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 기도력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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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 기도력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episodes

  • [7월 24일 안식일 장년 기도력] 오실 구속주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시 44:26)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1~8).
    그분이 어떤 방식으로 죽으실 것인지에 대해서도 예언되었습니다. 광야에서 구리 뱀을 든 것처럼 오실 구속주도 들려야 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요 3:16)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슥 13:6).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사 53:9~10).
    그러나 악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셔야 하셨던 그분은 죄와 사망을 이기신 정복자로서 다시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적』, 225~227
    4 min
  • [7월 23일 금요일 장년 기도력] 교회의 건축자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슥 6:12)
    하나님이 계신 하늘 성전의 보좌는 의와 공평을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지성소에는 위대한 의의 원칙 즉 인류 전체를 심판할 때 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습니다. 율법 석판을 넣어 둔 법궤는 속죄소로 덮여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앞에서 자신의 보혈로 죄인을 위해 탄원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인류를 구원하려는 계획에는 공의와 자비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런 결합은 무한한 지혜로만 고안해 낼 수 있고, 무한한 능력으로만 성취할 수 있기에 하늘은 그러한 결합으로 말미암아 경탄과 경외감으로 충만해집니다. 지상 성소에 새겨져 있는 두 그룹 천사는 경외의 자세로 속죄소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것은 속죄 사업에 대한 하늘 천사들의 관심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회개하는 죄인을 의롭게 하시고 타락한 인류와 관계를 새롭게 하시면서도 여전히 의로우실 수 있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어 허다한 사람을 파멸의 구덩이에서 일으키시고 자기 의의 흠 없는 옷으로 입히셔서 타락한 적 없는 천사와 연합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머물게 하신 것, 이것은 천사들이 알고 싶어 하는 신비로운 자비입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스가랴의 예언에 아름답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싹’입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슥 6:12~13).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희생과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 교회의 기초이자 교회의 건축자가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분을 가리켜 “모퉁잇돌”이라고 부르며 “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간다고 말했습니다. 또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엡 2:20~22).
    그분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타락한 인류를 구속한 영광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각 시대의 대쟁투』, 415~416
    0 min
  • [7월 22일 목요일 장년 기도력] 죄인들의 친구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 33:8)
    사탄이 인간의 마음을 부추겨서 고안해 낸 모든 모욕과 비난과 잔학 행위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가해졌습니다. 이것이 앞으로는 더 두드러지게 이뤄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욕적인 정신이 아직 하나님의 율법에 적대적이어서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양심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정부 밑에서 산다는 것은 매우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의 본성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예수님을 적대시합니다. 종교 재판과 정교한 고문 기술을 개발하고 사람들을 투옥하고 유배 보내고 화형에 처하고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을 자행하고 스미스필드 화재를 일으킨 동일한 사탄의 정신이 회심하지 않은 이들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악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수들에게도 그리스도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평화를 누리기 위해 알면서도 오류를 덮어 주어서는 안 됩니다. 구세주께서는 절대 죄악을 덮거나 타협하는 식으로 평화를 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에는 인류를 향한 사랑이 항상 흘러넘쳤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죄를 방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죄인들의 친구였지만 그들이 자기 영혼을 파괴하는 길을 걸으려 할 때 잠잠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의 피로 그 영혼들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악행을 엄히 책망하셨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 고결하고 영원한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애쓰셨습니다. 불순종이 가져다준 저주로 망가지고 시들어 버린 세상에 머무는 동안 그분은 세상에 경고와 지시와 책망을 전하지 않고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의무를 저버리고 평화를 사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에게 평화란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결과로 주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냈다는 자각입니다.
    『리뷰 앤드 헤럴드』, 1900년 1월 16일
    4 min
  • [7월 21일 수요일 장년 기도력] 영적인 풍요를 제공하는 위대한 상인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롬 11:33)
    승리는 진리를 위해 충성을 다한 신실하고 변함없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약 1:12)입니다.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과연 세상에 전할 마지막 자비의 기별을 맡은 신실한 청지기인가? 나는 자신을 철저히 점검하며 정신 자세를 확인하는 성실한 사람인가? 나는 진리를 전할 때 끊임없이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는가 아니면 인간 일꾼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가? 내가 한 일은 마지막 소멸의 불길에 타 버리고 말 것인가?
    그리스도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3)라는 칭찬을 받고 싶다면 하나님을 믿고 철저히 헌신해야만 합니다. 디모데가 복음의 아비로부터 들은 권면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딤전 4:16).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겠는가?’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안전책은 죽었다가 부활하여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을 힘입어 매 순간 조심하고 인내하되 각자의 자리에서 매일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러우면서도 힘차게 발을 내딛고 전진한다면 우리는 향상과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자기기만 속에 살아가는 라오디게아 신자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로 옷 입고, 스스로 부요하고 소유가 많아 필요한 것이 없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날마다 예수님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투성이인 그들의 삶은 어느덧 파산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죄악 세상에 마지막 자비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로서 우리는 순결하신 예수님, 자기를 부인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대의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라는 말이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받은 이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적인 풍요를 제공하는 위대한 상인께서 여러분을 일깨우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Letter(편지), 1894년 66
    0 min
  • [7월 20일 화요일 장년 기도력] 영원한 반석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 118:22)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는 견고한 기초석이십니다. 그들은 그 반석 위에 떨어져서 깨어집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과 믿음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반석에 떨어져 깨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독선을 버리고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그리스도께 나아가 죄를 자백하고, 그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초이신 그리스도 위에 집을 짓는 일 역시 믿음과 순종으로 말미암습니다.
    살아 있는 돌 위에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안전하게 집을 지을 수 있는 유일한 기초입니다. 그 반석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할 만큼 넓고 온 세상 사람의 무게와 짐을 견딜 만큼 강합니다. 산 돌이신 그리스도와 합하여 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모두 산 돌이 됩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자르고 연마하여 집을 꾸미는 사람이 많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산 돌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연결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재하지 않으면 우리는 유혹의 폭풍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안전하려면 견고한 기초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오늘날 검증되지 않은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비가 내리고 폭풍이 몰아치고 홍수가 닥치면 그 집은 무너집니다. 큰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즉 영원한 반석 위에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집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걸려 넘어지는 반석입니다. 그러나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벧전 2:7~8). 버림받은 돌처럼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무시당하고 학대받았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그러나 예수님이 영광받으실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받았습니다(롬 1:4). 재림하실 때에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 오십니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던 자들은 그분의 위대하심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버림받은 돌이 우주 앞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입니다.
    『시대의 소망』, 599~600
    0 min
  • [7월 19일 월요일 장년 기도력] 모든 산 자의 심판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유대인들은 사탄에게 홀려서 예수님 대신 강도이자 살인자를 선택했습니다. 이런 동맹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최후의 심판을 위하여 스스로를 결박했습니다.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은 단호한 음성으로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빌라도가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고 묻자 대제사장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요 19:14~15). 빌라도는 그분을 내주면서 인간이 당하는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한 형벌을 받을 만한 잘못이 그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치욕과 고난을 받아들인 그분은 하늘 궁정에서 완전한 보상을 얻고 보좌에 오르셔서 온 하늘과 우주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구원이라는 일을 떠맡으셨고 자신이 시작한 일을 해낼 수 있음을 타락하지 않은 세상과 하늘 가족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분께서 모든 산 자의 심판자이심을 온 우주와 타락한 세계 그리고 성도와 죄인 모두가 깨달을 것입니다. 잔인한 제사장들과 관원들에게 정죄를 받아 못 박혔던 그 손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에게 부여되는 모든 면류관을 친히 수여하실 것입니다. 그 손에서 상처의 흔적이 빛나는 광선처럼 드러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회개의 은혜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을 이룰 모든 영혼을 위해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의 상하고 다친 손만이 그들에게 생명의 위안 곧 영생을 줄 수 있습니다.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엄숙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 사람의 행위가 반드시 의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Manuscript(원고), 1898년 39
    0 min
  • [7월 18일 일요일 장년 기도력] 복음의 시대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바울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11)고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고 선언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똑같이 유효한 이 복음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 복음이 온전하게 제시되기만 한다면 수많은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영접할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 중에서 유대인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종종 간과되는 사람들에게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복음의 기별이 마지막으로 선포될 때 즉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계층의 백성을 위하여 특별한 사업을 수행해야 하는 이때 하나님은 자기 사자들이 세상 각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기를 기대하십니다. 유대인에게 여호와의 영원한 목적을 설명할 때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에 연결시킨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마치 새로운 창조의 아침이자, 영혼의 부활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복음 시대에 나타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구약 성경의 여러 페이지에도 묘사되어 있고,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을 얼마나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유대인들은 잠에서 깨어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주로 인정할 것이며,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것입니다. 그러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요 1:12)다는 말씀이 그들에게도 성취될 것입니다.
    『사도행적』, 380~381
    3 min
  • [7월 17일 안식일 장년 기도력] 하늘의 총애를 받으신 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유대인들은 1천여 년간 구주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에 자신들의 가장 밝은 미래를 걸었습니다. 그들은 노래와 예언으로 그리고 성전 의식과 가정 기도로 그분의 이름을 되뇌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늘의 총애를 받으신 분이 그들에게는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습니다(사 53:2; 요 1:11).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자기 율법에 관한 지식, 구주를 가리키는 상징과 예언에 관한 지식을 보존하도록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구원의 샘이 되기를 그분은 바라셨습니다. 거류민이었던 아브라함처럼, 애굽의 요셉처럼, 바벨론 궁정의 다니엘처럼 히브리 백성도 세상 사람들 가운데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네게 복을 주어…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2~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훈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반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과 포로 생활로 쇠약해진 이후에도 그 약속은 여전히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미 5:7)이라고 하셨고, 이사야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성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세속적으로 위대해지는 데 집착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 이방의 풍습을 좇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경고를 보내셨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의 압제로 징계를 받았으나 그것도 무익했습니다. 개혁이 있을 때마다 더욱 큰 배도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진실했다면 그분은 그들을 존귀하고 명예롭게 하셔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대의 소망』, 27~28
    0 min
  • [7월 16일 금요일 장년 기도력] 겸손의 모본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마 13:55)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옛날에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의 입을 막으려 했던 것처럼 행동할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밑도 끝도 없이 “광신이다! 최면술이다! 최면술이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길바닥에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깔았던 제자들을 지나치고 무모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냉담하거나 무덤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잠잠해야 한다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초림 때처럼 베들레헴 아기의 모습이 아니며, 제자들이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호산나!”를 외칠 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모습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영광 속에서 이 땅에 오시며 거룩한 천사가 모두 그분을 수행할 것입니다. 하늘의 천사가 전부 그 뒤를 따르고, 감람산에서 그분이 승천하실 때의 갈릴리 사람들처럼 성도들은 하늘을 응시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거룩한 자들 그리고 겸손의 모본이신 그분을 온전히 따르던 자들만이 넘치는 기쁨으로 그분을 바라보며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사 25:9)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고전 15:51) 다 변화할 것이며 티끌 속에서 잠자던 성도들은 그 나팔 소리에 깨어 일어나 영원한 불멸을 입고 “승리로다 사망과 음부를 이겼도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변화한 성도들은 천사들과 함께 이끌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고 사랑하는 그분과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광경, 이처럼 영광스러운 소망,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이와 같은 구원이 눈앞에 펼쳐지는데도 우리가 잠잠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제자들만큼이라도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소망이 그들의 소망보다 훨씬 더 밝게 빛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불멸을 입고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될 이와 같은 소망을 큰 소리로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누가 감히 우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가올 세상의 능력을 맛보았기에 그것을 더욱 갈망합니다. 저는 온 힘을 다해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분의 충만하심이 제 마음속에 채워져야 저는 비로소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초기문집』, 109~110
    0 min
  • [7월 15일 목요일 장년 기도력] 숨을 거두시는 창조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사탄은 맹렬한 유혹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쥐어짜듯이 괴롭혔습니다. 구주께서는 무덤의 문을 꿰뚫어 보실 수 없었습니다. 정복자로 무덤에서 나오리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의 희생을 받으셨다는 희망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심히 불쾌한 것이므로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지는 않을까 그분은 두려웠습니다. 죄지은 부류에게서 모든 자비가 거둬질 때 임하는 번뇌를 그리스도께서 느끼셨습니다. 그분의 잔이 그토록 썼던 이유, 하나님 아들의 가슴이 터져 버린 이유는, 아버지의 진노를 일으키는 죄를 그분이 우리 대신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아버지의 진노가 인류의 대속물이 되신 그분에게로 쏟아졌습니다.
    천사들은 탄식하며 구주께서 경험하시는 절망과 번민을 목격했습니다. 천군 천사는 그 무서운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렸습니다. 모욕을 당하며 숨을 거두시는 창조주에게 물질세계조차 동정을 표했습니다. 태양은 이 무서운 광경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던 태양이 대낮에 갑자기 없어진 듯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십자가를 뒤덮었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마 27:45)되었습니다. 일식이나 다른 자연 현상이 없었지만 마치 달도 없고 별도 없는 한밤중 같았습니다. 그것은 후세 사람들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기적을 통해 주신 증거였습니다.
    그 짙은 어둠으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가 가려졌습니다. 그분은 어둠으로 장막을 만드시고 자기의 영광을 인간의 눈으로부터 감추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은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함께 계셨으나 단지 그분의 임재가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 속에서 번쩍였다면 모든 군중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에 아버지의 임재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고 백성 중에 그분과 함께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인간으로서 당하는 마지막 고뇌를 짙은 어둠으로 가리셨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그리스도를 본 사람은 모두 그분의 신성을 확신했습니다. 인간에게 단 한 번 보였던 그 얼굴은 결코 잊히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얼굴이 살인자의 죄를 나타냈듯 그리스도의 얼굴은 순결함, 침착함, 자비가 충만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냈습니다.
    『시대의 소망』, 753~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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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매일 전하는 「장년 기도력」입니다. 하루 한 편, 성경 말씀과 영감의 글을 따라 묵상하고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제목으로 함께 기도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말씀으로 하루를 열고 믿음 안에서 자라가기 원하는 모든 분께, 매일 아침의 영적 양식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