 두마리와 떡 다섯덩이라고 항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들이 놓치고 있었던것은 이들과 같이 하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모든것을 지으시고 충만하게 이루신 주님앞에 부족이란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꼐서는 그 떡과 물고기를 받아 축복하시고 나누어 주십니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작고 보잘것 없는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왜 내가 너희와 동행하는것을 알지 못하느냐! 다만 너희가 가진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우리의 작은것이라도 받아 쓰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것을 드리면 됩니다.
    우리가 선교를 하지만 그 큰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 깔레문양하나 돕는다고 어떻게 아프리카가 구원이 되겠느냐? 니카라과의 작은 선교세터 하나를 세운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말씀과 같이 너희의 작은것 너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너희가 가지고 있는것을 내게 가지고 오면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내가 한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라 드리면 됩니다. 주님! 제가 지금 오불밖에 없습니다 이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오불을 드리면 됩니다!
    이번에 니카라과 선교를 갔을때 처음 시작은 유치원 교실 하나로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0000명의 인원이 모이는 집회를 하고 500명의 목회자가 모이는 집회를 할 수 있는 큰 선교의 기회로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보기에 너무 미약해도 주님앞에 진실되게 드리는 작은것에 늘 기적이 뒤따르는 줄로 믿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허락하신것들 털어서 주님께 드리면 됩니다. 재물도 시간도 헌신도 기도도 다 주님 주신것들 주님께 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줄 믿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럴때 하나님의 빈드르이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것입니다. 교회도 마찬 가집니다. 자근 교회들이 엄청난 선교의 사역을 시간이 흐른 후에 감당 합니다. 그들은 이 당의 궁핍함에 영혼의 핍절함에 책임을 갖고 이들을 불쌍히 여겨 자기의 있는 최선의 것을 드리는 순종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요한 복음은 이 보리떡과 물고기가 어린 소년의 점심이었다고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우리의 가진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에 감사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납니다. 작은것을 드리지만 큰 기쁨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작은것이지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선교하고 헌싱 할 때 우리의 것을 드릴때 하나님의 기적이 언제나 우리안에 넘치도록 일어날 줄을 믿으며 그러한 역사가 메세지를 듣는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6 min
  • 마태복음 14 : 1-12(이성혜 목사님)
    마태복음 14 : 1-12(이성혜 목사님)
    虎死留皮 人死留名-호사유피 인사유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 끝나는것 같고 다 사라지는 것 같지만 그가 살아서 보여준 행적들로 기억되는것이 분명히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헤롯왕은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연정을 품게되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습니다.
    상식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안되고 또 율법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왕에게 이 일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을때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그 일이 옳지 못하다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자 헤롯은 오히려 세례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고 자신의 생일 잔치 날에 목을베어 세례요한을 죽여버리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외치던 위대한 선지자의 삶을 불꽃같이 마감하게 됩니다.
    헤롯은 헤로디아에게서 안목의 즐거움을 탐하고 또 주변사람의 평판을 탐하던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리석음은 그가 허튼 맹세를 하게하고 또 그 맹세에 매여 의로운 선지자를 살해하도록 이끌고 맙니다.
    허영과 교만 체면으로 말미암아 불의를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헤롯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듯고 내뱉은 말은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는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어리석게도 그가 예수님을 찾았다던지 말씀을 들으려 했다던지 하는 기록이 없습니다.
    헤롯의 판단기준은 사람들의 이목이었습니다. 오로지 남의 이목과 환심을 얻는데만 관심이 있었던 자가 헤롯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예수그리스도의 소문을 듣고 생명으로 나아온 또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로 들어온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들이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침공하기전에 나아온 정탐꾼을 목숨을 걸고 숨겨준 기생 라합이 있습니다. 이 여인이 자신이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는 이유를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부르실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보고 마음이 녹았다고 말하고 있는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 나아온 기생 라합은 비천한 신분이었음에도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종으로 팔려간 미약한 인생을 쓰셔서 애굽이 7년 가뭄에 대비하게 하시고 또 그를 통해 주변 민족들도 구원을 받게되는 사건을 요셉의 경우로 기록하시고 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 왕조사대에 이르도록 총리에 세워집니다. 그가 높은 영광에 있을때 모함으로 다님엘의 세 친구들이 풀무불에 던져지게 되었으나 말쩡히 걸어 나왔을 때 느부갓네살은 그들에게 외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이방인 왕의 입술에서 이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이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번 니카라과 선교에서도 띠삐따빠시의 시장이 집회에 와서 온전히 참여하다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이적이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소식이 불신의 권력자를 바꾼 것입니다. 그를 통해 이 도시에 퍼지게 될 복음의 역사를 기대해 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 하나님의 역사의 소문을 듣고 아니면 역사하심을 보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들의 믿음의 반응이 성경에 기록된것입니다. 이들의 그러한 인생이 하나님앞에 기록되어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기록되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까? 복음의 소문을 듣고도 반응하지 않은 인물 심지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 이적 가운데 거했으면서도 또 게다가 이 일이 범상한 일이 아님을 느꼈음에도 자기 보기에 더 좋은 일을 쫓아간 어리석은 인생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소문으로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주셨고 성령하나님의 내주함으로 그 분의 우리안에서의 역동함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동역자로 부르시는 성령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 하시겠습니까?
    성경과 교회의 역사는 수 많은 믿음의 성인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 조차도 하나님은 기억 하시고 계십니다.
    중요한것은 으로운 선지자 요한도 기억 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라 주위의 평판에 자신의 인생을 맡겼던 헤롯도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어떻게 기억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반응은 하나님앞에 세워질 만한 것입니까?
    오늘 이 말씀을 받으시는 연합의 모든 성도들이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며 비전을 세워가시도록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1 min
  • 마태복음 13 : 18-30(정연권 목사님)
    마태복음 13 : 18-30(정연권 목사님)
    오늘의 본문은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부분은 씨 뿌리는자의 비유가 어제부터 계속 되고 또 한 부분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오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중심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간략하게 요약해보면 씨가 떨어지는 곳에 따라 결과로 나타나는 모습이 다르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씨는 전혀 수확을 할 수 없고 어떤 씨는 엄청난 수확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은 이 떨어지는 곳의 모습을 네가지 밭의 모습으로 구별해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먼저 이 네가지 밭의 모습은 지금 예수님 앞에 나아온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주님 앞에 나아왔지만 다같은 사람들이었지만 마음밭의 상태는 이렇게나 달랐던것입니다.
    또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것은 하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집중하고 계셨던것은 먼저 씨뿌리는 자가 씨를 잘 뿌리는지 아닌지도 아니요 또 뿌리는 씨앗에 관함도 아니고 오롯이 씨가 떨어지는 그곳에 관심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사람인가가 하나님의 관심이시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열매를 맺기 위해서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씨가 떨어지는 곳 네가지로 구분해서 설명을 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 네가지를 살펴보면
    먼저 중요한것은 떨어지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에 간직하는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19절)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라는 말씀으로 역설해 주시고 계십니다.
    말씀이 뿌려 졌습니다 하지만 받아 들이는 나 자신이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에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말씀을 뿌리는 사람의 탓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말씀으로 믿고 심령 가운데 간직하지 않으면 악한것이 와서 그 말씀을 낚아채 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정말로 다양한 형태로 들려지고 있습니다. 말씀의 선포로 또 나의 이웃을 통해서 또 나의 경험과 양심의 울림을 통해서 그러니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가 늘 살펴 봐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말씀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들려지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돌 밭에 뿌려진 씨앗으로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말씀이 뿌려지자 기쁨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닥치는 불편함과 고난으로 말씀을 잃어버리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 내 마음을 말씀이 비추기 시작하고 내 삶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내가 쓰는 말이 바뀌기 시작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바뀝니다. 나의 친구들과도 거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술 친구 멀어집니다 담배도 끊어질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TV 프로도 바뀝니다.
    그러고나면 주변에서 원성이 들려 오기도 합니다. 예수 너무 이상하게 믿지 마라, 하나님도 믿고 또 사회 생활도 잘 해야지 하며 회유도 합니다. 어려움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럴때 받았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중하게 내 심령 가운데 간직하고 있다면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장해 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받았던 말씀의 교훈과 은혜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뿌리르 내리지 못해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돌밭같은 마음 밭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이 열매를 맺기위해서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확신한 후에는 말씀이 보여 주시는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22절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가시 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여기서 경고 하시는것은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 못하는 이유가 염려와 욕심의 유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보다 세상의 것에 더 관심이 있다면 세상의 것들과 눈을 맞추고 바라보고 산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라는 말, 여기서 염려는 원어의 뜻으로 보면 마음이 나누어진것을 말합니다. 내 마음이 세상의 것을 향한것과 하나님의 뜻을 향하는 마음으로 나누어 진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염려를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염려로 인해 오늘의 본문은 말씀하시길 말씀이 막힌다고 말씀 하십니다. 내 안의 말씀이 나의 염려로 또 세상의 재물을 향한 유혹으로 숨이 막혀 죽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이뤄지는 일이 없듯이 욕심을 부린다고 이뤄지는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염려와 욕심에 묻혀 살면 살 수록 우리는 염려와 욕심에 매인 종이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를 이런 염려와 욕심의 덫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나를 매인것에서 해방시키시고 나의 한계를 돌파하며 진짜 나를 찾게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게 하시며 영광에 이르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좋은 밭에 떨어진 말씀이 열매를 맺는것입니다. 말씀을 받고 간직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고 그 말씀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비전을 쫓아 갈 때 나의 인생가운데 새로운 역사를 행사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게됨을 믿으시는 연합의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8 min
  • 마태복음 13 : 1-17(김재홍 목사님)
    마태복음 13 : 1-17(김재홍 목사님)
    오늘의 본문은 비유로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비유는 직설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빗대어 하는 말을 말합니다. 또 이 비유는 우화속에도 종종 등장합니다. 흠부와 놀부의 경우 다리 부러진 제비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 줬더니 행운의 박을 가져다 주고 놀부가 일부러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서 놓아 줬더니 재앙의 박으로 돌려준다는 이야기는 선하게 살아라, 긍훌의 삶을 살아라는 교훈을 이야기 하는 비유입니다.
    비유에는 직접적으로 어떻게 살아라 어떻게 해라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이야기 전체를 듣고나서 마음으로 나와 또 나의 삶과 견주어 메세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야기를 들을때 결국 정말로 메세지를 듣는다는것은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이야기의 의미를 들을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행동을 또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기때문에 마음에 호소하는 비유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복음을 마음으로 듣고 자신의 삶을 반추해서 바꾸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깊은 뜻이 잇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비유로 메세지를 들었을 때는 듣는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메세지를 잘 들을 수도 있고 전혀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해 주신 씨부리는 자의 비유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은 우리와 달리 먼저 씨를 뿌리고 밭을 가는 방법을 썼다고 하는데 씨가 밭에 떨어지지 않고 길에 떨어졌다 이야기 하실 때 마음속으로 씨앗이 아깝네 생각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도대체 주님이 말씀하시는 싸앗과 밭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수 있지만 두 사람이 들은 메세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꼐서 귀있는 자는 들으라 하실때의 귀있는 자는 이런 비유를 듣고 자기를 이 비유에 비추어보아 이 말씀의 진정한 메세지가 무었인지 깨닫는 자들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를 들으며 내가 돌밭이 아닌가? 반문하고 마음에 찔림이 있는 사람들은 이 메세지를 온 마음으로 듣는 영적인 인지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지유로 말씀하십니까?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것은 비유를 듣고서도 자신을 돌아보고 이 지유안의 진정한 메세지를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아무리 좋은 메세지라고 해도 들릴수 없는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갈급하여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붙잡으려 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메세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은 자신에 대한 또 이웃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없고 그저 진짜로 물리적인 귀만 남아있는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설교를 들어도 소리로 듣지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보는 말씀을 붙드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오직 언제나 하나님앞에 서있는 자신을 깨닫는 하나님앞에서 살아가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만 가능한 일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15절에 주님꼐서 말씀하신 귀로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킨다는 회개의 순서가 의미가 있는것입니다. 말씀을 듣는것은 많은 사람이 다 같이 듣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회개가 나타나는 사람은 드뭅니다 바로 이 말씀을 마음으로 듣는 사람들 자신의 인생의 아픔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들 자시느이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다 통해 영적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돌이킨다는것은 영적인 일입니다. 영적인 일이라는 것은 나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나의 인생을 살아온 경험 그리고 나의 감각까지 동원된 일이라는것입니다.
    말씀을 듣다보니 술을 마시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지고 내가 아내에게 가족에게 느기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폐부를 찌르는 사람은 술을 끊게 됩니다. 내가 말씀을 받고보니 신앙 생활을 평생하면서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위선적이며 또 하나님앞에 너무나 두렵고 죄스런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성경을 꾸준히 읽는 삶의 습관을 가질 수 없는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완악한 심령은 자신이 말씀에 비추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지 얼마나 가련한 삶을 살고 있는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이 삶이 바뀌어 하나님의 나라를 각양각색으로 선포하고 증거할 수 있는 영광의 삶이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이지 할 수 없는 영적으로 죽은거나 마찬가지인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16절 말슴에 나왔듯이 진짜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말씀이 보이고 말씀이 들리면 그 인생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잇으면 아픈데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씀을 들어서 내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가 느껴진다면 회개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겠습니까? 나를 바꿔 달라고 간구 하지 않겠씁니까? 울부짖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정말로 보고 듣는것이 시작입니다. 오믈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연합의 지체들이 진짜로 보고 진짜로 듣는 말씀의 은혜가ㅣ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17 min
  • 마태복음 12 : 38-50(조근상 목사님)
    마태복음 12 : 38-50(조근상 목사님)
    오늘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의 예수님에대한 태도가 완전히 적대적으로 변한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 놈쟁을 시작으로 예수님꼐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옵니다. 마태복음 12장부터는 예수님께대한 핍박을 잘 적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표적을 요구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꼐서 보여주신 표적이 많은데도 다시 표적을 요구 하고 있는것입니다. 사실 표적은 표적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표적은 쎄메이온이라고 원어에 표현하고 있는 단어의 목적은 믿음이 목적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는것이 믿음입니다. 표적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믿음을 일으키는것이 목적입니다.
    우리 삶가운데 기적과 표적이 들어납니다. 그러나 표적 자체는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목적은 예수님을 구세주 하나님으로 믿게 되고 영광을 돌리게 되는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표적이야기를하면 생각나는 존재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표적을 요구하는 그 악한 속셈을 아시고 마귀의 요구를 단호하게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하는것이 똑 같은 일입니다. 마귀처럼 예수님꼐 표적을 요구하며 주님을 떠 보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인물인지 마지막으로 확인하는것이고 또 꼬투리만 잡히면 요절을 내겠다고 나아온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선생님이여 하고 점잖게 예수님을 부르는 그 태도가 더 섬찟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무슨 표적을 보여줘도 하나님께서 주님을 통해 드러내실 십자가의 꼐획을 이해할 리가 없는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을 아시고 이렇게 응대 하십니다. 요나의 기적 밖에는 보여줄것이 없다. 십자가를 통해 죽음과 부활의 사역을 시작하실 계획 밖에는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각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님을 믿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장 큰 표적이고 이를 통해 주님을 믿게 되는것이 이 표적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자 병고치는 표적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뭐하겠습니까? 만일 그 표적을 통해 주님을 믿게 되는 믿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람은 지금 낳았어도 결국 병들고 결국 죽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병이 낳은들 그가 세상을 가진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니므이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십자가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초대하신 그 사건이 결국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믿음을 통해 구원받도록 하시는 크신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표적의 예가 될 만한 예화를 연이어 주님꼐서 말씀하십니다. 귀신을 쫓아낸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이 사람이 귀신을 쫓아냈지만 그 심령 가운데 주님이 계시지 않으니까, 이 사람이 귀신을 쫓는 이적이 있었어도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니까 결국 나간 마귀보다 더 지독한 마귀들이 들어와 주인노릇을 하게 되는 예화를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이적과 표적과 기사의 목적은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을 고치거나 하는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 표적을 통해 주님을 믿게 되는것이 목적입니다. 주님이 내안에 왕으로 죄정하시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늘 언제나 주님이 내 안에서 왕으로 나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내 심령을 차지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마귀가 나를 다스리는 왕노릇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의 왕이 되셔야 합니다 그것만이 이 인생을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의 삶으 비결인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때도 학연과 지연과 혈연을 초월한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관계위에 세워진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자녀인 형제와 자매들의 사랑위에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안에 학연과 지연과 혈연의 관계들이 들어오면 그 교회가 망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얼나나 많이 봐 왔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것들이 아닌 영적인 관계위에 서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가 임한 교회는 사랑이 넘쳐납니다, 교회안에서 어려운 사람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도와 줍니다. 혈연도 할 수 없는 일을 성도들이 서로서로 해 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곳에 임한 증거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완으로 다스린다는 증거인것입니다. 나누고 베풀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펴하고 그 안에 우리주님이 계십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연합의 교우들에게 우리주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시고 영광돌리시는 귀중한 하루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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