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으로 성취될 수 없는 것은 무가치하다.”
-스토아학파의 기본 명제
스토아는 주랑(柱廊)이란 뜻인데,
뜨거운 볕을 피하고픈 사람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오늘날의 공원과 같은 쉼의 장소였어요.
시민들은 자유롭게 오가던 스토아의 그늘에서,
스토아학파의 창시자 ‘제논’의 연설을 듣고
존재를 재편하는 힘을 얻곤 했죠.
제논은 기원전 335년경,
키프로스의 키티온에서 태어났어요.
동방과 서방의 중개지로 부유했던 키프로스에서 상인으로 일하다,
풍랑으로 우연히 아테네에 머물게 되었고,
그곳 서점에서 소크라테스에 대한 책을 읽고부터,
키니코스 학파, 메가라 학파, 플라톤 학파까지...
당대 아테네를 주름잡던 모든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꿈을 꾸었죠.
“그는 당대의 형이상학적 경향에 대해 상식으로 대응하고자 했다.”(러셀)
개별 주체들이 사회적 구조를 이기지 못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대안’을 찾고 싶어 하는데,
제논은 그 대안으로
‘애쓸 것과 애쓰지 말아야 할 것의 구분’을 두었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시대는,
‘애쓰지 말아야 할 외부’와
‘애쓸 수 있는 내부’의 차이를 구분하고,
오직 애쓸 수 있는 내부에 천착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최대치를 꼼꼼히 지속할 때
어떻게든 내 존재를 파괴하지 않는 훈련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
그는 생각했죠.
그 극복의 예시로 제논은 충동을 이기는 무심의 경지인
아파테이아(apatheia)를 꼽습니다.
고통과 불행의 원기는 짐승 같은 ‘충동’에 있기에
‘충동’을 지배하면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존재를 보호할 수 있죠.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지식이 있고,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다”고,
스토아학파는 주장합니다.
‘충동’에 승리하려면 합당한 언어(로고스)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현실적으로 성취될 수 없는 것은 무가치’하기에,
‘그 한계를 정확히 아는 것’부터가
삶을 재편하는 출발점이니까요.
충동에서 비롯된 일시적이고 짐승적인 감정은
타인과 비교해 상대적 허탈을 주조합니다.
이 허탈이 ‘자기 환영’을 만들어,
세계와 존재의 간극을 벌리고,
존재의 시간을 허비하도록 이끌죠.
스토아철학은 일반 시민들에게 ‘허무한 충동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구체적 ‘대안’이 철학이라 설파합니다.
세계를 지배할 수 없을 때,
내 존재라도 수호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거의 4세기를 이어간 스토아학파의 세부는 다음 방송에서
에픽테토스, 세네카, 키케로, 아우렐리우스의 인생론을 통해
빡빡한 시대의 ‘대안’의 언어를 세공해보겠습니다.
삶의 돌파구에 공명하길 기원하며
‘스토아학파’의 절실한 현실주의와 만나보시길 소원합니다.
세상에 있었으나 미처 깨닫지 못한 철학자들과 접선하기를 원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