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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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pisodes

  • 175회 개무덤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인의 지문
    “단장님, 이건 꼭 남근 같습니다. 아무래도 안압지에서 출토된 적이 있는….”
    대학원생(성균관대) 신분으로 조사에 참여하고 있던 김성태씨가 흥분해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의 경주고적조사발굴단장을 맡고 있던 조유전씨를 찾았다. 김성태씨는 무덤 속에 퇴적돼 있던 흙더미 속에서 범벅이 되어 버린 유물 한 점을 들고 나왔다. 꼭 남근처럼 생긴 유물이었다.
    31 min
  • 174회 임진왜란 중 ‘항복한 일본인’ 1만명이었다
    일본인 출신으로 귀화한 인물 가운데는 사야가(沙也加·김충선)이 첫손으로 꼽힌다.
     사야가는 1592년 4월15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이끄는 왜군 제2진의 선봉을 맡아 부산포에 상륙했다가 곧바로 부하들과 함께 귀순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ㄴ〈모하당 문집〉을 보면 단순한 항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정 전부터 “의롭지 못한 전쟁에 나섰지만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 가서 동방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귀화한다”고 밝혔다.
     조선 조정은 그런 사야가를 가상하게 여겨 자헌대부(정 2품)를 제수했다. 그러면서 김해 김씨의 성를 내리고,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내렸다. 김충선의 본관은 임금이 하사한 성이라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 했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고, 조총과 화포를 다뤘으며, 화약제조법을 전수했다. 또 이괄의 난(1624년)과 병자호란(1636년) 때도 공을 세웠다. 김충선이 임진왜란·이괄의 난(갑자년)·병자호란 등에서 모두 공을 세웠다고 해서 ‘임갑병 3난의 공신’이라는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36 min
  • 173회 역대 대통령의 글씨와 광화문 현판 논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서예솜씨를 자랑한 이는 누구일까.
     일단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뛰어난 서예실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년기부터 한학을 배우고 서예를 연마했으니 그럴만 하다.
     기교가 뛰어나고 기운이 웅혼하다는 평을 받는다. 윤보선 대통령의 글씨에서는 소박한 필의가 느껴진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대구사범 시절부터 김용하(1896~1950)로부터 서예를 배웠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소전 손재형(1903~1981)을 사사했다. 손재형 앞에서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을 정도로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전문교육을 받았던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는 군인출신답게 굳세고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대도무문(大道無門)’으로 유명한 김영삼 대통령은 독창적인 글씨체를 자랑했으며, 대자서(大字書)를 즐겼다. 역대 대통령으로는 유일하게 개인서예전을 열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투옥시절을 독서와 서예로 보냈는데, 특히 미국의 정치학자 브루스 커밍스에게 써준 ‘경천애인(敬天愛人)’ 글씨가 유명하다. 몸에 익숙해진 달필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물론 역대 대통령들의 서예 솜씨를 3살 어릴 적부터 혹독한 왕재 교육을 받았던 조선의 국왕들과는 견줄 수 없다.
     그래도 역대 대통령들은 글씨를 통해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보이고, 지도자로서의 정책과 이념을 나타내고자 했다.
     심지어 1991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종전에 걸려있던 ‘대웅전(大雄殿)’ 현판을 떼어내고 자신이 쓴 ‘극락보전(極樂寶殿)’ 현판으로 교체했을 정도다. 4대강 사업을 강행한 이명박 대통령의 ‘합강정(合江亭)’ 현판도 세종지구의 금강과 미호천이 만나는 지점에 걸었다.
    31 min
  • 172회 현충사 ‘박정희 현판’과 완물상지
    필자는 현충사를 다녀와 옛 자료를 뒤져보았다. 2005년 문화재청 자료를 보면 문화재에 걸린 역대 대통령의 글씨는 모두 37곳(43건)이었는데, 그중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는 28곳(34건)에 달했다. 지금은 교체되었지만 한글 현판인 ‘광화문’(사적 117호)을 비롯해 영릉·녕릉(사적 195호), 행주산성(사적 56호), 매헌 윤봉길의사 사적지(사적 229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13호) 등 내로라하는 사적의 현판이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다. 이중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유허인 화석정(파주시유형문화재 61호)와 오죽헌(보물 165호)까지 포함돼 있다. 18년이나 집권한 탓도 있겠지만 역대 대통령 그 누구보다도 서예를 통치에 활용한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지나치면 본뜻을 잃는다’는 ‘완물상지론’으로 임금을 다그친 조선시대 신료들의 아우성을 떠올린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었고, 숙종이 심금을 울리는 제문과 함께 현판을 하사한 현충사보다는 박정희가 성역화한 현충사 이미지가 더 부각된다면 어떨까.
    35 min
  • 171회 문재인 대통령은 왜 장군들에게 양날의 칼을 내렸을까
    검(劍)이란 무엇인가. ‘밑동에서부터 끝까지 고르고 순수하게 단련된 양날의 칼’이다.
    신석기 유적인 함북 웅기군 굴포리의 서포항 패총 등에서 출토된 골제단검은 짐승의 다리뼈를 쪼개 끝부분을 갈아서 예리한 칼날을 세워 만들었다.
    청동기 시대 들어서는 마제석검이 등장했다. 문자 그대로 점판암을 아주 정교하게 갈아서 만든 짧은 석검이다. 이 마제석검은 중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우리 전통의 무기 또는 도구라 할 수 있다. 사냥용이라기보다는 개인간의 싸움이나 호신의 무기로 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동기와 철기시대 들어 다양한 동검, 혹은 철검이 등장한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기는 청동단검이다. 이른바 비파형 동검의 형식이 발전된 세형동검이 한반도에서는 유행했다. 비파형 동검은 검신, 즉 칼의 형태가 비파처럼 아래가 둥글게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세형동검은 비파형 동검보다 좁고 날카롭게 만든 칼이다. 철제 검은 전반적인 모양이 청동 검과 비슷하다.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블로그 http://leekihwan.khan.kr/
    26 min
  • 170회 ‘영구결번’ 국보 보물, 그 파란만장 사연들
    영구결번이라는 게 있다. 스포츠나 항공기, 철도 등에서 특정 번호를 다시 사용하지 않도록 한 것을 의미한다.
    스포츠의 경우엔 명예의 뜻을 지니고 있지만 항공기나 철도의 사고에 따른 영구결번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국보와 보물에도 ‘영구결번’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국보는 274호와 278호, 두 건이지만 보물은 5호·163호·341호·458호·476호·479호·864호·1173호 등이 모두 ‘영구결번’이다. 그렇다면 문화재의 ‘영구결번’은 명예의 의미일까 불명예의 뜻일까.
    32 min
  • 169회 신발 흙 털다 발견한 신라 진흥왕의 포고문 “내 너에게…”
    “별것 없을 겁니다. 여태껏 여러 대학과 여러 학자들이 조사했지만 허탕만 쳤습니다.”
    1978년 1월6일.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 조사단이 충북 단양을 찾았다.
    온달의 유적을 찾고, 죽령을 중심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벌이기 위함이었다.
    맨먼저 단양군청을 찾았는데 시큰둥한 반응만 얻었다. 지금까지 많은 조사단이 오갔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새해벽두부터 뭐 그렇게 헛걸음 했느냐는 식이었다. 그러나 조사단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단양 읍내 뒷산인 성재산(해발 323m·적성산성)을 찾았다.
    오후 2시. 조사단은 간밤에 내린 눈이 하얗게 뒤덮은 산에 올랐다. 정영호 교수는 학생들에게 한가지 약속을 했다.
    “성 안에는 옛날 식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지. 대부분이 신라토기였고. 학생들에게 ‘글자가 있는 기왓장을 수습하면 맥주 한 병씩 준다.“
    그러나 별 수확이 없는 듯 했다.
    간밤에 내린 눈에 녹아 진탕이 되었고, 조사단 학생이 신발에 묻은 흙을 털려고 두리번거렸다.
    마침 직경 한 뼘쯤 되는, 흙 묻은 돌부리가 지표면을 뚫고 노출돼 있었다. 안성맞춤이었다. 학생이 신발 흙을 털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29 min
  • 168회 문무왕과 부여융의 ‘취리산회맹’ 굴욕회담은 아니었다
    “665년 8월 문무왕은 당나라 칙사 유인원과 웅진도독 부여융과 취리산에서 회맹했다.”
    〈삼국사기〉가 기록한 ‘취리산 회맹’ 기사의 시작이다. 기사가 전하는 취리산 회맹의 전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무도한) 백제를 평정했다. 그러나 당나라 소정방이 군사를 돌려 귀국하자 남은 백제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 고종은 당나라에 끌려간 부여융(백제 의자왕의 아들)에게 “귀국해서 백제의 남은 무리를 다스리며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명을 내렸다. 이미 4개월전 신라 문무왕에게 계림도독의 관작을 내린 당 고종은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했다. 결국 665년 8월 당나라를 대표한 유인원의 주도아래 계림도독(문무왕)과 웅진도독(부여융)의 회맹이 이뤄진 것이다.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블로그 http://leekihwan.khan.kr/
    41 min
  • 167회 임나일본부의 허구 밝힌 무허가 판자촌 지하의 고분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 찬 흥남 부두에~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국민가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는 한국전쟁으로 피란길에 오른 이들의 애환이 담긴 노래다. 노래가사에서 절절이 담겨있듯 부산은 전쟁의 참화를 피해 내려온 피란민들의 최종 목적지였다.
    갈 곳 없던 피란민들은 1평의 땅이라도 빈곳이라면 무작정 터를 잡고 판잣집을 지었다.
    당시엔 그것을 일본말로 ‘하꼬방’이라 했다. 하꼬(箱), 즉 동래 중심지 북쪽에 반달모양으로 뻗어있던, 수풀로 무성한 야트막한 구릉도 금세 피란민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피란민들의 애환이 담긴 바로 그곳이 기원후 2~기원후 7세기 사이 500년 동안 터전을 잡고 살았던 선인들의 공동묘지일 줄이야.
    1969년, 부산시는 동래구 복천동 구릉에 조성돼있던 이 무허가 판자촌을 민간인들에게 불하했다. 택지개발공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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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min
  • 166회 아무도 눈치 못챈 세종대왕의 업적을 지켜낸 사람들
    “지금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충주에만 있으니 염려스럽습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훈민정음 창제와 해시계·물시계·측우기 등 과학기술 장려, 대마도 정벌과 4군6진 개척, 그리고 〈농사직설〉 편찬 등 손으로 꼽을 수 없다. 그런데 세종대왕의 ‘숨겨진 업적’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적다.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책을 보관할 사고(史庫)를 확충한 것이다.
     조선 건국 후 사고는 내사고(서울 춘추관)와 외사고(충북 충주) 등 2곳 뿐이었다. 이중 〈태조실록〉과 〈정종실록〉, 〈태종실록〉 등이 보관된 곳은 외사고인 충주사고 뿐이었다. 그러니 내내 불안했다. 민가와 섞여있는 사고에 불이라도 나면 끝장이었다. 급기야 1439년(세종 21년) 사헌부가 상소문을 올린다.
    36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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