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철수 부활! 15회 Mikhail Bakhtin, “나는 인간이다.” : 바흐친의 ‘그로데스크 리얼리즘’과 ‘크로노토프’에 대하여
“나는 인간이고, 인간적인 것은 그 어떤 것도 낯설지 않다.”
-바흐친
바흐친에게 ‘민중’이란,
신민도,
시민도,
다중도,
인민도 아닌,
개별 인간으로서 살아왔으나, 역사의 혜택을 부여받지 못한 자,
민중을 뜻합니다.
이 ‘민중’에게 고유명을 찾아 주는 예술이 문학이죠.
네로의 실수로 죽은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가 한 말과 맞닿아 있어요.
“실수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다.”
바흐친에게,
삶을 재현하는 것은,
미학적 체계를 완성하려는 칸트적 구성이 아니에요.
대중, 민중, 인민과 싸우지 않고도,
미학적 형식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그 여분의 잉여(비주류)를
인준하는 언어의 발굴이 철학이라는 겁니다.
“작가의 기능은 소설과 이미 말에 내재하는 본성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에 제한된다.”
-바흐친
루카치의 비극에 대한 예찬이 놓쳐버린 비주류적 삶에 대한 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루카치와 바흐친은,
오묘하게 다르고 오묘하게 비슷합니다.
비극을 통해 도달하는 카타르시스의 힘으로 혁명을 추궁하고 싶은 젊은 시대의 치기가 있었던 루카치.
민중의 삶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인민들에게도 형식이 있다고 본 바흐친.
인민을 부정하지 않으려는 바흐친의 아주 민중적인 사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죠.
“모든 예술은 본성상 완결된 형식을 요구하여,
이 형식창조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삶의 생생한 구체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예술이 가진 문화적 본성을 극복하는 문제다.”
-바흐친
‘철학이 진취적인 언어를 장착하고 민중의 구체적 삶 속으로 엮어 들라’는
바흐친의 주장은 무지 어려운 행위입니다.
바흐친의 삶이 대변해주는,
‘예술로서의 대화주의’는,
‘미학적 형식의 창조로서의 형식주의’보다 어려운 것이고,
루카치보다 단단한 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멋지진 않은데, 더 어렵다는 것이고, 용기가 필요하단 말씀!
용기는, 비용을 감수하고 나아가는 것이지,
높은 고지만을 정복하겠다는 의지가 아닙니다.
진짜 용기는 적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과 몸을 부비며 사는 것이기도 하죠.
원한이 없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 쉽고,
복수할 대상이 없는,
민중이기에,
우리는 민중 속으로 갈 수 있는 것이고, 들어가야만 하는 겁니다.
SNS에서 열심히 정치적인 글을 쓰고 여론을 형성해도,
우리에게 중요한 일상에 촛불혁명의 의미가 우리 세포까지 파고들고 있지 못하죠.
일상은 지독히도 무료하게 반복됩니다.
한방의 무기는 없어요.
이 지속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계속 고독을 의식하는 인간으로서 굴러가야 한다는 거예요.
무언가를 잡는 것은 소용없어요.
굴러가는 것을 멈추면,
거기에 있는 신민도, 시민도, 인민도, 다중도 움직임을 멈추고 과거로 복속됩니다.
이 관성의 복원력은 ‘뉴턴’이 예감한 것보다 훨씬 엄청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운동을 멈추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반동의 힘으로 밀려가기 때문이죠.
용수철을 잡아당기면 제 자리로 오지 않습니다.
더 큰 반동으로 움직이고 난 뒤에 파동의 주기를 줄고,
겨우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이 물리적 법칙은 인간에겐 더 치명적입니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나이가 복원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반동 후에 다시 시작할 출발점은 더 큰 도전을 필요로 하죠.
혁명의 실패 뒤 더 끔찍한 독재가 나타난 이유입니다.
러시아가 그렇게 됐고,
중국이 그랬고,
일본이 그랬으며,
한국은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겠죠.
지속의 운동을 멈추면,
제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동으로 퇴화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그 퇴화의 자리에서도 살긴 삽니다.
더 이상의 꿈도,
더 이상의 개선도,
더 이상의 명랑함도 상실한 채 생존하긴 하죠.
이 지독한 끔찍함을 눈치챌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함께하는 음악
SCHUBERT - Impromptu n°3 (Horowit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