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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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pisodes

  • 125회 인조의 ‘닥치고’ 외교와 광해군의 ‘관형향배’ 외교
    두 임금이 있습니다. 광해군과 인조입니다. 역사서는 광해군을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이른바 ‘폐모살제’의 오욕을 뒤집어쓴 폭군으로 폄훼하고 있습니다. 반면 인조는 ‘어지러움’을 ‘바름’으로 바꿔놓은 ‘반정’의 주인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정세력이 공표한 인조반정의 명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광해군의 외교실정입니다. 반정세력은 이른바 혁명공약에서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재조지은·再造之恩) 명나라에 배은망덕 했고, 사태를 관망하며 정책을 결정하는 외교(관형향배)로 오랑캐(후금)에 투항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명나라를 배반하는 것은 금수만도 못한 외교행위’라고 천명했습니다. 이렇게 공표해놓으니 더는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절묘한 줄다리기 외교를 나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의 외교를 ‘금수의 외교’라 비난하며 등장한 반정세력은 어땠을까요.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향한 ‘닥치고 충성’의 대가는 어떠했습니까. 이괄의 난(1624년)을 필두로,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등 세 번의 전란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습니다. 무려 60만명의 백성들이 청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정묘·병자호란의 와중에 내심 화친을 바라는 신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화친을 논하는 순간 ‘오랑캐 세력’으로 낙인찍는 풍토 때문에 입도 벙긋 못했답니다. 걸핏하면 ‘종북파’니 ‘빨갱이’니 하며 색깔을 칠하는 작금의 풍토와 다를 바 없습니다. 병자호란이 치욕적인 항복 선언으로 끝난 뒤 무능한 군주 인조가 한강을 건너 도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연도에 늘어선 1만여 백성들이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임금이시여. 백성을 버리십니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5회’는 ‘인조의 닥치고 외교와 광해군의 관형향배 외교’입니다.
    34 min
  • 124회 경주 호우총에서 확인된 광개토대왕의 체취
    고고학자라면 흔히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 등장하는 해리슨 포드를 떠올리고, 그 멋진 남자의 모험담을 연상하게 됩니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학문의 길로 접어든 고고학도들도 제법 보았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은 그렇게 낭만적인 학문은 아닙니다. 한여름철 뙤약볕에 앉아 행여 발굴되는 유물이 상하고 유구가 무너질까봐 트롤(꽃삽 같은 도구)과 붓으로 감질나는 작업을 펼칠 때가 많은 직업이니까요.
     하지만 획기적인 유물이나 유적을 자기 손으로 찾아내는 그 벅찬 순간을 잊지 못하겠지요. 아마 그래서 고고학 하나봅니다. 이번 주에 아주 흥미로운 발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해방 이후 우리 손으로 처음 발굴한 유물이야기입니다.
     비록 패망한 일본인 학자의 귀국을 막아선 끝에, 그것도 미군정청의 예산을 받아 시작했지만 그래도 한국 학자들이 주인격으로 참여했으므로 나름 잊을 수 없는 발굴이었지요. 무엇보다 그 첫번째 발굴에서 고고학사에 길이 남을 유물이 하나 터져나옵니다.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 그것도 시내 한복판에서 고구려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의 체취가 묻은 유물이었습니다. 왜 하필 고구려 임금의 유물이 경주에서 나왔을까요. 또하나 흥미로운 것은 그 유물에 새겨진 글씨의 앞 뒤에 마치 붙은 수수께끼 같은 부호들입니다.
     #(井)하고 十인데, 도통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해시태그(#)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4회는 바로 ‘경주 호우총에서 확인된 광개토대왕의 체취’를 다루려 합니다.
    30 min
  • 123회 이완용, 그는 왜 ‘독립문’ 글씨를 썼을까
    독립문을 아십니까. 서재필 박사가 조선의 자강독립을 위해 프랑스 개선문을 본따 만들었다는 그 독립문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한 가지는 알고 계시니까. 독립문의 이마에 떡하니 새겨져있는 ‘독립문’ 편액을 누가 썼는지…. 독립문이니까 아마도 독립투사 중 명필인 분이 쓰셨겠지요. 그러나 아닙니다. 저 ‘독립문’ 글씨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조선 귀족의 영수 후작 이완용 각하’였답니다. 제 얘기가 아니라 동아일보 1924년 기사에 나와 있는 표현 그대로입니다.
    매국노와 독립문…. 이 해괴한 조합은 무엇일까요. 왜 하필 이완용이 ‘독립문’ 편액을 썼을까요. ‘독립문’을 공부하다보면 온갖 희한한 일들을 알게 됩니다. 서재필과 이완용이 말한 ‘독립’의 의미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독립문과 독립협회, 독립신문을 만들었다는 박사 서재필이라는 인물의 두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서재필은 다름 아닌 미국 이름 필립 제이슨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을 잊어서는 안될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독립문은 서재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립문 건설이 백성 성금 모금운동으로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독립신문은 성금을 낸 백성의 이름을 한사람씩 게재했고, 건설비가 부족하자 ‘제발 빨리 좀 내라’는 독촉기사를 거의 매일같이 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3회는 바로 독립문 건립을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를 풀어헤치려 합니다.
    33 min
  • 122회 휴전선···미완의 혁명가 궁예가 꿈꾼 세상
    궁예라는 역사인물이 있습니다. 한쪽 눈을 잃은 비운의 영웅 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일어서 한때는 삼한 재통일의 가도를 달렸으나 너무 과속하는 바람에 왕건의 고려세력에게 패한 인물쯤으로 말입니다. 미륵불을 자처하고 허황된 관심법으로 신하들은 물론이고, 부인과 자식까지 무참하게 죽인 폭군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궁예는 그렇게 단순하게 폄훼될 인물이 아닙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한때는 영원한 평등세상을 이루는 대동방국, 태봉국의 기치를 드높인 난세의 영웅이었습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기에 폭군의 반열에 든 것일 뿐입니다.
     또하나, 궁예가 웅지를 편 곳이 어딘줄 아십니까. 바로 철원의 드넓은 벌판, 지금은 비무장지대 안쪽인 풍천원입니다. 그 뿐입니까. 군사분계선, 즉 휴전선을 딱 반으로 가르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궁예의 꿈이 서린 태봉국의 도성입니다.
     물론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곳입니다. 이제 궁예의 꿈이 서린 철원 비무장지대안 휴전선으로 가보려 합니다. 만약 남북한의 고고학자들이 둘레 12.5킬로미터가 넘는 저 엄청난 규모의 태봉국도성을 공동발굴한다면 어찌 될까요. 휴전선을 밟고 공동조사를 펼치는 남북한의 학자들…. 상상만 해도 기막힌 뉴스가 되지 않을까요. 궁예의 꿈도 함께 발굴해보면 어떨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2회는 ‘휴전선…미완의 혁명가 궁예가 꿈꾼 세상’입니다.
    34 min
  • 121회 부석사 금동불상, 과연 솔로몬의 지혜는 있는가
    최근 문화유산계를 뜨겁게 달구는 이슈가 있습니다. 바로 서산 부석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입니다. 1330년 시주자 32명이 불심을 모아 제작한 불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상은 700년 가까이 부석사에 없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일본 대마도(쓰시마) 관음사(간논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이 한·일간 민감한 난제로 떠올랐습니다. 2012년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가 많으니 훔쳐와 팔면 큰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범행을 모의한 한국 절도범 일당이 감쪽같이 훔쳐서 국내로 반입한 것입니다.
     그 때 훔쳐온 것이 관음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일본 지방 유형문화재)과 해신신사(가이진 진사)의 금동여래입상(일본 국가지정중요문화재)이었습니다. 이 중 통일신라시기의 걸작인 금동여래입상은 일본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습니다. 서산 부석사측이 ‘1330년 고려국 서산 부석사에서 제작했다’는 불상 조성문이 존재하고, 왜구들이 불법반출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부석사 것’이라고 주장한겁니다.
     이 문제는 법정소송에 휘말렸고, 법원은 일단 부석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측은 “절도범이 훔쳐간 것이 명백한 유물을 빼앗는 행위”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사실 ‘왜구가 약탈해갔다’는 확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정황의 예는 차고 넘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부석사 불상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그리고 솔로몬의 지혜는 없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31 min
  • 120회 세종과 정조의 사건 처리법
    얼마전 최순실씨가 특검에 출두하면서 ‘민주특검이 아니다’라 외치자 ‘염병하네’라는 소리가 3번 들렸다. 특검 사무실의 환경미화원이었다. 환경미화원은 잘못을 인정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래고래 큰소리치는 최순실씨를 향해 ‘분노의 외침’을 날렸다.
    욕설이어서 언론에서는 쓸 수 없는 ‘염병’ 언급은 시원한 ‘사이다 발언’으로 탈바꿈했다. 아닌게아니라 새삼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죄를 저질러놓고도 큰소리치며 수사를 방해하는 모습을 볼 때면 때로 답답한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식으로 붙잡아두고 다그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조선시대는 어땠을까. 태평상대, 요순의 시대였던 세종과 중흥기를 이끈 정조 시대의 죄와 벌을 곱씹어보면서 시대의 정의를 한번 돌이켜본다. 세종 때는 왜 범죄가 들끓었을까. 세종은 왜 사형수의 특별사면을 생각했을까. 정조는 왜 그토록 살인사건 수사에 힘을 기울였을까. 세종 시대에 넘쳐난 사형수, 그리고 정조 시대의 살인사건 처리법…. 이 두 사례를 통해 조선시대 정의를 생각해본다.
    38 min
  • 119회 금테 두른 김유신 저택, 그 속에 숨겨진 명문가의 향기
    얼마전 흥미로운 발굴기사가 떴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집터(종택)인 재매정지(財買井址·사적 246호)에서 갑옷이 출토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김유신 장군이 입었던 갑옷은 아니었으므로 호사가의 입장에서는 다소 실망스러웠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 발굴을 보면서 새삼 김유신 가문의 종가인 ‘재매정택’을 떠올리게 됩니다. 재매정택은 최전성기 신라를 대표하는 가문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으로 친다면 권력형 축재로 성공한 재벌가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김유신의 ‘재매정택’은 한마디로 신라 최고의 재벌가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유신의 재매정택은 돈만 좇는 탐욕의 재벌은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을 했던 가문이고자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가였습니다.
     김유신의 ‘재매정택’을 포함해서 전성기 신라에는 무려 39곳의 호화저택이 있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는 이 39채의 호화저택을 황금이 쏟아져들어가는 금입택(金入宅)이라 했답니다. 한마디로 금테두른 저택이라는 뜻이겠죠. 이들이 축적한 재산은 상상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재벌기업에 가부를 강요했듯이 당대 신라 임금도 ‘금입택’ 가문에 ‘돈 좀 내라’는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도 ‘강요된 기부’였겠지요. 어떻든 김유신의 종가 ‘재매정택’ 발굴을 계기로 신라 전성기의 재벌가들을 한번 알아보려 합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는 ‘금테 두른 김유신 저택, 그 속에 숨겨진 명문가의 향기’입니다.
    36 min
  • 118회 고려 조선 ‘덕후’들의 요절복통 ‘덕질’
    요즘 ‘덕후’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일본어인 오타쿠(御宅)를 우리 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이라는데요. 원래는 집이나 댁의 높임말인데 그 뜻이 바뀌어 집안에 틀어박혀 취미생활에 몰두하는 사람을 지칭했답니다. 요즘엔 특정 분야에 몰두해서 취미생활을 하는, 좋은 의미로 쓰입니다. 그런데 이런 ‘덕후’들은 왕조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물론 예전에는 괴상한 취미라는 의미에서 ‘벽(癖)’이라 했습니다.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땅을 너무도 좋아하는 사람을 ‘전벽(田癖)’ ‘지벽(地癖)’이라 했고, 남을 고소 고발하는 게 취미인 자를 ‘소벽(疏癖)’ 이라고 했습니다. 책을 너무 좋아하면 ‘전벽(傳癖)’ 혹은 ‘서음(書淫)’ 이라 했으며, 술과 시에 탐익하는 사람을 ‘주벽’ ‘시마(詩魔)’라 했습니다. 물론 돈을 너무 좋아하는 자는 ‘전벽(錢癖)’이라 했지요. 그 뿐입니까. 어떤 이는 피부에 난 ‘부스럼 딱지 먹기’가 취미라 해서 ‘창기벽(瘡痂癖)’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와같은 ‘벽’이 없는 사람을 두고 ‘재미없고 인간미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박제가와 허균 같은 분의 이야기입니다. 두 분 뿐 아니라 이규보, 이덕무, 정약용, 김정희 등도 모두 당대의 ‘덕후’였습니다. ‘덕후’가 우대받던 시대, 자 이제 ‘고려·조선 덕후들의 요절복통 덕질’을 알아보려 합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18회입니다.
    38 min
  • 117회 구구단, 남근, 가요···백제 빅3 목간이 들려주는 역사
    목간은 당대의 생생한 기록입니다. 목간에 쓰여진 기록을 읽으면 그 시대 사람들의 체취를 흠뻑 맡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확인된 목간은 500여점에 달합니다. 그 가운데 백제시대 목간은 70여점 정도랍니다. 많지않은 숫자지요. 대부분이 사비백제 시기의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리 많지않은 백제 목간 가운데는 유독 흥미로운 목간들이 눈에 띕니다.
     이번 주는 그래서 백제 시대 ‘빅 3’ 목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구구단을 정교하게 써놓은 쌍북리 구구단 목간이 눈에 띕니다. 과연 어떤 패턴으로 만들어진 목간일까요. 옛 사람들은 왜 이이단이라 하지 않고 구구단이라 했을까요. 과연 구구단을 ‘9×9’부터 시작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번째 흥미로운 목간이 바로 ‘남근형 목간’입니다. 능산리에서 발견된 이 야릇한 목간의 쓰임새는 무엇일까요. 백제인들은 왜 이 남근 형태의 목간을 지금으로 치면 세종로 사거리에 내걸었을까요. 그것도 모자라 목간에 ‘설 立’자를 3번이나 기록했습니다. ‘섰다~! 섰다! 섰다!’를 세번이나 외친 까닭은 무엇일까요.
     ‘빅3’ 가운데 남은 하나는 역시 능산리에서 수습한 ‘백제 가요 목간’입니다. 가장 오래된 백제시대의 가요라 합니다. 이름 또한 ‘숙세가’라 붙였습니다. 내용을 보면 지금의 충청도 사람을 뺨치 듯 너무도 여유롭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백제인의 여유가 지금의 충청인의 여유로 이어졌다는 것이···.
     이 시간 백제시대 빅3 목간이 들려주는 역사이야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17회는 ‘구구단, 남근, 가요…백제의 빅3 목간이 들려주는 역사’입니다.
    33 min
  • 116회 천마총인가, 기린총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경주에 가보면 엄청난 규모의 무덤이 한복판에 늘어서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반에 공개된 무덤이 바로 천마총입니다.
     원래는 황남동 155호 고분이었다가 1973년 발굴 이후 천마총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무덤에서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금관이 발굴됐습니다. 그렇다면 국보 중의 국보인 금관과 관련된 이름이 붙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바로 상상의 동물인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가 3벌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1벌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림 속에서 후다닥 튀어나와 하늘로 훌쩍 날 것 같은 생생한 천마그림이었습니다. 1500년전 신라인들의 빼어난 회화작품이었습니다. 그러니 천마총의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당연히 국보(207호)가 되었지요.
     그런데 발굴 30년 여 년이 지난 2000년 무렵부터 다른 주장이 나옵니다. 그림이 천마가 아닌 기린이라는 겁니다. 기린? 우리가 아는 아프리카 기린이 아닙니다. 성인의 치세에 나타난다는 바로 그 상상의 동물입니다. 기린은 바로 공자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동물이기도 합니다. 이후부터 천마냐 기린이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논쟁이 벌어집니다. 2009년엔 국보 천마도의 천마 위에 뿔 형상이 보인다면서 이것은 전형적인 기린의 모습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됐습니다. 그런가하면 2013년인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다른 말다래(1971년 발굴한 3벌 가운데 다른 한 벌)를 복원해본 결과 갈기 형성이 뚜렷한 천마가 보였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천마가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과연 어떤 주장이 맞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16회는 ‘천마총인가, 기린총인가, 그것이 문제로다’입니다.
    32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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