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1.
-진행: 노혁이, 백조미
타이완은 이민사회이다. 대다수가 화인(華人)이지만 처음부터 이 섬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4백년 전, 100년 전, 또는 74년 전에 건너와 정착한 사람들이다.
예전에 타이완에서는 호적법에 ‘본적’을 등록하도록 되어 있어서 이른바 외성인과 본성인이 얼마나 되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본적’ 등록 제도가 1992년에 폐지되어 정확한 숫자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1990년에 전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타이완의 외성인은 269만5천 명으로 당시 전체 인구의 13%를 차지했다. 그러다 2002년도에 내정부에서 다시 조사를 펼쳤는데, 그때 나온 통계 결과, 타이완의 민남인(즉 보통 본성인 또는 대만인이라 부르는 타이완 출신 시민)은 전체의 76.9%, 학카인 10.9%, 외성인 10%, 원주민족 1.4%, 확인이 안 된 본적은 0.8%로 집계되었다.
사회의 보편적인 견해로 총인구 2,315만 명 중에 이른바 본성인(1945년 이전에 중국 본토에서 건너와 타이완에 정착한 시민)은 86%, 주로 1945년 이후, 특히 1949년 이후 타이완에 정착한 시민은 12%인데, 본성인 86% 중에는 민남인이 73%, 학카인이 13%라고 할 수 있다.
1949년12월 난징의 국민정부가 타이베이를 임시수도로 정하며 중앙정부 및 국군과 가족 등 약 200만 명이 중국대륙에서 철수해 타이완으로 건너왔다고 하는데, 외성인 군인은 60만 대군이라고는 하는데 그 숫자에는 못 미쳤을 것 같으며, 같이 건너온 공무원과 일반인은 약 70만 명에 불과하다는 설도 유력하여 1949년 당시 이른바 외성인은 130만 명으로 추산된다.
정치/군사/이데올로기의 슬픈 현실 때문에 가족들과 헤어져야만 했던 사람들, 특히 분단국가에서는 뼈져리게 느낄 수 있는데, 중화민국 정부가 정말 잘했다고 생각되는 건 바로 1987년11월2일 당시 중화민국 총통 장징궈가 기존의 ‘삼불정책’을 깨고 ‘타이완해협 양안 간의 친지들이 너무 오랫동안 분리되어 있다는 데 개탄하면서 중국대륙에 3촌(3등친三等親)에 해당하는 혈친 또는 혼인 관계로 척분이 있는 ‘인친’ 그리고 배우자가 있는 자는 중국대륙 친지방문을 허용한다고 발표하며 양안 간 교류에 물꼬를 트게 되었다.
1987년4월15일 ‘외성인 귀향 친지방문 촉진회’가 정식 발족되어 5월에는 대규모 영민(베테랑으로 불림)들이 퇴역장병위원회에 청원하는 등의 일련의 고향에 돌아가 친지를 만나겠다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1987년10월15일 중화민국 내정부는 대륙 친지방문에 관한 규정을 공고했는데, 바로 다음날, 중국 국무원에서는 ‘타이완 동포의 대륙 친지방문 접대 방법 통지’를 발표하며, 타이완에 정착한 외성인의 중국대륙 방문이 정식으로 펼쳐지게 되었고, 이 또한 양안관계에서 가장 신속하게 호응을 얻은 조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타이완에서 중국대륙 친지방문을 허가하고, 중국에서도 허가한 후 약 2주일 후인 1987년11월2일부터 고향방문 신청 접수를 수리하기 시작해 등록 시작 며칠 안 되어 3만 명이, 두 달도 채 안 되어 10만 명이 넘는 노병들이 타오위안 소재 중정국제공항과 홍콩의 카이탁(啟德)공항, 홍콩의 홍칸(홍함紅勘)기차역에 한꺼번에 수만명에 달하는 국민당 국군출신 노병들이 모여드는 진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한국의 이산가족 상봉처럼 가족이 만나는 곳마나 눈물바다가 되었었다.
199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중국과의 산업/상업 교류가 시작되면서 이른바 ‘타이상(대만상인)’의 중국시장 진출붐이 일었다. 지금까지도 타이완의 최대 무역 의존 국가는 중국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타이완해협의 너비는 180킬로미터이다. 40년 동안 건너지 못했던 바다를 건널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실향민만이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고향을 잃은 사람을 뜻한다. 대표적으로 실향민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6.25 전쟁 전과 중에 월남한 이북 출신들을 지칭하는 말
황해도, 미수복 경기도, 미수복 강원도 출신 실향민들은 남한과 가까워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았지만, 평안북도, 평안남도, 함경북도, 함경남도 출신 주민들은 혼자 월남하거나 가족들 중 일부만 월남한 사람들이 많았다.
가족과 이별하고 고향을 떠나게 만든 김일성 일가, 북한 정권,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감이 남한 본토 출신 사람들보다 많거나 더 심한 경우가 많다.
2020년대 현재 실향민의 출생연도가 20세기 초반이기에 지금은 상당수가 작고했으며, 생존한 사람들은 대부분 80대 이상의 고령이다. 그래서 2010년대까지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 북한과의 협상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인데 이는 실향민들의 나이가 매우 고령이고, 이들의 죽음은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남북한 간의 연결 매개체를 아예 단절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대 현재에는 대부분이 고령으로 사망
김일성이 주도권을 갖던 북한 정부에 의해 행해졌다. 강도 높은 토지개혁이 실시되어 많은 지주와 중농들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재산을 빼앗겼고, 고향에서 쫓겨나 머나먼 타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당시 이북 지역에서 상당한 세를 갖추고 있던 기독교 세력에게도 강력한 탄압이 가해졌다. 결국 지주, 중농, 기독교인, 반공 지식인에게 38선 이북의 땅은 살 수 없는 땅이 되었다.
실향민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강원도 속초라고 하죠?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피난민들이 내려와 판잣집을 지으며 살아왔던 강원도 속초. 매년 실향민 축제가 열리는 곳. 10살 때 피난을 온 사람들이 이제 여든살이 넘었다.
고향을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한다는 것. 참 슬픈 역사. 이 역사의 산 증인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