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내게서 몇 가지를 배웠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Arthur Schpenhauer
안녕하세요. 두철수입니다.
‘품위’ 그 자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철수’를
연속으로 만나는 시간을 계획했습니다.
그 첫 번째 주연은 쇼펜하우어입니다.
명품인 만큼 논란이 많았던 쇼펜하우어의 생애를 짧게 톺아봅니다.
쇼펜하우어는, 1788년 단치히에서
유서 깊은 무역상이자,
루소와 볼테르를 읽을 정도로
시민적이면서 귀족적인 공화주의자 아버지와,
그보다 20살 어렸던 어머니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출생합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그 저주스러운 불안증을 물려받았기에
온갖 의지력을 총동원하여 그것에 맞서야 한다.”
-쇼펜하우어
아버지의 불안증 탓에
쇼펜하우어는 당대 시민사회의 최강국이었던
영국에서 태어날 기회를 잃어버렸고,
나폴레옹의 봉쇄령으로 인한 무역업의 손실과,
가정보다는 사교 생활에 빠져 있는 어머니에 대한 실망으로,
끝끝내,
쇼펜하우어의 아버지 하인리히는
창고 지붕 위에서
몸을 던져 버리죠.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자살한 아버지를
죽는 날까지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화려한 사교를 즐기는 어머니와의 관계와는 반대였죠.
아버지는 쇼펜하우어에게 자신의 가업을 물려주려고 했어요.
견문을 넓히고, 거상으로 만들고자
유럽 여행도 기획했었죠.
하지만,
그럴수록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한 열망은 점점 커져만 갔답니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인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어려웠던 그는,
고타의 김나지움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합니다.
1807년,
당시 과학 분야에서 뛰어나고,
진보적인 대학으로 이름난 괴팅겐 대학에서,
플라톤과 칸트를 배우는 아이러니한 시작에서,
쇼펜하우어 인생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 같네요.
1813년에는 드디어 박사학위 논문, 「충족근거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제출하고,
어머니와 절친했던 괴테의 찬사도 받게 됩니다.
그동안 서로 화해할 수 없을 만큼 잦은 다툼 이후,
결국 어머니와는 결별하고,
홀로 드레스덴으로 이주합니다.
1814년에서 1818년, 쇼펜하우어가 30살이 되는 해까지는,
그가 ‘가장 왕성한 생산의 시기’라고 자평할 정도였지요.
왜?
1815년에,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출간하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초판을 구상하고, 원고를 완성한 시기였거든요.
그러나, 이 ‘왕성한 생산의 시기’ 이후,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을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저급한 인간으로 치부하곤 합니다.
출판업자인 브로크하우스는 이 오만한 철학자에 대해
이런 편지를 남기기도 했죠.
"귀하의 편지는 받지 않겠습니다.
철학자가 썼다기보다는 마부가 썼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귀하의 편지는 너무도 거칠고 무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