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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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pisodes

  • 145회 ‘일필휘쇄’ 겸재 정선의 ‘졸작열전’
    겸재 정선(1676~1759)을 향한 평가는 극찬 일색입니다.
    “겸재는…조선중화사상에 따라…조선고유색을 현양한 진경문화를 주도한…진경산수화법의 창시자다.”
    심지어 ‘민족적 자존심을 지킨 화성(畵聖)으로 추앙해야 할 인물’로도 꼽힙니다. 신격화도 이런 신격화가 없습니다. 무오류의 위인전을 읽는 듯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합니다. 지나친 신봉은 외려 겸재의 진정한 가치를 흐리게 하지는 않을까요.
    장진성 서울대교수(고고미술사학과)의 논문(‘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방식’)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겸재는 쓸어내리듯 휘두른 빠른 붓질로 단번에 그리는 ‘일필휘쇄(一筆揮灑)’ 필법으로 유명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겸재의 절친인 이병연은 “내 친구 정선은 그림 그리는 흥취가 날 때 붓이 없으면 내 손에서 붓을 빼앗아…쓸어내리듯 휘두른 붓질이 더욱 방자해졌다”고 평했습니다.
    문인 이규상은 “겸재의 그림은 생동감이 넘치지만…붓놀림은 조악한 기운을 띠었다. 그림 요구에 응해…붓을 쓸어내리듯 휘둘렀다”고 전했습니다. 오죽하면 “그림 주문량이 삼대밭처럼 많았고, 겸재가 사용한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조영석)라는 평가가 있을까요. 조선 후기 문인 권섭의 평가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정선이 피곤하여 아들이 대신 그렸는가…못 그린 그림도 있구나.”
    권섭은 정선의 몇몇 그림을 보고 실망한 나머지 ‘혹시 대필작품이 아니냐’고까지 의심한 것이다.
    장진성 교수는 그 예로 몇몇 작품을 꼽습니다. 삼성미술관 리움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2점의 ‘내연산삼용추도’ 그림을 보면 어떨까요. 리움 작품이 겸재 특유의 힘찬 필획을 자랑하지만, 박물관의 작품(그림)은 어쩐지 반복적이고 형식적이랍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중인 겸재의 두 ‘정양사’ 작품에도 질 차이가 역력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중년기에 그림 주문이 많아지자 매우 태만한 필법으로 그렸다”는 조영석의 평가가 눈에 띕니다. 그럴 만 했습니다.
    겸재의 그림값은 중국시장에서도 청나라 1급 궁정화가 1년치 연봉(은 130냥)에 이를 정도로 고가였습니다. 당연히 그림 주문이 폭주했을 터이고, 더러는 ‘일필휘쇄’ 필법으로 설렁설렁 그린 것들도 있었을 겁니다. 겸재 또한 인간이 아닙니까. 겸재를 둘러싼 지나친 신격화를 걷어내니 오히려 겸재의 인간적인 풍모가 배어나지 않습니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45회에서 ‘일필휘쇄 겸재의 졸작열전’을 들어보십시오.
    34 min
  • 144회 “개 혀?” 다산 정약용의 개고기 사랑법
    “개 혀?” 충청도 사투리가 웃음을 자아냅니다.
    “보신탕(개고기) 먹을 줄 아느냐”는 질문이지요, ‘개 혀?’의 복수형도 있답니다. ‘개들 혀?’랍니다. 그런데 이쯤해서 충북 사람들이 딴죽을 겁니다. ‘개 혀?’는 엄밀히 말해 충청남도 사투리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충북에서는 뭐라고 하느냐고 물으니 이런 대답이 나옵니다. “개 햐?” 물론 우스갯소리지요.
    사실 개고기는 동양만의 식습관은 아니었습니다. 1926년 1월 8일 동아일보에는 흥미로운 해외토픽이 실려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위생상 해롭다고 떠드는데 독일 작센 지방에서는 매년 평균 5만두의 개가 식용으로 팔리고, 개고기 전매업자까지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차츰 ‘개고기는 동양의 야만스런 식습관’이라는 이미지로만 굳어져 갔습니다.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독일의 빌헬름 2세로부터 사냥개를 선물받은 뒤 보냈다는 감사편지는 인구에 회자됩니다. “맛있게 잘 먹었소이다.”
    그런데 2700년이라는 유구한 세월동안 끈질긴 사랑을 받았던 복날 개고기 문화가 눈에 띄게 사양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국내에서도 개고기 문화의 상징이던 성남 모란시장의 식용견 점포 거리는 파리를 날리고 있답니다. 보신탕의 간판을 단 음식점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반려견 인구가 급증하면서 ‘개고기 문화=야만’이라는 인식이 퍼진 결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혀?’하는 말이 ‘극혐’의 단어로 사전에 등재될 날이 멀지 않았다. 가만 보니 성질이 흉악한 사람을 ‘개고기’라 일컬은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자칫 개고기 음식을 먹다가 ‘개고기’란 욕설을 들을 판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44회는 “개혀? 다산 정약용의 개고기 사랑법입니다.”
    30 min
  • 143회 일본 장관 다나카의 경천사탑 약탈사건
    “일본의 특사 다나카 자작(궁내대신)의 흉계로…무기를 가진 일본인들이 경천사탑을 급습해서 탑을 해체하여 실어갔다고 한다.…”
     1907년 3월7일 〈대한매일신보〉는 해괴망측한 단독보도가 씁니다. 1907년 1월 대한제국을 방문했던 일본의 궁내대신(장관) 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가 경천사 10층석탑을 무단으로 해체해서 일본으로 반출했다는 충격적인 기사였습니다. 이 대리석 탑은 높이만 13m에 이르는 섬세한 부조의 걸작 석조유물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탑을 송두리째 해체한 뒤 무단반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인 어네스트 베셀이 발행한 〈대한매일신보〉는 이날의 1보를 시작으로 6월까지 3개월 동안 끈질기게 이 야만적인 약탈행위를 연속 보도합니다. 이 약탈사건은 지각있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손가락질 받았고, 결국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됩니다.
     한일병합 이후 데라우치 마사다케 제1대 조선총독까지 나서 “탑을 조선의 현장으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경천사 10층 석탑은 11년 9개월 만인 1918년 11월 15일 반환됩니다. 다나카가 반출할 당시의 모습 그대로, 즉 포장도 풀지 않은 채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탑부재의 상태는 끔찍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와 일본 신문인 〈이륙신문〉,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영자지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 〈코리아리뷰〉, 〈저팬 크로니컬〉, 프랑스 신문인 〈쿠리에 드 라 콩페랑스〉 등에 실린 기사를 토대로 경천사 10층 석탑 약탈사건의 전모를 밝혀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43회는 ‘일본 장관 다나카의 경천사탑 약탈사건’입니다.
    36 min
  • 142회 인조는 과연 광해군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인조반정 세력이 광해군을 쫓아낸 명분은 크게 3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폐모살제였습니다.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10년간이나 유폐시킨 죄와 8살짜리 이복동생(영창대군)을 죽인 죄 등을 물었습니다. 또하나는 임진왜란으로 불탄 궁궐을 중수하면서 백성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는 죄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배반하고 오랑캐(후금)와 화친한 죄였습니다.
     세가지 죄상 중 첫번째, 즉 폐모살제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큰 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두번째 궁궐의 중수도 보기에 따라서는 잘못된 내정으로 지탄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의 업적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의 책임자로서 전국을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또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무릅쓰고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의성 허준의 동의보감 편찬을 도와줌으로써 질병으로 속절없이 죽어나간 백성들을 구제했습니다.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 등 명망가들을 등용함으로써 당파색을 줄인 업적도 만만치 않으며, 궁궐 중수도 좀 무리한 감은 있지만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은 바로 ‘명나라에 대한 배은망덕’입니다.
     광해군은 과연 오랑캐 후금에 굴복한 외교정책을 폈을까요. 아닙니다. 광해군은 욱일승천하는 후금(청나라)과 다 쓰러져 가는 대국(명나라)와 줄타기 외교로 조선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을 쓰레기로 손가락질 하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이후, 조선은 어찌 되었을까요.
     지난주 인조반정 이후 폐위되어 유배지를 전전했던 광해군의 삶을 조명했습니다. 이번 주는 광해군이 쫓겨난 후의 조선을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42회는 ‘인조는 과연 광해군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입니다.
    36 min
  • 141회 조선판 쇼생크 탈출-광해군 일가의 비극
    1623년 5월 22일 강화도 교동에서 깜짝 놀랄 사건이 일어납니다.
     인조반정으로 쫓겨나 위리안치된 광해군의 아들(폐세자 이질)이 땅굴을 파서 심야탈주극을 시도하다가 붙잡힌 사건입니다. 폐세자 부부가 26일간 가위와 인두로 파낸 땅굴의 길이는 70자, 즉 21m였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조선판 쇼생크탈출이었습니다.
     폐세자는 무사히 탈출했지만 그만 길을 잃고 헤매다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조정은 벌집 쑤셔놓은 듯 발칵 뒤집혔습니다. 페세자를 죽여야 한다는 공론이 모였습니다.
     ‘더는 골육간 참변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인조와 일부 신료들의 부정적인 견해도 있었습니다.
     ‘죽이자’는 공론에 참여했던 신료들 가운데 번복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근을 잘라야 한다’는 반정 공신들의 주장에 페세자는 자진의 명을 받았습니다.
     페세자는 ‘본시는 한뿌린데 어찌 이다지 박대하는고. 새장을 벗어나 마음대로 왕래하고파’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폐세자의 부인이 목을 맸고, 광해군의 부인마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광해군 혼자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6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광해군을 박정하게 대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어떤 싸가지없는 궁비는 광해군이 꾸짖자 ‘영감이 무슨 낯으로 날 야단치냐’고 쏘아붙였습니다. 얼핏 ‘사이다 발언’으로 치부될 수도 있었지만 당대의 여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런 궁녀는 반드시 하늘의 재앙을 받을 것’이라는 쑥덕공론이 나왔습니다. 광해군은 쫓겨난 후 18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광해군과 그 일가의 최후를 한번 들여다 보았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41회는 ‘조선판 쇼생크 탈출 광해군 일가의 비극’입니다.
    36 min
  • 140회 오프더레코드까지 미주알고주알 보도한 조선시대 신문
    지난 주엔 1577년 8~11월 사이 약 100일간 발행된 민간인쇄신문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그러나 이 100일간의 신문은 활자로 대량 인쇄되어 구독자인 사대부들에게 유료로 배포된 조보였습니다. 그런데 문헌기록을 보면 조선조 중종부터 조보가 발행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선조시대에 잠깐 발행된 민간인쇄 신문과는 달리 승정원 주서가 편집한 조보내용을 베껴서 각 관청에 배포한 것입니다.
     이런 조보에도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었습니다. 당연하지요. 각 도에서 올라온 행생 보고서와 임금과 신료들을 질타한 상소문, 그리고 임금이 내린 반성문까지 그대로 실었으니까요. 지금 기자들이 취재해서 보도한 정치·사회면 기사와 다를바 없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임금이 ‘오프더레코드’를 건 기사까지 실었답니다. 심지어 국가기밀에 해당되는 내용까지 마구 게재해버리는 바람에 ‘보도지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보도지침’ 따위에 관심이 없어 그냥 기사로 내보내는 승정원 주서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국왕의 건강 상태까지 미주알고주알 실은 자도 있었습니다.
     기사내용을 보면 웃깁니다. ‘주상께서는 여색을 삼가라’는 상소문까지 그대로 내보냈습니다. 세자빈의 간택날짜까지 어김없이 보도했으며, 당대의 권세가를 탄핵하는 상소문까지 신속보도했습니다.
     심지어 선조는 “상소문에 등장하는 ‘참 나쁜 신료 둘’은 누구를 지칭하느냐”고 묻고는 이 두 사람의 이름 만큼은 조보에 싣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렸답니다. 또 어떤 조보는 신임 이조판서의 기사를 실었는데 이 기사를 읽은 대소신료들이 ‘어찌 그런 사람을 이조판서로 발탁했느냐’고 공론을 모으는 바람에 결국 낙마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지상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낙마한 셈이지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40회는 ‘오프더레코드까지 미주알고주알 보도한 조선시대 신문’입니다.
    38 min
  • 139회 1577년 선조는 왜 신문 폐간을 명했을까
    1577년 11월28일 선조가 분기탱천합니다. “어떤 자가 내 허락 없이 조보(조선시대 관보)를 발행했는가. 인쇄·배포한 자와 그것을 허가해준 자 모두를 색출하라”는 명이었습니다. 서슬 퍼런 선조의 명에 따라 30여 명의 조보인쇄발행업자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그해 8월부터 약 100일간 민간인이 인쇄·발행·배포한 조보는 약 100일 만에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시대 조보는 단순히 행정소식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임금과 대신들의 잘못을 따지는 상소문과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 올리는 보고문, 그리고 임금 스스로의 책임론까지 고백하는 글까지 그대로 실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격인 승정원의 주서(7급 공무원)이 골라 편집한 것을 여과 없이 게재한 것입니다. 그러니 요즘의 신문을 방불케 하는 고발 및 현장기사가 생생하게 실린 것입니다. 원래 조보는 중앙 및 지방 관청에서만 필사본으로 돌려보았습니다. 그런데 1577년 8월 서울의 민간업자들은 의정부에 “조보를 활자로 대량인쇄해서 경향 각지의 사대부들에게 유료로 배포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신청서를 냅니다. 의정부도 사헌부의 품의를 받아 “그러라”고 허락해줍니다. 선조는 약 100일이 지나서야 이 같은 사실을 알고 격노했습니다. 민간인쇄업자가 인쇄한 뒤에 구독료를 받고 판 이 조보에는 어떤 내용이 실려 있을까요. 지난 4월 민간인쇄조보가 발행되던 바로 1577년 11월의 조보 8쪽이 발굴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깜짝 놀랍니다. 요즘 언론의 고발기사와 르포기사는 저리가라 입니다. 과연 어떤 기사가 실려 있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39회는 ‘1577년 11월 28일 선조는 왜 신문폐간을 명했을까’입니다.
    39 min
  • 138회 한마디 농담으로 세운 나라
    중구삭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말은 쇠(金)를 녹인다는 사자성어입니다.
     흔히들 유언비어의 무서움을 알려주는 말이고, 여론의 무서움을 시사하는 성어입니다. 어쨌든 말(言)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는 “말(舌)은 네 마리의 말(馬)이 끈 마차(駟)보다 빠르다”(駟不及舌)는 성어가 일러줍니다. 천하의 성인인 공자도 제자앞에서 농담 한마디 잘못했다가 곤욕을 치렀습니다. 정색하고 따지는 제자앞에서 “농담이야! 농담!”하며 쩔쩔 맸습니다. 연산군은 술자리에서 한 승진약속을 지켰습니다.
     중국 주나라 성왕과 코흘리개 동생(우)의 일화를 전하면서 “군주는 언제 어느 순간이라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연산군이 인용한 주나라 성왕의 농담은 가히 ‘농담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13살 짜리 어린 천자는 동생하고 소꿉장난 하면서 “내가 너에게 주나라의 노른자 땅을 봉지로 내주겠다”고 장난쳤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모든 사실을 기록하던 사관은 “빨리 약속을 지키라”고 채근했습니다. 성왕이 “그저 농담이었을 뿐인데 왜 그러느냐”고 항변했지만 사관의 대꾸는 추상같았습니다. “천자는 농담하면 안된다. 말을 뱉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할수없이 성왕은 동생에게 중국의 한가운데 땅을 봉지로 내주었습니다.
     그 제후국이 중국 중원에서 건국한 춘추시대 진(晋)나라입니다. 농담한마디의 대가가 이렇게 컸습니다. 그뿐인가요. 한나라 고조 유방은 태자를 바꾸겠다는 농반진반의 이야기를 뱉었다가 엄청난 피바람을 불렀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38회는 ‘한마디 농담으로 세운 나라’입니다.
    34 min
  • 137회 청동기 노출남, 그는 왜 나체쇼를 벌였을까
    197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아주 싼값에 구입한 청동유물의 녹을 닦았더니 흥미로운 문양이 나타났습니다.
     한면에는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있었고, 다른 면에는 사람 3명이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와 나뭇가지는 ‘솟대’를 연상시켰습니다. 문제는 다른 면에 새겨진 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해석가능했습니다. 토기항아리에 곡식을 저장하는 이는 여인 같아보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괭이를 들고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남자가 이상했습니다. 남성기를 자랑스레 노출한채 따비(쟁기)를 움직이면서 천연덕스럽게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 남성은 왜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채 이렇게 ‘알몸 밭갈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을까요. 지금 같으면 영락없는 노출증 환자로 지탄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중기의 학자인 유희춘의 〈미암집〉에 단서가 있었습니다. 해마다 입춘날 벌거벗고 맡을 가는 세시풍습이 함경도 지방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기원전 4~3세기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중기까지 장장 2000년 동안 이 해괴망측한 퍼포먼스가 벌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37회 ‘청동기 노출남, 그는 왜 나체쇼를 벌였을까’입니다.
    32 min
  • 136회 지긋지긋한 학교, 과연 언제 생겼나
    ‘아! 지겨운 학교, 언제나 쉬려나.’
    기원전 2000년 무렵 어느 수메르 학생이 설형문자로 점토판에 새긴 넋두리입니다. 학교생활, 얼마나 지긋지긋했으면 그랬을까요.
    수메르인이 새겨둔 점포판을 보면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교사가 지극히 산만한 학생을 체벌하고, 체벌당한 학생은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우리 선생님에게 좀 뇌물 좀 줍시다”라 했습니다. 자식이 뭐라고, 아버지는 자식의 호소를 듣고 교사를 초청해서 이른바 촌지를 건넵니다.
    인류 최초의 촌지입니다. 그런데 촌지를 받은 선생님의 반응이 걸작입니다. 문제의 학생을 향해 “넌 형제들 중에 가장 두각을 나타낼 거야. 틀림없어.”라 칭찬해줍니다.
    촌지의 효과일까요. 물론 지금이야 사라졌다지만 촌지는 3000년 이상 지속되어온 관행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동양은 어떨까요.
    요순시대에 속하는 순임금 치하의 기록(〈사기〉 ‘오제본기’)을 보면 ‘학생은 회초리로 다스린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본격적인 학교의 기록은 상나라(기원전 1600~1046) 시대부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의 대학교육 역시 상나라가 원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36회는 ‘지긋지긋한 학교, 언제부터 생겼을까’ 입니다.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블로그 http://leekihwan.khan.kr/
    31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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