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음력 8월 15일. 8월 대보름. 한가위. 가을 추수를 끝내기 전에 덜 익은 쌀로 만든 송편, 햇과일로 조상에게 차례를 지냈다.
가장 중요한 것,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것. 지금은 도로가 좋아져서 2-3시간이면 가지만, 전북 김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에 가려면 기차타고 아주 먼거리처럼 느껴졌다.
한국은 전 국민의 75%가 고향을 방문. 이번에 한국은 9월 12일 월요일까지 공휴일. 대만은 그렇지 않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1947년생이시고 지금 75세. 명절에 왜 고향에 내려가고 싶을까?
아버지에게 고향이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태어나서 자란 곳. 농경사회에서는 이사를 잘 가지 않는다. 매년 농사를 지어야하고, 정착을 해야한다. 장성해서 도시로 나간가도 해도, 어릴 적 자란 곳에 대한 향수가 있고, 매년 명절이면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아버지는 더 이상 추석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신다. 다만 온 가족이 함께 모인다는 의미는 변치 않아서, 추석때면 온 가족이 모이려고 한다. 미국도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에는 가족들이 다 모이지 않나.
청나라 이전의 대만은 부족사회. 농경보다는 바다나 산, 거주지를 중심으로 수렵채집사회를 이뤄왔다. 평등하지만, 폭력성이 강하다. 모든 부족이 함께 나눠먹는. 다만, 힘 겨루기. 농경사회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생겨나고, 정치가 생겨나고, 위계가 생겨나고. 대신 폭력은 줄어들었고. 도시생활은 평화롭던 고향과는 또 다른 세계. 한국에 눈감으면 코를 베어간다는 속담. 인정이 없고, 속지 않아야 살아남는 세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한가위는 예전엔 음식을 이웃과 나눠먹었다. 그래서 아무리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풍요로운 날.
1)월병… 어렸을때. 아마 10살? 아버지께서 아는 화교분이 주셨다고 월병을 가져오신 적이 있었는데, 빵처럼 보이는 것이 아주 속이 실하고 묵직했다. 기대가 컸다. 아주 달달한 팥빵을 기대했었는데, 생전 처음 맛보는 희안한 향신료 맛이 많이 났다. 못먹었다. ^^
ㄴ왜 바비큐를 즐겨먹게 되었을까? 1980년대 간장회사들의 바베큐소스 광고 경쟁. 완쟈샹, 찐란, 완쟈샹의 TV광고중에 一家烤肉萬家香
젊은 세대들. 우리도 그랬지만 항상 세대와 세대사이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커다란 골이 존재한다. 꼰대를 이해할 수 없고,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고, 그랬던 것처럼.
바비큐라는 것은 어쩌면 온가족을 함께 모이게 만드는 변명이나 이유같은 것이 아닐까? 혼자 고기를 굽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여러 사람이 모여야 다양한 ‘구이’음식들을 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