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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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pisodes

  • 155회 1만년전 제주도에 정착한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제주도 하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뭍사람들에게는 로망이지요. 뭔가 세파에 찌들어 살고 있는 육지 사람들은 한번쯤 평화롭고 아름다운 제주도에서의 삶을 상상해보곤 하지요. 최근에는 가수 이효리씨가 세상 편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TV프로그램을 보면서 한껏 부러워하게 되지요. 얼마나 부러우면 제주도 여행가서 굳이 이효리씨의 집을 찾아가는 분들도 있다면서요. 뭐 제주도까지 가서 남의 사생활을 훔쳐볼 필요가 있습니까. 그보다 훨씬 의미있는 곳들도 많은데….
    화산섬 제주도의 풍치는 말하지 않아도 유명합니다. 그러나 뭔가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여행을 어떨까요. 지금으로부터 1만년전의 제주도를 가보는 그런 여행 말입니다. 제주도야 말로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연결하는 이른바 ‘경계인’이 살았던 곳이거든요. 그 이들의 흔적이 제주도 고산리라는 곳에 남아있습니다.
    뭐 뻑적지근한 유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해발고도 15~20m의 넓은 평탄대지에서 살았던 1만 년 전 ‘경계인’의 체취를 한번 맡아보면 어떨까요. 이곳에서는 구석기 최말기의 유물과 신석기 조기의 유물이 공반되어 나옵니다. 제주도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문화상입니다. 게다가 풍치까지 빼어납니다. 그렇다면 1만년전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경계인들은 어떻게 거센 파도를 헤치고 제주도로 왔을까요. 엄청 쉬웠습니다.
    왜냐면 제주도는 섬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는 때는 지금부터 2만~1만8000년 전입니다. 그때부터 지구는 온난화의 길을 걷게 되지요. 그 무렵 서해바다는 몇 개의 강줄기가 흐르는 육지였습니다. 중국과 한반도, 제주도는 그냥 육지로 통해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빙하가 녹아 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1만1000년부터는 급속도로 차올랐습니다. 급기야 제주는 섬이 되었고, 아주 쉬운 방법, 즉 도보로 왔던 사람들은 더 이상 빠져나가지 못했던거지요. 그 사람들이 남긴 문화가 바로 제주섬에서 발굴된 것입니다. 제주도에서 밟아보는 1만년전 세상….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55회가 할 이야기는 바로 ‘1만년전 제주도에 정착한 경계인…그들은 누구인가’입니다.
    33 min
  • 154회 한탄강 임진강에서 본 한국의 그랜드캐니언
    “한반도에 화산이 몇개 있습니까”라 묻는다면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고 하겠지요. 백두산과 한라산, 두 곳이 아니냐고…. 그러나 아닙니다. 한 곳이 더 있습니다. 그것도 한반도 중심부에 있습니다.
     지금은 북한 땅이지만 철원의 다소 높은 산성이라면 멀리서나마 볼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 산의 해발은 453m밖에 안됩니다. 오리산입니다. 그렇게 구릉처럼 야트막한 산이 무슨 화산이냐고 묻겠지요. 그러나 맞습니다. 화산입니다. 그것도 200만 년 전부터 무려 10차례나 폭발한 화산입니다.
     무슨 화산이 그렇게 작냐고요? 화산폭발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백두산이나 한라산처럼 용암과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중심분출이 있습니다. 이 경우 폭발하는 용암의 점도가 강해서 백두산과 한라산 같은 엄청난 크기의 화산을 낳지요. 그러나 화산폭발 중에는 용암이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이른바 열하분출도 있습니다. 이 경우 용암의 점성은 약해서 먼 곳까지 흘러가지요. 그러니 분화구 주변의 화산체는 작지만 주변에는 엄청난 양의 용암이 흐르게 됩니다. 이것이 같은 화산인데 백두산과 한라산에 비해 오리산의 해발이 453m밖에 안되는 이유입니다.
     거대한 용암의 바다가 식으면 엄청난 평야지대가 되겠지요. 그것이 철원·평강·회양의 2억평에 달하는 평야입니다. 용암이 낮은 곳을 찾아 흐르면 강이 되겠지요. 그것이 한탄강과 임진강입니다. 30만 년 전 고인류가 수렵채집활동을 했던 곳입니다. 전곡리 구석기유적이 그것이지요. 오리산에서 터진 화산폭발은 어머니의 탯줄 같았고, 한탄강과 임진강은 어머니의 젖줄 같았지요.
     게다가 임진강 한탄강은 한반도 전체를 경영하려는 남북세력은 누구나 건너야 할 요처였지요. 지금도 남북한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요충지가 수두룩 하지 않습니까. 지형이 바뀌지 않는 한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군사요새가 되었겠지요. 무엇보다 용암이 흘러 생긴 현무암이 침식과 풍화작용을 겪으며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주상절리와 수직단애를 이뤘습니다.
     지금 한탄강과 임진강을 가보면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할만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무심코 수풀을 헤쳐보면 바로 그곳에 20~30m 주상저리 수직단애가 4~5m씩 전개되지요. 엄청난 광경입니다. 저 혼자만 볼 수 없어, 이렇게 팟캐스트에서 소개합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54회는 ‘한탄강 임진강에서 본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입니다.
    26 min
  • 153회 아키히토가 방문한 고려신사에 숨겨진 내선일체의 흉계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최근 고구려 왕족을 모신 사이타마현(埼玉)의 고려(고마)신사를 찾았습니다.
     “일본 왕실에 한국계 피가 흐른다”고 고백했던 일왕이기에 남다른 주목을 받았습니다. 과거사를 외면하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행보와는 확연히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냥 ‘헤헤’ 거릴 것은 아닙니다. 이 신사가 일제강점기에 ‘내선일체의 성지(聖地)’로 부각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필자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고려신사’ 관련 기사를 찾아보았더니 기사 앞에 빠짐없이 ‘내선일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고려신사는 고구려 멸망 후 일본 조정이 마련해주었다는 고구려 유민촌을 다스린 고려약광(高麗若光)을 모신 신사입니다. 평범했던 이 신사가 1919년 3·1운동 이후 갑자기 유명한 답사코스로 각광받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내지시찰단’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각계인사들을 일본 본토에 파견한 이후 고려신사는 단골 답사코스가 됐습니다.
     희한한 일은 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고마다 히데오(兒玉秀雄) 백작 등 본토의 일본인들이 고려신사 후원회(봉찬회)까지 결성했다는 것입니다. 후원회 이사인 다케이 후미오(武井文夫)의 언급이 소름끼칩니다.
     “고구려 망명객을 잘 대접해서 동화시킨 이 역사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야말로 내선융화입니다. 고려신사는 내선일체의 살아있는 모형이자 증거입니다.”
     1940년 4월5일 식목일을 맞아 조선신궁은 고려신사에 오엽송과 개나리를, 고려신사는 조선신궁에 벚꽃나무를 사이좋게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매일신보의 제목은 ‘내선일체의 신목(神木) 교환’이었습니다. 양측은 “오늘도 내선인(일본과 조선인)이 손잡고 가야 한다”(조선신궁) “황국의 은혜에 고려왕의 영혼도 지하에서 기뻐할 것”(고려신사 봉찬회)이라는 덕담을 주고받았습니다. 지긋지긋한 ‘내선일체’ 타령이었습니다. 고려신사는 이처럼 내선일체의 도구로 철저히 이용당했습니다. 아키히토 일왕의 신사 방문을 굳이 백안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냥 넘기기 어려운 어두운 역사의 편린이 고려신사에 숨어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53회는 ‘아키히토가 방문한 고려신사에 숨겨진 내선일체의 흉계’입니다.
    32 min
  • 152회 조선은 왜 천문관측에 목숨을 걸었을까
    지난주엔 고려 조선의 빼어난 천문관측 사례를 더듬어보았습니다. 1572년의 ‘티코 초신성’과 1604년의 ‘케플러 초신성’ 등 밤하늘의 우주쇼를 조선의 천문학자들도 목격했으며,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석담일기〉 등에 그 관측기록을 담았음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1604년 요하네스 케플러가 관측한 초신성의 경우 조선천문관리들이 4일이나 먼저 관측했습니다. 1572년 서양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목격한 초신성의 경우 똑같은 날짜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됐습니다.
     비단 서양에서도 거의 동시에 관측된 객성(초신성·신성·변광성)의 기록뿐이 아닙니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서양에서는 관측하지 못한 중요한 객성 기록이 있습니다. 예컨대 1973년과 1074년 고려의 하늘에서 관측된 신성과, 1592~1594년 사이 15개월이나 목격된 변광성 및 신성 기록이 그것입니다. 천문관측에 관한한 고려 조선의 수준이 서양을 뛰어 넘어섰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점이 생깁니다. 왜 고려 조선 등 우리 조상들은 천문관측에 목숨을 걸었을까요. 아닌게 아니라 천문관측을 잘못한 관리들은 곤장을 맞고 유배형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요즘 날씨예보를 잘못했다 해서 기상청 관리를 처벌하고, 일식이나 객성 출몰소식을 잘못 전한 천문관리들을 “매우 쳐라”는 식으로 치도곤한 셈이지요.
     이렇게 고려나 조선의 임금들이 천문관측가 날씨예보에 왕조차원의 관심을 보인 까닭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성변을 제대로 관측하는 것은 하늘과 백성의 마음을 제대로 읽는 통치권자의 능력이었습니다. 왜냐. 옛 임금들은 민심은 곧 천심이며, 하늘의 조화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곧 백성의 마음을 제대로 읽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52회는 ‘조선은 왜 천문관측에 목숨을 걸었을까’입니다. 천문관측에 왕조의 명운을 걸었던 옛 조상들의 하늘땅 별땅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요.
    33 min
  • 151회 케플러보다 4일 빨랐던 조선의 초신성 관측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흥미로운 천문학 논문이 실렸습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치세에 관측한 신성폭발 기록을 제대로 규명한 것입니다.
     미국·영국·폴란드 등 6개국 공동연구진은 지난해 칠레에서 전갈자리 꼬리부분에 있는 한 별을 둘러싼 가스구름을 관측했습니다. 공동연구진은 이 가스구름을 연구하면서 1437년(세종 19년) 음력 2월5일 “미수(전갈자리 별자리)에서 객성이 14일간이나 나타났다”는 〈세종실록〉 기록을 검토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해 관측한 가스구름은 바로 1437년 폭발한 신성의 흔적이었음을 밝혀냈습니다. 조선 천문학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고려와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당대 서양 천문학을 압도할 정도의 빼어난 천문관측 수준을 보여줬습니다.
     1073년과 74년 〈고려사〉는 서양에서는 관측하지 못한 ‘신성’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1592~94년 사이에도 역시 서양인들의 눈에 띄지 못한 객성을 4개나 관측했습니다. 특히 한 개의 객성은 15개월간 두 번의 연속된 기간에 걸쳐 관측됐습니다. 이 객성을 끈질기게 추적한 조선 천문학자들은 이 별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니라 고정별(항성)이라 판단했습니다. 그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 별은 신성이나 초신성이 아나라 자체적으로 별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는 변광성이었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조선의 천문학자들은 1572년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관측한 이른바 ‘티코 초신성’도 같은 날에 보았습니다. 또한 1604년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발견했다고 해서 ‘케플러 초신성’이라 명명된 초신성도 관측했습니다. 오히려 케플러보다 4일이나 먼저 관측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왜 고려·조선의 천문학은 그렇게 발전했을까요. 천문학자들은 왜 예보를 잘못하면 중한 처벌까지 받았을까요.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하늘을 관측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는 2회에 걸쳐 고려 조선의 천문학을 공부해봅니다. 151회는 ‘케플러보다 4일 빨랐던 조선의 초신성 관측’입니다. 다음 주 방송인 152회는 ‘조선은 왜 천문관측에 목숨을 걸었을까’입니다.
    29 min
  • 150회 세종대왕도 막지못한 소주 한 잔의 유혹
    술을 좋아하십니까. 그것도 소주 한 잔, 어떻습니까. 요즘 저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지만, 흥미로운 통계가 있네요.
     지난해, 즉 2016년 성인 1인당 1년에 85병의 소주를 마셨다는군요. 전국적으로 1년에 팔린 소주가 무려 34억병이라니 대한민국은 가히 소주공화국이라 할 수 있겠네요. 궁금증이 생깁니다. 소주는 과연 언제부터 대한민국의 ‘국민술’이 되었을까요. 듣자하니 소주의 고향은 대한민국도, 중국도 아닌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이라고 하는데요.
     언제 누구손을 거쳐 이 땅에 들어왔을까요. 정답은 세계제국 몽골입니다. 몽골의 기마부대를 거쳐 고려 땅에 도착했답니다. 그렇게 들어온 소주는 단박에 고려와,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을 취하게 했다네요.
     오죽하면 세종대왕께서도 “소주 한잔의 유혹을 어찌 막겠느냐. 좀 삼가는 것은 좋겠지만…”이라고 말꼬리를 흐렸다는 군요. 소주 때문에 술병에 걸리고, 때로는 소주 때문에 죽고, 죽이고 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습니다. 심지어는 내연남녀가 짜고 백화주+소주 폭탄주를 본남편에게 마시게 해서 죽였다는 실록 기사도 있네요.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는 소주를 매일같이 마셔서 결국 술병으로 죽었다지요. 만약 적장자인 이방우가 태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2대임금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소주에 얽힌 요지경 풍속도를 살펴보려 합니다. 조선시대 소주의 도수는 40도를 넘어섰다는데 그것이 일제시대 때는 35도가 되고, 이제는 10도 중반까지 내려왔지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50회는 ‘세종대왕도 막지못한 소주 한 잔의 유혹’입니다.
    29 min
  • 149회 국호논쟁…대한민국이냐 고려공화국이냐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
    1948년 6월 7일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위원 30명은 무기명 투표 끝에 압도적인 표차로 ‘대한민국’을 국호로 의결했습니다. 그러나 ‘대한’이 국호로 쓰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1897년 고종(사진)이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대한(大韓)’이라 했습니다. ‘조선은 원래 중국의 책봉을 받은 기자조선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명나라 황제가 낙점해준 국호’여서 새로 탄생하는 황제국의 칭호로는 적당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고종은 “삼한(三韓)의 땅을 하나로 통합했으니 국호를 ‘대한’으로 정한다”고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야심차게 출발한 고종의 대한’은 한일병합으로 13년 만에 단명했습니다. 그러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국내외 독립투사들이 모여 임시정부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의합니다. 하지만 논쟁이 있었습니다. 망한 나라인 ‘대한’을 다시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다수결 끝에 ‘대한민국’으로 낙착됐지만 ‘고려’와 ‘조선’을 선호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이 논쟁은 1948년 단독 정부 수립 때도 고스란히 재현됩니다. 제헌국회 의장인 이승만은 “1919년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이니 당연히 ‘대한민국’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고려민국’ 혹은 ‘고려공화국’을 지지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중국의 지배를 받던 조선의 국호는 언급할 가치가 없고, 한(韓)은 한반도 남부의 부락국가, 그것도 삼한 분립의 의미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대한은 일제에 의해 망한 치욕의 국호라 폄훼했습니다.
    일부 사학자들은 ‘대한’의 대(大)는 대영이나 대일본처럼 제국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야말로 거란과 몽골의 침략을 꿋꿋하게 이겨낸 완전한 통일국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을 초지일관 앞세웠습니다.
    ‘국호 문제는 추후에 적절한 시기에 재논의하자’는 이승만의 설득이 통해 ‘대한민국’으로 최종 결정됐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대한민국’ 국호에 이런 흥미진진한 사연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남북한이 통일되면 어떨까요. 새로운 국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한번쯤 생각해봅시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49회는 ‘국호논쟁의 전말…대한민국이냐, 고려공화국이냐’입니다.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블로그 http://leekihwan.khan.kr/
    34 min
  • 148회 허황옥, 평강공주…호화혼수의 원조들
    요즘 자식을 키워 대학 보내고, 취직시키고, 결혼까지 시키려면 얼마나 들까요.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렇다면 조상들은 어땠을까요.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혼인할 때 재물없이 보내는 것이 예법”이라는 고구려 시대 기록도 있지만 어디 그렇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 유명한 평강공주의 예가 있습니다. 바보 온달과 혼인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가출한 평강공주의 팔꿈치에 금팔찌 수십개가 걸려있었습니다. 평강공주가 훔쳐서 나온 것일까요. 아마도 어머니(왕비)가 준 것이 아닐까요.
    부모 속을 긁어놓고 가출하는 딸에게 남몰래 혼수품을 마련해준 것은 아닐까요. 마침내 온달과 결혼한 평강공주는 이 금팔찌를 팔아 재산을 마련했답니다. 그렇다면 호화혼수의 원조는 평강공주였을까요. 아닙니다. 비조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이유타국 공주로 가락국 김수로왕에게 시집온 16살 허황옥이었습니다. 허황옥의 부모 역시 이역만리 가락국까지 시잡가는 철부지 딸을 위해 엄청난 양의 혼수품을 보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신라 신문왕은 귀족 김흠운의 딸을 데려오면서 무려 수레 300대의 혼수품을 보냈습니다.
    상상해보십시요. 서라벌 시내에 늘어선 300대의 혼수품…. 조선시대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혼수품 때문에 혼인식을 올릴 수 없던 백성들이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세종 임금이 한성판윤(서울시장)과 감사(도지사)에게 “시집장가 못가는 백성에게 혼수품을 마련해주라”는 특명을 내렸겠습니까. 실록 등을 들춰보면 호화혼수 때문에 생긴 요지경 풍속이 부지기수로 등장합니다. 18세기 실학자 이덕무의 한탄이 귓전을 때립니다.
    “혼수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딸을 낳으면 집을 망칠 징조라 한다. 어린 딸이 죽으면 사람들이 얼마의 돈을 벌었다는 말로 위로한다. 인륜과 도덕이 여지없이 타락한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딸이 죽으면 “혼수 마련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위안 삼았다니 얼마나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결혼식 비용, 얼마나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작은 결혼식이 유행이라지요.
    37 min
  • 147회 데라우치 꽃과 사내초, 그리고 청와대 미남석불
    사내초(寺內草)를 아십니까. 청와대 미남석불을 아십니까.
    해방된 지 무려 72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입니다. 그런데 이 사내초나 미남석불에 식민지 조선의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穀·1852~1919)’의 체취가 남아있다는 것이 심각합니다. 사내초는 데라우치의 일본어(사내·寺內) 발음이지요. 말하자면 데라우치 꽃이고 학명도 여전히 ‘데라우치아(Terauchia)’로 시작됩니다. ‘평양지모’니 ‘조선화관’이니 하는 어엿한 우리말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식물학자 나카이 타케노신(中井猛之進·1882~1952)이 “데라우치 총독 각하 덕분에 (식물조사를 벌였으니) 감복하고 있으며, 본 식물을 각하에 바쳐 길이 각하의 공을 전하려 한다”며 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총독각하의 영원한 종입니다. 딸랑딸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청와대 미남석불엔 왜 데라우치의 체취가 묻어있다는 걸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데라우치가 조선총독으로 한창 권세를 누릴 때인 1912년 어느날 경주를 방문했더랍니다. 이때 어딘가에 앉아있던 석불좌상을 보고는 군침을 흘렸답니다. 모르긴 몰라도 “스바라시(すばらしい·굉장하다)”했겠죠.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경주금융조합이사 고다히라 료조(小平亮三)가 순간 ‘총독 각하의 의중’을 읽었습니다. 고다히라는 데라우치가 일본출장을 간 틈에 잽싸게 그 불상을 경성(서울)의 왜성대 총독관저로 옮겨놓았습니다. 하도 잘생겨서 ‘미남석불’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 불상은 1939년 총독관저가 지금의 청와대로 이전하자 함께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 미남불상은 1993~94년 구포역 열차전복·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서해 페리호 침몰·성수대교 붕괴·충주호 유람선 화재 등 참사가 이어지자 괴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나타납니다. 기독교 신자인 김영삼 대통령이 불상을 치워버리자 사고가 빈발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청와대는 부랴부랴 출입기자들에게 미남석불을 공개하는 촌극을 빚었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47회는 ‘데라우치 꽃과 사내초, 청와대 미남석불’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블로그 http://leekihwan.khan.kr
    34 min
  • 146회 신라 연습생 키운 연예기획자 ‘우륵’
    가야국 출신 음악가인 우륵이 있습니다. 나라가 멸망 직전에 놓이자 신라로 망명한 인물입니다. 우륵의 음악에 빠진 신라 진흥왕은 전도 유망한 음악가 3명을 우륵에게 보냈습니다. 말하자면 가야 출신 연예기획자인 우륵에게 연습생 3명을 보낸 것입니다.
     우륵은 오디션을 통해 3명의 재능을 파악한 뒤 노래 담당, 춤 담당, 악기 담당 등으로 맹연습을 시켰습니다. 치열한 연습을 통해 신라 그룹이 탄생했습니다. 우륵은 진흥왕 앞에서 자신이 키운 신라밴드의 데뷔 무대를 치렀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진흥왕은 만족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륵 덕분에 신라 최고의 아티스트가 된 3명이 우륵이 작곡한 작품 12곡을 “음란하고 번잡하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3명은 스승의 12곡을 5곡으로 줄여 편곡해버립니다. 우륵은 분기탱천했습니다. 그러나 제자 3명이 편곡한 5곡을 들어본 뒤에는 눈물을 흘리며 “정말 잘만들었다”고 칭찬했습니다. 왜 제자들은 스승의 곡을 멋대로 편곡했을까요.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편곡을 했는데도 신라 조정에서는 “가야를 망하게 한 저 음악을 연주해서는 안된다”로 아우성쳤습니다. 진흥왕이 “괜찮다. 음악이 나라를 망쳤겠냐. 임금이 망친 거지”라 변호했습니다. 왜 신라인들은 우륵의 음악을 두고 “나라를 망친 음악”이라 했을까요.
     대체 음악과 정치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비판한 것일까요. 이쯤에서 공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다스려진 세상의 가락은 편안하고 즐겁고 화평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의 가락은 슬프고 시름겹고 그 백성은 고달프다.”
     지난 1995년 광주 신청동 유적에서 2000년 전 사람들이 연주했을 법한 현악기와 타악기가 각 1점씩 확인되었습니다. 하늘제사, 조상제사를 지내고 혹은 추수를 마치고 파종을 끝낸 뒤 한바탕 잔치를 벌였던 사람들에게 음악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46회입니다.
    30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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