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삼서 1 : 1-15(유병훈 전도사)
진리를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1:1~8)
1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선한 것을 본받으라(1:9~15)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13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14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15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이 새벽에 기도의 자리를 지키러 나오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이 연합의 성전에 가득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다보면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그런 오해를 받을 때 막상 변명할 기회도 반박할 방법도 변변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만큼 억울한 때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의 진심을 몰라주고 사실과 진실은 가리워 집니다.
왜 제가 오해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하는가 하면 바로 요한 삼서가 그런 오해를 요 근래들어 많이 받은 서신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삼서는 ‘장로인 나는’ 이라고 시작합니다. 편지를 쓰는 사람이 사도가 아니라 장로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이 서신의 저자는 사도 요한으로 이미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들어오면서 이 서신의 저자에 대한 의심을 하는 학자들이 있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확실한 외적인 증거 즉 저자의 이름이 어떤 식으로든 표현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자의 정확성을 의심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서신이 사도요한에 의해 씌어졌다고 믿는 학자 들은 내적인 증거에 집중합니다. 이 서신들이 사도요한이 요한 복음에서 설파하신 내용들을 얼마나 일관되게 반영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의 복음서에서 다루는 주제들을 서신들에서도 다루고 있는가? 요한의 복음서에서 중요하다고 한것을 서신서에서도 중요하다고 하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 내용들을 살피는 기준이 되는 복음과 서신서의 공통 주제들을 살피면 빛과 어두움의 대비, 하나님안에서 누리는 생명과 하나님을 떠나 겪는 죽음, 하나님안의 사랑과 이와 반대되는 죄된 미움 혹은 증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와 세상의 거짓과의 구분이 있습니다.
이 내용을 잣대삼아 서신서들과 요한복음을 비교하면 결론적으로는 똑같은 주제들을 너무나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는 이 요한복음과 요한 일이삼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으로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흥미로운것은 마태와 누가복음에서 나오는 나무는 열매로 알아본다는 말씀이 학문적인 성찰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을 통하여 요한 복음과 요한의 서신들로 열매를 맺고 가지인 요한과 본체이신 하나님이 연결되어 있음을 증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무를 보지 않고 열매만 보아도 이게 감나무에서 나온 열맨지 포도나무에서 나온 열매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을 통해 주장하신 성령의 열매인 서신서들을 보고 사도 요한이 보이는것과 우리 주님과 하나님이 보이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는 가린다고 가려지거나 보기 싫다고 안 볼수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열매는 살아있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살아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임을 기어이 증거 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만약 나의 인생자체가 의심받고 오해받는 중에 있는 분이 계시다면, 또 만약 우리의 교회가 의심받고 오해 받는 경우가 혹시라도 있다면 그럴수록 더욱 더 하나님께 붙어있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맺게 하시는 성령의 열매가 나를 우리를 우리 교회를 그리고 하나님을 증거 하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요한의 복음과 서신서들을 오늘도 생생히 증거 하시듯이 나와 우리와 교회를 하나님의 열매로 자녀로 증거하시는 변호인이 되어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이 정말로 사랑한 가이오에게 쓴 개인적인 편지입니다. 얼마나 사도 요한이 이 가이오를 사랑했는지 이 짦은 서신에서 다섯번이나 사랑하는 자 라고 가이오를 호칭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적인 편지를 쓸때 공식적인 직분을 사용해서 쓰는것이 어색한 일이듯이 요한 사도도 자신의 사도로의 직분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정인수 목사님께서 살아계실 때 저한테 전화를 주시면 ‘유전도사 나야’ 라고 하셨지 ‘유전도사, 아틀란타 연합 장로교회 담임목사 정인수야’ 라고 하지 않으셨던것과 같은 이야기 입니다.
사도요한이 자신을 지칭한 장로라는 표현은 원어로 ‘프레스부테로스’ 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프레스부테로스’ 이 말씀은 장로를 지칭하는 동시에 또 나이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자기를 지칭해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사용한 이 말씀은 ‘장로인 나는’ 보다는 ‘나이든 내가 편지를 쓰니’ 라고 보던지 ‘늙은 내가 편지를 쓰니’ 로 이해할 때 그 뜻이 더 분명해 진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자신의 자녀와 같은 가이오에게 아버지가 편지를 쓰듯 어머니가 편지를 쓰듯 사도 요한이 글을 써내려 간 것입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늙은 사도 요한이 자기 친 자식같은 가이오가 꼭 알아야 할 것, 꼭 행해야 할 것, 정말로 중요한것을 적은 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이 이해하기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된 자들을 전송하고 영접하라는것이 요한의 부탁이자 명령이기는 한데 이 나그네 된 자들이 정확하게 누구인지를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지 않는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이 나그네들은 사도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을 받은 자들도 아닙니다. 직분상으로는 도무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사도요한은 이들이 주의 이름을 위해서 이방인들에게 사역하던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교회가 전혀 모르던 사람들 원어로는 케노스라고 적는 낯선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들 사이에서 교회가 없이 떠돌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내가 만난적도 없던, 전혀 알지 못하는 순회 선교사들을 이야기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께서는그들을 영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선교사니까 힘드니까 불쌍하니까 도와주라고 사도 요한께서 말씀 하시고 계시는것일까요? 아니면 교회는, 성도는 선교하는 사람이면 무조건 도와주어야 하는 걸까요?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사도 요한은 자기 친 자식과도 같은 가이오에게 자신의 사도라는 직분도 내려놓고 평생 진리를 경험한 그러나 이제는 나이든 노인으로써 진리를 이야기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이 나그네된 자들은 주님의 이름을 직접 자기몸으로 전함으로써, 그리고 가이오와 가이오의 교회는 이들을 영접함으로써, 오늘의 본문 팔절에서 이야기 하시듯 하나님안에서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영접하다라는 말씀은 원어로 후포람바노라는 단어입니다 받아서 올린다는 뜻의 이 단어는 귀하게 받아서 하나님께 올려드린다고 해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영접한다는 뜻은 나는 사실 알지도 못하고 들어본 적도 없는 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십자가를 지고 있을 때, 진리를 위해 일하는 십자가를 지고 있을 때 그 십자가를 보고 이들을 귀하게 받아 하나님게 영광을 돌려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복음을 전하는 자나 영접하는 자나 영접 받는 자나 모두 다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같은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동역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안에서 연합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모두가 하나 되는것입니다.
이 영접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이 으뜸되길 좋아해 심지어는 사도 요한이 보낸 형제들을 비방하고 내쫓는 교회의 연합을 깨는 본문에 나오는 디오드레베같은 사람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인것 입니다.
사도 요한이 보낸 형제를 내 쫓을 수 있을 정도로 교회 안에서 큰 힘을 행사할 수 있었던 디오드레베는 어찌보면 신실한 하나님의 성도들보다도 더 하나님을 잘 모시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형제를 돕는일과 같은 육의 일을 너무나 무시하던 성도의 삶에 무관심하고 무지했던 영지주의자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교회안에서 자기를 드러낼수 있을 만큼이나 힘은 있으되 사랑이 없었던 디오드레베는 정말로 비참한 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렇게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무지하고 또 그렇게 무지한 삶을 사는것이 죄인줄도 몰랐던 이런 사람들을 악한자라고 말씀으로 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법한자들 악을 행하는 자들이 성도의 삶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었던 것과는 달리 영접하는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성도된 자들은 나의 이웃이 나의 형제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무엇인지 유심히 살펴 그 십자가의 무게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고있는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진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십자가라면 자신들도 기쁘게 그 십자가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올릴줄을 아는 영접하는 자, 사랑의 진리를 아는 자. 연합의 능력을 지닌 자,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주님의 이름앞에 합당하게 돌릴 줄 아는 자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복음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복음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인생의 많은 것을 포기한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복음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 분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복음을 위해 가족의 목숨을 희생한 분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복음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복음을 위해 자신의 어려움과 상처를 동여매고 같은 상처를 입은 영혼들을 치유해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해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고 그 이름을 지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진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분들이 지고 가시는 십자가를 알아봅니다.
또 그 십자가를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서로가 서로를 영접 하시는 것입니다. 서로를 귀하게 받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사도 요한이 특별히 요한 삼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진리입니다.
가이오가 사도요한을 영접했듯이 사도요한이 가이오를 귀하게 영접했듯이 이들이 나그네 전도자들을 귀하게 영접했듯이 우리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안에서 또 우리 밖에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을 서로 귀하게 영접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서로 영접하는것만큼 우리 주님을 받아들이는 일이 또 있겠습니까?
우리가 서로의 십자가를 알아보고 서로 영접하기에 힘쓸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연합의 능력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과 권능이 언제나 같이 하실 것을 믿고
또 그런 서로를 영접하는것이 우리와 교회와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세상에대해 증거하는 성령의 열매가 되심을 깨달아 그대로 행하는
그 크신 영광이 오늘 새벽의 성전에 나오신 모든 분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