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하게 생긴 것은 절대 길이 아니며, 길은 자명성과 무관하다.”
-장자
“도를 아십니까?”
짐짓 선량한 체하며 다가오는
서울역 앞의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유일하게 기록이 아닌 ‘텍스트’를 남겼던,
‘장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만나러 가 볼까요.~
장자는,
전국시대 송나라,
‘몽(夢)이라는 지방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장자’에게 어울리는 장소지요.
초나라 위왕이,
장자의 도움을 얻고자 보낸 사람을,
“자유를 속박당하느니 시궁창에서 놀고 싶다”며,
돌려보낸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렇다고,
장자가 정치에 한없이 무심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윗대가리는 무용하고, 아랫대가리는 유용하라.”는
그의 정치철학은 무용과 유용의 실질적인 구분 없이
‘평화’를 선전하는 명분주의자들의 위선을 꼬집죠.
농사짓고 약초를 캐는,
실질적 삶의 토대에서 시작해
존재의 의미를 위한 위상의 정립으로 나아가는 방도만이
정치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존재와 세계와 정치에 비약도 구원도 없습니다.
장자의 존재론은
여기 내가 “있다”로 끝나는 ‘동물적 삶’을 포월하여
내가 여기 “존재”한다고 되묻는 지경까지
상승하는 인간의 내적 열망입니다.
익숙한 감각을 빗겨 가고 넘어서라는 명령이죠.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도’, 즉 존재론적 방향성입니다.
전국시대 말기에
개인이 주체로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다시 말해 시대의 소모품으로써 살 수밖에 없는 시대에,
장자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가 나비였던 꿈을 꾼 장주였는지 그것이 장주였던 꿈을 꾼 나비였는지 나는 모른다.”는
감각적 지각만으론 존재의 이치를 깨달을 순 없다는 것이죠.
주관을 벗어난 곳에서
즉 반드시 그렇게 여기 있음을 알아챌 수 있는 기준만이
‘존재’를 감당합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꿈같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절정의 그곳에서
인간은 ‘존재’를 논할 자격을 얻죠.
꿈이 아닌 곳,
꿈같은 감각적 포만으론 설명될 수 없는 지경에서
‘존재’는 ‘존재 답게’ 실현됩니다.
이것이 ‘우물한 개구리’를 탈출하는 법이며,
이것이 ‘대붕’의 도약을 인식하는 것이죠.
나를 확실하게 깨워주는 텍스트를 남기는 은둔자로서,
‘먼 미래를 향해 편지를 날리는 것뿐이었을’ 거라고,
메뚝씨는 말합니다.
우물을 넘어섰을 때,
우물 안에 있음을 내가 자각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우물안 개구리가 아니니까요.
세계의 일부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세계에 참여하며 존재를 논하는 것,
내가 반드시 여기에 있다는 증명 방법,
그것이,
장자의 ‘도’이자, 우리의 앞날을 향해 그가 보냈던 편지죠.
아직도 ‘도’를 모르시겠다면,
장자의 여러 재미난 일화들과,
윤리학과 사상의 나머지는,
두 남자의 수다로 톺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방송에서 만나요.~
내가 반드시 여기 있음을 증명하고 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