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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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pisodes

  • 165회 뼈대있는 가문 5대가 묻힌 백제시대 선산
    2003년 12월 충남 공주 수촌리에서 백제 무령왕릉 이후 최대의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불과 300평 남짓한 구릉 한편에서 백제 무덤 6기가 확인됐는데 그 속에서 금동관모 2점과, 금동신발 3켤레, 중국제 흑갈유도자기 3점, 중국제 청자 2점, 금동허리띠 2점, 환두대도 및 대도 2점 등 백제사를 구명할 수 있는 찬란한 유물들이 쏟아졌다. 이렇게 많은 백제의 금동제 유물이 쏟아진 것은 무령왕릉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자지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4 min
  • 164회 무령왕비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다
    1995년 충남 공주에서는 금강을 따라 공주~부여를 연결하는 백제큰길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해발 67m인 야트막한 산(정지산)을 절단할 참이었다. 이미 금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백제큰다리)의 교각공사는 진행중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웅진백제의 고도가 아닌가. 시 전체가 유적·유물밭이므로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히 문화재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했다.
     지표조사는 국립공주박물관이 맡았다. 만약 정지산의 지표에서 유물·유구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면 절단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지산 주변에서 백제시대 유물이 채집되었다.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96년 2월부터 정식발굴조사가 시작됐다. 발굴은 박물관에서 가장 젊은 학예사(이한상 현 대전대 교수)가 맡았다. 발굴이 진행될수록 뭔가 이상했다.
    37 min
  • 163회 ‘또하나의 궁궐’ 회암사는 왜 폭삭 무너졌을까
    지난 2006년엔 또하나 흥미로운 유구가 확인됐다.
    절터 서쪽 부속건물터에서 깊이 4m, 폭 10m 이상의 돌 구조물이 발굴된 것이다. 처음엔 음식저장고이거나 창고인줄 알았다.
    그러나 바닥에 깔린 흙덩이를 분석해보았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흙에서 기생충알이 다수 확인된 것이다. 흙 1g당 흡층과 회충알이 30개 이상 나왔다. 이것은 흙이라기보다는 대변성분에 가까웠다.
    제대로 발굴해보니 공동화장실, 즉 해우소의 규모는 길이 14m, 폭 2.8m, 깊이 3.8m였다.
    구덩이 내부의 사면은 돌벽이었고, 바닥은 박석으로 깐 얼개가 특징이었다. 구덩이의 둘레에는 12개의 기둥자리가 발견됐다. 구덩이 내부는 발굴당시 무너진 기와더미로 덮여있었다.
    추론하면 대형 구덩이 위에 마루 널판을 깔고 기둥과 기와 지붕을 올려 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화장실 유구 북쪽으로는 수조가 설치되었는데, 뒤처리용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2000년대 초반 발굴 당시 회암사를 2~3차례 답사했던 필자는 최근 15년 만에 다시 찾아갔다.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절터는 발굴 현장 그대로 보전되어 있었다. 화장실 유구는 필자가 답사할 때는 없었다.
    각설하고 관람객들은 지금 마치 고고학자의 기분으로 회암사 유구를 돌아볼 수 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부인 강씨, 그리고 무학대사 등의 체취를 맡을 수 있고, 희대의 여걸이라는 문정왕후와 승려 보우의 이야기도 더듬어 볼 수 있다.
    35 min
  • 162회 뇌물김치로 정승에 오른 ‘침채정승’
    “주나라 문왕이 창포저를 매우 좋아했다. 그 말을 들은 공자는 얼굴을 찌푸려가며 (창포저를) 먹었는데 3년이 지난 후에야 익숙해졌다.(文王嗜昌蒲菹 孔子聞而服之 縮알而食之 三年 然後勝之)”(〈여씨춘추〉)
    김치의 원형이 ‘절임채소’라 한다면 동양의 성인인 공자도 김치를 먹었다고 할 수 있다. 평소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주나라 문왕이 생전에 창포저(昌蒲菹·창포로 만든 절임채소)를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찡그려가며 ‘창포저 먹기’에 도전했다. 그러나 얼마나 시었는지 3년이 지나서야 익숙해졌다. 제사음식으로, 혹은 양념으로 쓰였던 중국의 절임채소, 즉 김치는 엄청 시었다. 주로 초산발효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블로그 http://leekihwan.khan.kr/
    35 min
  • 161회 백제의 혼이 담긴 남한산성, 결코 함락되지 않았다
    “상(인조)이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했다.”
     일반적으로 남한산성은 ‘치욕의 성’으로 각인돼 있다.
     조선조 인조가 청나라 대군에 쫓겨 피란했다가 결국 무릎을 끓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기록을 보면 목불인견이다. 때는 바야흐로 1637년 1월30일이었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치욕적인 날이다.
    어느 누가 기억하고 싶은 역사이며, 장소이겠는가. 그러나 한가지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1637년 1월 28일, 청나라가 조선에 내민 12개 조항의 항복조건 가운데 미묘한 내용이다.
     “용골대가 청 태종의 칙서를 가지고 왔다. 명나라와 국교를 끊고, 그들의 연호를 버려라.~ 또 있다. 성벽(城壁)을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로 이 성을 새로 쌓거나, 기존의 성을 보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특별히 강화의 조건에 넣어 강조한 것이다.
    인조 임금이 급히 피한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한없이 밀리기만 했던 조선이었지만 무려 45일을 남한산성에서 버텼다. 그러니 청나라군으로서는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강화조약의 중요한 조건 하나가 “절대 성을 새로 쌓거나 기존 성이라도 보수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블로그 http://leekihwan.khan.kr/
    기사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1231110001&code=960100
    35 min
  • 160회 조선시대 최고의 브로맨스, 겸재와 사천의 필살 ‘콜라보’
    조선시대 최고의 브로맨스가 있다. 바로 겸재 정선(1676~1751)과 사천 이병연(1671~1751)이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1740년 당시 만 69살이던 사천이 양천현감을 제수받아 떠나는 절친 정선에게 다음과 같은 이별시를 남겼다. “자네와 나는 합쳐야…되는데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둘다 허둥대네.…강서에 지는 저 노을 원망스럽네.” 얼마나 멀리 떨어지기에 이렇게 구구절절 이별의 슬픔을 토로하는가.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아니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 양천구청장으로 발령받은 것이다. 그런 친구에게 ‘이별이 원망스럽네. 어쩌네’ 하는 것이 좀 ‘오버’아닐까. 그러나 평생지기 ‘베프’였던 천재시인과 화가의 브로맨스를 안다면 좀 과장된 호들갑 쯤은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5살 터울인 두사람은 지금의 서촌(서울 청운동 옥인동 일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사천 이병연은 겸재 정선보다 덜 알려졌다.
    그러나 당대의 평가로는 ‘그림은 정겸재, 시는 이사천’이나 ‘좌사천, 우겸재’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시와 그림 분야의 쌍두마차였다. 사천은 평생 1만3000~3만수의 시를 지은 다작시인이었다. 시를 지을 때마다 수염을 쥐어뜯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시를 짓느라 수십일동안 문을 닫고 끙끙 거리던 사천의 얼굴엔 수염이 남아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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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min
  • 159회 '백년하청' 황하가 맑아진다. 성인이 출현하려는가
    최근 백년하청의 성어를 낳았던 황하가 급속도로 맑아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2000~2015년 사이 황하에 유입되는 토사량이 연간 2억6000t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수십년간의 치수정책이 성과를 냈단다. 그렇다면 ‘1000년 만에 성인이 나타날 징조’라고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황하가 맑아졌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 중기의 문장가 장유(1587~1638) 역시 ‘황하가 사흘간 맑아졌다니 하늘의 뜻 정녕코 태평시대 열려는 듯 하다(大河三日澄光 天意丁寧泰運昌)’고 좋아했다.
     하지만 장유 이후 400년이 지난 지금 ‘맑아진 황하’를 한없이 기뻐할 수 있을까. 개운치 않다. 인공적으로 대자연의 균형을 무너뜨린 결과라는 분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해봐도 생태계 파괴가 우려된다. 무엇보다 새삼 눈을 돌려 찾아본다. 대체 성인이 어디쯤에서 나온다는 건가.
    32 min
  • 158회 곽재우 장군은 왜 공신대열에서 빠졌을까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을 아십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맨먼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른 만고의 장수입니다.
    그러나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의 공신 심사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전장을 누빈 장수들은 이순신·원균·권율 등 불과 18명만 선무공신 대열에 올랐습니다.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다 제외됐습니다. 반면 의주로 줄행랑 친 선조 임금을 호종했던 신하들은 86명이나 호성공신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근자에 유관순 열사의 낮은 독립운동유공 서훈(3등급)을 올리자는 여론이 일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의 상징 인물인 유관순 열사에게 3등급이라니 어인 일입니까. 6형제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이회영 선생도 역시 3등급이랍니다. 재조정이 필요합니다. 하기야 이런 분들에게 감히 등급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지하에서 곽재우 장군이나 유관순 열사의 호통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고얀 놈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58회는 ‘곽재우 장군은 왜 공신대열에서 빠졌을까’입니다.
    38 min
  • 157회 경애왕은 그날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이지 않았다
    우리 역사상 가장 한심한 임금을 꼽으라면 신라 경애왕이요, 최악의 인간말종을 꼽으라면 아마도 견훤 정도일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경애왕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졌는데도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이다가 후백제 견훤의 침입을 받아 ‘강요에 의한 자결’로 비참한 생을 마감한 인물입니다. 자기만 죽으면 될 일이 아니라 신라의 1000년 사직도 급전직하했지요.
    견훤은 또 어떻습니까. 경애왕을 자결토록 한 것도 모자라 경애왕의 왕비마저 강간하고, 부하들에게 ‘경애왕의 비첩들을 마음껏 농락하라’고 명을 내렸다지요. 이런 인간말종이 어디있습니까. 문제는 1934년 일제가 포석정을 사적 1호로 지정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너희는 적이 쳐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과 중신들이 질탕 퍼마시고 놀았으니 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식민지로 살 수밖에 없다”는 패배주의를 은연중 심어주려 했겠지요. 후백제 견훤의 난행을 덤으로 얹어놓았겠지요.
    그러나 사서의 기록은 ‘참’일까요. 아무리 정신이 없는 임금이라도 그렇지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 그것도 한겨울에 야외에서 술판을 벌였을까요. 또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 나라(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아무렴 남의 나라 임금의 부인을 강간했을까요.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사기록입니다.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미 경애왕은 두달 전에 후백제군의 위협 때문에 왕건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던 터였습니다. 아마도 경애왕은 위기에 빠진 종묘사직을 위해 제사를 지냈고, 제사음식을 음복하러 왕족과 귀족들과 함께 나왔다가 그만 후백제군의 침입을 받아 죽임을 당했을 겁니다.
    경애왕이 제사를 지냈던 곳이 바로 포석사이고, 음복하러 나왔던 곳이 포석정이겠지요. 이런저런 문헌과 발굴성과 등을 토대로 재해석해보고자 합니다.
    포석사와 포석정은 신라 귀족들이 혼례를 치르거나 제사를 지낸 뒤 연회를 베풀거나 음복을 했던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해석이 요즘들어 나오고 있거든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57회는 ‘경애왕은 그날 술판을 벌이지 않았다’입니다.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블로그 http://leekihwan.khan.kr/
    31 min
  • 156회 미라는 임신중···. 출산중 숨진 산모 미라의 안타까운 사연
    ‘암덩어리인가.’ 2002년 9월 경기 파주 파평 윤씨 문중 묘소에서 발굴된 여성 미라의 상태를 관찰하던 연구팀이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미라의 복부가 심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습니다. 처음엔 ‘암덩어리가 아닐까’ 생각했답니다. 그렇다면 수백년전 암으로 사망한 여인일 수도 있다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정밀검사해보니 더 놀라웠습니다.
     미라의 뱃속에서 만삭크기의 남자태아가 보였습니다. 미라의 외음부를 살짝 열어보니 태아의 머리카락이 보였습니다. 태아의 머리가 산도(질)에 진입한 상태였습니다. 자궁벽의 오른쪽 부위에 3×4㎝의 별 모양의 파열흔적이 선명했습니다. 금방 아기를 낳을 수도 있었던 산모가 그만 출산 직전에 숨을 거둔 것입니다. 자궁파열로 인한 출혈 쇼크로 태아와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운의 여인은 1566년 윤10월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산중 사망한 이 ‘모자 미라’는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희귀사례입니다. 부패가스가 태아를 몸밖으로 밀어내기 때문에 임신 중 태아가 온전히 남아있기는 불가능하답니다.
     2004년 대전에서 발굴된 ‘학봉장군’ 미라의 사인은 피를 토하는 중증 폐질환이었습니다. 정밀검사 결과 학봉장군은 기관지 확장증 같은 폐질환 치료를 위해 지혈제로 꽃가루를 복용하고 있었습니다. 2001년 경기 양주의 댕기머리 소년 미라(5~6살)의 사인은 ‘속립성 결핵’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결핵균이 혈액의 흐름을 타고 온 몸에 퍼져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2010년 경북 문경에서 발굴된 진성이낭(眞城李娘) 미라의 사인은 죽상동맥경화증에 의한 심혈관 질환이었습니다. 17세기 여인은 나쁜 콜레스테롤이 동맥 안에 쌓이면서 혈관이 좁아지는, 전형적인 현대인의 성인병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한가지 궁금증이 있습니다.
     왜 유독 조선시대 무덤에서 미라가 출토될까요. 비밀은 무덤조성방식(회곽묘)에 있습니다. 석회와 모래 황토를 3:1:1로 섞어 싸바르면 몇 년 후 벽돌처럼 단단해진답니다. 누구도 훼손할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몸(身體髮膚 受之父母)을 터럭하나 훼손하지 않고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不敢毁傷 孝之始也)’이라는 가르침을 따랐던 조상들의 노심초사가 생생합니다. 이 풍습이 ‘의도하지 않은 미라’를 낳았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56회는 ‘미라는 임신중…. 출산중 숨진 산모 미라의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36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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