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 연합 장로교회 말씀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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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타 연합 장로교회 말씀 강해 episodes

  • 마태복음 12 : 22-37(심우진 목사님)
    마태복음 12 : 22-37(심우진 목사님)
    사람들이 우리 주님 앞에 눈멀고 말 못하는 귀신 들린 사람을 데려옵니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는 이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이 때 사람들이 우리 주님꼐 임한 영광이 큼을보고 외칩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이것은 사람들이 드디어 예수님꼐서 하나님꼐서 예정하신 메시아가 아닌지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꼐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주실 분이 아니신가, 예수님을 왕ㅇ늘로 세우면 어떨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본 바리새 파들의 생각입니다. 이들은 순간 예수님을 자신들의 이상, 자신들이 구축해놓은 권력을 위협하는 위험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사역이 과연 어떠한 뜻인지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충돌한다는것만 크게 느낀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은 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향한 나쁜 마음만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떤 사람에 대해 이렇게 악해지면 정말 냄새가 납니다. 그 사람이 못되면 고소해지고 또 잘하면 더 밉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랬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다루고 나름 이스라엘을 개혁하겠다던 지도자 들이었음에도 이들의 마음이 시기와 질투에 휩싸이자 예수님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이를 깍아내리고자 무던히 애를 쓰게 됩니다. 말로 행동으로 사사건건 예수님을 막으려고 용을 씁니다.
    이들이 오늘의 본문에서 들고나온 예수님을 향한 반대의 변은 바로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는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을 초월한 능력과 권세는 악마적인것이라는 그 시대에서는 생명을 위협하는 엄청난 모함을 하는것이었습니다. 율법을 다루는 자신들의 권위를 뒤에 업은 모함에 있어서는 가장 파괴력이 큰 모함의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다는 살의가 번뜩거리는 말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함에 대해 사람들을 동원해서 반대하시거나 또 기적으로 이들의 입을 막으시거나 하지 않고 이들의 주장에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반박을 하십니다. 바리새인들로 깨닫길 바라시는 마음까지도 느껴지는 설득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는 황폐해 질 것을 모르느냐?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반문하시면서 그들의 주장이 그 논리의 근원부터 잘못된것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하지만 이 반박은 바리새인들을 공격하기 위한것 보다는 그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시기 위한 초석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바리새인들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아라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의 힘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는냐? 그것이 뜻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중에 임하였다는것이다!라고 단호하게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어떤 사건을 볼 때 그 사건과 동시에 그 이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일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니꼐 했듯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는 저항이 있을 수 있고 늘 언제나 순조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진행하는 내내 어렴움이 있고 힘든일이 끊이지 않았어도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아 이것이 하나님뜻이었구나 깨닫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교회의 사역 중에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꼭 해야하는 일이 있다는것입니다.
    예수님꼐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어떻게보면 자상하실 정도로 예수님꼐서 행하시는 일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인지 말씀해 주시고 설득하시고 또 아울러 그들이 행하는일이 정말로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큰 실수와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성령을 말로써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능력의 사건은 오직 성령의 힘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 인들은 그것을 마귀의 힘이라 칭했으니 정면으로 성령하나님의 역사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얼나나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십니까? 말로써 하나님을 대적 할 수 있다는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에는 사함이 없으니 말을 조심해서 해라 말을 가려서 하라는 말씀이십니다. 너희가 아는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재잔하지 말고 일어나는 사건의 이면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선한 삶을 살면서 악한 말을 하는 분을 보신적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악한 삶을 살면서 선한 말로 남을 세우고 이롭게 하는 사람을 보신적 있으십니까? 아마 없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가볍게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말은 나의 삶의 반영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내 입술로 어떻게 더럽고 추한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죄인된 우리는 더욱더 조심해서 나의 입술의 작은 말들을 살펴야 하는것입니다. 혹시나 나의 사사로운 실수의 말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그것이 나에게 득이 될 리는 만무하니까요.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내가 용을 쓴다고 나의 삶이 바뀌겠습니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도움을 받고 주님꼐 영광을 돌리므로 나의 삶도 나의 말도 바뀌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이 모든 살므이 여정가운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0 min
  • 마태복음 12 : 1-21(조재욱 목사님)
    마태복음 12 : 1-21(조재욱 목사님)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사이에 있었던 안식일에 관한 논쟁입니다. 이네 관련하여 두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하나는 이삭을 베어먹은 제자들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손마른 자를 치유해 주시는 사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시대에 살았던 나름 정치적 종교적으로 개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예수님 시절에는 6000명 정도가 있었는데요 이 사람들은 율볍을 여구하고 해석하는데 평생을 자치며 살았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중에서도 더 깊이 율법을 연구하게 되면 서기돤이 되는것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종교적인 위치에 오르는것은 물론 심지어는 재판까지도 관할 했기때문에 예수님 사역당시의 시대에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놓치는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살피는 마음에서 주신것을 무시하고 형식적이고 인본적인 율법의 해석만을 고집 했습니다. 이들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뤄야할 신앙생활이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전락하게 된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레위기 25장을 통해서도 잘 살펴벌 수 있습니다. 안식일과 희년에 관한 법인데요 쉽게 말하면 때가 차면 잃어버렸던 땅이 원래의 주인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제도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부자가 계속해서 부자가 되는것을 막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계속해서 대를이어 가난하게 사는것을 방지하는 법입니다. 또 안식녕과 안식일을 두어서 땅도 쉬게하고 사람도 쉬게 하는 고된 삶에서의 안식과 회복을 얻게하는 법입니다.
    이 법으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고통도 또 우리의 필요도 다 아시고 섬세하게 챙기시는 아버지의 마음이시고 어머니의 마음이시지 않습니까?
    이 날을 제사당이 나팔을 불어 거룩하게 선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거룩하게 보시는지 또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것은 무엇인지 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과 회복이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쉼과 회복!
    그러나 이에 맞서는 바리새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옭아매는 분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지 않습니까? 안식일에 이삭을 먹은 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정죄하는거이 얼마나 사실은 억지인것입니까?
    예수님께서 12절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고 물으시는것을 보면 얼마나 이들을 답답해 하시는지가 느껴집니다. 안식일에 구제와 선교의 일을 행하는것이 얼마나 당연합니까? 사람을 구하는것 생명을 구하는것 이러한것이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주님앞에 손마른 자가 나옵니다. 손이 말라서라는 것은 피가돌지 않아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입니다.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손만 고치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구원받으러 주님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런 불쌍한 인갱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연히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규례와 율례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서는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주님앞에 불쌍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구원의 큰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구원이 필요한 손마른 자같은 자들입니다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오직 모든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에서 오는것임을 고백하시고 큰 은혜받으시는 오늘 하우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15 min
  • 마태복음 10 : 34-42(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10 : 34-42(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이 치러야할 희생과 대가를 많이 말씀 하십니다. 특히 10:34절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말씀하시면서 주님꼐서 이 당에 온 목적이 영적 전쟁인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과 불의와 의에 타협하러 오신것이 아니라 검같은 진리의 복음을 건포하러 오셨음을 분명히 하고 계신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사람들과는 결코 화평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기독교가 평화의 종교가 아닌것을 오해 하시면 안됩니다. 이것은 범죄의 현장에 경찰이 들이 닥치거나 의사가 환부를 꾹꾸 눌러서 진룔를 하는것처럼 타락한 세상에 진리가 선포되면 나타나는 당연한 역반을 이 있음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더러운 환부를 감추고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핍박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말씀 곧 진리가 선포 되면 이를 듣는 사람은 두종류의 반응을 합니다. 배척하거나 아니면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됩니다. 우리는 이런 갈등을 피하면 안됩니다 불신자들로부터 또 진리를 오해하는 사람들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것입니다.
    또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갈때에 믿는자와 자기 가족들과도 갈등이 있을수 있습니다. 35-36절을 보면
    "10:35-36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 말씀은 불효하라는것이 아니라 혈연보다도 중요한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인것을 말씀하고 계신것입니다. 불신영혼이 가정에 있으면 전도해야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집안에서 쫓겨나기까지하는 간증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진정한 가정의 평안이 오게됨을 믿으셔야 합니다. 현대의 해체되는 가정들을 보면 가지가지 이유가 있고 글르인해 가정을 포기하게되는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 근본의 원인을 보면 결국 가정조차도 죄된 세상을 쫓아가고 그 가정의 근본을 둘 만한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처음의 갈등을 극복하고 예쑤그리스도를 믿음에 우리의 가정의 근본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진정한 가정의 평안을 가져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을 보시면 갑자기 경제의 부강이 이뤄 졌지만 이 ㅁ나라의 정신이 기초할 가치가 없으므로 얼마나 지금 나라가 부유해진 부작용을 겪고 있습니까? 부패가 온 나라에 가득하고 이 나라가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될지 너무나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믿는 자들의 삶에 필요한 자세는 38절 에 나오듯이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감수 해야하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지금 까지 살아온 삶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삶을 살게 되면서 겪는 분리의 고통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십자가의 고통이 없이는 면류관의 영광도 없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짜라가기로 결당하고 나아갈 때 주시는 비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젼을 따라 살아가려 할 때 우리를 주저 앉히려는 어려움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극복해내는 아픔을 겪을 때 만이 주님이 허락하신 비젼을 성취하며 사는 자유를 얻게 되는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가고자하는 진리추구의 열정과 또 자기개발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젼을 감당하며 성취해 나가겠습니까?
    일본에 한 폐병환자가 있었습니다. 병세가 너무나 위중해서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죽어가는 인생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복음을 붇들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오늘 죽더라도 남을 섬기다 죽는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이겠다 하는 깨달음대로 다른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본의 환자를 그 후로 50년을 더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현대의 성인이요 빈민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사선을 넘어서의 저자인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입니다.
    그렇습니다 비젼의 삶은 하나님의 비젼으로 모든것을 바치려 할 때 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생명의 삶인것입니다. 그리고 살리는 그 생명의 힘은 오직 우리주 예스그리스도의 복음 그 안에만 있음을 깨달으시는 모든 연합의 교우들 되시기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9 min
  • 마태복음 10 : 16-33(서석훈 목사님)
    마태복음 10 : 16-33(서석훈 목사님)
    영과 이리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당연히 이리가 이깁니다. 양은 다리도 짦고 눈도 안좋고 또 무기가 될 거라고는 뭉뚝한 뿔뿐입니다.
    그런 이리가운데로 양을 몰아 넣듯이 우리를 보낸다고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께선는 말씀 하십니다. 도대체 무엇빼문에? 라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6절에 보시면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라고 하시는데 제 귀에는 이 말씀이 꼭 너희들이 알아서 처신하고 알아서 살아 남아라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니 이 말슴에 대해 고민해 보지 않을 수 가 없는것입니다.
    17절과 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즉 이상황은 복음을 전할때 닥텨올 상황을 말씀하고 계심이 드러납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 이리가 양떼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듯이 핍박과 박해가 시작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절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현대에도 중동에서는 얼마나 많은 믿는 형제와 자매들에 대한 박해가 이어지고 있습니까? 현대의 소셜미디어에는 매일마다 순교의 소식이 전해집니다, 바로 지금도 세상의 누군가는 복음을 믿는다는 이우로 목숨을 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런 박해는 심지어는 가족으로부터도 오게 됩니다. 21절을 보시면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이러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아직도 저희 청년들 중에는 부모와 현제들의 지독한 핍박을 무릎쓰고 교회에 나와 가족구원을 부르짖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 청년들이 겪는 마음의 고통은 참으로 보기 딱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우리를 이리가운데로 넣으시냐는 것입니다. 안 보내시면 안되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해 보게하는 말씀이 19절입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이 말씀은 사랑하는 우리주님께서 우리에게 할 말을 주신다고 하는 이 말씀은 다시생각하면 그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꼐 계신다는 말씀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어떤한 경우에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20절은 또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무슨 말슴이십니까? 복음을 위해 고난 당하는 그 때 할 말 조차도 성령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말씀은 우리는 육신의 고통으로 이 사던을 이해 할 지라도 실상은 이 일은 실체는 영적인 전재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양은 이리에게 백번백패입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 목동과 같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게다가 이 목동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는 진짜 목동이라면 말할거도 없이 양들은 안전합니다.
    22절을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날씀의 핵심입니다. 육신의 가치보다 연적인 가치가 트다는 것입니다. 연적인 생명 영생이 더 귀한 것이며 이 영생을 지키기 위한 전투에 이리가 덤벼도 선한 목자 되시는 우리주님꼐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보이는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16절로 가서보면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말은 약삭빠르게 처신을 달해서 니목숨 네가 부지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아무리 어려운 가운데 있어도 더 소중한 것, 진정한 가치가 있는것, 영생을 가져다 주는것, 즉 하나님 말씀 복음을 붙잡는 지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비록 이리앞에 있는 양떼의 처지를 겪을 지라도 더 중요한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영적 전쟁의 실체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놓고 치열한 전쟁이 있을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싸우시도록 할 때 우리의 승리는 보장된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이 보이는 이 모든것의 근본임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승리하실때에는 완전히 승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절대로 물러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려워도 혹은 고난을 겪어도 목숨을 잃어도 물러나지 않을것은 이것이 영원한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과 영원히 동행 할 길인 영생의 길 복음의 길을 붙잡으시는 우리 무두가 되시길 축원 드립니다.
    12 min
  • 마태복음 10 : 1-15(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10 : 1-15(정인수 담임 목사님)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전도여행으로 차송하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전도자들의 자세를 전도자들이 전해야 할것과 또 전도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으로 나누어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1-4절 까지는 12제자의 파송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영어로 보면 열두 제자를 The twelve라고 정관사를 붙여서 설명합니다. 이미 특정한 열두명이 정해져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이 목적을 위해 부르신 따로 세우신 열두명의 제자가 있었다는 이야기이고 또 열두명의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이 전도를 위함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모든면에서 훈련이 중요하지만 특히 교회사역에서의 훈련은 너무 중요합니다. 모든 교인이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훈련이 없이는 남들을 이끌수 있는 리더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할 주 모르는 사역을 어떻게 남에게 시킬 수 있겠으며 또 훈련이 없이 어떻게 다 같이 움직이는 협동의 사역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훈련을 시키신일을 보면 모든일의 모범을 먼저 보이시고 그 후에 사역을 맡기시는 일종의 Under JOb Training을 하고 계신걸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 사역 훈련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때 권능을 주셨다는것입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보면 아무리 잘 배운 지식과 이론도 권능이 없으면 무용지물인것을 봅니다. 그래서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말씀의 권능을 받으셔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권세와 능력이 있기때문입니다.
    권능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권능은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재, 즉 진정한 기도의 교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권능은 오직 하나님나라를 섬기는 일에만 한하여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역을 위한것이지 다른것을 위해 주어지는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 선포 곧 복음을 위한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또 한가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주어지는 은사가 현대에는 없어진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점점 악해지고 타락해 가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 맏설 무기를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세상이 악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강력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Apostle은 보냄을 받은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제자들이 보냄을 받아 사도가 되는것입니다. 부르신을 받았을 때 사도가 된 것입니다.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갈 때 사도가 되는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복음의 가치를 알아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이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사역은 직업이 아니라 부르신으로 인한 소명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먼저가라고 보내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변부터 먼저 복음을 전하라는 원칙의 말씀입니다. 복음을 먼저 나 자신에게 전하고 나의 가족에게 정하고 이웃과 세상에 전하는것이 오이코스 전도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능력이 임하실 때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이 먼저 전해짐을 볼 수 있습니다.
    "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또다른 복음전도의 원칙 사역의 원칙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능력은 은사는 소유는 주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것입니다 그러니 베풀때도 거저 베출어야합니다. 성령의 은사의 능력이 나타날때 돈을 요구하는 자들은 거짓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것에 우리가 무슨 권리가 있겠습니까?
    또 9절과 10절에서는 전도를 위해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다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맞퉈 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후는 하나님의 책임이 되십니다. 아버지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뛰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는 분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그 만남을 위해 기도하는것이 복음전도의 방법이고 또 훈련입니다.
    그리고 12절과 13절에 보면 어디든 평안을 빌며 평안으로 축복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누구에게나 평안을 빌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함이 옳은 일인것입니다 그러나 평안을 받을 사람이 받을만할 사람이 아니라면 그 평안은 우리에게 돌아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평안이 합당한 자들을 찯으시고 그것을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연합의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의 평안을 세상에 전하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 min
  • 마태복음 9 : 27-38 (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9 : 27-38 (정인수 담임 목사님)
    오늘의 본문은 두가지 사건과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두 맹인을 치유하신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주님의 전도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전도사역에 관하여 더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 주님의 사역을 요약하면 세가지 중요한 사역으로 볼 수 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것을 삼중사역이라고 합니다. 3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것을 보면 주님의 사역은 첫째로 가르치시는 것이요 둘째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즉 전도하시고 혹은 선교하신느것이고 마지막은 치유하시는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역 즉 교회가 감당해야하는 하나님의 미션은 바로 우리 주님의 사역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교회도 가르치고 선교혹은 전도하고 또 우리 주변의 연약한 자들을 돕고 세워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어떻게 주님은 전도를 감당 하셨나 살피고 또 우리는 어떻게 해야 정말로 전도를 할 수 있는것인지 묵상해 보겠습니다.
    먼저 제일 중요한것은 예수님이 복음이 필요한 영혼을 보시듯 볼 수 있는 영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안이 있지 않다면 불신의 영혼 복음이 필요한 영혼을 알아 볼 수 없을것입니다. 우리 주면에는 이민의 삶에 지쳐 낮아진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분들은 우군가 손을 내밀어 주기만을 기다리는 분 들입니다. 또 우리 주변에 많은 유학생들 이들도 마찬가지로 낮은 마음의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 이런 연혼들 손대기만 하면 추수가 될 영혼들을 알아볼수 있다면 당연히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영혼들을 알아 보시고 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알아보고 다가가는 그런 전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우리 주님의 마음, 심장을 우리도 품어야 합니다. 우닐 주님께서는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이셨습니다, 그저 곤고한 영혼들에게 가서 교리나 읊어대는 얼치기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들의 연약함을 가슴아파해 주시는 그런 공감의 심장의 소유자 이셨습니다.
    원어로 불쌍히여기다는 스프랑케니조마이입니다.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이야기 합니다. 연약한 자들을 보시고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언제나 끊어질 듯 아프셨다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남하고 연약했던 병자와 과부와 고아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 분이셨기에 우리도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도 우리 주님의 심령을 닮은 전도자가 되어서 아픈 심령을 알아보고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위로의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는 먼저 주님의 탄식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연약한 세상의 심령들을 보시고 가슴 아파 하셨던 이유주의 하나는 복음이 필요한 사람은 지천에 널렸는데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너무 적어서 입니다.
    이미 천국의 추수철이 되었는데 추수할 일꾼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수때는 온가족이 나가서 추수를 합니다 그래도 일꾼이 부족해서 군부대에서 일꾼을 데려오고 또 이웃 동네에서도 데려옵니다 그렇게 뛰어야 추수가 감당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님께서 보시는 세상은 추수철이 되서 들판은 희어졌는데 곡식을 거둘 추수꾼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쌍한 영혼들을 보시고 탄식하시는 우리 주님의 탄식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추수할 때 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말씀 하신것은 38절입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이 추수꾼은 사람의 힘으로 충당이 되는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청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삮꾼이 아닌 주님의 심장을 지닌 진짜 추수꾼을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함포사격입니다. 전쟁에서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적의 진지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드제서야 보병이 상륙해서 전투를 합니다. 그와같이 우리가 기도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전도의 전투에서 승리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시고 기도하시고 또 기도하셔서 전도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시는 모든 연합의 교우 되시기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 min
  • 마태복음 9 : 14-26 (정연권 목사님)
    마태복음 9 : 14-26 (정연권 목사님)
    오늘의 말씀의 본문은 세가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격하는 요한의 제자들과의 금식 논쟁이고
    둘째는 죽은딸을 살려달라는 관리의 간구와 이에응하시는 우리주님의 기적의 사건입니다.
    세째는 이 떄 십이년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나아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나음을 얻게 되는 또다른 기적의 사건이 그것입니다.
    첫번째 사건과 나머지 두가지 기적의 사건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우리에게 과연 믿음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득별히 많이 다뤄지지 않는 첫번째 사건을 집중해 보면서 과연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극복해야 할 신앙의 세가지 난제들 방해물들이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14절은 이렇습니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 말씀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는 질문으로 사실 싸움을 거는 말들이고 비난하는 말 들입니다.
    비난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사실이 아닌데 터무니없이 헐뜯으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하고 있던것이 바로 이 비난입니다. 그들은 묻기를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일견 맏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말로 금식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식을 어느때 하는것인가요? 그 시대 금식은 지금도 그렇지만 특별한 일로 지독한 슬픔의 표현이거나 간구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금식을 계절마다 절기마다 행하는 관습으로 바꾼것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진실한 감정의 표현이거나 철저한 믿음과 같구의 수단이어야 할 금식에 종교적인 관습의 굴레를 씌워 버린것입니다.
    또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는 금식을 해야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스승인 요한이 투옥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금식을 하며 간구하고 슬픔을 표현할 충분한 이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은 금식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자들이 금식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하는 억지 헐뜯음이라는 것입니다, 비난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비난의 마음은 하지만 현길에서는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저사람이 왜 나와 생각이 혹은 행동이 같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해 상대방을 헐뜯는 이 비난의 마음은 심지어는 부부사이에도 일어나고 관계를 해치는 아주 악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오늘 첫번째로 극복해야할 신앙의 난제입니다.
    두번째는 남을 부정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의의 기준을 잣대로 남을 재고 찬단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당한 판단이 아니라 너는 아니다 너는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말하고자 하는 핑계인것입니다. 나의 기준을 절대화 시켜서 남을 판단하는 교만한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을 살펴 봅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라고 말을 띄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준이 자기들입니다. 금식해야될 이유가 있는 자신들의 처지는 쏙 빼고 자신의 행동만을 근거, 기준으로 삼고 남을 판단 합니다.
    이런일은 우리 삶에 너무나 많습니다. 게다가 이런 부정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도 향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 역사하심을 또 얼마나 자주 또 많이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우리 마음대로 이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다하고 치부해 버립니까?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힘든일이 생겨도 그럼에도 나와 내 가족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것이 아니라 나의 기준으로 하나님은 이제 더이상 내인생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이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못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오늘의 말씀이 보여주는 요한의 제자들의 모습은 위협하려는 마음, 강요하려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가 되면 남이 나의 말에 따라주기를 원하는 강요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라는 질문은 어찌하여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내 기준을 따르라는 협박이고 강요입니다.
    오늘 살펴본 세가지의 마음들은 우리의 성장을 가로박고 또 관계를 파괴하는 악한 방해불들입니다. 이것들은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과 정 반대의 것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낮아지고 섬기라고 하시는 섬긴의 사랑을 말씀 하셨지 이런것들을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들과 갗은 것들을 다스리게 하시고자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안에 내주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것은 오직 성령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메세지를 들으시는 모든 분들께서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런 악한 방해물들을 다 이겨 내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 min
  • 마태복음 8 : 1-13(김재홍 목사님)
    마태복음 8 : 1-13(김재홍 목사님)
    오늘은 기도를 어떻게 해야하나 또 중보기도는 어떻게 해야하나에 대해 묵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제까지 산상수훈을 하시고 이제 산에서 내려 오실때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오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한 나병 환자가 주님앞에 나아 옵니다.
    만약 우리 연합교회 본당에 천명도 넘는 사람으로 꽉꽉차 잇는데 나병환자가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 시선과 당혹감등 상상이 가실것입니다, 나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구요 게다가 이 시대의 나병 환자는 부정한자 사람들 근처에 오면 돌을 던져서 쫓을 자 입니다.
    그러니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 어려움을 뚫고 주님 앞에 선 이 사람의 그 간절한 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한 사람이 주님 앞에 정말로 간절한 심정으로 서있는것입니다.
    그 때 이 나병 환자는 뜻 박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그런데 그 간절함으로 주님앞에 나아와서는 이 사람은 자신의 뜻을 먼저 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절대적인 주님의 뜻을 먼저 구했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주님의 주권을 인정했다는 이야기이고 그 권위가 어떠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님앞에서 온전히 낮추는 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 부정한 나병환자에게 주님께서는 손을 대어 주십니다. 랍비가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꼐서는 겸비함으로 당신 앞으로 나아온 이 사람에게 손을 내어 만져 주시는것입니다. 그러자 놀라운것은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즉시 하나님께서 반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시 라는 말씀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올바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기도응답은 이렇게 즉각적일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응답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어떵 자세로 하나님앞에 우리가 나아가는가 입니다.
    심지어는 우리 주님도 감람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고 주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결국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부활의 영광을 보게 되셨다는 것, 죽음을 이기셨다는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결국에는 승리 합니다. 그것이 진리 입니다. 어떤 결과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로마서 8:28에서도 이렇게 적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주님께서 나의 어려움을 내어버려두는듯 할 때가 있어도 결국에는 다 아시고 우리를 주님의 뜻 가운데로 이끌어 가고 계심을 믿게 되시기 축원합니다. 어려움 가운데 붙들어야만 되는 절대로 우리가 깨달아야 만 되는 주님의 모습이 있다는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시간이 너무나 귀한 것이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깨닫길 원하시는 진리를 먼저 구하게 되셔야 하는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백부장의 믿음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로마의 백부장도 예수님과 교류하기에는 어려운 관계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일제시대때 헌병대 대장과 비슷한 사람이 민족 지도자이신 김구 선생님이나 안창호 선생님앞에 깨달음을 구하려 나아오는것과 비슷한 이야깁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이 백부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알고 있었다는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고백하는것은 자신도 남의 수하에 있는사람이라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명령이 무엇인지 알고 그 명령의 권위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라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자기 종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권세가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 세상은 세계를 정복한 로마의 황제가 바로 신이다 라고 이야기 하고 그런 신?의 권위를 수호하는 자가 백부장이었음에도 이 백부장은 진정한 권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권윅가 누구에게 있는 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철저하게 명령을 지키고 그 권위에 복종하는것 처럼 주님앞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자세로 또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의 권위를 철저히 인정하는 자세로 나아온 백부장에게 예수님께서는 응답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백부장처럼 자신의 삶속의 경험을 통해 더 자세히 주님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백부방이 군인으로써 명령과 그의 권위를 통해 주님을 이해했다면 사업하시는 분들은 손님을 대하는 나의 자세, 또 손님의필요에 응하는 나의 자세를 통해 주님께 어떻게 응해야 하는지 살필수 있을것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가?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그 뜻을 이루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주님의 몸된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사명과 직분을 받으신 분들이 영광되고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 분들껜 하나님께서 충성을 다 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백부장은 남의 마음에 공감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고 말한것을 보시면 백부장이 하인의 괴로움에 공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아픕니다 괴롭습니다 어떻게 해결 해 주세요 주님, 그를 보는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이런 공감의 마음에 주님은 반응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아파하는 기도가 중보의 기도입니다.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또 동시에 도울 수 없는 미약한 나의 한계를 불쌍히 여기고 아버지께 은 혜를구하는것이야 말로 중보기도의 자세여야한다고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께 겸비와 공감의 기도의 능력이 임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8 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