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역사! 24회 다툼의 시대 ‘예(禮)를 세우다’ 순자편
“인간은 무리를 이루어 살기에 맹수를 이길 수 있다.”
-순자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군사 정권 아래,
부당한 무리의 힘으로만 제압당하던 시절의 학교 모습을 담았죠.
선도부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 ‘현수’는 폭력을 폭력으로 감당해야만 했어요.
자본주의 시대인 지금,
‘돈’은 강력한 ‘힘’을 장착했습니다.
돈 많은 건물주 앞에서,
우리는 비굴하게 고개 숙여야 하죠.
순자가 살던, 전국시대 말기도 같았습니다.
강자들의 힘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아무것도 없음을 한탄하며,
다수가 핍박받아야 했던 때였죠.
이른바 ‘예(禮)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순자는 당 시대를 이렇게 명명합니다.
“능력이 있으면, 멋대로 오만하고, 그릇된 일을 하면서 남에게 교만하게 행동하며,
능력이 없으면, 질투하고 원망하고 비방하며 사람들을 쓰러뜨리려고 하는”,
소인들이 판을 치고,
약자만이 피해를 감당하는,
‘사악한 세상’이 바로,
순자가 정의한 ‘예가 사라진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순자는 어떻게 예를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분(分)입니다.
구분할 때, 쓰는 그 ‘분’이죠.
공적인 영토와 사적인 영토의 구분,
알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구분이 ‘예’의 토대죠.
“군자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마음에 붙어서 온몸으로 퍼져 행동으로 나타난다.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입으로 나온다. 입과 귀 사이가 네 치 밖에 안되니,
어찌 일곱 자나 되는 몸을 아름답게 할 수 있으랴!”
-「순자」 권학 편.
망가진 현세적 삶을,
새로운 질서로 정립하여 다시 세우는 길은,
‘예’를 잘 세우는 것이고,
‘예’는 ‘분’을 통해,
세계와 존재의 세미한 분석인 ‘이성’의 작용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순자는 생각했습니다.
순자는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사회를 구성해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자연 세계가 고요해도 인간은 ‘문명’ 을 욕망합니다.
“장자는 고원한 하늘의 세계는 알되, 인간이 사는 현실 세계는 알지 못한다.”고,
비판한 이유기도 하죠.
욕망하는 인간은 통솔하기 위해선 질퍽한 싸움에서 생기를 찾는,
현실 세계의 작동 원리는 현실적 기준으로 재차 세워야만 합니다.
이것이 ‘분’의 작용이며, ‘이성’을 통한 ‘예’의 구축이죠.
‘군자’와 ‘소인’, ‘탁월함’과 ‘비천함’의 날카로운 구분이 수행될 때,
‘예’는 ‘욕망하는 존재’인 인간 사회에 평화를 유지하게 할 수 있죠.
“군자는 스승을 높이고 법과 친하게 지내며 그를 해치는 자를 미워하고,
선을 좋아함에 싫증내지 않으며, 충고를 받아들여 훈계를 삼을 줄 안다.
소인은 이와 반대로 심하게 난동을 부리면서도 남들이 자기를 비판하는 것을 싫어하고,
매우 못났으면서도 남들이 자기를 어질다고 여겨주기를 바란다.”
-「순자」 수신 편.
수신(修身)에 앞서 권학(勸學)을 세웠던,
순자의 나머지 사상의 세부와 일생, 정치에 대해서는
방송을 통해 접선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전통과 친지들에 예를 다하며,
충분한 이성으로 군자답게 존중하는,
훈훈한 명절이 되셨기를 바라며,
메뚝씨와 똥팔씨의 촌철살인 수다로,
시대를 뛰어넘어,
순자와 접선하는 한 주 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