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회의 공공성과 사회 책임 전통에 대해 알아봅니다.
19세기 후반에 전래된 기독교는 학교와 병원설립으로 시작하여 기독교의 공공성과 사회 공적 책임성을 일깨웠으며, 1910년 이래로 나라의 주권 회복과 민족 독립을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합니다. 이후 다양한 계몽 운동과 농촌운동 등을 통해 사회봉사의 영역을 넓혀 나갑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 교회는 일제의 식민 지배 기간에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영역으로 사회 공적 책임을 실천했습니다.
이를 구별하여 보면 첫째, 선교 초기에 당시 사회 윤리적 기능을 고양시켰습니다.
즉 교인의 삶을 바르게 인도함으로써 나아가 사회 차원의 윤리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교회내 치리 기구인 당회가 권징 등의 기능을 바르게 수행했습니다. 한편 1907년 평양신앙각성운동 등으로 신앙의 내면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사회 윤리적 기능 수행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정신 문화의 개발입니다.
선교사들이 선교 언어로 한글의 가치를 발견하고 한글 문법체계를 세워 사전을 편찬하고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여 출간하는 등 한글 발전과 문맹 퇴치 등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했습니다.
셋째, 인재양성입니다.
기독교학교의 설립으로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서양문명 등 지식 전수와 기독교정신으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한편 아동과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데도 큰 몫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넷째, 독립 운동 참여입니다.
서북지역 기독교를 타파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의 희생 대상이 된 것과 1919년 3.1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 모두 당시 시대상황에 적극 참여하여 나라의 정치적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릇이었습니다.
다섯째, 총회차원에서 다양한 사회 봉사활동을 추진했습니다. 즉 농촌운동과 질병퇴치운동, 절제운동, 공창폐지운동 등의 봉사활동을 감당했습니다.
정리하면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한국의 개신교는 사회 속에서 공공성을 띄고 사회의 공적책임을 지는 교회로 발전해갔으며 이러한 모습은 193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또한 교인들의 신앙 범위와 범주도 교회 안에 국한되지 않고 교회 울타리를 넘어 사회 속에서도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데 까지 발전하였습니다. 다만 1938년 장로교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사회 공적 책임을 지는 교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