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접속>에서 동현이 말합니다.
“쓸데없는 감정들 때문에 진짜 사랑을 놓칠 수 있어요.”
수현이 말합니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게 된다고 들었어요.”
검소한 독일인과 세련된 프랑스인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이 둘 사이에 ‘대화’라는 다리가 놓일 수 있을까요?
정답은 방송에서 확인하세요.~
오늘은 바흐친의 책, 《예술과 책임》 과 《말의 미학》을 통해 ‘대화’의 의미를 톺아봅니다.
대화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어요.
‘내가 나 자신’과 하는 대화,
‘나와 타자’와의 대화,
‘나와 세계’와 맺는 대화.
내 자신과 하는 대화는,
내 세계에 갇혀 나만의 형식을 주조해내고,
그 형식 속에서 나를 바라보며 도치된 고립인,
독백적 세계에 빠져들 수 있어요.
현실감각을 누락한 대화 방식이죠.
반면,
나와 타자와의 대화는,
현실감각만 있는 대화일 수 있어요.
약속된 규범 안에서만 나누는 말의 섞임을 대화의 알속으로 착각할 수 있죠.
현실에서 거리가 너무 멀어도,
현실에만 갇혀 있어도, 대화를 통한 ‘접속’은 불가능해요.
대화란, 현실과 현실 바깥의 적극적 교류니까요.
바흐친은,
“대화란, 삶과 문화의 교류”
라고 말합니다.
나와 세계와의 만남을 언어적으로 지향하는 방법이죠.
요컨대 대화란?
현실적인 타자와의 기계적 만남이 아니라,
현실 바깥에 있는 나 자신과의 도치적 만남도 아닌,
현실을 품으면서도
현실을 포월하는
그 세계 속으로 오롯이 나를 밀고 가는 접속!!!
그렇다면 “현실과 현실 바깥 사이에 거리를 좁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예술과 책임》에서 말합니다.
“산문적 일상과 시적 예술의 조화”
“독백의 장벽을 허무는 것을 ‘책임’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혁명은 총과 칼을 드는 것만이 아니라,
생활과 예술의 장벽을 허무는 언어의 기관총을 난사하는 일이야말로 진짜 혁명에 가까운 것”이라고 표현해 봅니다.
우리는 균열을 나쁜 말로만 쓰고 있어요.
질서의 붕괴나 위험의 노출만을 균열로 바라보는 습관이죠.
그러나 균열은 대화가 들어갈 수 있는 틈새가 될 수 있습니다.
대화는, 공식적인 세계 저편에 있기 때문에,
균열을 출발 지점으로 삼아야 가능합니다.
무거운 질감이죠.
대화적 상상력의 실현을 위하여
웃음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대화는 심오한 만큼 웃음으로 시작해야 해요.
“존재에는 알리바이가 없다.”는 말을 책임지는 행위니까요.
생은, 반복되지 않기에 유일하고,
책임은 규범과 당위로서가 아니라,
모험의 기초 토대이기 때문에,
축복입니다.
진정으로 외롭지 않기 위해선
진정으로 타자와 세계를 잇는 대화적 행위에 몰입해야 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