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 : 23-30 (정인수 담임 목사님)
오늘의 본문은 어제 본문인 부자 청년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어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무슨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겟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이 청년의 심중을 다 아시는 예수님께서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 이 청년에게 유도적인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네가 이러이러한 율법을 다 아느냐? 그랬더니 청년은 내가 어렸을때부터 그 모든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하고 약간은 건방진 대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대의 통념이 부자는 어떤 이유에서든 성한일을 통해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결과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렀다는것을 잘 알고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부자가 된것을 모델로 삼은 믿음이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통념과는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데 네가 온전하려거든 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네가 가진 모든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하십니다. 온전하려거든이라는 도입의 뜻은 온전치 못하다를 전제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온전해 지려거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율법도 지켜야 하는데 이 청년에게는 그것이 안보인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면 영생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것이라는 예수님께서 영생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생을 구하는 질문에 이 이상 분명할 수 없는 확실한 대답을 주셨음에도 이 젊은 율법사 청년은 재산이 많은 연고로 근심하며 주님을 떠나가게 되고 그 이후로 성경에 다시 등장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심히 걱정하며 떠나는 이 청년의 뒷모습에 예수님께서 아주 놀라우신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이 오늘의 본문 23,2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것도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듯이 어렵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낙타가 어떻게 개미나 간신히 지나갈만한 바늘귀를 지난갑니까? 못지난 갑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이들은 부자는 선하다는 그 당시의 믿음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어렵다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를 가능케 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꾸실 수 가 있기 때문입니다. 낙타도 바늘귀를 지나갈 수 있도록 하시는 전능의 하나님이시라는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를 가난한자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어려운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말슴에서 주의할 것은 이 부자가 반드시 물질적인 부자를 뜻하는것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자는 마음이 교만한 자를 가리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마음이 한평 땅 가진것 없는 가난한 사람처럼 마음이 겸손하고 그 마음이 가난하다면 그 사람은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부자가 아닌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부자 청년은 일단 물질을 포기할 마음이 없고 또 더더욱 자신의 부유한 마음을 낮출 생각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작아지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낙타만큼이난 큰 내마음이 낮아져서 바늘귀도 지나갈 만큼 작아지려면 정말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참여하려는 치열한 절제와 자기부인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절대로 이렇게 할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은혜입니다.
이러자 베드로가 또 늘 그렇듯이 끼어듭니다. 27절에 보시면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것도 버리고 주님을 따라왔다는것을 강조하면서 그 대가가 무엇이 되겠냐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물어보는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알다시피 베드로는 그 마음에 주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도 한 자리 하려는 출세욕, 권력욕과 자신을 주님앞에서 증명하려는 허영과 교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또 부활하시고 그러고도 제자들앞에 나타나실때 까지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짐으로 마음에 꽉찬 베드로가 뭘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에 예수님꼐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 이 말씀을 듣는 베드로를 포한한 제자들의 가슴이 얼마나 뛰었겠습니까? 하지만 이 말씀은 한참후에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거꾸로 순교하면서 낮아질대로 낮아진 모습으로 주님앞에 섰을 때나 가능해 질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꼐서는 29절에 또 이렇게 첨언하십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역사는 죽으려면 살고 살려면 죽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은 나의 모든것을 포기할 때 진정한 구원이 이뤄질 줄 믿습니다.
자신의 기득궈을 쥐고 있다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자들에게 주시는 또 다른 경고의 메세지가 3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선배는 먼저 서고 그후에 후배가 나중되야 한다고 생각하는 통념이 누구에게나 세계적으로 있습니다. 그러면 이 것을 구원의 역사에 적용해 보면 유대민족이 구원에 먼저 들어가고 이방민족은 나중에 들어가던지 못 들어가든지 하는것이 맞을것입니다.
유대 민족에게는 이방인에게 없던 율법선생과 제사장들이 셀수 없을 만큼 많았어도 그 마음에 교만이 가득하여 예수의 도를 부정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우리나라와 같은 이방나라보다도 후에 들어오게되지 않았습니까? 또 거기에다가 예수님께서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자기 의로 가득한 삶을 살다가 창녀와 세리보다도 나중에 구원에 들어가게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됨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먼저되었다고 믿늠 율법 선샌과 교사와 제사장과 서기관들보다도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세리와 창녀들이 천국에 먼저 들어가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
이 말슴은 저와 여러분들께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복음에 진전이 없고 주저 앉아 전도도 하지 않고 남을 정죄만 하고 있다면 우리가 먼저된자와 다를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먼저 되었어도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고 더욱더 전도하고 주님의 뜻앞에 나악야만 우리 주님의 세상구원의 복음에 참여해야만 우리가 나중되는 수모를 당하지 않고 또 주님의 영생의 축복을 온전히 받을 수 있을것을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연합의 성도들께서도 결코 자고하지 않고 주님앞에 자신을 전도와 성교와 섬김으로 낯추시며 하나님의 축복의 상급을 놓치는 이 없이 모두 다 받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