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미국 이야기 - Voice of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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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 미국 이야기 - Voice of America episodes

  • [구석 구석 미국이야기] 버지니아 위구르 학교...200주년 맞은 국립식물원
    미국 곳곳의 다양한 모습과 진솔한 미국인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구석구석 미국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는 주말마다 특별한 학교들이 많이 열립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자녀들에게 모국어와 전통문화 등을 전수하기 위해 일요일 한국 학교, 중국 학교  이런 식으로 주말 학교를 여는 건데요. 워싱턴 D.C. 에서 멀지 않은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서는 일요일 위구르 학교가 열리고 있습니다. 위구르족은 중국 신장 자치구에 살고 있는 소수 민족인데요. 중국 당국이 위구르족을 강제 수용소에 가둬 이슬람 문화와 언어를 말살하려 한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죠. 과연 미국에 있는 위구르 학교는 어떤 분위기일까요?  
    “첫 번째 이야기, 버지니아에서 배우는 위구르 문화와 언어, 위구르 학교” 
    버지니아 페어팩스에 있는 ‘애나케어(Ana Care and Education)’ 학원은 일요일에도 아침부터 학생들로 북적입니다. 매주 일요일 위구르족의 문화와 언어를 집중적으로 배우는 ‘일요 위구르 학교’ 프로그램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미국 최초의 위구르 학교이기도 한 페어팩스 일요일 위구르 학교에선 위구르어 수업 외에 전통춤 수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서리야 카시개리 씨는 이 학교의 공동 설립자이자 교장입니다.  
    “우리 일요 위구르 학교에서는 현재 총 8명의 교사가 80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생 수는 학기마다 조금씩 다른데요. 많을 때는 100명 가까이 되기도 하고 적을 때는 70명 정도 되기도 하고요. 보통 100명 안 선을 유지합니다.” 
    카시개리 교장은 1999년에 미국에 왔습니다. 미국에서 열심히 일하며 돈을 모은 카시개리 교장은 2017년, 딸과 함께 위구르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학교를 열었습니다. 중국 당국이 신장 자치구 위구르족을 탄압하는 가운데 위구르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고 하네요. 
    “중국 당국은 위구르 책과 교재를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위구르어를 전혀 가르치지 못 하게 했고요. 학교에선 중국어 수업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은 학교뿐 아니라 위구르 인들이 아예 위구르어를 사용하지 못 하도록 한다고 해요. 현지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닙니다. 우리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거의 다 잃어버리게 됐어요.” 
    일요 위구르 학교에서는 위구르어를 초급, 중급, 고급 이렇게 3단계로 나눠 가르치는데요. 투마리스 알마스 씨는 고급 위구르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신장 지구에서 위구르어 말살 정책을 펴면서 우리 고유의 언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잖아요. 따라서 우리 학교는 위구르 후손들이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계승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 의미 있는 일에 동참하고자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초급반에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이 대부분인 반면, 고급반에는 중고등학생이 대다수를 차지했는데요. 이들 고급반 학생들은 수업을 통해 단순히 언어만 배우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언어를 배우면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지만, 후손들에게 전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학생도 있었고요. 언어뿐 아니라 이슬람 수업도 함께 듣는다는 이 학생은 종교를 배움으로 인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 또 어머니가 쓰시는 언어와 어머니의 뿌리에 대해 더 알기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카시개리 교장은 학생들의 말처럼 자신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문화를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서리야 카시개리]  “위구르족 문화의 중심은 춤과 노래에 있습니다. 어느 민족이든, 또 어떤 사회든 여성은 어릴 때부터 춤을 배우고 남성들은 노래나 악기를 배우기 마련이죠. 문화를 계승하기 위해서요. 우리 학교에서도 노래와 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르칩니다.” 
    ‘위구르 인권 프로젝트’라는 국제 인권단체의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중국 신장 지방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방식으로 위구르 출신 미국인들을 협박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카시개리 교장은 위구르 학교의 문을 연 이후, 고향의 형제자매들과 연락이 끊겼다고 했습니다.  
    [녹취: 서리야 카시개리] “네, 저도 두렵습니다. 걱정도 되고요. 항상 모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 생각을 해요. 하지만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위구르 학교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운영할 겁니다.” 
    카시개리 교장은 몸은 비록 미국에 와 있지만, 자신의 뿌리인 위구르의 전통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200주년 맞은 국립식물원”   
    워싱턴 D.C.에는 도심 속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의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보태닉가든(U.S. Botanic Garden), 즉 국립식물원인데요. 1820년 미 연방 의회가 세운 국립식물원이 올해로 200주년을 맞았습니다. 
    북미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원답게, 국립식물원엔 꽃과 나무 그리고 역사가 살아 숨 쉽니다. 들어가는 순간,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 국립식물원은 워싱턴 D.C.의 바쁜 직장인들에겐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녹취: 애나 파브로바] “마치 도시 속의 숲속에 온 듯한 기분이에요. 단 5분이라도 복잡한 일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어 정말 좋습니다.” 
    의회 건물 바로 옆이자, 역사적인 건물들이 모여있는 내셔널몰에 자리 잡고 있는 국립식물원엔 온실과 야외 정원에서 총 6만5천여 식물이 자라고 있는데요. 무려 165년 이상 된 것도 있습니다.  
    실내 온실에는 식물의 특징에 따라 온도와 습도 등 환경을 달리한 여러 방으로 구성돼 있는데요. 지난 200년간, 국립식물원은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식물들의 가치를 알려주고 있다고 사하라 문 차포틴 국립식물원장은 설명했습니다.  
    [녹취: 사하라 문 차포틴] “우리 식물원은 사람들에게 식물의 중요성에 대해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농촌 경험이 없고 우리가 먹는 식물이 어디서 온 것인지 잘 모르는 도시인들에겐 더없이 좋은 학습의 공간이 되고 있어요.” 
    국립식물원에서 가장 사랑받는 전시 가운데 하나는 전 세계에서 온 4천여 점에 달하는 난초 특별전입니다. 매년 봄, 난초 전시 기간이 되면 꽃봉오리를 터뜨린 난초들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는데요. 이 중에는 멸종 위기에 처한 것들도 있습니다.  
    또 매년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식물성 재료로 만들 건축 모형들 사이로 장난감 기차가 다니는 크리스마스 특별 전시가 열리는데요. 아이들이 가장 많이 찾고 좋아하는 전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200주년을 맞아 “깊은 뿌리, 뻗어가는 가지”라는 제목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200주년 전시관에서는 1830년대 미국 정부가 보낸 탐사 원정대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 원정대가 수집해 돌아온 식물 표본들은 초기 국립식물원의 토대가 됐고, 일부는 아직도 남아 전시되고 있습니다. 
    샤포틴 원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방문객들이 이런 경험을 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요. 
    [녹취: 사하라 문 차포틴] “이번 전시를 통해 식물들을 감상하고, 새로운 식물을 발견하며, 식물들이 우리 일상의 삶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를 방문객들이 배우고 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국립식물원은 1년 내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데요. 200년간 미국인의 큰 사랑을 받으며 매년 100만 명 이상이 찾고 있는 국립식물원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귀중한 선물이 되고 있습니다.   
     
    11 min
  • [구석구석 미국 이야기] 로드아일랜드의 인정 넘치는 판사...인터넷 중독 탈출 '디지털 웰니스'
     미국 곳곳의 다양한 모습과 진솔한 미국인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구석구석 미국 이야기, 김현숙입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나 법정이라고 하면 권위적이고 딱딱한 분위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나무로 된 방청석엔 긴장된 얼굴로 사람들이 앉아 있고, 법복을 입은 판사는 근엄한 모습으로 판결을 내리죠. 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총을 찬 경찰이 상주하고 있기도 한데요. 미국 동부 로드아일랜드주의 주도인 프로비던스 지방 법원엔 인간적이고도 공정한 판결로 법정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판사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 법정에 뭉클한 감동을 안기는 인정 넘치는 판사”
    [현장음: 프로비던스 법원]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 지방법원의 한 재판정. 이날 재판을 주재하는 사람은 오늘의 주인공인 프랭크 카프리오 판사인데요. 카프리오 판사 앞에 한 여성이 재판을 받으러 나옵니다. 
    [현장음: 교통 범칙금 재판 현장]
    불법주차로 4장의 주차위반 딱지를 받은 이 여성.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정을 묻는 판사의 말에 울먹이며 설명을 시작합니다. 
    [현장음: 교통 범칙금 재판 현장]
    최근 세상을 떠난 아들이 진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처지가 돼 관공서를 들렀다가 주차 딱지를 받았다는 여성은 끝내 눈물을 터뜨리고 마는데요. 
    측은한 표정으로 이 여성과 대화를 주고받던 카프리오 판사는 벌금을 탕감해 준다고 말하며,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길 바란다고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 광경은 카프리오 판사의 법정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인데요. 카프리오 판사는 범칙금 부과 판결처럼 경범죄 재판에서도 늘 피고인 입장을 세심하게 듣고는 자비로운 판결을 내린다고 합니다. 
    [녹취: 프랭크 카프리오] “제가 판사석에 앉은 세월이 30년인데요. 25년간 저의 재판과정이 로드아일랜드 지역 텔레비전으로 방송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의 판결을 보고는 사람들이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했어요. “판사님, 지금처럼 관용과 연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주세요.” 이렇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고요. “이 돈을 다른 사람을 돕는데 써주세요.” 이러면서 돈을 동봉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카프리오 판사의 판결이 인터넷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가면서, 카프리오 판사의 법정은 미 전역에 알려졌습니다. 
    [녹취: 프랭크 카프리오] “오늘 받은 편지를 한번 보여드릴까요? 이 여성은 직장에서 보너스를 조금 받았다며, 100달러를 현금으로 보내왔네요. 사정이 어려운 사람의 범칙금을 대신 내달라고 하면서요.”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사정을 봐주다 보니 카프리오 판사가 탕감해주는 범칙금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보내오는 후원금으로 지역 당국은 세수를 채운다고 하네요.
    [녹취: 프랭크 카프리오] “중동의 이라크에서도 편지가 오고요.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러시아 등 전 세계에서 후원금이 답지합니다. 사람들의 온정이 느껴지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큰 감동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후원이 단 1달러도 아쉬운 사람들에겐 큰 힘이 된다고 카프리오 판사는 설명했습니다. 
    [녹취: 프랭크 카프리오] “저희 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정말 가난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늘 사랑이 넘쳤습니다. 아버지는 또 우리 자녀들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기대하셨는데요. 저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성공의 사다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제가 성공했다고 해서 다가 아니죠. 이 사다리를 다시 내려서 다른 사람이 또 이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장음: 재판 현장]
    카프리오 판사는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려주기도 하지만, 다시는 법 위반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도 잊지 않습니다. 또 법정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늘 행운을 빈다고,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란다고 격려하는데요. 카프리오 판사의 인정 넘치는 판결 덕에 프로비던스 법정은 사람들이 새로운 용기를 얻는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인터넷 중독에서 탈출하는 ‘디지털 웰니스’ 운동”  
    인터넷과 똑똑한 손전화,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요즘은 인터넷이 없으면 일상생활을 이어가지 못하는 인터넷 중독 현상을 겪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손전화 하나로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소셜미디어 활동도 하다 보니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손전화를 들여다보게 되고요. 따라서 인터넷이 없으면 사람들이 이제 불안감을 느끼는 건데요. 인터넷 중독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손전화를 잠시 손에서 내려놓는, 그러니까 디지털 세상과 잠시 떨어져 있도록 돕는 디지털 웰빙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녹취: 니나 허셔] “우리는 지금 ‘관심 경제’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 시대, 사람의 관심이 가장 주요한 재화가 되면서 대중의 관심을 얻는 자가 승자가 되는 시대가 된 겁니다.”
    니나 허셔 씨는 사회복지사이자 ‘디지털 웰니스 콜렉티브(Digital Wellness Collective)’의 최고경영자(CEO)인데요.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신체적으로 가장 유익한 기술의 사용을 찾는, 이른바 디지털 웰니스를 추구하는 단체들의 연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허셔 씨가 디지털 웰빙 운동을 시작하게 된 데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말을 더듬었던 허셔 씨는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눈을 맞추는 것이 매우 중요했는데 어느 순간 이게 어려워졌다고 했습니다. 
    [녹취: 니나 허셔]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맞추고 의사소통을 하기보다는 손전화 화면을 내려다보며 대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손전화를 통한 문자가 주요 대화 수단이 된 거죠. 이런 사회적 현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소명이 됐습니다.” 
    ‘디지털 웰니스 콜렉티브’에 소속돼 있는 ‘아메리카 오프라인(America Offline)’이란 단체는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손전화 없이 생활하는 캠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농구팀 코치가 시작한 프로그램이라고 하는데요. 아이들이 손전화만 들여다보면서 팀원 간의 단합이 약해지는 걸 보며 캠프를 시작했다고 하네요. 
    과도한 손전화 사용으로 신조어도 많이 생겼습니다. 손전화 없이는 불안감을 느끼는 ‘노모포비아(Nomophobia)’라는 단어가 생겼고, 디지털기기를 장시간 사용하느라 고개가 45도 정도 기울어지면서 나타나는 ‘테크넥(Tech Neck)’, 일명 거북목을 갖게 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임상심리학 전문대학원, 라이트 인스티튜트(Wright Institute)의 아나타시아 킴 교수는 우려되는 점이 또 있다고 했습니다.  
    [녹취: 아나타시아 킴]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들에게까지 손전화는 이제 신체의 부속 기관이 됐습니다.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분비가 인터넷 소셜미디어 상의 사람들 반응에 좌우된다면, 건강에 매우 해로울 수 있습니다.”
    과도한 인터넷 사용에 따른 부작용이 알려지면서 디지털 해독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는데요. 크리스틴 그레이서 씨도 그중 한 명입니다. 
    [녹취: 크리스틴 그레이서]
    “갓 태어난 아기를 수유하면서 한 손으로 손전화를 쳐다보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순간 아기 얼굴이 보이면서 ‘내가 왜 지금 손전화를 보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손전화 사용을 최대한 줄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디지털 웰니스 콜렉티브'의 허셔 씨는 현대인이 인터넷을 완전히 끊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본인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인터넷 기기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찾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구석구석 미국 이야기' 다음 주에는 미국의 또 다른 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와 함께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11 min
  • [구석구석 미국 이야기] 루이지애나의 베트남 보트피플...전역 군인들이 재기를 꿈꾸는 카페
    미국 곳곳의 다양한 모습과 진솔한 미국인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구석구석 미국 이야기입니다. 1970년대, 4백만 명이 넘는 베트남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베트남에 들어선 공산정권을 피해 배를 타고 조국을 떠난 난민들, 일명 보트피플들이 갖은 고생 끝에 미국에까지 도달했던 건데요. 당시 대부분이 미 서부 해안에 정착했지만, 텍사스주와 루이지애나 등 남부지역에 정착한 인구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미 남부 멕시코만 지역에 자리 잡은 많은 베트남 이민자들은 새우잡이 어선을 타거나 수산물 가공 일에 뛰어들었는데요. 빈손으로 미국에 와 새우 처리 사업으로 성공을 이룬 보트 피플을 만나보죠. 
    “첫 번째 이야기, 새우잡이 어선으로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베트남 보트피플”
    걸프만을 끼고 있는 루이지애나는 수산업으로 유명합니다. 새우를 한가득 실어 온 새우잡이 어선이 선착장에 닿으면 곧장 처리 시설로 이동하는데요. 이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한 여성, 바로 베트남 보트피플 출신인 테레사 누엔 씨입니다. 
    [녹취: 테레사 누엔] “저는 새우 잡이 어선이 들어오면 새우를 구입합니다. 그리곤 선 처리 과정을 거친 후에 대형 새우 가공 업체로 납품합니다.”
    누엔 씨는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 본인 소유의 새우 처리 시설을 연 첫 번째 베트남계 이민자입니다. 
    [녹취: 테레사 누엔] “저는 주말에는 무척 바쁩니다. 주중엔 좀 여유가 있어요. 아무래도 새우잡이 어선들이 출하를 덜 하거든요.”
    작고 다부진 체격에 화려한 화장, 당찬 걸음걸이와 말투를 가진 누엔 씨는 70대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인데요. 지난 20년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새우와 굴을 만지며 보냈다고 합니다.
    [녹취: 테레사 누엔]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전처럼 그렇게 일은 못 하고 있어요. 이전엔 정말 한시도 쉬지 않고 일했답니다.”
    누엔 씨의 특별한 인생 여정은 1975년에 시작됐습니다. 당시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베트남은 공산정권하에 들어가게 됐고 월남인들은 자유를 찾아, 보트를 구해 조국을 떠나게 되는데요. 테레사 씨 역시 1979년 남편과 5자녀를 데리고 베트남을 탈출했습니다. 
    [녹취: 테레사 누엔] “배를 타고 오면서 고생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배가 베트남을 떠난 지 닷새 만에 해적의 공격을 받았어요. 해적들은 배에 탄 난민들을 상대로 강도질과 강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누엔 씨가 탄 배는 말레이시아 국적 어선에 구조됐고 누엔 씨는 미국까지 올 수 있게 됐는데요. 텍사스를 거쳐 루이지애나에 자리 잡았습니다. 
    [녹취: 테레사 누엔]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길거리에서 새우를 팔았습니다. 제일 어린 자식을 옆에 앉혀두고서요. 2파운드, 3파운드, 이렇게 조금씩 팔았죠. 뉴올리언스를 돌아다니며 일종의 새우 행상을 했어요. 낡은 차는 뒷좌석도 없어서 조수석에다 어린 아들을 앉히곤 장사를 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며 돈을 모은 누엔 씨는 곧 문을 닫을 처지에 있던 수산물 처리 시설을 인수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사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녹취: 테레사 누엔] “처음 한 2년 동안, 지역의 어부들이 저와 거래를 하지 않았습니다. 수산물이 조금 잡힌 날이나 우리 공장에 와서 팔려고 했지, 수확이 좋은 날은 다른 공장을 찾았어요.”
    다행히 사업 규모는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강도를 만나기도 했고, 대형 자연재해에 모든 것을 잃기도 했습니다. 
    [녹취: 테레사 누엔] “지난 2005년에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 남부를 휩쓸었죠. 당시에 카트리나는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도 사업체를 완전히 다 잃었습니다.”
    하지만 누엔 씨는 오뚝이처럼 일어서도 또 일어서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70대가 된 지금까지 넘치는 열정으로 새우 처리 시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녹취: 테레사 누엔] “71살이 됐으니까 이제 은퇴할 때도 됐죠. 하지만 하늘이 허락하는 한 저는 계속 일을 할 겁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요.”
    사람들의 편견도, 자연재해도 누엔 씨의 꿈과 열정만큼은 꺾을 수 없는데요. 배를 타고 미국에 온 보트피플 출신 난민은 미국 멕시코만에서 새우잡이 어선을 통해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어 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전역 군인들이 재기를 꿈꾸는 카페”  
    ‘음식은 사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성 들여 요리한 음식에는 그 음식을 먹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아끼는 마음이 들어가기 마련이죠. 그런데 워싱턴 DC에는 전역 군인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내는 카페가 있습니다.  
    향긋한 커피 향과 각종 빵과 케이크로 가득한 이곳은 ‘도그태그 베이커리’입니다. 도그태그란 말 그대로 풀이하면 개목걸이인데요. 미군이 목에 걸고 다니는 인식표, 즉 군번줄을 도그태그라고 부르곤 하죠. 상호에서 알 수 있듯 이 카페는 일반적으로 커피와 빵을 파는 카페와는 조금 다른, 특별한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녹취: 매건 오길비] “우리 카페는 일종의 생활 경영 학교입니다. 전역 군인들과 군 복무 중 장애를 입은 상이군인, 군인의 배우자, 또 군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모여서 소규모 사업과 기업가의 정신 등에 대해 배웁니다. 참가자들은 주 4일, 6시간씩 5개월간 수업을 들어요.”
    도그태그 베이커리의 최고경영자(CEO)인 매건 오길비 씨는 이들 참가자들이 조지타운대학교 교수가 가르치는 총 7단계 과정을 수료하게 된다고 설명했는데요. 수강 기간, 그룹 토론과 몇 차례 시험을 통과하면 조지타운대가 수여하는 경영 자격증도 취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게 1층은 일반적인 카페와 똑같이 차와 커피를 팔지만 2층은 전역 군인과 그 가족들이 수업을 듣는 학습 공간입니다.  
    [녹취: 매건 오길비] “수업 중에 ‘나의 목소리 찾기’라는 과정이 있어요. 이 수업을 통해 참가자들은 자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가치와 또 삶의 목적을 찾는 기회로 삼습니다. 무엇보다 미래의 계획을 세울 수도 있죠.”
    미국의 비영리 연구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전역 군인 약 4명 중 1명은 군 복무를 마친 후 민간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또 이들 가운데 30%는 군 생활에서 얻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해 민간인으로의 복귀에 매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는데요. 도그태그 베이커리의 수강생인 티키 툰디 씨 역시 제대 후 어려움을 경험했다고 했습니다. 
    [녹취: 티키 툰디] “저는 육군으로 복무하던 중에 건강상의 문제로 2015년에 의병 제대했습니다. 우울증이 찾아왔는데,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알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런 툰디 씨에게 지금 듣고 있는 수업은 새로운 길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녹취: 티키 툰디] “이런 프로그램을 만나게 된 것이 또 내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것이 너무 기쁩니다. 늘 무기력하던 제가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하루를 위한 계획이 세우고, 성취할 무언가가 생긴 것. 이런 변화가 제게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게 만듭니다.”
    수업은 전역 군인은 물론 군인 가족들에게도 열려있습니다. 이동이 잦고 때로 가족 부양의 책임을 지기도 하는 군인의 배우자들에겐 직장을 찾고 또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요. 4년간 전업주부로 살다가 건강 문제로 제대한 남편을 돌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 브랜디 램버트 씨는 그래서 바로 이곳을 찾았습니다.
    [녹취: 브랜디 램버트] “집에만 늘 있다가, 사회에 나가 취업을 해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게 무척 힘들었습니다.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하는 것과 가정을 돌보는 것을 동시에 어떻게 수행하고 또 균형을 맞추며 생활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이런 간절함으로 모인 사람들이기에 수업 시간은 뜨거운 학구열로 넘치는데요. 오길비 CEO는 도그태그 베이커리는 군인들만을 위한 공간, 혹은 민간인들만의 공간이 아닌,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공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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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석구석 미국 이야기] 노숙자에서 자선사업가가 된 뉴욕 피자 챔피언...양조장으로 변신한 성당
    미국 곳곳의 다양한 모습과 진솔한 미국인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구석구석 미국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이민자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찾는 곳이 바로 미 동부의 대도시 뉴욕입니다. 다양한 문화와 인종, 산업이 공존하는 뉴욕은 인생의 새로운 기회와 성공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정말 꿈과 같은 도시인데요.  가난한 이민자 출신으로 한때 뉴욕 거리를 전전하는 노숙자로 살았지만, 지금은 백만장자 사업가이자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돕는 자선사업가로 변신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을 만나러 뉴욕으로 가보시죠. 
    “첫 번째 이야기, 노숙자에서 자선사업가가 된 뉴욕의 피자 챔피언”
    [현장음:뉴욕 거리]
    바쁘게 오가는 차와 사람들로 분주한 뉴욕 도심의 거리. 이곳은 쿠르드족 출신의 이민자 하키 아크데니즈 씨의 활동무대이기도 합니다. 유명 사업가인 하키 씨는 큰 집과 좋은 차를 충분히 소유할 수도 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녹취: 하키 아크데니즈] “저의 꿈이 돈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제 꿈이죠. 얼마나 많은 걸 갖고 있는지는 상관없어요. 전 사실 검소하고 단순한 사람입니다.  제가 지금 차고 있는 이 시계도 100달러 정도 밖에 안하는 거에요. 전 사실 수천, 수만 달러하는 롤렉스 시계도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안 하는 거죠.”
    올해 39살인 하키 씨는 쿠르드족 가정의 17남매 가운데 한 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10대 때 캐나다로 왔고, 더 나은 삶을 위해 2001년 뉴욕으로 향했는데요. 하지만 뉴욕에 오면서 고생이 시작됐습니다.  
    [녹취: 하키 아크데니즈] “전 뉴욕에 온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바로 여기 도착한 날이에요. 뉴욕 공항에 도착하면 미국인 친구가 마중을 나와서 도와주기로 했는데, 공항에 나타나지 않았죠. 전화를 했더니 전화기도 꺼져있더군요.”
    하키 씨는 결국 싸구려 모텔과 기차역 등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거리에서 지내다가 ‘바우어리 미션’이라는 노숙자 쉼터에 들어가게 됐는데요. 하키 씨는 거기서 3달을 머물렀습니다. 
    [녹취: 하키 아크데니즈] “제 방에선 노숙자 20~30명 정도가 함께 지냈습니다. 사람들은 노숙자들이 쉼터에 들어가면 생활이 편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또 쉼터에서 공동생활하는 것이 썩 자유롭지도 않았어요.”
    하키 씨는 이후 뉴욕 시내의 한 피자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바닥 설거지부터 시작해 피자를 자르기,  피자굽기까지 차근차근 배워나갔죠. 하키 씨는 하루 19시간씩 일하면서 어떻게든 돈을 아끼려고 노력했고, 몇 년 후 그렇게 모은 돈으로 직접 가게를 열었는데요. 시내 수백 군데 달하는 피자 가게들과 경쟁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피자 만들기 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하게 됐는데요. 피자 도우라고 하는 둥근 빵에 불을 붙여 돌리는 현란한 기술로 챔피언 즉 피자 만들기 일인자에 오른 겁니다. 하키 씨 우승 이야기와 사진이 지역 잡지에 표지로 실리게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 알고는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녹취: 하키 아크데니즈] “잡지 표지에 제 사진이 실리면서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저희 직원들도 다 놀랬죠. 잡지책을 가지고 온 손님들이 가게 밖에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손님들은 계속 늘어났고 얼마 후 두 번째 가게를 열 수 있었습니다”
    가게 이름은 자신의 별명에서 따 ‘챔피언 피자’라고 붙였는데요. 현재 챔피언 피자는 14개 지점에 달합니다. 하키 씨는 유엔(UN)에서 연설하기도 했고요. 하키 씨의 소셜미디어인 인스타그램 계정을 따르는 사람은 400만 명에 달합니다. 그리고 하키 씨가 거리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나누는 영상의 조회 수는 4억 회를 넘겼습니다. 
    자신이 뉴욕 시내 노숙자였던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는 하키 씨는 매주 수요일, 거리로  나와 노숙자들에게 피자 배식을 하는 등 노숙자 돕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녹취: 하키 아크데니즈] “누구나 아름다운 미소를 가지고 있죠. 중요한 건 이 미소를 잃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노숙자들을 도우면서 늘 웃으라고 말합니다.  더 큰 걸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노숙자분들이 미소를 한번 지어주거나 따뜻하게 안아주면 그걸로 족합니다.”
    이제는 피자 사업가보다는 자선 사업가로 더 유명한 하키 씨. 어려운 이들을 더 많이 돕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요. 노숙자들이 안전하게 생활하고 공부도 할 수 있는 6층짜리 노숙자 쉼터를 짓는 거라고 합니다. 노숙자에서 백만장자를 이룬 하키 씨의 아메리칸드림은 이렇게 더 아름다운 꿈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술집으로 변신한 100년 된 성당”  
    미국에는 수많은 교회와 성당이 있습니다. 또 매년 4천 개~5천 개의 교회가 새로 문을 여는데요. 그만큼, 사라지는 교회도 많습니다. 교회가 문을 닫는 이유는 대부분 경제적인 부분 대부분인데요. 이렇게 팔린 교회는 아파트나 책 가게, 박물관 등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런데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가면 특이하게도, 맥주 공장 겸 술집이 된 가톨릭 성당이 있습니다. 
     
    피츠버그 거리에 고풍스럽게 자리 잡은 성당.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건물답게 웅장함을 뽐냅니다. 그런데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일반적인 성당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회중석 대신 수많은 탁자와 의자들이 채워져 있고, 고해실로 쓰였던 곳은 술을 마시는 바(bar)로, 성당 앞 제단은 맥주 양조장이 돼 있습니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세례자 성요한 성당’이었던 이곳은 이제 ‘처치 브루 웍스(Church Brew Works)’, 즉 성당 양조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활기를 보였던 지역 경제가 쇠락하면서 사람들이 지역을 떠나게 됐고 남아 있는 교구 성도로는 성당을 유지하기 어려워 성당의 문을 닫게 됐다고 하네요.
    [녹취: 션 케이시] “이 성당은 1902년에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20여 년 전에 성당이 문을 닫으면서 건물이 매매 시장에 나온 겁니다. 저는 이 건물이 아주 좋아 보였어요. 이 건물로 뭔가 해보고 싶었죠. 유럽 스타일의 맥주를 파는 술집이 들어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게 주인인 션 케이시 씨는 그래서 교회 건물을 매입해 술집으로 변신시켰습니다. 가장 힘든 작업은 성당 앞 제단에 6개의 대형 양조 탱크를 설치하는 일이었다고 하는데요. 양조 전문가인 댄 야낼씨는 현재 이 양조 시설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녹취: 댄 야넬] “우리 양조장은 한 번에 20배럴 그러니까 2천300ℓ가 넘는 맥주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맥주 수천 박스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에 여러 차례 양조를 할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4천ℓ가 훨씬 넘는 맥주를 생산할 수도 있어요.”
    야넬 씨에겐 양조 작업이 성스러운 의식과 같다고 했습니다. 
    [녹취: 댄 야넬] “제게 맥주 양조는 묵상의 시간과 흡사합니다. 무슨 일이 있든, 어떤 골치 아픈 일이 생기든 일단 여기 오면 다 잊고 양조에 집중합니다. 곡물을 뜨거운 물에 붓고 양조 과정을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어요. 최고의 맥주를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 양조 과정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성당 양조장에선 특제 맥주도 많이 생산하는데요. 국제적인 맥주 품질 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술집을 찾는 이유가 단순히 맥주 맛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해가 질 무렵,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석양을 보며 맥주를 마시면 기가 막힌다는 사람부터, 성당 특유의 높은 천장 등 술집 분위기가 정말 독특해서 좋다는 손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손님은 이렇게 사람들이 성당 술집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고 했습니다. 
    [녹취: 손님] “사실 처음 이 가게에 왔을 땐, 성당에서 술을 마신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곳은 성당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술을 마실 수 있게 됐어요”
    술집 주인인 케이시 씨는 자신의 자녀들도 가업을 이어받아 계속 성당 술집을 운영하길 바란다고 했는데요. 더는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한 성당은 아닐지라도, 역사적인 술집으로 대를 이어가길 축복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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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석구석 미국 이야기] 워싱턴DC에서 만나는 소울푸드...반려동물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미국 곳곳의 다양한 모습과 진솔한 미국인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구석구석 미국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2월은 흑인 역사의 달입니다. 과거 흑인들이 받았던 인종 차별을 기념함과 동시에 흑인들이 미국 사회 곳곳에 끼친 업적을 기리는 달인데요. 흑인의 유산은 미국의 정치,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줬습니다. 음식 분야도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특히 미 남부 노예제도를 통해 태어난 흑인의 음식, 일명 ‘소울 푸드(Soul food)’는 미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곳 워싱턴 DC에도 소울푸드로 유명한 식당이 있는데 미국인들이 왜 소울푸드를 좋아하는지 직접 찾아가 확인해보죠. 
    “첫 번째 이야기, 워싱턴 DC에서 만나는 미국인의 소울푸드 ”
    [현장음:뉴욕 거리]
    커다란 기름 솥에서 닭이 튀겨지고 있습니다. 노릇노릇 잘 익은 치킨은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데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요리 가운데 하나인 닭튀김, 프라이드치킨이 사실은 미국 소울푸드의 대표 음식입니다. 워싱턴DC에 자리 잡은 ‘우앤아(Oohh’s & Aahh’s)’ 식당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먹기만 해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소울푸드로 유명한데요. 닭튀김, 치즈로 버무려진 맥앤치즈, 콘브레드라고 부르는 옥수수빵 등 대표적인 소울푸드를 맛볼 수 있죠.
    [녹취: 아지 애벗] “소울푸드란 이름은 1960~70년대 흑인 인권 운동인 일명 ‘블랙파워’ 운동이 한창일 당시 만들어졌습니다. 영혼이 담긴 흑인 전통음식에 대한 자부심이란 의미가 있어요. 사실 소울푸드 역사는 1700년부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그때부터 미국인들 식탁에 오른 요리입니다.”
    요리 준비로 분주한 아지 애벗 총주방장 설명을 들으셨는데요. 이 식당은 ‘흑인남북전쟁기념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워싱턴DC 소울 푸드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녹취: 아지 애벗] “우리 식당엔 유명한 사람들이 정말 많이 찾아옵니다. 유명 가수 제이 지나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도 우리 가게를 찾았고요. 단골이 된 유명 인사들도 있어요.”
    애벗 씨 말대로 식당 벽면엔 유명 인사들 친필 사인이 담긴 사진이 가득 걸려 있습니다. 
    우앤아 식당 음식은 유명 인사만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미국 전통 소울푸드 맛을 그대로 간직한 탓에 늘 많은 손님으로 북적이는데요. 손님들은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할까요?
    [녹취: 알렉스] “뭐니 뭐니 해도 닭튀김이죠. 여기는 프라이드치킨이 제일 맛있어요!”
    치킨을 비롯해 다양한 요리를 시켜 먹고 있는 이 손님은 소울푸드를 찾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녹취: 알렉스] “저는 남부 텍사스에서 자랐거든요. 어릴 때부터 늘 프라이드치킨이랑 와플빵, 찐 콩, 옥수수빵 같은 소울푸드를 먹으며 자랐어요. 그중 제일 좋아하는 건 닭튀김이고요.”
    요리 대회 수상 경력도 있는 애벗 총주방장은 어린 나이에 요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부엌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요리를 배웠다는데요. 애벗 씨는 특히 할머니가 물려주신 요리 비법으로 소울푸드를 만드는데, 손님들이 자신이 요리한 것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녹취: 아지 애벗] “미국에선 2월 한 달 동안 흑인 역사의 달을 맞아 흑인들의 아픈 과거를 돌아보고 또 흑인들이 미국에 기여한 업적을 기리는데요. 미국 흑인들 성공 사례는 역사책이나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답니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런 소울 푸드 역시 소중한 성공 사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애벗 씨는 자신이 정성 들여 요리한, 흑인의 애환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소울 푸드를 통해 흑인 역사와 문화가 전수되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반려동물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많은 미국인이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반려동물이 아파서 죽거나 하면 자녀를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을 느끼기도 하는데요. 가족 같던 반려동물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반려동물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가 있다고 합니다. 
    [현장음: 에리카 에릭스도터 스튜디오]
    미 동부 버지니아주 레스턴에서 활동 중인 화가 에리카 에릭스도터씨. 에리카 씨 화실은 다른 화가들 작업실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에리카 씨가 그려놓은 작품들을 보면 뭔가 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화폭마다 담겨있는 주인공은 사람이나 풍경이 아닌 개와 고양이들인데요.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는 반려동물들로 주인들은 이 그림을 보며 위로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녹취: 에리카 에릭스도터] “저는 단순히 동물을 그리는 게 아닙니다. 그 동물의 영혼과 성격, 개성 등 생명을 그림에 담아요. 저는 동물 그림을 그릴 때 항상 눈부터 시작하는데요. 눈은 영혼의 창이라고 하잖아요? 눈을 제대로 그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에리카 씨 말대로, 작품 속 동물들 눈은 마치 살아있는 듯합니다. 
    에리카 씨는 스웨덴 출신 이민자로 3대째 화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화가 집안이긴 하지만 이렇게 동물 그림을 그리게 된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고 하는데요. 어느 날 우연히 자기 집 앞에 앉아 있는 길고양이를 본 에리카 씨는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림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본 친구들이 감탄했고, 에리카 씨가 동물 초상을 잘 그린다는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녹취: 에리카 에릭스도터] “저는 그림을 의뢰하는 고객들께 특별한 연민을 느낍니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던 존재를 떠나보낸 사람들이잖아요? 동물이 죽었든 아님 아직 살아있든 간에요. 고객들은 보통 인터넷 웹사이트나 이메일을 통해 초상화 의뢰를 합니다. 그러면 저는 초상화 주인공이 될 동물에 대해 의뢰인과 대화를 나눕니다. 아주 기본적인 질문, 그러니까 무슨 종인지부터 시작해서 그 동물과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어떤 추억이 있는지를 다 물어봐요.”
    이렇게 동물에 대해 듣고 난 후, 동물의 생애가 한 폭의 초상화에 담기게 됩니다. 
    에리카 씨 고객인 크리스 보트닉 씨는 평생 동물을 길렀지만, 특별히 애정이 가는 개 카넬라의 초상화를 맡겼는데요. 멕시코 여행 중에 만난 떠돌이 개를 미국으로 데려와 기르면서 처음엔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녹취: 크리스 보트닉] “당시에 제가 살던 방 한 칸짜리 아파트로 개를 데려왔어요. 처음엔 종일 구석에 앉아서 저를 보며 으르렁대고만 있었죠. 내가 잠들면 제 목을 물어뜯을 것 같았어요. 자기 근처에도 못 오게 했고요. 카넬라가 그런 마음의 벽을 허무는 데 8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특별했던 반려견이었기에 보트닉 씨는 카넬라가 죽은 이후 카넬라 초상화를 벽에 걸어뒀습니다. 보트닉 씨는 카넬라를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해준 에리카 씨에게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에리카 씨 작품은 사실 좀 비쌉니다. 초상화 한 건당 1천700달러 정도라고 하네요. 하지만 이렇게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의뢰하는 사람들은 끊이질 않는데요. 1년 전에 예약해야 그림을 받아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녹취: 에리카 에릭스도터] “미국 전역에서 초상화 의뢰가 들어와요. 특히 기억에 남는 의뢰인은 조지아에 사는 분인데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가 23년을 살다 죽었는데 고양이가 세상을 떠남과 거의 동시에 첫 번째 자녀가 태어났대요. 그래서 지금도 부엌에 고양이 사진을 걸어놓고 가족들이 늘 고양이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마치 먼저 떠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요.”
    전문가들은 이렇게 아끼던 동물의 초상화를 남기는 것이 상실감을 채울 수 있는 좋은 치료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요. 에리카 씨는 자기 그림을 통해 위로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작품 수입 일부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물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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