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 연합 장로교회 말씀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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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타 연합 장로교회 말씀 강해 episodes

  • 마태복음 21 : 1-11 (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21 : 1-11 (정인수 담임 목사님)
    오늘우리가 읽은 본문의 일절에 감람산 벳바게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이 벳바게와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러 가시면서 쉬시던 곳입니다. 이곳은 예수님꼐서 습관을 좇아 기도하러 가시던 곳이며 감람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전 마지막으로 피땀을 흘리시는 기도를 이곳에서 하셨던 곳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시절 나귀는 아주 중요한 교통 수단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나귀를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니까 나귀주인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나귀를 달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나귀를 내어주는데 오늘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2절을 보시면 ”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라고 하십니다. 나귀새끼를 보면 풀어 내게로 가져오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남의것을 그것도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하고 요긴한 것을 강탈하는 것이 아니냐? 의문을 가질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6절에 보시면 제자들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인생에 있어서 어떤 때는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절도 보겠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예수님의 이 명령은 단순히 타고가실 나귀를 얻기 위한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준비하고 계셨던것은 예루살렘의 입성과 십자가에서의 고난을 예시하는 행진이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되면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하셨던 모든 사역의 정점인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것입니다. 이 모든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예비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9)”
    예수님이 오시기 500년전에 이미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어떤모습으로 오실지가 예언되어 있었고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스가랴 선지자의 이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4절은 이 예언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행진이 준비되었음을 알려주는것입니다.
    하지만 또 이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앞으로 닥쳐올 고난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아시고 주관하지는 예지의 능력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에게 다시한번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내 주고 계심을 볼 수 있음니다. 나귀주인에 관해 미리 아시고 나귀주인이 당신의 권위에 복종해 나귀를 내어 주실것을 아는것은 바로 하나님의 예지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지의 능력은 시 공간을 초월해 모든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모든것을 꿰뚫어 우리가 하나님앞에 감출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예수님을 세번 부인함도 가롯 유다의 악한 생각도 아시고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실 것도 다 예지 하셨습니다. 또 지금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예배와 찬송을 하는지도 다 아시고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무엇이 필요하신지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것을 맏길 수 있는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삼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여기서 주라는 원어는 ὁ κύριος αὐτῶν – ‘호 쿠리오스 아우톤’ 이라는 말이 쓰이는데 이것은 그들의 주, 곧 여호와 하나님만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로 주님을 지칭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귀는 하나님을 섬기기위해 필요한것이라는것을 나귀의 주인에게 말씀하시고 있는것입니다.
    필요하다는 단어는 χρείαν – 크레이안이라는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는 필요하다, 부족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나귀가 필요하다. 지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부족한것이 이 나귀다라는 뜻이 있는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께 필요한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사용하시고자 하실때 보잘것 없는 나귀라도 하나님께 부족한것, 하나님께서 필요하신것으로 생각하시고 사용해 주심을 우리는 그저 감사히 여기고 기가막힌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 모든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소유를 쓰시겠다 하는 앞에서 이 나귀의 주인은 다름아닌 이 때를 위해 나귀를 준비해 온 관리인으로의 직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모든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그저 관리인에 불과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나귀가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안 내어드릴 관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기회를 놓칠 어리석은 관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쓰시겠다는것은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하시는것은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도와준것처럼 기억하시고 갚아 주시겠다는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가막힌 기회가 어디 있습니까?
    또 우리가 생각해 볼것은 이 나귀 한마리를 쓰시려는 계획이 최소 이미 수백년전부터 예언자를 통해서 또 이 나귀주인을 통해서 이뤄질것이 예비 되어 있다면 고작 나귀한마리에 하나님의 그 깊으신 계획이 있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우리모두를 향해 역시 하나님께서 귀한 계획을 갖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이땅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땅에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쓰실 때를 위해 지어지고 태어났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쓰시겠다 할 때 지체 없이 순종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 합니다.
    18 min
  • 마태복음 20 : 1-16 (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20 : 1-16 (정인수 담임 목사님)
    오늘의 본문은 조금은 어려운 본문입니다. 상식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모든 일꾼이 한 데나리온의 임금을 받는것이 어찌보면 우리에게는 공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을 쓰 마태는 전직이 세리 였습니다. 돈에 대해서 아주 민감한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 분명한 마태가 이 비유에 주목해서 기록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가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관과는 너무나 다른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을 때 주의해야할 핵심은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는 과정이 아니라 마지막에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한 데나리온을 받는 그 순간에 있습니다. 일을 능률있게 했는가도 관심이 아닙니다. 다만 포도원에가서 일하는것과 그 일이 끝나면 무조건 한 데나리온씩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일을 열심히 한사람 태도가 좋은 사람에게 보상이 더 가야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있으십니다. 인간의 상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이야기 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배경은 팔레스타인의 포도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 포도원의 주인으로 비유하여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포도는 9월에 따는데 이 따는시기가 길지않아 이 때는 모든 일손이 바쁘게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를 놓치면 포도가 못 쓰게 되고 농사를 망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구하러 다닌는 것은 수확의 계절에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거리에 나아가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사람들을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다섯시, 여러번에 걸쳐 부르게 되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이 주인이 모두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한 데나리온씩을 임금으로 줄테니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는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포도원에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나악 일을 해야 하는 청지기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물질도 시간도 재능도 다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포도원에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포도원 주인이 급하게 일꾼들을 고용하면서 시간의 차이가 없이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을 보면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우리가 산술적으로 생각하면 오전부터 일한자와 마지막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는 차등을 두어 임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시간 일한사람과 하루종일 일한 사람이 같은 임금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공평치 않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생각이 다릅니다. 주인은 어찌하여 놀고 있느냐?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와서 일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이 주인은 우리가 허송해버린 시간 잊어버린 시간 나의 과거에 대해서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습니다. 주인에게는 다만 부르심을 받고 그 순간부터 해 질때까지 일하는 그 시간만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한가지 원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그 이전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그 순간 이후가 중요할 뿐입니다. 부르심에 순종한 그 순간 이전은 더 이상 묻지 않으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하나님과의 놀라운 관계가 있습니다. 지난 세월동안 허송했구나 그러나 이제는 와서 일하라 하시는 그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예 하고 제가 가겠습니다하고 대답하는것이 필요합니다. 지난 세월 허송한것을 변명할 필요도 없고 그저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 오늘 주의할 점은 임금을 지불할 때에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을 먼저 주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들에게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과 같은 임금을 주는것이었습니다. 이 때 아침온 사람들이 불평과 불만을 터 뜨리는데 이것은 자기가 받을것을 못 받아서 터뜨리는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남이 받은것을 보며 불평과 원망을 터 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배가 아파서 하는 원망이었던 것입니다. 11,12절에 보면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듯 이 사람들은 지금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나는 하루 종일 일했는데 왜 나를 한시간 일한 저사람과 같은 임금을 주느냐?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주인은 애초부터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동일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한시간만 일한 일꾼 도 온 종일 일한 사람과 동일한 임금을 받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한 데나리온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고작 한 시간 일을 하고서 어떻게 하루의 임금을 받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된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관대함과 그 은혜에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불만을 터뜨리는 자들에게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 답변을 보면 알 수 있는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세계관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행한 일이나 시간, 우리의 업적등 공로에 촛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늘의 비유의 핵심은 이 포도원의 주인에 있습니다. 이 주인의 주권적 의지가 오늘의 핵심입니다. 14절을 보면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 이렇게 주늠것은 내 뜻이다 바로 자신의 주권적인 의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의지는 우리를 향한 은혜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 나는 이렇게 늦게 부르셨을까? 왜 그 때 부르지 않으시고 지금 부르시는 걸까? 그 때 부르셨으면 더 좋았을텐데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 하지만 주인이신 하나님이 보실때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 그제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저 언제 나를 불러 주셨든 최선을 다해 부르신 순간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의지를 믿고 사역하면 되는 것입니다,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목사로 섬기건 평신도로 섬기건 차이가 없습니다. 귀한 일을 하건 허드렛일을 하건 그것은 내 생각일 뿐 하나님의 은혜의 의지는 우리를 모두 다 똑같은 아버지의 구원의 역사아래로 인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이상 높은 은혜가 없고 그 은혜이상 큰 은혜가 없으며 그 은혜이상 넓고 깊은 절대적인 은혜가 바로 이 한 데나리온의 은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은혜입니다. 이 이상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헛 됩니다 이 이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는 이 은혜에 감사할 뿐 그 외에 할 일이 옶는 오직 이 은혜로 기뻐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으로 사역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5 min
  • 마태복음 19 : 23-30 (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19 : 23-30 (정인수 담임 목사님)
    오늘의 본문은 어제 본문인 부자 청년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어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무슨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겟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이 청년의 심중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 이 청년에게 유도적인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네가 이러이러한 율법을 다 아느냐? 그랬더니 청년은 내가 어렸을때부터 그 모든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하고 약간은 건방진 대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대의 통념이 부자는 어떤 이유에서든 성한일을 통해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결과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렀다는것을 잘 알고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부자가 된것을 모델로 삼은 믿음이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통념과는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데 네가 온전하려거든 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네가 가진 모든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하십니다. 온전하려거든이라는 도입의 뜻은 온전치 못하다를 전제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온전해 지려거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율법도 지켜야 하는데 이 청년에게는 그것이 안보인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면 영생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것이라는 예수님께서 영생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생을 구하는 질문에 이 이상 분명할 수 없는 확실한 대답을 주셨음에도 이 젊은 율법사 청년은 재산이 많은 연고로 근심하며 주님을 떠나가게 되고 그 이후로 성경에 다시 등장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심히 걱정하며 떠나는 이 청년의 뒷모습에 예수님께서 아주 놀라우신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이 오늘의 본문 23,2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것도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듯이 어렵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낙타가 어떻게 개미나 간신히 지나갈만한 바늘귀를 지난갑니까? 못지난 갑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이들은 부자는 선하다는 그 당시의 믿음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어렵다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를 가능케 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꾸실 수 가 있기 때문입니다. 낙타도 바늘귀를 지나갈 수 있도록 하시는 전능의 하나님이시라는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를 가난한자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어려운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말슴에서 주의할 것은 이 부자가 반드시 물질적인 부자를 뜻하는것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자는 마음이 교만한 자를 가리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마음이 한평 땅 가진것 없는 가난한 사람처럼 마음이 겸손하고 그 마음이 가난하다면 그 사람은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부자가 아닌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부자 청년은 일단 물질을 포기할 마음이 없고 또 더더욱 자신의 부유한 마음을 낮출 생각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작아지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낙타만큼이난 큰 내마음이 낮아져서 바늘귀도 지나갈 만큼 작아지려면 정말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참여하려는 치열한 절제와 자기부인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절대로 이렇게 할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은혜입니다.
    이러자 베드로가 또 늘 그렇듯이 끼어듭니다. 27절에 보시면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것도 버리고 주님을 따라왔다는것을 강조하면서 그 대가가 무엇이 되겠냐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물어보는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알다시피 베드로는 그 마음에 주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도 한 자리 하려는 출세욕, 권력욕과 자신을 주님앞에서 증명하려는 허영과 교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또 부활하시고 그러고도 제자들앞에 나타나실때 까지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짐으로 마음에 꽉찬 베드로가 뭘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에 예수님꼐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 이 말씀을 듣는 베드로를 포한한 제자들의 가슴이 얼마나 뛰었겠습니까? 하지만 이 말씀은 한참후에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거꾸로 순교하면서 낮아질대로 낮아진 모습으로 주님앞에 섰을 때나 가능해 질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꼐서는 29절에 또 이렇게 첨언하십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역사는 죽으려면 살고 살려면 죽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은 나의 모든것을 포기할 때 진정한 구원이 이뤄질 줄 믿습니다.
    자신의 기득궈을 쥐고 있다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자들에게 주시는 또 다른 경고의 메세지가 3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선배는 먼저 서고 그후에 후배가 나중되야 한다고 생각하는 통념이 누구에게나 세계적으로 있습니다. 그러면 이 것을 구원의 역사에 적용해 보면 유대민족이 구원에 먼저 들어가고 이방민족은 나중에 들어가던지 못 들어가든지 하는것이 맞을것입니다.
    유대 민족에게는 이방인에게 없던 율법선생과 제사장들이 셀수 없을 만큼 많았어도 그 마음에 교만이 가득하여 예수의 도를 부정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우리나라와 같은 이방나라보다도 후에 들어오게되지 않았습니까? 또 거기에다가 예수님께서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자기 의로 가득한 삶을 살다가 창녀와 세리보다도 나중에 구원에 들어가게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됨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먼저되었다고 믿늠 율법 선샌과 교사와 제사장과 서기관들보다도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세리와 창녀들이 천국에 먼저 들어가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슴은 저와 여러분들께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복음에 진전이 없고 주저 앉아 전도도 하지 않고 남을 정죄만 하고 있다면 우리가 먼저된자와 다를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먼저 되었어도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고 더욱더 전도하고 주님의 뜻앞에 나악야만 우리 주님의 세상구원의 복음에 참여해야만 우리가 나중되는 수모를 당하지 않고 또 주님의 영생의 축복을 온전히 받을 수 있을것을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연합의 성도들께서도 결코 자고하지 않고 주님앞에 자신을 전도와 성교와 섬김으로 낯추시며 하나님의 축복의 상급을 놓치는 이 없이 모두 다 받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7 min
  • 마태복음 19 : 13-22 (정연권 목사님)
    마태복음 19 : 13-22 (정연권 목사님)
    오늘의 본문에서는 두가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앞에 나아온 어린아이들과 연관된 일화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앞에 나아온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로부터 오늘 우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길 원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기앞에 나아온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지위나 부의 소유여하를 막론하고 아니 오히려 없는사람 연약한 사람들을 먼저 만나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아온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13,1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에서 보시면 예수님꼐서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아온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온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권위를 가지고 이런 행위를 제자들이 금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이것이 아주 않좋게 보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어린아이에게 시간을 쓰는것이 시간낭비고 쓸데없는 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런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처럼 권위로 꾸짖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밝히심으로 그들의 행동을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이 이런 사람의것이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정확하게 어린아이의 어떤점을 들어 말씀하셨는가는 여러가지 설명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보시는 기준은 우리의 기준과는 너무나 달랐고 또 두번째는 예수님꼐서는 연약한 어린아이들도 한명의 인격으로 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귀한 모습을 담은 사람으로 어린아이들을 대해 주셨다는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 주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다 따라갈 수는 전혀 없겠지만 우리눈의 기준을 따르지 말고 예수님의 기준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우리 이웃들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눈에 연약한 자 비루한 자 혹은 쓸데 없는 자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당신의 형상을 단은 귀한 그릇이요 자녀라는것 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오는 두번째 일화는 주님 앞에 나아온 부자 청녕의 일화입니다. 또 그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18절과 19절을 보시면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계명들을 보는 청년의 이해는 우리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도 아직까지는 살인한적 없고 간음한 적 없습니다. 거짓말은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양심에 크게 걸리며 살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 청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은 이 모든것을 어릴 때 부터 지키고 살았다고 항변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진짜로 보시고 싶었던것은 이런 문자적인 순종이 아니라 이 안에 감춰져있는 하나님의 진심을 이 청년이 역시 진심으로 속사람과 전심 전력을 다해 지키고 있는지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청녕이 자신을 돌아볼수 있도록 5가지의 동사로 된 말씀을 주십니다. 21절 말씀을 축약하면 가서, 팔아, 주라, 와서, 따르라의 다섯가지 동사로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년이 이 말씀을 따르려 보면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았는지가 금방 드러나는것입니다. 자신이 계명을 지켰다 하지만 그것은 문자적인 것이고 자신의 진심 자신이 정말로 의지하고 사랑하는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다름이 이 다섯가지 동사로 비추어 드러나게 되는것입니다.
    이 청년의 심중을 드러내신 우리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가 심지어는 나 자신까지도 속이고 있을 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말씀앞에 서면 우리의 영혼이 잇는 그대로 비춰집니다. 그럴때 부끄럽고 찔림이 있을때 그 말씀을 거부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해 내려놓을 것들을 내려 놓고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정녕 하늘의 보화가 크게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우리를 열납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안으로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14 min
  • 마태복음 18 : 12-20 (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18 : 12-20 (정인수 담임 목사님)
    어제부터 우리가 잃어버린 작은자 소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성경을 읽을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오는것은 아주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바꿔서 말하면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야 하는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장기 결석자 태신자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접근을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99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가서 한마리를 구하러 가는것을 잘못 생각하면 신자들을 버려두고 가는것처럼 생각 할 수 있는데 이 말씀은 그런것이 아니고 길을 잃지 않는 양들을 말씀하시는것으로 생각하는것이 맞습니다. 목자를 따르고 이상한 길로 빠지지 않는 성도의 이미지가 99마리의 양이고 한마리의 양은 그야말로 잃어버린 양 실족한 성도를 이야기 한다고 생각하시는것이 맞습니다.
    본문이 말씀하시는대로 잃어버렸던 양을 찾는것은 너무나 기쁜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런 사람들에 관심을 갖는것은 너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것은 교회에서 남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흔히 교회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경우에 용서를 해야만 한다고 용서를 공식화해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교회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범죄하는것이 발생했을 경우에 대한 아주 중요한 가이드라인을 주시고 계십니다.
    15절을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라고 하시고 계십니다. 즉 무조건적인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것이 아니라 공동체 즉 교회안에서의 범죄는 권고하여서 돌이킬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해야한다고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데도 듣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부당한 행위를 고집하고 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자신을 돌이키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취급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리고 죄를 돌이키지 않는 경우는 법에 호소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교회라는 공동체에 회개하지 않고 완고하고 해악을 끼치는 죄인을 적당히 덮어서는 안된다는것입니다. 그것은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문제를 지적할 이유와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자들에게는 무한대로 문이 열려야 합니다. 절대적인 관용과 수용이 허락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회개한 자들에 대한 용서와 수용의 중요성은 1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은 믿음의 공동체 곧 교회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교회와의 건강한 관계가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에 수용되는것 교회와 바른 관계를 갖는것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공동체의 권위와 능력에 대해서 19절과 2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9: ”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언제나 성격에서 진실로라는 말씀은 중요한 말씀이라는 표시입니다. 합심하여 구하는 기도에 대한 기도를 이 말씀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는 기도는 능력의 기도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일어 납니다.
    이번 발족하게 되는 복음주의 연합에 은혜가 큽니다. 이 년전에 복음주의 연합의 비전을 가지게 되는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교단의 문제로 이 교단을 떠나자고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그것은 올바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교단과의 관계와 또 그 안에 있는 한인 교회들 그리고 교단에서 제일 큰 연합교회의 관계를 교단에서 나온다고 그냥 정리할 수 있는것이 아니고 특히 우리 한인들에게 결국에는 좋은 영향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점에서 이년간 저와 같이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해 주신 새벽 기도의 성도들이 너무나 자랑 스럽습니다. 저 혼자 기도했으면 복음주의 연합의 비전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난감한 교단의 문제를 놓고 합심해서 저와 같이 기도해 주시던 우리 새벽의 성도들 때문에 복음주의연합이라는 비전을 받게 되었고 이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이 된것은 합심해서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들은 합심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두세사람이라도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세상이 그런 사람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힘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미약한 할머니들, 여인들의 간절한 기도의 강력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놓고 합심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게 살 길입니다.
    그럴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임이라고 다 같은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모임이 아니면 주님이 임재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임재가 없다면 그것은 헛 된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되신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모이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함께하시는가가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고민해야할 유일한 문제 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연합의 모든 성도들께서 우리 주님의 이름아래 합심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강력으로 세상을 승리하시는 모든 분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7 min
  • 마태복음 18 : 1-11(서석훈 목사님)
    마태복음 18 : 1-11(서석훈 목사님)
    오늘의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삼년이나 주님과 같이 다닌 제자들의 질문의 수준이 그닥 높지 않은것은 어찌보면 실망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이런 염려가 잘 묻어나오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일단 4절까지의 주님의 대답은 괜찮습니다. 이해하기에 어려움도 없고 그럴 수 있겠다는 공감을 끌어내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의 주님의 대답들이십니다. 천국에서 누가 제일 큰것입니까 하는 질문에 실족케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죽는것이 낫다는 너무나 심각한 대답을 해 주십니다.
    이것은 천국에 대해 아직도 이해를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고 세상의 기준으로 천국을 이해하려는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염려와 실망으로 정말로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먼저 사람들은 남들과 비교해서 자신이 남들보다 더 낫고 더 크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그 사고에서 제자들은 주님께 누가 천국에서 큰 자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천국의 기준은 세상과 다름을 말씀해 주셔야 했습니다. 4절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세상의 원칙을 따르는 사람들은 결국 세상이 움직이는대로 따라 갑니다. 한때 유행한 드라마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네가 아니라고 하지만 에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네 안의 괴물이 너를 삼텨 버릴것이다” 하는 대사 였습니다. 인생이 결국에는 욕망의 오예로 사로잡혀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욕망들을 누르기 위해 평생을 씨름하던 바울 사도꼐서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하신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욕망의 노예들이 되는 세상의 사람기준과 대척점에 잇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심지어는 삼절에서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고까지 적고 있지 않습니까?
    주석들에서는 이 말씀이 겸손하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을 말씀하시는것이라고들 해 놓았는데 그런듯 하긴 하지만 백프로 긍정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아이들을 잘 관찰해 보니 몇가지 인사이트를 주는 특징이 있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어린아일들은 잘 믿습니다. 의심도 안하고 잘 믿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이것을 잘 따릅니다. 믿으면 믿는대로 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또 절대적으로 의존적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다는것은 말씀을 믿고 잘 따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을 가르키는것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누가복음에는 99마리의 양과 한마리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한 목자는 99마리의 양을 내버려둔 채 로 한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섭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한마리 때문에 99마리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에서는 언제나 99마리가 한마리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숫자로 생각하면 그렇지만 생명으로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한마리의 생명이라도 도저히 소흘히 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이 생명인 것입니다. 바로 이 생명의 사고가 천국의 사고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7절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18: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이 말씀은 남을 상하게 하지말고 삶으로 이웃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배려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처럼 만약 크기와 숫자를 기준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살기 시작하면 삶에서 남을 위한 배려가 사라집니다. 상처주고 괴롭히고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 당연히 일어납니다.
    그러나 생며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기 시작하면 돈보다, 규모보다, 지위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소중해 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웃안에 있는 생명의 불씨를 살리는 일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의를 차리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일은 이런 배려에서 시작하고 배려를 하게 되면 자신의 욕심을 누를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남보다 높아지는것보다 내가 돈을 더 버는 것 보다 내가 이름을 날리는 것보다 내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으로 그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 더 중요해 지는 배려의 마음 그리고 그 영혼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되는 생명의 마음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마릇ㅁ을 들으시는 모든 연합의 성도들께서는 이 사랑과 생명의 마음을 심령에 품으시는 모든 분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4 min
  • 마태복음 17 : 14-27(정인수 담임 목사님)
    한번은 목회를 하는 목사님들에게 설문서를 돌렸습니다. 묻기를 ‘당신의 기도 생활을 방해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하는 설문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대다수의 목사님들이 말 하기를 교회의 많은 일들이 기도생활을 방해하는 원인이라고 적었습니다. 기도역시 교회의 사역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교회마다 회의와 프로그램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기도는 늘 사역의 뒷구석에 방치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분주한 목회자, 분주한 교인들이 잊어버리는것 그것이 바로 기도 생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것은 분주한 생활로 기도를 소흘히하게 되는것이 바로 사탄이 원하는 것이며 교회와 교인들을 공격하는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힘으로 살것인가의 문제가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결정 됩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아말렉과 이스라엘이 싸울 떄 싸우는 것은 여호수아였지만 전쟁의 승패는 산 꼭대기에서 기도하는 모세에 달려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승리하고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승리 하는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많은 문제들 아니 모든 문제들은 기도로 다룰때만이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옥에 갖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그렇 때 옥 문이 열리고 사도 베드로가 자유롭게 되는것을 그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꼼짝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힐 때 어떻게 해결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기도로 해결 할 수 있음을 믿게 되시기를 축워합니다.
    셀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랄프 네이버박사가 주님이 세우기 원했던 교회를 세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기도에 승리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고 둘 째는 교회의 모든 리더쉽들이 기도의 영향력을 배우고 실천하라 세 번째는 전 교회를 기도의 능력이 살아있는 기도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예수니몎서 제자들과 변화산을 내려오는데 귀신들려 거품을 물고 있는 아이와 어쩔줄 모르는 제자들과 아이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꾸짖으시며 아이를 고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의 제목을 정해 보자면 아마도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 위기도 정치적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현대의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 버리고 산다는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은과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것 걷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잃어나 걸으라 했던 초대 교회에는 은과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살아 운동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들은 은과금만 많아지고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 즉 능력이 없는것은 아닌지요?
    오늘 본문의 16절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아주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이라는 말을 빼고 교회에 라고 말을 바꾸어도 작금의 세태에는 전혀 이상 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현대 교회에는 병을 고치는 능력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도 사라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실때 가장 먼저 주신것은 바로 약한것을 고치시는 능력이었습니다. 다른것을 가르쳐 주신것이 아니라 능력을 나눠주셨습니다. 교회는 영적 전쟁을 치루는 곳입니다. 교회는 귀신을 쫓아내고 세상의 권력을 정복하는 정사를 주님께서 허락하신 곳입니다. 그 권세가 주님의 십자가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능력을 사용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모든 능력은 우리를 자신이 이 세상모든 권세를 갖고 있는것처럼 속이고 겁주는 사탄의 계괴를 분쇄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사용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우리에게 교회에게 주신것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또 사용해야만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치유해야만 합니다.
    19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왜 우리는 능력이 없습니까? 왜 우리는 안 됩니까? 우리는 왜 능력있는 기도꾼이 되지 못합니까? 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데 능력이 드러나지 않고 변화가 없습니까?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라고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만 우리의 삶의 전체를 주님께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능력이 드러나지 않는것입니다. 우리의 사업을 우리의 가정을 우리의 인생의 계획을 주님의 뜻에 맞추지 못하고 또 그럴 엄두도 내지 않기 때문에 능력이 없다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머리로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데 이에서 더 나가 사탄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정복하는능력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정복할 권세가 나와 교회에게 주어졌다는 그 사실은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말슴을 살펴보면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러한 류가 나갈 수 없다고 적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외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도 없이는 나의 문제가 해결 되지 않습니다. 기도가 없이는 나의 주변의 변화가 없습니다.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됩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과 연결 됩니다. 내 인생을 내 가정을 내 사업을 내 자식을 하나님의 권능과 연결 시키는 능력 그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연합의 성도들은 기도의 능력을 깨닫고 사용하시는 기도의 용사들이 되시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5 min
  • 마태복음 16 : 13-28(정선기 목사님)
    마태복음 16 : 13-28 (정선기 목사님)
    오늘의 본문에는 세가지의 의미있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 이름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번째이름은 빌립보 가이사랴입니다. 로마황제에게 하사받은 이 땅을 헤롯의 아들 빌립이 수도로 정하면서 로마황제를 기린다는 의미의 가이사랴라는 이름을 자신의 이름과 함께 넣고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신전들을 세운곳입니다.
    이 곳은 세상의 권력이 힘과 명예와 모든것의 기준이 곳이었습니다. 그 정점인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곳이었고 그것도 신중의 신으로 숭배하는 황제숭배의 유대땅의 핵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땅에서 황제가 하나님으로 숭배받는 통탄할 땅이었습니다. 그 이름 가이사랴 빌립보가 오늘 본문의 첫번째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어떤 사람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름은 바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로마 황제를 하나님처럼 숭배하는 땅에서 예수님께서 세상이 당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물어보신 것은 굉장히 의미 심장한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런저런 대답을 합니다 결국 세상이 보기에 예수님은 선지자라는 대답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또 물어 보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랴 생각하느냐?
    왜 여기서 주님께서 이 질문을 하시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첫째 이곳이 황제를 섬기는곳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제 곧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당신의 사역의 최종 목적인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사역을 감당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닥쳐올 시험과 연단에서 왕으로 구세주로 우리 주님의 정체성을 모르고는 제자들이 시험과 고난을 견딜 재간이 없으므로 바로 이 곳에서 확인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대답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가 정확하게 주는 그리스도 곧 기름부으신자 왕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을 하는것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하나님의 아들로 숭상을 받는 바로 그 땅에서 베드로는 그것들은 거짓이고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왕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세상의 권력을 숭배하는 심장에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선포하신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이 이름이 오늘의 본문에서 나오는 두 번쩨의 이름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우리 믿는자들의 신앙의 기본이 되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누군지 고백하는 이 고백을 한 베드로는 믿는자들을 대표하는 오늘의 본문의 두번째 이름입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은 자신의 지혜와 통찰로 한 고백이 아닙니다. 이런 진리를 깨닫는 고백은 오로지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한것임을 믿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시몬에게 예수님꼐서 새로 주신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바위를 뜻합니다. 그리고 준님께서는 이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교회를 위한 반석으로 이 이름을 쓰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통해 크신 약속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신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의 권세를 깨고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마귀의 권세는 일견 큽니다, 오늘 말씀의 무대인 가이사랴 빌립보의 로마황제 신전만 봐도 그 위력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마귀의 권세를 깨고 교회가 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18절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 교회를 주님께서 손수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우는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와 같은 신앙의 고백을 하는 세상의 왕이 나의 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이시라 고백하는 자들의 고백위에 당신의 교회를 직접 세우시겠다고 고백을 하고 계시는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주어지는 천국의 열쇠는 베드로 개인에개 주어진 열쇠가 아니라 베드로와 똑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자 선물인것입니다.
    오늘의 마ㅣㄹ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도 바로 이와같은 신앙의 고백을 통해 천국의 열쇠를 신앙의 고백의 특권과 선물로 받으시는 모든 분이 되시기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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