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리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추구할 대상이 아니다.”
-말테 호센펠더
‘처리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리는 시대,
《헬레니즘 철학사》의 저자 말테 호센펠더가
헬레니즘의 대표 명제라 꼽은 문장입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이 있기 전
이미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는 변화하는 당대 분위기에서,
주류가 아니었어요.
“철학을 발견한 이유는 삶에서 불안정의 원인을 줄이는데 있다”는
플라톤주의자 크세노크라테스의 말이 합당한 사회가 되어 버렸죠.
이제 철학은,
세계와 본성이 일치하는 ‘아르케’(근원)에서,
덕성의 탁월함을 위한 ‘아레떼’(탁월함)로의 이동을 넘어
개인과 세계를 분리시키고,
개인을 세계 위에 두는 응용 학문으로 유통됩니다.
오늘날과 유사하죠.
맞습니다.
헬레니즘 시대는,
정치와 사회 구성체에 대한 관심이 줄고,
개별 존재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개인주의가 보편화된 시대죠.
“인간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동물”이라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규준이 몰락한 시대라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는 상대적인 것이 되었고,
개인이 절대적인 대상으로 변모한 것이죠.
메뚝씨는 이를,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은 지워지고,
무한이란 실체는 종교로 감금당하고,
인간은 신적 권위에 도전하기보다
동물적 만족에 집착하게”된 시대의 도래라 표현합니다.
호메로스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와 비교하면 정리가 쉽겠죠.
“나는 경작할 수 있는 밭이나 가옥에 애착을 갖기보다
마음은 항상 배의 키와 전쟁과 날아가는 화살에 쏠려있다.”
“만일 네가 다른 종족,
낯선 땅에 있을 때 설사 그 땅이 황홀하고 비옥한 곳이라 할지라도
너는 멀리 있는 조국의 빵을 먹으리라.”
고향 상실의 시대는 ‘체념’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토대가 없으니 모험의 기상이 불안하게 된 것이죠.
“체념은 쉽게 오고, 쉽게 지워지지 않을 만큼 강력합니다.
마치 오래된 굳은살과 같아요.”
-메뚝씨
그렇다면 ‘체념’은 어떻게 전이될까요?
‘체념’을 포기할 이유를 찾는다면,
혹은 세계와 존재의 변화를 여태 소원하고 계시다면,
이번 방송을 권해드립니다.
‘철학의 역사’를 향한 지성의 항해를 위해,
모험심을 불태우며,
배에 올라타셨으니,
끝까지 순항하시길 기원합니다. 끝까지 가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