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파수 7,130kHz, 한국을 향해 송출했던 민슝을 찾아…
-방송국의 심장부: 제어실, 2차 대전 때 폭격 당한 흔적.
-1937년~1940년 사이에 건축, 건물과 바닥 등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미군의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벽과 창문을 뚫고 실내 송신 장비에 총알 구멍이 생긴 게 그대로.
-냉전시대의 심리전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 타이완의 목소리를 전파한 역사적 장소
– 쟈이 민슝 ‘국가광파문물관-국가 라디오방송 박물관’-
-2025.03.17.-타이완ㆍ한반도ㆍ양안관계ㆍ시사평론-시사성 프로그램에서 어떠한 장소, 지리 환경을 소개하는 건 여행 관광을 목적으로 두지 않지만, 오늘 공유하는 주제는 필자가 지난 주말(3/15) 타이완 중남부에 위치하고 북회귀선이 경내를 가로지르는 타이완의 두 곳 중 하나 쟈이(嘉義)이다. 국제상에서 타이완 원주민을 말할 때 ‘아리산’이라는 지명을 거론하곤 하는데, ‘아리산’도 바로 쟈이에 소재해 있다. 고산차 차밭으로도 다도 애호가들이 찾는 곳이며, 최근은 국립고궁박물원이 (정치/경제/문화 등 측면에서의) 지역 간의 형평성을 이루고자 고궁 남부분원을 쟈이 타이바오(太保)에 설립하여 타이베이에서 1965년11월에 문을 연 고궁의 건축 외관과는 매우 다른 새로운 모습의 고궁을 보여주고 있는데 올해 12월 고궁 남원 개관 10주년을 맞는다. 이 외에 100년 전의 설탕공장 시설과 제품을 싣고 나르던 소형 (꼬마)열차 체험도 있으며, 칠면조/닭고기 덮밥, 거위고기 등 전통 음식과 관광객에게 파는 게 아닌 현지인들이 먹거나 특히 선물용으로 많이 샀던 (푸이쉬안) 에그롤 등 달달한 것도 있다. 고산, 우거진 숲, 깊은 산골 원주민 마을, 광활한 평야와 바다, 현지인들에게는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오늘의 주제는 관광은 아니다. 오히려 딱딱하고 재미없는 냉전시대의 선전 방송, 일본 점령 시대의 방송 설비와 미국 지원 시대의 설비가 공존하면서도 타이완 출신과 1945년 이후 대륙에서 건너온 전기전자 공학 분야 직원들이 국가 존망이라는 위기감에 헌신했던 곳, 쟈이 민슝(民雄) 소재 라디오방송사 지국이며, 지금의 ‘국가광파문물관(국가 라디오방송 박물관)’이다. 이곳의 건축물과 시설은 1937년에서 1940년 사이에 시공하였고, 2차 대전 기간에는 일본의 ‘남진정책’에 따른 군사적 심리전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수도 난징와 인접한 곳에 위치한 ‘중앙광파전대(중앙방송국)’에서 타이완 동포를 향한 방송을 하였을 때 타이완을 식민 통치하고 있던 일본정부는 바로 이 민슝의 방송국에서 제밍하였고 심리전도 펼쳤다. 1937년 일제시대 총독부가 광할한 평야가 있는, 벼농사를 주로 하는 쟈난(嘉南)평원을 ‘방송소’ 기지로 삼고 1940년9월28일 첫 방송을 개시하였었다. 당시 송신소, 변전소 및 기숙사도 함께 건축하였고, (약 70층 높이 빌딩) 높이 206미터의 2개의 T형 안테나를 만들었는데, 그 안테나는 오늘날의 송신 안테나의 비조이기도 하다. 지금 타이베이 101타워의 5분의2 수준의 206미터 높이의 조형은 매우 웅장하여 그 시대 쟈이 민슝지역의 랜드마크였다.
송신 출력이 강력하여 송신 범위는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쟝수성(강소성)과 난징시 등을 포함하고 있다.
1941년 진주만사태가 발생할 때 라디오방송이 얼마나 쓸모있는 무기인가를 보여줬다.
민슝방송소는 일본군이 전쟁 기간 방송할 수 있게 한 중요한 도구인데, 1941년12월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습한 후 서둘러 남쪽으로 전진하였는데, 당시 미군들의 사기를 누그러트리는, 미군들이 싸우고 싶지 않도록 하는 매혹의 목소리, ‘도쿄 로즈’의 목소리가 바로 이곳 쟈이 민슝방송소에서 태평양 미군과 남양에 주둔한 군대에 전파되었다.
“저기 야자수 나무 뒤로 4개의 철탑이 보이지요, 저 마름모꼴 안테나는 주파수 7130kHz로 일본과 한국으로 방송하는 주요 송신탑입니다.”
지금은 민슝에서 타이완의 국제방송의 송신 임무가 사라졌지만 필자가 예전부터 지금까지 한국어방송의 주파수 안내를 해오면서 ‘7130kHz’라는 숫자에 너무나도 익숙하다 보니 현장에서 옛 생각에 콧등이 찡해졌다.
1999년도에 ‘국가광파문물관’으로 조직 개편된 이곳은 박물관답게 그 시대의 중요 문물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원래 방송지국 건물 안에 전시해 놓은 것 외에 상당수는 방송 송신 관련 기술지침 문건들이 남아 있고, 기타 방송 기계 설비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
1940년부터 6년 동안, 일본정부의 심리전 방송 문건들 또는 기타 공문서 같은 건 하나도 남은 게 없다. 지금도 충분히 상상이 가겠지만 군사, 정보 관련 문건은 다 기밀이다 보니, 일본이 패망하고 타이완을 떠나기 전에 모든 문건들을 다 태워버렸으리라 믿는다. 듣기로는 문건을 3박3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72시간 태웠다고 하는데 정확한 기록이 있는지는 추후에 더 알아보고 보충하겠다.
라디오방송 박물관에서 녹음해온 것 중에 예전 심리전 방송에서 중공 인민해방군이 군용기를 몰고 오면 얼마만큼의 황금을 상금으로 준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참고로 이 심리전 방송은 1950년대에서 80년대 사이에 송출하는 것 중의 하나이고, 특히 양안관계에서 타이완의 군사 최전선 진먼과 마주가 원래 일반 민간인 출입이 제한된 ‘전쟁 지역’이라는 딱지를 떼어낸 지 33년차가 된다. (1992년11월7일, 진먼현의 “전지정무” 해제) 이는 뭘 의미할까?
혹시 1983년5월 중국 민항기를 납치하여 서울로 간 6명의 중국인을 기억하는지? 한국 춘천 주한미군기지도 그때 이 사태에서 주목을 받았는데, 그때 한국은 국제법적 대응으로, 하이재킹은 국제법에 의해서 엄연히 금지되어 있으므로 하이재킹 범인을 국제법과 국내법을 적용하여 1년3개월의 유기징역을 선고하였던 사건이 있었고, 복역 후 추방령을 내려 타이완으로 이송되었다.
민항기 하이재킹은 국제법으로도 절대 용인할 수 없는 공공위험죄인데 유독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유난히도 자주 일어났고, 필자가 당시 ‘BCC중국광파공사’의 해외부 ‘VOFC, 자유중국의 소리’ 시절에 한 해에만 10번의 중국인의 민항기 납치를 통해 타이완에 착륙한 사건들이 발생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1990년대 초반과 그 이전, 또는 지금과 그 시대는 너무나도 달라져있다.
(군용기 몰고 귀순하라고 권장하는 선전 방송, 원음, 국가광파문물관 2층에서 녹음)
우리 중화민국 정부는 중공 공군 장병들이 봉기하여 귀순할 경우 과거의 잘못은 묻지 않으며 생명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걸 전제하고 봉기를 책동하거나 군용기를 몰고올 경우에 상응하는 상금을 준다며 심리전 방송에서 군용기 모델과 상금에 대해, 가장 높은 상금을 말한다면 H(轟)-6형 군용기를 몰고 귀순한 중공군에게는 황금 8천냥(兩), J(殲)-7형 군용기는 황금 7천냥, 트라이던트 제트 운수기는 황금 6천냥 등의 높은 상금을 주며, 귀순할 의사를 밝히는 방법은 타이완 서해안에 접근할 때 비행 속도를 줄이고 착륙 장치(랜딩 기어)를 내리며 날개는 드리프트 다운을 유지한다’는 지시도 심리전 방송에서 하고 있다.
또 우리측 중앙방송에서 심리전 외에도 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는 특수임무를 띈 이름없는 사람들을 향해 모든 내용을 숫자로 방송하며 지시를 내렸던 것도 방송 역사에 남아있다.
광파 문물관, 레트로, 옛추억, 또는 무시무시했던 냉전이나 대치, 전쟁을 떠나서 현대사를 현장에서 공부하는 곳으로 생각하며 한 번 다녀가시길 추천한다. –白兆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