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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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pisodes

  • 15회 대장금, 장덕, 애종…조선의 여의사 열전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5회 주제는 ‘대장금’입니다.
    대장금으로 대표되는 조선 시대 최고의 커리어 우먼들의 이야기, 즉 <조선시대 여의사 열전>입니다.
    조선에서 여자의사가 탄생한 배경이 재미있습니다. 태종·세종 때의 일인데, “남자 의사가 (진맥을 한다면서) 여인들의 살을 주무르게 되니 망측스럽다”는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남자의사의 손길이 무서워 병을 감추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아녀자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전국 8도의 10~15살 관기들 가운데 영리한 여자아이들을 뽑아 서울로 유학시켰습니다.
    이들은 3년간 혹독한 의학공부를 한 끝에 의녀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의녀 가운데 대장금은 군계일학이었습니다.
    사극 <대장금>에도 묘사됐듯이 사실상 중종 임금의 주치의 노릇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종 임금은 남자의사들을 내치고 대장금을 비롯한 의녀들에게 몸을 맡겼답니다. 물론 남자 의사들, 즉 어의들은 잔뜩 볼멘 소리를 해댔지만 중종의 대장금 사랑은 끔찍했습니다. 대장금 뿐이 아닙니다. <실록>에 등장하는 의녀 가운데 장덕과 귀금은 특히 이비인후과 및 치과전문의로 명성이 자자했답니다. 선조~광해군 때의 의녀 애종은 “끼가 많고 음란하다”는 악평을 들었지만 워낙 의술이 좋아서 등용됐습니다. 조선시대 의녀들은 팔방미인이기도 했지만, 너무나 할 일이 많았습니다. 왕실과 사대부의 술판에 끌려가 기생노릇도 해야 했으며, 왕명을 받아 수사관 노릇이나 법의학자 노릇도 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사회복지사 노릇도 했고,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감사관 노릇까지 했답니다. 조선시대 의녀들의 고군분투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요.
    25 min
  • 14회 ‘세종은 성군이 아니었다.’
    팟 캐스트 14회는 세종대왕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만고의 성군’이나 ‘해동의 요순’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감히 ‘세종은 성군이 아니었다’는 주제로 이야기할까 합니다.
     물론 세종대왕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백성을 긍휼히 생각하는 세종의 마음씨 역시 실록에 나와있는 그대로입니다. 죄인들의 귀휴제도를 만들었고, 관노비들의 출산휴가를 늘렸으며, 심지어는 그 남편들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상상이나 하십니까. 세종시대에 관노비의 남편에게 30일 간의 출산·육아휴가를 주었다는 사실을…. 더욱이 형을 살고 있는 죄인들의 목욕관리까지 신경을 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치세에 가려진 반전의 역사도 있습니다. 그 시대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른 것도 아닌, ‘실록’을 중심으로 풀어가려 합니다.
     세종의 시대에 집행을 기다리던 사형수가 190명에 달했으며, 그 시대에 도적이 들끓어 내탕고와 봉상시까지 털렸다는 이야기, 그래서 도둑의 발뒤꿈치 근육을 자르는 이른바 ‘단근형’의 형벌을 채택했다는 사실….
     무엇보다 혹형 중의 혹형이라는 능지처사의 형벌이 세종시대에 가장 많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실록>을 뒤져보니 무려 60명이 능지처사로 죽었답니다. 이들 대부분은 부모, 자식이나 주인을 죽인 죄, 즉 강상죄를 범한 이들이었습니다.
     효를 최고덕목으로 여기는 유교사회였기에 그럴 수도 있었다구요. 하지만 세종임금이 누구입니까. 만고의 성군이 아닙니까. 심지어 참혹한 고문 끝에 허위자백까지 받아낸 뒤 능지처사의 처벌을 내린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세종시대에 이 무슨 해괴한 일이었을까요. 팟캐스트 14회가 전합니다.
    27 min
  • 13회 금지된 사랑, 궁녀와 내시의 ‘슬픈언약식’
    이번 주(13회) 팟캐스트 주제는 아프도록 시린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 청춘 남녀인 궁녀와 별감이 맺었던 ‘슬픈 언약식’입니다. 조선시대 궁녀는 알다시피 임금과 혼인한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어느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면 안됐습니다. 그저 임금이나 세자의 손길만 바라보고 살았던 가련한 여인들이었죠.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평생 살아야 했던 여인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도 감정이 있는, 그것도 여인들이었습니다. 특히 15살 내외의 꽃다운 나이에 접어들면 낙옅 떨어지는 소리에도 까르르 대는 소녀들이었겠습니다. 그런 소녀들보고 임금만 바라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소녀들은 궁궐을 드나드는 몇 안되는 남자들을 보고 연정을 품었습니다.
    어떤 소녀들은 젊은 별감들과 15살 풋사랑을 나눴습니다. 3대3 미팅까지 벌이면서 연애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다른 소녀는 젊은 환관과 사랑을 나누면서 내탕고의 옥관자(탕건 조이개)를 남자에게 선물하면서 언약식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풋사랑의 대가는 너무도 혹독했습니다. “궁녀가 임금 외의 다른 남자와 간통하면 참형에 처한다”는 국법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철부지 궁녀들의 ‘사랑의 대가’는 과연 어땠을까요.
    팟캐스트에서 들려드리겠습니다.
    32 min
  • 12회 ‘고려·조선판 4대강 공사가 남긴 교훈’
    <흔적의 역사> 팟 캐스트 12회는 ‘고려·조선판 4대강 공사가 남긴 교훈’입니다.
    고려·조선에 무슨 4대강 공사냐구요. 물론 4대강 공사를 벌인 것은 아니고, 4대강 공사의 과정을 쏙 빼닮은,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른 국책사업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운하공사입니다.
    고려·조선 때 국가재정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바로 세곡(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서울(개경 혹은 한양)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던 육로로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주로 해로, 즉 조운선을 이용해서 옮겼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려·조선 때 안흥량으로 일컬어졌던 지역, 즉 지금의 충청도 태안 앞바다가 가장 큰 고비였습니다. 안흥량 해역은 물살이 험하기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조운선들이 번번이 침몰하고 선원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미곡이 적게는 수백석에서 많게는 1만석까지 수장되는 등 큰 낭패를 겪었습니다. 예컨대 1403년(태종 3년)에는 조운선 34척과 선원 1000여 명, 쌀 1만석이 수장되는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조선판 세월호 사건’이라 일컬을 만한 사건입니다.
    이같은 사고가 고려시대에도 빈발했을 겁니다. 그러자 고려 인종 때인 1134년 지금의 태안 지역에 운하를 뚫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고, 급기야 운하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지금의 천수만~가로림만을 뚫는 공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공사는 화강암 암반층과 조수간만의 차이에 따른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운하공사는 결코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조선 태종 때 책사 하륜은 일종의 갑문식 공법이라는 당시로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었습니다. 현장에 답사했던 사람들마다 “공사구역이 단단한 돌로 이뤄졌기 때문에 공사가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냈는데 공사는 강행됩니다.
    태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하륜의 계책이라 어느 누구도 공사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했던 겁니다.
    결국 10여 일이라는 그야말로 속도전을 방불케하는 단기간의 공사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금세 이 공사가 무리한 공사였음이 드러났습니다. 실록을 보면 “헛되이 백성의 힘을 썼을 뿐 조운은 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자 그렇다면 하륜의 계책은 왜 실패했을까요. 그리고 이 운하공사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회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요.
    29 min
  • 11회 역사속 패션피플과 성형미인
    이번 주 이기환의 팟캐스트 ‘흔적의 역사’ 11번째 이야기는 ‘역사속 패션피플과 성형미인’입니다.
     요즘 겨울철을 두고 ‘성형의 계절’이라 합니다. 그 뿐입니까. 우리나라는 어느새 ‘성형 강국’이 되었고, 성형관광의 메카로 발돋움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최근의 트렌드일까요?
     아닙니다. 원래 성형은 동이족의 전유물이었답니다. 증거가 있냐구요? 있습니다. 그것도 움직일 수 없는 고고학 증거들입니다. 이번 팟캐스트에서 한번 성명해드리겠습니다. 동이족은 성형 민족이라 할만 합니다.
     이번 팟캐스트에서 또 하나 궁금해 하실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의 미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역사속 패셔니스타’는 누가 있었을까.
     그렇습니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부터 ‘개미허리’ 여인을 미인의 기준으로 삼았답니다.  오죽했으면 ‘탐연세요(貪戀細腰)’, 즉 ‘가느다란 허리를 탐한다’는 고사가 <묵자> ‘겸애중(兼愛中)’에까지 나올까요.
     당대 사람들은 가는 허리를 만들려고 하루에 한끼씩만 먹으며 초절정 다이어트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굶어죽은 사람들이 속출했다지요. 한나라 성제의 후궁인 조비연은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을 정도로 몸매가 가냘팠답니다.
     양나라 시대의 여인 장정완의 허리 사이즈는 1척6촌, 즉 15인치(40㎝)도 안됐다고 합니다. 당대의 미인을 뜻하는 고사성어는 바로 ‘버들가지처럼 가는 허리에, 눈꽃같이 새햐안 피부’를 뜻하는 ‘세요설부(細腰雪膚)’였답니다.
     ‘긴머리’를 향한 로망도 대단했답니다.
     특히나 고구려·신라인들의 긴 생머리에 중국대륙이 열광했다는데요. 신라인들은 머리카락을 중국에 공물로 보내거나 수출했다는군요. 1960년대 가발수출로 외화를 벌었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또 있습니다. 조선의 선조 시대 때는 남자들까지 귀고리를 다는 풍습이 유행처럼 번졌다는데요.
     오죽했으면 선조임금이 비망기를 내려 “요즘 사내아이들까지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다”면서 “적발되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겠습니까.
     머리에 가체를 올리는 풍습도 사치풍조의 대명사였습니다. 심지어 무거운 가체 때문에 13살 어린 신부가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는 기록(이덕무의 <청장관전서>)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영조와 정조 임금은 “연좌의 죄목까지 써서 이 말도 안되는 풍조를 엄금하겠다”고 여러 차례 명령을 내렸지만 ‘유행을 어찌 강제로 막을 수 있느냐’는 여론에 밀려 끝내 손을 들고 맙니다.
     가체를 막자 이번에는 본발(본머리)을 기르는 풍습이 슬그머니 유행으로 등장한겁니다. 그러니 임금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정조는 한마디 합니다.
     “지금 여기 있는 신하들이 각자 집에 가서 정해진 법도를 지킨다면 일반 백성들도 반드시 본받을 것이다.”
     세속의 유행을 정부차원에서 강제로 막기란 사실상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 겁니다.
     다만 지도층의 솔선수범에 기대를 건 것이죠. 기억나시죠. 1960~70년대 막대 자로 여성의 미니스커트 길이를 재고, 장발을 단속한다며 대명천지에 울타리에 쳐놓고 장발자들을 몰아넣었던 추억….
     씁쓸한 기억들이죠. 지금 옛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몸소 자신이 하지 않는다면 백성이 믿지 않는다”(<한비자>)
     “위에서 좋아하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지나침이 있다.”(<맹자>)
    33 min
  • 10회 우리 역사를 흔든 환관 이야기
    지난 주에 이어 환관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우리 역사 속의 환관 이야기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조에 처음 환관의 기록이 보입니다. 사실 우리 역사를 훑어보면 중국처럼 환관을 대량으로 양성하고 기용하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궁형이나 자궁(스스로 거세)을 통해 환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답니다. 다만 어릴 때 개(犬)에 물려 고자가 된 케이스가 훗날 환관이 되었다고 하네요. 물론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 황제의 조칙에 따라 환관을 만들어 중국에 보내는 경우가 있엇다고 하지만….
    우리 역사 속에서도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환관들이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고려 의종 때 환관 정함은 사치향락과 황음에 빠진 의종을 대신해 권력을 마음껏 주물렀습니다. 오죽했으면 “나라의 권세가 모두 고자(정함)에게 있구나!”하는 한탄이 개경거리에 울려퍼졌다고 합니다. 정함을 비롯한 환관들의 득세는 결국 무신란이라는 왜곡된 역사를 불러오는데 일조했습니다.
    원나라 간섭기에는 원 조정에서 출세한 환관들이 꽤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원나라 황태후의 총애를 받았던 환관 방신우가 있었는데요. 방신우가 비록 거들먹거리기는 했지만 고려라는 국호를 잃을 위기를 넘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답니다.
    조선조가 개국해서 뜻있는 대신들이 환관의 폐해를 설파하고 환관혁파를 기회가 닿을 때마다 했습니다. 그러나 최측근의 자리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환관들을 임금은 버릴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필요악이라고 할까요. 이를테면 김사행과 조순 등은 조선초 공신의 반열에 오를만큼 득세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환관들의 말로가 그랬듯이 임금의 사랑이 식거나 임금의 힘이 떨어지거나, 혹은 임금의 죽으면 급전직하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김사행과 조순은 목이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환관은 연산군 조의 환관 김처선이었을 겁니다.
    김처선은 연산군이 무오사화·갑자사화 등을 일으켜 대대적인 ‘사람 사냥’에 나설 때 바른 소리를 했답니다. 그러다 결국 죽음을 각오하고 연산군의 면전에서 “그만 좀 하시라”고 맞서다 비참한 죽음을 당했답니다. 연산군이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김처선의 ‘처’자를 씨는 모든 이름과 모든 관직을 없애버리라는 엄명을 내렸답니다.
    중종반정이 일어났지만 비참하게 죽은 김처선을 선양하는 작업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환관 주제에 임금에게 대든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환관의 존재를 폄훼한 것이지요. 그러나 연산군의 횡포에 그토록 당당하게 대든 사대부가 과연 몇이나 있습니까.
    환관 이야기의 끝은 결국 환관을 위한 변명이 되었군요.
    35 min
  • 9회 ‘문고리 권력’의 원조, 환관의 정체
    이번주 팟캐스트 9회는 ‘환관’ 이야기입니다.
    ‘문고리 권력의 원조…. 환관 그들을 위한 변명’ 입니다.
    중요 부위를 스스로 자르거나, 혹은 형벌을 받아 잘린 남성들의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사기>라는 불후의 역사서를 쓴 사마천도 궁형을 당한 뒤 ‘치욕’이라는 낱말을 19번이나 쓰면서 괴로워했답니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는 것보다 더 엄청난 치욕은 없다. 하루에도 창자가 9번 끊어지는 것 같다”고 괴로워했답니다.
    사마천이야 강제로 잘렸다지만 환관이 되려고 스스로 자른 남성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들은 왜 사마천의 말마따나 ‘몸이 망가져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잘라야 했을까요. 명나라 공식역사서를 보면 명확한 이유가 나옵니다.
    “환관은 황제의 배후에서 황제를 조종해서 권세를 장악했다. 그 위세가 구족에 이른다.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자식 손자들을 거세시켜 부귀를 꿈꾸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황제의 문고리를 잡는다는 뜻이 아닐까요.
    문고리 정치의 원조는 누구였을까요.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은 ‘지록위마’의 주인공이죠. 바로 기원전 210~207년 사이 진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환관 조고였습니다.
    조고는 황제의 어가를 책임지고, 황제의 옥새를 관리하고, 끝내는 궁궐의 출입을 통제하는 직책을 맡아 국정을 농단했습니다. 이로써 황제와 신하, 황제와 백성들 간의 소통은 끊어졌습니다. 황제와의 ‘소통의 문’을 쥐고 흔든 문고리 권력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명나라를 두고 흔히 환관의 나라라 합니다. 내로라 하는 환관들이 악명을 떨쳤습니다.
    ‘만세’를 연호한다는 황제의 권세에 비견된다며 ‘구천구백세’를 외치게 했다는 환관 위충현의 권세는 어땠을까요. 당대 사람들은 위충현과 그의 내연녀 객씨의 권세를 황제보다 더 높이 평가했답니다. 또 있습니다. 환관 유근 역시 백관들에게 단체기합을 줄 정도로 위세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권세는 아침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졌습니다.
    조고는 삼족을 멸하는 극형을 받았고, 위충현은 천참만륙, 즉 천갈래 만갈래 찢기는 형을 받았습니다. 유근은 무려 3357회의 칼질형을 받았습니다.
    자, 이제 환관들의 슬픈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32 min
  • 7회 ‘세종은 앉아있는 종합병원이었다-임금들의 진료보고서’
    세종대왕은 ‘만고의 성군’이자 ‘해동의 요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더불어 세종을 수식할 수 있는 단어들이 있다. 일벌레에, 공부벌레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종이 생전에 내내 온갖 병마와 싸웠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세종에게 ‘앉아있는 종합병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습니다.
    극심한 당뇨병에 두통, 이질에, 풍질에, 요로결석에, 다리부종에, 수전증에…. 화려한 병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기에 세종 뿐이 아니었습니다. 지존으로서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고, 백성을 위해 일해야 하는 군주들은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등창 때문에 승하한 임금, 족질로 고생한 임금, 그리고 뜻밖의 의료사고로 급서한 임금 등….
    또 어느 임금은 양기보충을 위해 풀벌레와 뱀을 먹기도 했고, 또 어느 임금은 병치료를 위해 똥물을 약으로 마셨다고 합니다. 이 뿐인가. 너무나 아버지를 그리워한 나머지 요절한 효자임금도 있었답니다. 업무 스트레스는 임금들의 건강을 갉아먹었습니다. 어느 임금은 “정무를 처리하느라 수염이 하얗게 셌다”고 토로했습니다.
    또 어느 임금은 심각한 정신병 증세를 여러차례 호소했지만 신하들로부터 ‘철없는 소리 작작하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답니다. 또 다른 임금은 신하들의 지긋지긋한 복지부동에 “대체 어쩌자는 거냐”고 소리쳤습니다. 또 어떤 임금은 서슬퍼런 동생이 무서워 결국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고 나서야 여생을 편안하게 즐겼다고 합니다.
    물로 임금들의 평균수명은 일반 백성들보다 훨씬 높았겠지요. 하지만 임금이 어떤 자리입니까.
    한나라 시대 유교의 국교화를 이룬 동중서는 임금 왕(王)자를 이렇게 해석했답니다.
    “王자에서 가로획 3개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뜻한다. 임금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소통시켜주는 세로 획이다.”
    그러니 절대 편한 자리가 아니요, 혼자 지존의 자리만 즐길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즉 하늘과 사람·땅을 소통시켜야 했으니까요.
    그러고보면 요즘의 지도자는 편합니다. 하늘과 땅은 소통의 대상이 아니니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만 소통시키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조차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요.
    39 min
  • 6회 ‘내 탓이오’를 외친 임금들
    1403년(태종 3년) 선원 등 1000여 명과 쌀 1만석이 수장된 대형참사가 발생했습니다.
     거센 풍랑 중에 배를 띄운 관리들이 부른 인재였다. 하지만 태종은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면서 ‘내탓이오’를 외쳤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대표적인 성군으로 꼽히는 당나라 태종은 628년 메뚜기 떼가 창궐하자 들판에 나가 메뚜기 두 마리를 생으로 삼켰습니다.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먹으라”면서….
     중국 상나라 창업주 탕왕은 7년간이나 가뭄이 계속되자 머리카락을 자르고, 손톱을 깎은 뒤 뽕나무밭에 들어가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다”면서 ‘6가지 자책’을 하늘에 고했습니다. 역사는 이것을 ‘상림육책(桑林六責)’이라 했다.
     송나라 태종은 메꾸기 떼가 창궐하자 “내 몸을 불사르겠다”고 분신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메뚜기떼가 물러났답니다.
     천하의 폭군이라는 연산군도 “천재지변은 사람이 부르는 것이니 겉치레를 물리치고 참된 덕을 행하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그냥 듣고 넘길 일이 아니니 잘 정서해서 다시 올리라”고 지시했답니다. 인조 시대에 기상이변이 계속되자 대사헌 강석기는 “정책이 일관성이 없고. 인사가 엉망진창”이라고 임금을 무섭게 다그쳤습니다.
     2000년 전 부여 시대엔 기상이변으로 곡식이 영글지 않으면 임금을 바꾸거나 심지어는 죽였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도자가 무슨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아닌데…. 무슨 사건사고가 나고, 심지어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까지 모두 지도자의 탓으로 돌렸을까요. 정말 왜 일까요.
     올해 유달리 사건 사고가 많았고, 천재지변도 많았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운석이 떨어지고, 때아닌 메꾸기 떼까지 보였습니다. 심지어는 땅이 꺼지기까지(싱크홀) 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까지 원양어선까지 침몰했습니다.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6회는 바로 이런 대형참사와 재변에 대처했던 옛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는 배우는 자의 몫입니다.
    30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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