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 연합 장로교회 말씀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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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타 연합 장로교회 말씀 강해 episodes

  • 마태복음 3 : 1-10 (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3 : 1-10 (정인수 담임 목사님)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소망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죄와 그로인한 타락으로 인해 소망이 없어졌습니다. 그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소망으로 다시 오시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을 완성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주님을 선포하시고 있고 주님을 예비하는 자로 세례 요한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사야와 같이 예수님을 준비하던 사역자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야말로 홀연히 유대광야에 나타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가 외치는 메세지는 일관되게 회개하라 하나였습니다.
    그의 메세지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대의 왕들이 행차하면 그가 올 길을 먼저 다듬고 기다리듯 우리 주님이 오실 길을 다듬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것은 우리의 존재를 좌우하는 우리의 마음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오만하고 더러운 우리의 마음으로는 왕되신 주님을 절대 맞을 수 없습니다.
    유대민족도 그들의 죄와 타락으로 세례 요한 이전 사백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영적인 암흑기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사백년만에 들린 메세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였습니다.
    회개는 육신의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회개는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나의 존재의 진리는 사실 마음의 문제입니다. 나의 존재 자체가 준비 되어야 주님을 맞을수 있습니다. 회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필수의 과정입니다.
    회개는 3가지 단계로 드러나고 발전하게 됩니다.
    첫째는 나의 죄를 지식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나의 구체적인 죄와 또 나의 존재자체의 죄성을 깨닫게 되는것을 의미합니다. 행위와 생각으로 지은 나의 죄를 깨달으며 또 이를 넘어 나의 존재자체에 있는 죄성을 인지하기 시작하는것이 회개의 일단계입니다.
    이 때 우리는 아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적어도 남보다 이런 점에서 낫다고 생각을 해 온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고 하셨고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죄인 됨을 깨닫는것은 신앙이 깊어지면 질수록 더 강력해 지는 것입니다. 고 한경직 목산님은 그야날로 청아한 삶을 거룩의 삶을 살아오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그 믿음의 거인이 말년에 한 고백은 나는 죄덩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성화의 과정에서 죄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자신의 존재를 깊이 상령안에서 성찰한 분들만이 할 수 있는 내면의 진실의 고백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죄를 애통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단계입니다. 내가 나의 죄인임을 깨닫고 나의 죄인됨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가 하나님의 성령안에서 깨닫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보시는 심령이 나의 울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에 들어간 많은 신자분들은 울 이유도 없는데 종종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두번째 단계인 죄를 애통하는것 입니다.
    세번째 단계는 죄를 나의 삶으로 대적하는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지적합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의 세번째 단계입니다. 죄와는 반대로 행하게 되고 나의 죄성을 대적하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능력과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탐욕의 삶에서 나눔의 삶으로 무기력한 죄의 포로에서 행동으로 죄와 싸우는 병졸로 나의 삶이 바뀌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습니다. 2008년 미국의 경제위기는 이 탐욕에 근거한 시스템이 아무리 대단해 조여도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 너무나 잘 보여주는 예 였습니다. 지금은 중국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저 위정자들의 모습에서 중국이 어떤 미래를 겪을까 심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영적인 문제의 해결은 회개로 부터 시작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모든 문제의 해결의 시작입니다.
    회개를 하면 첫째, 나의 죄를 용서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죄의 용서는 오직 내가 회개할 때만이 나에게 체감되어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은 연원히 임재하시지만 그 하나님과 나를 이어주는것은 오직 회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두번째는 천국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것입니다. 회개 할 때 더럽고 추하던 나의 심령에 복음이 뿌려지고 그 복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며 우리안에 천국의 소망과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것입니다.
    세번째는 진정한 회개는 성령의 충만함을 가져오는것입니다. 모든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언제나 선포 하셨던것은 회개의 메세지였습니다 회개할 때만 성령의 역사가 있다느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성령의 충만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를 언제나 하고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가끔 하는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우리 영의 호흡이라면 그 기도에는 늘 회개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ACTS 가 기도의 순서이고 해야할 기도의 종류라고 하지 않습니까?
    A: Adoration-하나님을 높이고
    C: Confession- 나와 공동체의 죄를 회개하며
    T: Thanks Giving- 하나님께 감사하고
    S: Supplecation- 하나님께 간구 하는것, 하나님께 무릎으로 나아가는것.
    이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이는 기도도 없고 기도는 회개의 연장이어야 합니다. 회개 없이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도 없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자, 회개하는 자입니다 그런 회개의 자리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납니다. 치유가 일어나고 회복과 충만이 넘쳐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회개의 장소이어야만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받으시는 모든 분들께 회개의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6 min
  • 마태복음 2 : 13-23(심우진 목사님)
    마태복음 2 : 13-23(심우진 목사님)
    오늘의 본문은 헤롯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된후 자신의 왕권의 안전이 위험을 느낀다고 판단해 베들레헴과 그 지경안의 수많은 어린아이들을 살육하는것이 주 내용입니다.
    이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헤롯은 유대인을 대적하던 에돔족속이었던것이었습니다. 야곱의 형 에서가 붉은 피부로 인해 에돔이라는 이름을 얻어 이 족속의 조상이 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헤록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할 때 어찌 느꼈을지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에돔족속 헤롯이 미쳐 폭주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당신의 계획 안에서 온전히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계획은 예수님이 연약할 지라도 우리 주님의 육신의 부모가 미약할 지라도 온전하게 보호가 되시는것입니다.
    헤롯이 자신의 속임수에 동방박사들이 속지않고 자신에게 원하던 소식을 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미쳐날뛴것은 분명한 사탄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일은 이 때에만 있었던일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사탄마귀의 책동질은 일어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 속에는 여적전쟁의 형태로 드러나는것입니다.
    이 영적전쟁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법에 따른 올바른 생각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사탄의 꼭두각시로 부려먹으려는 사단의 수작과의 싸움입니다.
    우리에게 이 때 필요한것은 나를 괴롭히는 현실뒤에 누가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건의 뒤에 사단이 있는지 이 더러운 영의 계략인것인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적을 알아야 제대로 싸울 수 있습니다. 단순한 해프닝인지 아니면 정말로 영적 군장을 꾸려 제대로 싸워야할 영적인 대적이 있는지 우리는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단과 홀로 싸우는 듯 느껴져도 결국 이 모든것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극도로 교활한 존재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 이지만 이 것들조차 하나님의 섭리의 지배를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결국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 집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그 승리가 보장된 싸움인 것입니다.
    자 요셉이 마리아를 만난후 지금 까지의 그의 삶에는 어려운 고비들이 늘 있었습니다. 세상의 시선과 먼저 싸워야 했고 지금은 세상의 왕이 싸움을 걸어오는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과 싸워야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고비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지켜 내셨습니다. 털 끝하나 다치지 않도록 이끌어 주셨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환란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심과 아버지의 신실함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털 끝하나 다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기억할 것은 하나님 본인이셨던 아기 예수도 세상에서 고난의 길을 지나도록 하나님의 계획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안전하게 지키셨어도 애수님께서 안전한 곳으로만 지나지 않게하시고 목숨이 위태로운 위험의 현장을 직접 관통해 가시게 했다는것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다면 우리도 똑 같은 어려움을 감당할 때가 분명히 우리 인생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무셨던 갈릴리는 유대지방의 정말 촌이었습니다. 아무런 볼만한것이 없는 시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이야말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 갖춰져 있던 곳이었습니다. 어려움이 아니라 세상의 구석에서 잊혀진듯이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도 어쩌면 하나님의 복음전파계획의 중심에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보다 낫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인간의 계획보다 더 깊고 신비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전혀 차질이 없이 이끌고 나가시며 실현해 주십니다. 이 꼐획을 믿으심으로 어려움과 또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사역할 지라도 살아갈 지라도 하나님께는 중심이 되는 쉬한 자녀의 삶을 사는것임을 믿으시고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붇드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든 분들 되시기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 min
  • 마태 2:1-12(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 2:1-12(정인수 담임 목사님)
    새벽기도를 나올때마다 하늘을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아틀란타는 별이 많이 보이는 편이라 하늘에 있는 새벽별을 보면 경외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별은 인간의 역사를 지켜보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아프리카 케냐에 선교를 가서 마사이부족의 마을의 선교사님 댁에서 하루를 보내는데 하늘에서 별이 쏟아진다는 표현이 딱 맞을정도로 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뜨거운 감동을 느낀 기억이 납니다.
    그곳에서 별들은 지으신 분의 뜻을 따라 하늘에서 합창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이 모든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뜨겁게 온 심령으로 찬양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별을 쓰셔서 성탄과 소망의 증거로 사용하십니다. 동방의 별은 바로 성탄절의 상징이자 소망을 이야기 합니다. 별은 소망이고 기쁨과 소망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소망 곧 비전은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비전을 가지고 사는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비전이 없으면 일찍 늙습니다. 비전이 있으면 나이에 상관이 없이 소망과 기쁨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서는 방향을 말씀하실때 각기 다른 상징으로 사용하시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쪽은 환란을 나타내는 방향이고 남쪽은 은혜의 방향이며 동쪽은 소망과 비전을 나타내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을 나타내는 동쪽하늘의 별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크신 소망과 비전을 나타내는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불안속에 살아갑니다. 과학이 무섭게 발달했어도 현대의 철학과 문화는 허무와 절망을 이야기 합니다. 이 과학의 발달은 이미 인간의 윤리의식과 균형감각으로 감당이 안되는 수준으로 발전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이 기술을 가지고 어디로 갈지 종국에 이 기술이 인류를 해칠 수 도 있는 위험이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허무와 절망으로 표현되고 있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극도로 발달한 문영과 기술이 우리에게 주는것은 소망도 비전도 아닌 오히려 실존적인 불안입니다, 역설적으로 허무와 절망의 골이 기술의 발전으로 깊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슴 드리지만 오빅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런 허무와 절망으로부터 우리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 크신 소망은 오직 옛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그 큰 소망의 성탄으로의 발현을 광명한 새벽별로 표현 합니다. 계시록 22장 16절은 적기를: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오늘의 말씀에서 이 동장의 별은 인도하는 별로 나오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온것은 자신들의 생각으로 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태어 났다면 당연히 예루살렘에서 태어 났을것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판단으로 예루살렘에 와 헤롯을 만나게 되는 것 입니다.
    그제서야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박사들이 별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별을 따라가 이른곳이 바로 베들레헴의 마굿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천한 그곳에서 이들은 온 인류의 소망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것입니다. 결국 우리도 우리의 새벽별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인생의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살 수 있습니다. 다른길은 다 죽음과 자기 파괴의 파멸의 길입니다. 우리 주님은 허망한 말로 추상으로 우리를 이끌지 않으십니다. 구체적인 방향을 말씀과 기도를 통해 보여 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참신하고 발전적인 계획과 생각을 가능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벽의 기도를 통해 큐티를 통해 하나님께 나의 인생의 방향을 지도 받아야 합니다. 새벽기도 나오십시오 나오셔서 인생의 방향을 받아 가세요, 그런 영감의 지도가 없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가겠습니까?
    또한 동방의 별은 심판의 별입니다. 이 별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소망의 병 비전의 빛이었지만 헤롯에게는 이 별은 공포의 별이요 심판의 별이었습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을 속여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동방박사들은 여기에 속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수작이 먹히지 않자 불안해진 헤롯은 폭주를 하기 시작합니다. 극도의 공포감에 자기의 백성들을 학살하고 아기들까지 죽이는 광인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인생의 끝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파멸입니다 죽음 입니다.
    그러나 새벽별 되신 우리 주님을 쫓아가는 인생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곳에서도 온 우주의 영광과 생명되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만나게 됨을 밎으시기 바랍니다. 마굿간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쫓아가는 사람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심을 믿으시고 경험하시기를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께 그 구체적인 하나님의 경험이 충만 하시기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참고: 계명성은 새벽별(Morning Star)을 뜻하는 한자어이다. 한자의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새벽에 빛나는 별'이며, 순우리나라 말로는 '샛별'이 가장 적절하다. 금성이 새벽 하늘에 뜰 때 그것을 샛별, 또는 계명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계명성'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다른 문맥에서는 거의 씌이지 않고, 현대 한국어에서는 오직 그리스도교 성경에만 등장한다.
    계명성은 성경 이외의 문맥에서는 사용되는 일이 없으므로 성경 용어로 보는 것이 합당하고, 성경 안에서 본래 예수를 뜻하므로 계명성은 '예수를 상징하는 새벽 동쪽 하늘의 밝은 별'로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19 min
  • 마태복음 1 : 18-25(정인수 담임 목사님)
    마태복음 1 : 18-25(정인수 담임 목사님)
    요즘 New Age 운동이라는것이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합니다. 이유는 이 돈정녀를 통한 예수님의 탄생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누가가 기록한 바와 같이 역사적 사실이며 이 사실이 우리의 구원의 조건과 직결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를 사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한것은 흠없는 구원자입니다. 죄있는 자가 다른 죄인을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흠없고 죄없는 구원자라야 우리의 죄사함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없는자라야 우리의 죄를 사할 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같이 우리 주변에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제한을 두고 하나님을 이해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희안하게도 이들은 시험관아기와 같이 윤리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일들엔 환호하고 믿으면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심에는 극도로 부정적인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과학의 시작도 하나님이 만든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된것이고 많은 신학자들은 과학자이였기도 합니다. 그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백세때 이삭을 주셨고 태가 마른 한나에게 사무엘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신비의 역사가 기독교에서는 일어납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님께 불가능한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은 불완전한 인간중에 순종하는 자들을 들어 쓰시길 즐겨 하십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경우에도 생각해 보면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때 얼마나 황망했겠습니까? 결혼도 하기전에 임신한 약혼녀 마리아와 마리아가 전했을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말이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그러나 요셉은 성경이 적고 있는대로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율법으로 마리아를 정죄하겠다고 난리를 부리지 않고 조용히 마리아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파혼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의 이야기를 전했을때 인간으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신비임에도 요셉은 전해지는 말씀에 순종을 하고야 맙니다. 마리아의 남편이 되고 아기 예수의 양육을 책임지는 아버지의 역활을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순종의 사람들을 통해 또 하나님의 신비를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이미 말씀하신 당신의 계획들 즉 하나님의 예언들을 하나하나 빠짐이 없이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결국 한나님의 모든 말씀은 성취되기 위한 계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지키면 좋은 윤리와도 다르고 아마 이렇게 될것이라는 예측과도 다른 실제로 이루어질 예정의 말씀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기 위한 말씀임을 믿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믿음이란 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것입니다.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하신 역사와 계획하심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우리의 구원을 믿을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께서 자기의 머리로 믿는 이성의 한계를 넘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 min
  • 마태복음 1:1-17(조재욱 목사님)
    마태복음1:1-1(조재욱 목사님)
    사도 마태가 적는 예수님의 족보로 마태복음은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중시하는 히브리 문화와도 통하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았다는 선민사상이 굉장히 강하였고 그런 선민의식이 혈통과 족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로 이어졌습니다.
    마태 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씌여졌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에게 익숙한 족보이야기로 복음을 시작하는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의 복음은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14대 아브라함에서 바벨론유수까지 14대 바벨론유수에서 예수그리스도까지 14대 이렇게 우리 주님의 족보를 나누고 있습니다.
    사도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할때 몇몇의 이름을 누락 시키기도 했는데 이것은 마태의 실수라기보다는 이러므로 족보를 통해 저자가 전할 메세지를 강조하는 유대인 특유의 표현방법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족보를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보면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경륜을 보실 수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을때 그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실것이라는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계속 자식을 볼 기미도 보이지 않자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하나님을 의지하는것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깬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하나님꼐서 13년이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99세일때 아브라함앞에 나타 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앞에서 행하여 온전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왜 나와의 언약을 깼느냐? 왜 나를 순종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씀 하시는 질책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의 언약을 깬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하는데 그 죽음을 할례로 대신해 주신것입니다. 말씀은 아브라함이 죽은것같이 되었을때 이삭을 얻었음을 적고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이 죽은것 같다, 곧 죽었다고 적고 있는것입니다. 할례로 죽은자 되었을때 하나님께서 할례를 통해 육을 죽이시고 영을 살리셨을때 이삭을 얻었다는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할례로 언약의 족보가 이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것입니다.
    하나님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하나님과의 언약도 깨버리는 연약한 인간인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 온 민족의 구원을 이루시는 우리주 그리스도를 보내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어찌보면 아브라함보다도 더 주의해서 볼 만한 인물들이, 많은 여성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다말이고, 룻이고, 라합이고 밧세바입니다 이들은 창녀요 이방여인이요 간음한 여자들이었습니다. 연약하기 이를때 없고 불완전하기 이를데없는 사람들인것입니다.
    왜 이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갔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죄인임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죄인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죄인이었습니다. 그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메시아,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것이라는것의 예표인것입니다.
    또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는 차별이 없고, 또 불가능이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창기 라합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셔야만 이 더러운 죄인인 나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이시라는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이셔야만 더러운 이방 죄인인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의사의 실수로 맹인이 된 유명한 시인이자 찬송가 작사가인 크로스비여사는 자신의 눈이 치유를 받을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기 싫다라고 적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사께서 천국에서 눈을 떴을 때 첫번째로 보길 원하는 것이 세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주님,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는 사랑의 신앙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구원의 경륜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은 이렇게도 깊은 주님사랑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우리를 죄인된 우리를 더러운 우리의 인생을 구원할 이 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며 그 크신 사랑의 경륜은 오늘 한때 세리였던 마태의 복음의 시작에 적힌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며 오늘 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시는 모두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6 min
  • 고린도전서 14:13-15, 에베소서 6:18 (정인수 담임 목사님)
    고린도전서 14:13-15, 에베소서 6:18 (정인수 담임 목사님)
    오늘은 먼저 중보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설교를 하겠습니다. 우리 브라이언 민 수년간 전신 마비로 누워있던 이 아들이 이번에 해피버스데이 투유 맘이라고 입을 떼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직 분명한 언어는 아니지만 이 아들이 입을 띤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오늘 말씀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능력있는 기도를 하기 원합니다. 능력있는 기도는 오직 성령님과의 관계를 깨달을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면 성령님께서는 놀라운 기도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고 친밀하게 만들어 줍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통로를 통해 성령님께서 내 뜻을 하늘로 전하는것뿐 아니라 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숨 쉬지 않고 살 수 있기를 기대하는것이 어리석은것과 같이 기도를 포기하고 영적으로 살기를 기대하는것이 얼마나 헛된 일이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것은 살아있기를 포기하는것 입니다.
    또 기도하지 않으면 죄된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하면 완벽한 기도의 선생님 되시는 성령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불완전하고 죄인된 존재인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앞에 닿을만 한 것이겠습니까? 가당치도 않은일입니다 오직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통역을 통해 전해 주시지 않으면 기도가 열납되는것은 불가능함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령 하나님 안에서 하느것입니다. 표현조차 어려운 나의 감정과 사정을 성령하나님께서 직접 나의 대변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정확하게 전달해 주심을 깨달으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도 모르는 나의 아픔과 고통을 성령께서 아시고 전하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때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해야합니다. 소리내어 부르짖어 기도할 때 나를 벗어버리고 해야 할 기도를 하게되는것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적인 기도에서는 꼭 부르짖어 기도하는 습관이 들어야 합니다. 이 부르짖는 기도는 또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기도입니다. 소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악을 궤멸하는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을 이스라엘 백성이 공격할 때 무엇으로 공격했습니까? 소리입니다 목소리 높여 고함을 치니 성이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이와같이 부르짖는 기도에 악한 영을 물리치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방언으로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방언을 통해 은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막힌것을 뚫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막힐때 방언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의 문이 뚫립니다. 영이 눌릴때 방언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기도 한다고 진땀을 흘리며 기도했는데 삼분을 넘지 못하십니까? 방언으로 그 한계를 넘을 수 있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과의 Direct Communication 입니다 다만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에게 덕을 세우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방언으로 교만한 성도가 있을 때 교회에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예언을 더 강조하시기도 했씁니다.
    예언은 미래의 일을 점치는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교회에 밝히는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게 하시는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언으로 드러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을 통해 우리 영의 깊은 탄식을 해소하게 됩니다. 우리 양혼의 병을 치유 받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의 질서를 위해 방언을 절제할 줄 도 알아야겠습니다. 사도 바울같은 과격한 성령파 사도도 그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질서있게 하는 방언을 강조하시고 또 일만마디 방언보다 다섯마디 예언을 낫다고 하신것입니다.
    방언에는 신비가 있습니다. 영적인 기도에는 신비가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새 해에는 더욱더 싶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 하나님의 진리를 살아내는 모두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5 min
  • 사도행전 2:38, 5:32, 19:1-7 (정인수 담임 목사님)
    사도행전 2:38, 5:32, 19:1-7 (정인수 담임 목사님)
    인생의 한계를 뛰어 넘는것도 교회의 영적 성장의 한계를 뛰어 넘는것도 다 성령의 은혜로 하는것입니다.
    어제 우리교회의 성도인 잔-리 집사님의 집을 심방을 했습니다 이 분이 요근래 교통사고로 어려움을 겪으시고 회복이 됐는데 간증을 하셨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성실하게 인생을 살아 왔는데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꼭 치유 받을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무엇보다 교회가 과연 무엇인가 깨닫게 하셨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 모든것이 다 하나님 은혜임을 고백하는 집사님을 보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비콕스라는 세계적인 신학자가 있는데 이분은 원래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나주 지적인 신학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분도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복음주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 분이 쓰신 책이 Fire from Heave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책은 솨연 어떤 교회가 영적인 영향력을 현대 사회에 미치고 있는냐는 것이었고 이 책을 위해 본인이 직접 전세계의 많은 교회를 돌아다였습니다.
    결론은 성령 충만한 교회만이 아직도 남아있고 능력을 발휘하는 교회더라는 것이 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성령의 엔진을 달아야 교회던 인생이던 아를 솎아매는 두려움과 한계를 뛰어넘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이후 교회가 실제적으로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교회의 성도들은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목숨을 걸고서 예수는 그리스도를 외치며 노방에서 시장에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 입니다. 그 후의 하나님의 역사는 사도행전에 오롯이 적혀 있지 않습니까? 이 것이 성령 충만한 교회의 능력입니다.
    반대로 제도적인 교회 율법적인 교회는 능력이 있을 수 가 없습니다. 신학교에서 말하는대로 말씀을 쪼개고 분석하고 그대로 성경을 공부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실지로 전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것은 지식적이고 혼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인격이신 삼위중 한 분이신 하나님의 실체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매직파워가 아닙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로 인해 우리에게 허락된 은혜의 산물입니다. 이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연합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 스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성령의 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성령은 전적인 십자가 보혈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사모하는것은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사모하는것과 같은 것 입니다. 그러므로 성려은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사모하는 모든 자녀들이 받아야하는 필수불가결의 과정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성령하나님을 깔보고 경원시하는 나쁜 태도는 회개의 대상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성령의 내적 충만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순간 분터 우리안에 내주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속사람을 바꾸기 시작 하십니다. 언어와 행동이 인격이 바뀌기 시작하는 성회의 과정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내적 충만입니다.
    성령의 외적 충만은 위로부터 오는 충만이며 오순절 성령강림의 충만이며 불같은 능력의 은혜입니다. 이 성력의 외적 충만의 능력은 아라들까지도 바꾸어 버리는 어마어마한 능력의 충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이 받아야하는 성령의 충만인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겅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조건들이 만족되야 합니다.
    먼저 남의 마음이 성령님께 열려야 합니다. 낮은 마음 파산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기 원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충만해져서 혈기를 부리는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이 있겠습니까? 혈기는 악령을 부르고 성령을 소멸하는 행위인것입니다.
    또 성령의 역사가 강력히 일어나는 회중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성령의 강림은 교회 성도의 합심기도가운데 일어난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성령은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임하십니다. 자아가 강해 생명의 말씀을 받아 드리잊 않는자들에게는 성령의 충만이 있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안수할 때 성령의 역사가 드러 났습니다. 바울이 안수할 때 성령의 역사가 늘 일어낭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러나 무엇보자도 회개의 분량이 차야 합니다. 회개는 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는것은 성령충만의 지름길이며 필수의 조건입니다. 내 안의 죄를 씻을 때에만 성령 하나님의 충만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것에 임함에 있어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합니다. 자기 생각을 꺾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하나님 노릇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성령의 충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치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이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께 엎드려 순종하여 성령의 외적 내적 충만을 받으시는 귀한 역사에 동참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0 min
  • 요한 1서 2:20,27, 스가랴 4:6 (정인수 담임 목사님)
    요한 1서 2:20,27, 스가랴 4:6 (정인수 담임 목사님)
    성도의 삶에는 확실히 진리가 체험되는 능력의 현장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다메섹 노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 체험이 바울의 모든것, 정체성 까지도 결정짓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것은 체험이 없을 때 능력이 없는 단순한 종교인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구의 이성위주의 기독교는 점점 쇠퇴하고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능력위주의 사역을 하는 교회들은 점점 성장하는것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는 오직 성령의 충만함이 문제해결의 열쇠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에 동반되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지는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성도의 사역과 문제가 해결되어진다는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신실해 보이는 성도조차도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하는데 자기 자신의 기름을 태우는 열매없는 삶을 삽니다. 인간적인 분투로는 하나님의 역사도 드러나지 않고 부흥은 더더욱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스스로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다이나믹을 우리의 삶안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원어로 보면 기름 부은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꼐서 기름부으심을 받으셨다면 우리 믿는자에게 기름 부으심은 필수지 옵션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름 부으심의 뜻을 잘 알아야겠습니다. 먼저 기름 부으심은 거룩하게되어 구별하는것을 말합니다. 또 신적인 위임을 받을때 기름이 부어 집니다 왕이나 제사장을 세울때 기름부으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신적사역위에 능력을 부어주는 능력을 부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직 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만 우리 성도가 그리스도를 통해 왕노릇하는 자로써 거룩하게 구별되고 능력이 드러나게 되고 사역을 감당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성경을 보면 에수님 자신이 성령을 주시기도 하지만 또 직접 성령의 충만을 받아 사역하시는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성령충만하는일에 소흘히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도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사역하셨습니다.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현대에는 너무나 눌린 영혼이 많고 이것이 중독으로 드러납니다.이 사회는 이미 중독의 사회입니다. 이렇게 중독의 기운이 넘쳐나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습니다. 중독은 분명히 악한 영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이 중독을 치유하려면 사람의 힘으로 되겠습니까?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할 것임을 깨달으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기름 부으심은 성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야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기름 부으심을 위해서는 적어도 두가지를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데 하나는 거룩의 추구요 하나는 용서하는것과 용서받는것의 추구 입니다.
    먼저 더러운것에서 내 생각과 몸이 떠나야 하고 나자신이 용서하는 사람 또 용서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늘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데 기름부음이 있을거란 기대는 애초에 버리십시오. 자신의 삶을 쪼개서 또 자기의 소유를 쪼개서 드리는 제사가 없을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도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역사가 나타나길 축원합니다.
    29 min
  • 이사야 44:3-5, 요한복음 7:37-39 (정인수 담임 목사님)
    이사야 44:3-5, 요한복음 7:37-39 (정인수 담임 목사님)
    인생에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좋은일도 나쁜일도 기쁘고 슬픈일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할때 우리는 이 일들을 겪어가면서 어떻게 이 문제 사이에서 상처받지 않을까 그런 수준에서 전전 긍긍 하며 살았습니다.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나면 이런 약한 마음이 어떻게 나의 이 어려움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드러날까로 바뀌게 됩니다.
    문제는 사탄이 우리가 겪는 고통을 통해 우리를 속여 우리의 마음을 뺏으려 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전쟁터 입니다 더러운 존재 사탄은 이 마음을 빼앗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혈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왜 마음이 중요합니까? 이 마음안에 믿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이 마음을 빼앗아 허수아비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이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그럴때에만 우리가 직면하고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본질적인 해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오직 하나님께서만 우리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7:37-39에서 나온것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열면 우리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나옵니다. 이 배라는 말에는 원어에는 마음, 심장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믿는자는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생수의 강 성령이 터져 나와야 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이러지 않고 나의 힘으로 모든것을 감당하려고 몸부림을 치는것은 내 안의 생수의 강이 막혔다는 증거입니다.
    이럴때 우리는 영혼의 기갈을 경험하는데 이 기갈은 성령 하나님을 사모하는것으로 이해 하셔야합니다. 내 심령이 답답하고 뭔가가 채워져야 할 것을 알게됩니다. 그럴때 성령 하나님으로 내 심령을 채워야 합니다. 성령은 물과 같이 부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위로부터 부어지는 은혜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부어질때 이 기갈은 물론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약속이며 우리가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모든 마음의 고통은 성령 하나님의 채워짐으로만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헛된 세상에서 위로함을 찾으려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세상이 여러모에서 교회와 비슷하거나 교회 보다 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든 맥도널드라는 영성학자의 지적은 이렇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좋은것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먹이고 또 집을 지어주는것 같은것들을 할 수는 있어도 은혜는 오직 교회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은 오직 교회에서만 하나님의 은혜로만 터져 나오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게 이런 영적 기갈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왜 유일한 해결이신 하나님을 그럼에도 멀리할까요? 그것은 생수의 강을 갈망하는 영적 기갈 속에 있으면서도 이것을 느낄수 없는 죽음과도 같은 영적인 무감각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오직 은혜로만 받을 수 있는 이 생수의 강을 받을수 있는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수의 강이 터지는 은혜는 마음의 밭이 경작된 사람에게만 임하십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은혜는 엉겅퀴속에 떨어진 씨앗이고, 길가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밭은 오직 말씀과 기도와 묵상으로 매일매일을 채워갈 때에만 갈려질 수 있습니다. 그럴때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는 은혜를 사모하는 만큼만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 은혜를 사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함이 이 은혜를 크게 받는 비결입니다.
    진짜 문제는 이 모든것 은혜를 넘치게 주시겠다는것이 약속으로 주어졌음에도 현대인들이 은혜를 구하지 않는것이 문제입니다. 힘들게 살 때는 은혜를 구하더니 배가 차고 살 만해진 오늘이 되니 은혜를 옵션쯤으로 생각하고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이유는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은혜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만 되는 존재 들입니다.
    오늘 이 메세지를 들으시는 모든 분들께 은혜를 사모함과 그 은혜의 성령으로의 부어짐이 넘쳐나시기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0 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