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자신의 사상이 이 세상에 열매를 맺으리라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버틀란드 러셀
최초로 인간의 긍지가 하강하던
헬레니즘의 시대에 널리 퍼진,
‘철학적 회의주의’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다만 오늘날 유통되고 있는
비관적인 일상적 회의주의와는 다른
철학적 의미의 회의주의라고 미리 말씀 전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합일인 폴리스가 무너지고,
계급간의 양극화가 커지면서,
긍정적 변화에 기대를 품을 수 없는 시대 상황에서
‘철학적 회의주의’는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소망하는 실천적 움직임’에서 시작했다고,
메뚝씨는 평합니다.
흩어진 기준들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사람도 많아지지만,
세계를 움직이는 법률과 정치가
죄다 거짓이라 치부하는 사람도 늘어납니다.
이 시대의 지식인들 역시,
서두에서 인용한 러셀의 주장처럼
“자신의 사상이 이 세상에 열매를 맺으리라 거의 생각하지 않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될 수 없는 철학적 호기심은
회의주의라는 사유의 경향을 주조합니다.
회의주의는 그리스어로,
'σκέπτομαι' skeptomai 으로,
“생각하다, 둘러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판단과 선택하는 과정에서 모든 비용이 자신에게만 주어질 때,
인간은 확실성의 토대를 ‘감각적 익숙함’으로 제한합니다.
늘 했던 방식을 유지할 수밖에 없죠.
이런 시대에 기원전 435년, 안티스테네스가 등장합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고,
디오게네스의 스승으로,
아테네의 귀족 출신이죠.
“선한 것만이 존재한다”는,
그의 철학은 ‘익숙함’으로 함몰되는 역사적 퇴보를
보편적 기준의 재확립으로
철저하게 방어하고픈 복고풍 철학입니다.
다시 확고한 기준을 정립하고픈 욕망이죠.
때문에 안티스테네스가 ‘철학적 회의주의’의 뿌리라는 러셀의 평가는
오해의 소지가 깊습니다.
회의주의는 ‘선과 악’의 준거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모든 믿음을 지양하기 때문이죠.
오히려
그의 제자 디오게네스가
세속의 기준을 무찌르는 실천적 삶을 통해
‘근심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하나의 ‘표상’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확실성의 토대를 재정립하는 시도조차
‘근심’의 또 다른 계기라고 보았죠.
그렇지만 디오게네스는 철학적 회의주의의 개념을 생산하지는 않았습니다.
‘개’처럼 살면서 심플한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을 뿐이죠.
‘근심’은 ‘문명의 복잡성’에서 나왔다고 진단했기에
그는 ‘프로메테우스’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피론에 와서야 회의주의는 ‘개념’을 장착합니다.
‘에포케’, 즉 판단중지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번잡한 세속에서 자유를 소원할 구체적 언어를 세공했죠.
그는 “진리가 불가능하다”는 주장 대신,
“믿음을 보류하라!”고 권고합니다.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면
선택과 판단의 비용을 최소로 줄일 방법을 연마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판단’ 자체를 중지해버리는
‘에포케’적 방법입니다.
책임을 피하는 궁극적 시도는 판단과 선택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죠.
그 뒤를 이어,
아카데미아의 회의주의자 아르케실라오스와 카르네아데스는
보다 구체적으로 ‘회의주의’를 철학화시킵니다.
‘명제’를 활용해 확실성의 토대들을 무너트리는 방법을 썼죠.
분석철학이라 불리는 현대철학적 경향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혜의 본질은 지식의 소유가 아니라 오류로부터의 자유”라고 주장한 아르케실라오스와,
“최고의 선은 자연이 일차적으로 우리의 것을 만드는 것을 즐기는 것”이라는 카르네아데스의주장은
확실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근심으로부터 해방될 도피처’의 준거를 마련합니다.
물론 회의주의적 시도는 ‘진보주의적 열정’만큼 쉽지 않은 일이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만을 좇는 시대와
감각만이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된 혼돈의 시대는
약육강식의 자연 법칙을 가속시키는
퇴보의 시대라고 메뚝씨는 강하게 피력합니다.
헬레니즘과 비슷한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회의주의자에게 배울 것이 무엇인가를 재고할 이유죠.
뭉뚱그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톺아보며,
철학적 회의주의로부터 배울 바를
메뚝씨와 똥팔씨가 친숙한 입담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방송으로 접선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근심에서 벗어나고자 소망하시는 모든 분들은,
꼭 청취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