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0월 8일, 조선왕조 500년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치욕스런 사건이 발생한다. 미우라 공사의 사주를 받은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넘어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러시아의 힘을 빌어 쓰러져가는 국운을 돌리고자 이듬 해 아관파천을 강행한다.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면서 노서아가비(러시아 커피)에 맛을 들인다. 그래서 고종은 우리나라 역사 상 최초로 커피 마신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환궁 후에도 덕수궁 내에 ‘정관헌’ 이라는 서양식 정자를 짓게 하고 신하들과 커피를 나눴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을 다녀온 상인이나 사신 중에 커피를 접한 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종이 우리나라 커피 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고종의 커피 수발을 들었던 궁녀가 있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그녀가 우리나라 최초의 바리스타가 아니었나 싶다. 그 뒤 고종은 좋아하는 커피 때문에 죽음의 고비를 겪게 된다. 러시아어 통역관이었던 김홍륙이 착복사건으로 유배를 떠나기 전, 커피에 독을 타게 해 이 사건으로 고종은 18개의 치아를 잃게 된다.
우리나라 커피 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은 천재 시인 이상이다. 그는 1933년 제비를 시작으로 쯔루, 식스나인 이란 다방을 열었다. 운영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지 여는 족족 금새 망했다. 가우디에게 구엘이 있었듯이, 이상에게도 구본웅이란 부유한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당시 다방은 18~19세기 유럽의 까페와 마찬가지로 문학, 미술, 음악, 사상에 대한 나눔의 장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예술인들이 그 시대 다방에 모여들었다.
해방 후 6.25가 발발하면서 미군에 의해 인스턴트 커피가 소개되었다. 미군이 전쟁 물자로 가져온 것을 수완이 좋은 장사치들이 몰래 빼내어 암시장에서 거래하곤 했다. 인스턴트 커피는 1906년 일본인 가또가 발명하였다. 그 이후 전쟁 물가로 쓰기 시작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1950년 이전만 해도 커피50%와 전분 50% 비율의 인스턴트 커피였으나, 6.25 때부터 미국 제너럴푸드 社가 개발한 100% 인스턴트 커피가 등장했다. 어찌 보면 한국전쟁이 인스턴트 커피 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만큼은 분명하다.
마흔이 넘은 중년 남성이라면, ‘레지’라는 단어를 기억할 것이다. 요즘은 중소도시가 아니면 대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00다방’에서 커피를 써빙하던 여자 종업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쎄시봉, 학림과 같은 고급 음악다방에서부터 장미, 맹물과 같은 동네 다방에 이르기 까지 그곳은 만남의 장소였고, 휴식 공간이었다. 요즘은 고급 원두커피 까페에 밀리고 일부 퇴폐적인 인식 때문에 그 자취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해외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 인스턴트 커피가 유용할 때가 있다. 물론 네슬레 등 다국적 식품회사의 인스턴트 커피를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만큼 맛이 뛰어나지 못하다. 우리 것에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 않은가 보다. 해외에서 만난 배낭여행자들에게 우리 인스턴트 커피를 맛보게 하면 다들 정말 맛있다고 한다. 심지어 한국에 가면 보내줄 수 없느냐고 까지 한다. 토종 인스턴트 커피의 효시는 동서 커피다. 1960대 말 설립된 동서 커피는 정부의 지원과 자사의 노력에 힘입어 지금의 인스턴트 커피 제조 기술을 확보했다.
가장 간편한 커피는 자판기 커피다. 가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100원짜리 동전 두어 개만 가지면 언제 어디서든 간편하게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맛은 훌륭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편리함 때문에 아직까지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78년 등장 이후 커피의 대중화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IMF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99년 7월, 대한민국 커피 사에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스타벅스 라는 미국 커피 브랜드가 한국에 상륙한 것이다. 이대 1호점을 열었을 때, 누가 한끼 밥값을 주고 커피를 사 마시겠느냐며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스타벅스 라는 커피를 마심으로써 고급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매스티지 등장과 더불어 그 인기의 상승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에 고급 커피 시장이 열린 것이다. 스타벅스의 성공 이후 커피빈, 파스쿠찌 등 해외 고급 커피 프랜차이즈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그들 역시 대 성공을 거뒀다. 이에 뒤질세라 엔젤리너스 커피, 탐앤탐스, 까페베네 등 국내 고급 커피 브랜드가 런칭되었고, 이들 역시 지금까지 성장가도를 달리며 국내 커피시장의 양적 성장을 주도하고 있다.
*커피 읽어주는 남자는요~
대학 졸업 후 여러 회사를 이직하면서 틈틈히 전 세계 곳곳(54개국)을 여행하였다. 평소 커피를 즐기다 약 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커피에 대해 공부를 했으며, 대륙별 커피농장과 까페들을 돌아보며 각국의 커피역사와 문화를 익혔다. 지금은‘맛있는 커피 한 잔이 세상을 바꾼다’는 신념으로 서울 마포 골목에서 작은 까페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문화센터와 기관 등에서 커피와 여행에 대해 특강을 하고 있으며, 한국능력교육개발원 커피바리스타 실기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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