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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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pisodes

  • 135회 사람제사와 성종 임금의 흑역사
    얼마전 경주 월성의 성벽 기단부에서 인골 2기가 발견됐습니다. 그저 휩쓸려 들어가 묻힌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람제사의 희생물로 그곳에 묻힌 것입니다. 성벽을 튼튼하게 만든다는 명목으로 제사상을 차렸고, 두사람이 희생물이 된 것이지요. 인골이 발견된 성벽의 연대가 5세기 무렵이었으니까 1500년 전 신라의 상황이네요. 이게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 2000년에는 경주의 한 우물에서 10살짜리 어린아이 인골이 거꾸로 박힌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제사에 사용된 다른 동물들의 뼈가 수두룩했고, 제사용 토기들도 즐비했습니다. 국가적인 제사행위가 있었다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이 불쌍한 어린아이 역시 제사의 희생물이 된 거죠. 이 인골이 묻힌 연대는 9세기 무렵이니까 1100년 정도 된 것인가요.
     가만 생각해보면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랬으니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어땠겠습니까. 사람제사의 공포가 채 가시지 않았겠지요. 고려때도 조선때도 뭔가 민심이 흐트러질 때마다 사람제사의 유언비어가 돌았습니다. 어린아이를 희생물로 바쳐야 건축물이 튼튼해진다는 따위의 소문들이었죠. 심지어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추앙받는 성종 시대에도 사람제사의 소문이 퍼졌습니다. ‘성종 임금의 흑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그리고 왜 옛 사람들은 생사람을 잡아 제삿상에 바쳤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가 전해드립니다.
    35 min
  • 134회 신석기 시대 명품팔찌공장 동삼동 패총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물 박물관이 있습니다. 기원전 6000~기원전 2000년 사이 무려 4000년간 신석기인들의 삶을 복원해볼 수 있는 부산 동삼동 패총유적입니다.
     패총이란 조개무지, 즉 신석기인들이 먹고 버린 조개들의 무덤입니다. 석회질로 된 조개껍데기는 토양을 알칼리성으로 바꾸기 때문에 패총 안에 들어있는 유구와 유물들이 잘 썩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삼동 패총에서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유물들이 쏟아졌습니다. 특히 이곳은 당대 명품팔찌의 대량생산 공장이 존재했던 곳입니다.
     1999년 발굴에서는 1500여점의 팔찌가 확인됐는데, 그 중에는 완제품도 있었고, 제작도중에 깨졌거나 아니면 제작하기 전의 조개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공장이었다는 얘기죠. 흥미로운 것은 광안리산 명품인 투박조개로 만든 이 팔찌들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동삼동 패총에서는 곰을 숭상한 사람들답게 흙으로 만든 곰인형이 확인됐고, 세밀한 형상은 과감히 생략한채 특징만 묘사한 사슴그림 토기도 보였습니다.
     당대 신석기인들의 예술감각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무엇보다 동삼동 패총은 한국 고고학자들의 애환과 영욕이 담긴 발굴장이었습니다. 발굴역량이 부족했던 1960~70년대 숱한 고고학도가 동삼동에서 발굴을 배웠으며,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로라하는 대표학자들로 성장했습니다.
     동삼동 패총에 읽힌 흥미진진 이야기, 한번 들어보십시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34회는 ‘신석기 시대 명품팔찌공장 동삼동 패총’입니다.
    35 min
  • 133회 들입다 바드득 안으니···19금 노래에 빠진 김천택
    김천택의 가곡집 〈청구영언〉 하면 어떤 노래가 생각나십니까.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와 고려 충신 정몽주의 ‘단심가’ 같은 고고한 노래가 떠오르겠지요.
     뭐 국어책에서 배웠으니 당연히 그럴 겁니다. 옛 성현들의 노래를 한글로 소개했다는 점에서 〈청구영언〉의 가치는 필설로 다할 수 없지요.
     그런데 이 〈청구영언〉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노래들이 잇달아 발견됩니다. 이른바 ‘만횡청류’ 노래인데요. 시쳇말로 ‘남녀상열지사’ 노래, 아니 지금으로 치면 19금 노래들입니다. 한 두 곡이 아닙니다. 뭐 ‘들입다 바드득 안으니… 빨간 치마 걷어 올리니…’ 뭐 이런 노래가 나오지 않나, ‘마흔살에 계집질하니… 이 재미 알았던들 기어 다닐 때부터 했겠네’ 하는 노래까지 있습니다. 심지어는 바람피우는 유부녀에게 ‘니 남편한테 이른다. 니가 김서방하고 삼밭에서 쓰러진 행태를…’ 하는 적나라하게 노랫말까지 모아두었습니다. 당대 조선사회에서 ‘음란하기 짝이 없는 난세지음’의 딱지가 붙은 노래들이었습니다.
     김천택도 그걸 모를 리 없었습니다. 고심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김천택은 왜 이 음란하기 짝이 없는 ‘19금’ 노래에 푹 빠졌을까요.
     요즘 국립한글박물관은 김천택의 〈청구영언〉과 관련된 특별전을 열고 있습니다. 특별전이 열리는 김에 당대 ‘아양지계’라는 밴드까지 결성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김천택의 삶을 돌아보고, 특히나 그가 19금 노래에 빠진 이유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33회는 ‘들입다 바드득 안으니…19금 노래에 빠진 김천택’입니다.
    32 min
  • 132회 감악산비는 제5의 진흥왕순수비다?
    진흥왕순수비. 한국사를 배울 때 놓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삼국 가운데 약소국이던 신라가 진흥왕 때 낙동강 서쪽의 가야세력을 정복하고 북쪽으로는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뒤 함경도 이원지방까지 진출한 다음 새롭게 개척한 영토를 순행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으로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순수비는 창녕비ㆍ북한산비ㆍ마운령비ㆍ황초령비 등 4곳입니다. 한결같이 개척한 새로운 영토 중에서도 요충지에 속하는 지점에 건립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4곳 뿐일까요. 역사학자들은 진흥왕순수비가 더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수상한 곳이 있습니다. 1980년대 초 학계에 보고된 감악산비입니다. 임진강유역의 요충지, 임진강-파주-서울을 잇는 감악산(해발 675미터) 정상에 심상치않은 비석이 서있습니다. 생김새는 북한산 순수비와 닮았고, 12~13자의 글자의 흔적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흥왕순수비요!”하는 확증이 없기에 그냥 조심스럽게 추정해볼 뿐입니다. 이 비석은 1976년 감악산을 관할하는 군부대 소령의 눈에 띄었고, 마침내 학계에 보고됐습니다. 누구든 감악산에 가면 이 심상치않은 비석을 반드시 친견해보시기 바랍니다. 아 참, 철원에도 진흥왕순수비의 전설이 깃든 곳이 있습니다. 고석정입니다. 이 역시 시간이 나면 한번 찾아가보십시요.
    30 min
  • 131회 간송 전형필과 야마나카의 문화재 전쟁 3막
    최근 일제강점기 고미술 무역상인 ‘야마나카 상회’를 다룬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야마나카 상회를 거쳐 판매된 석조 및 도자 문화재의 도록 사진과 관련 기록을 정리한 논문입니다. 야마나카 상회 관련 서적을 들춰보니 간송 전형필 선생과 몇차례 맞대결을 벌인 기록이 있었습니다. 논문이 나온 김에 간송과 야마나카 상회가 펼친 문화재 전쟁을 한번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간송도 조선에서 알아주는 부자였지만 당대 글로벌 거대자본이던 야마나카 상회와는 견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간송은 당당히 맞섰습니다. 첫번째 야마나카 상회가 개최한 경매에서 석조물 4점을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첫번째 만남에서는 판정패였습니다. 어떤 이유때문일까요. 하지만 두번째 대면에서는 승리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감상할 수 있는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첩을 야마나카 상회로부터 구입했습니다. 이것도 한편의 드라마 같은 승부였습니다. 이제 1승1패 상황. 간송은 3차전을 벌입니다. 한편의 대서사시 같은 싸움이었습니다.
     참기름병으로 쓰이다가 1원에 팔렸고, 이것이 60-600-3000원으로 급등했다가 결국 1만4580원까지 오른 조선백자입니다. 간송은 야마나카 상회와의 불꽃튀기는 경매전 끝에 승리를 거둡니다. 과연 어떤 백자이기에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 대결을 벌였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31회는 ‘간송 전형필과 야마나카의 문화재전쟁 3막’입니다.
    29 min
  • 130회 향토 모임이 찾아낸 ‘충청판 광개토대왕비’
    ‘충청판 광개토대왕비’ 이야기를 아십니까. 1979년 충북의 어느 향토연구회 답사모임 사람들이 발견한 고구려비입니다. 이름하여 중원 고구려비입니다.
     처음에는 신라 진흥왕이 영토를 개척한 기념으로 세운 순수비인줄 알았답니다. 그러나 당대 최고전문가들이 머리를 싸매어 해독한 결과 놀라운 내용임이 밝혀졌습니다. 고구려가 신라를 형제국으로 삼았으며,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귀족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고구려군 지휘관이 신라영토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글귀도 있었습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두 모여 이 비문을 언제 세웠으며, 또 정확한 내용은 무엇인지 해독하려 나름 심혈을 기울였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주민들은 석독에 쩔쩔매는 학자들을 향해 “아니 뭐 대박사(大博士)는 오지 않고, 죄다 소박사(小博士)만 왔나보다”라 비아냥댔답니다. 어떤 학자의 꿈 속에 비문의 글씨가 보였다니 얼마나 엄청난 스트레스였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라의 영토에 고구려가 비문을 세웠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신라 임금을 ‘매금’이라 일컫고 동생으로 삼았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대체 이 비문이 세워졌을 5세기 중후반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30회는 ‘향토 모임이 찾아낸 충청판 광개토대왕비’입니다.
    29 min
  • 129회 쫓겨난 보물. 신라 황금귀고리의 기구한 팔자
    우리나라 보물과 관련된 기막힌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1933년 마을주민이 밭을 갈다가 발견한 경주 노서리 215번지 유물입니다. 그러나 주민이 수습한 것은 반쪽이었습니다. 신고를 받고 현장을 찾은 일본인 학자 아리미쓰가 나머지 반쪽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마을주민이 찾은 반쪽은 서울(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나머지 반쪽은 도쿄(국립제실박물관)으로 갔습니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거죠. 왜 그렇게 흩어진 것일까요.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이듬해인 1966년 문제의 노서리 유물 반쪽이 반환됩니다. 두 유물이 합체됐겠죠. 이듬해인 1967년 문화재위원회는 그렇게 합쳐진 유물 중 팔찌(454호), 귀고리(455호), 목걸이(456호) 등을 보물로 지정합니다.
     그렇다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까요. 아닙니다. 귀고리가 문제였습니다. 이 귀고리는 42년 뒤 보물의 지위를 잃어버립니다. 즉 보물 455호의 목록에 오른 유물은 노서리 출토 귀고리가 아닌 ‘황오동 출토 귀고리’로 둔갑해버립니다. 출토 때부터 반으로 나뉘었고, 서울과 도쿄로 흩어졌다가 천신만고 끝에 해후했는데, 이제는 더 잘 생기고 예쁜 배우자를 만났다고 소박당한 꼴입니다. 졸지에 보물의 지위를 잃어버린 노서리 금귀고리는 지금 이 순간도 천덕꾸러기 신세입니다.
     1966년 반환 이후 단 한번도 수장고 밖을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유물 사진 역시 흑백으로만 남아있습니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29회 팟캐스트가 전합니다.
    31 min
  • 128회 전곡 구석기 유적과 후지무라 조작사건
    이번 주는 27만 년 전의 세계로 되돌아가겠습니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한탄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선사시대의 이야기입니다. 해마다 5월이면 이곳에서 구석기축제가 열립니다. 올해는 5월3일부터 7일까지 열린답니다. 27만 년 전 구석기 시대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이고, 선사박물관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되어 있으니 한번 참여해보시기 바랍니다.
     궁금증이 생기실 겁니다. 왜 하필 27만 년 전 세계냐. 그걸 어떻게 아느냐. 뭐 이런 질문들을 하실 겁니다. 사실 한탄강 임진강은 화산활동이 빚어낸 강들입니다. 용암이 흘러 두 강을 만들었고, 고인류는 문명의 젖줄인 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았습니다.
     1977년 이곳에서 수상쩍은 돌멩이 하나가 확인되면서 이곳이 구석기 시대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돌멩이는 구석기 시대의 맥가이버칼이었습니다. 전문용어로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라 하지요.
     세계적인 구석기학자가 방문해서 출토된 돌멩이와, 이 돌멩이가 나온 토층을 분석한 결과 27만 년 전 쯤의 것이라 판정했습니다. 이후 이 지역에서 이와같은 돌멩이, 즉 주먹도끼가 상당수 확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27만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과연 지금 우리들의 조상일까요. 이곳은 왜 구석기인들의 터전이 되었을까요.
     또 한가지 이곳에서 27만 년 전의 구석기 유적이 확인되자 일본 열도 또한 구석기 붐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붐은 파국을 불렀습니다. 구석기 유적조작사건이 일어나 일본고고학계가 쑥대밭이 된 것입니다. 과연 일본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28회는 ‘전곡 구석기 유적과 후지무라 조작사건’입니다.
    31 min
  • 127회 고종의 비밀정보기관과 하얼빈 의거의 수상한 연관성…
    고종은 망국의 임금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하기야 500년 왕조가 자기 대에서 끊겼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최근에는 고종이 그나마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쓴 증거가 여럿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랬겠지요. 쇠락한 나라의 임금으로 사방에서 으르렁대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그저 힘없이 나라를 바친 임금은 아니었겠지요. 그렇게 믿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7회는 ‘고종의 비밀정보기관과 하얼빈 의거의 수상한 연관성…’입니다.
    32 min
  • 126회 조선판 ‘히딩크’ 박연이 하멜을 만났을 때
    지금으로부터 364년 전 제주도에서 드라마와 같은 만남이 있었습니다.
     1653년 네덜란드인으로 이미 귀화했던 박연(벨테브레이)과, 난파된 배에서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닿은 하멜 일행이 조우한 것입니다. 이미 조선인 아내와 아이까지 두었던 박연은 “매우 유감스럽지만 조선법으로는 도저히 돌아갈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역만리에서 고향사람을 만난 박연과 하멜은 ‘옷깃을 적실 때까지 울었다’고 합니다.
     이미 조선사람이 다 된 박연에 비해 하멜은 운신의 폭이 좁았습니다. 30여 명의 동료들이 함께 있었으니 의견을 맞출 수도 없었습니다. 이미 조선말을 배우고, 조선 풍습에 익숙해진 박연은 정식으로 무과(과거)를 통과해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박연은 조선에 새로운 화포제작법을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멜은 달랐습니다.
     일행 중 일부가 마침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에게 ‘돌아가게 해달라’는 시위까지 벌였습니다. 네덜란드인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을 만약 청나라 조정이 안다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북벌을 계획하던 효종 임금의 야심이 들통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선은 청나라 사신들에게 뇌물을 주어 입단속을 시키는가 하면 하멜 일행에게 유배형을 내렸습니다. 이후 7년간 전남 강진에서 유배를 당했던 하멜일행은 결국 탈출하고 맙니다. 조선땅을 밟은 지 무려 13년여만의 일입니다. 하멜은 그 13년 여 동안 받지못한 임금을 청구하려고 보고서를 씁니다.
     그것이 바로 하멜표류기입니다. 반면 조선에 정착한 박연은 조선판 히딩크의 역할을 해낸 뒤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나 박연의 후손이 어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6회, ‘조선판 히딩크 박연이 하멜을 만났을 때’입니다.
    33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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