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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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pisodes

  • 25회 신라공주와 페르시아 왕자의 사랑
    이번 주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주제는 ‘신라공주와 페르시아 왕자의 사랑’이야기 입니다.
     아니 머나먼 나라의 왕자 공주가, 그것도 1500년 전에 사랑을 나눴고, 혼인까지 했다는 거냐. 그걸 믿으라는 거냐 하고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란판 단군신화라 할 수 있는 ‘쿠쉬나메’라는 서사시에 나오는 내용이라니 어쩝니까. 그 서사시에 따르면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자가 중국을 거쳐 신라로 망명합니다.
     이란 왕자는 엄청 환대를 받습니다. 양국 선수들끼리 선수를 섞어 이란의 전통 스포츠인 폴로경기까지 벌였답니다.
     그리고 이란왕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신라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양국은 신라-페르시아 연합군을 결성해서 때마침 침략해온 중국군대를 대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중국대륙까지 진출합니다.
     왕자와 공주 부부는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 와중에 망국의 페르시아 왕자의 꿈에 ‘빨리 조국에 가서 아랍 정복자들을 무찌르고 나라를 바로 세우라’는 계시가 나타납니다. 부부는 아이를 임신한 채로 이란으로 달려갑니다.
     왕자는 독립투쟁의 와중에 죽습니다. 그러나 부부사이에는 영웅이 태어납니다. 이란-신라 혼혈의 아이가 자라 결국 아랍폭정자를 무찌릅니다. 이것이 ‘쿠쉬나메’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쿠쉬나메 서사시를 보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지난 2008년 이란 답사여행 중 품었던 궁금증의 하나가 풀린 느낌이랄까. 당시 이란에서 방영됐던 사극 ‘대장금’은 85%가 넘는 엄청난 시청률를 기록했습니다. 저는 그 때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역만리 이란에서 ‘대장금’이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뭘까. 뭐 그런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쿠쉬나메’를 보고서야 양국 백성들 사이에 흐르는 뭔가 친연의 DNA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쿠쉬나메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고, 과연 우리와 이란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친연의 DNA가 무엇인지를 검토해보겠습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를 기대해 주십시오.
    24 min
  • 24회 만약 이성계의 장남이 조선의 2대 국왕이었다면…
    흔적의 역사 24회는 ‘가정법’입니다. 제목은 ‘만약 이성계의 장남이 조선의 2대 국왕이었다면…’입니다.
     오늘은 ‘만약’이라는 가정법을 해보려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가정법을 써보지 않습니까.
     만약 한국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중국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조선이 임진왜란 때 완전히 쫄딱 망했었더라면…. 세종대왕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에 서거하지 않았다면….
     뭐 이런 가정법 말입니다. 물론 역사를 읽는데 무슨 가정법이냐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가정법을 던져놓고 상상해보는 편도 흥미로울 것 같지 않습니까. 오늘은 이런 가정법입니다. ‘만약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개국 조선의 2대왕이 되었다면 어찌 됐을까’하는…. 또 아버지의 뜻에 반해 은거의 길을 택한 이방우가 술병으로 일찍 죽지 않았다면 또 어찌 됐을까…. 뭐 이런 가정법들입니다.
     그랬다면 조선의 그림은 달라졌을 겁니다. 형제들끼리의 유혈참극을 빚은 1,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개국초부터 정통성 시비에 휘말리지는 않았겠지요. 그리고 정종과 태종은 물론이고 세종, 성종 뭐 이런 분들까지 등장하지 않았겠네요. 그랬을 경우 조선은 어찌 됐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의 역사가 어찌 뒤바뀌어 졌을지 모르겠네요. 흔적의 역사 24회는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이방우를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알아보고, 헛된 가정법을 풀어가려 합니다.
    31 min
  • 23회 백성 버린 선조의 피란길, 그 참담한 징비록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3회 주제는 ‘백성 버린 선조의 피란길, 그 참담한 징비록’입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1592년(선조 25년) 4월 30일 선조 임금이 피란길에 오릅니다.
     임진왜란 발발로 왜군이 쳐들어오자 ‘무조건 피란’을 결정한 것입니다. 〈징비록〉, 〈선조수정실록〉 등을 보면 목불인견입니다. 선조가 벽제~혜음령을 지나자 밭을 갈던 백성이 대성 통곡합니다.
     “나랏님이 백성을 버리면 누굴 믿고 살라는 것입니까.”
     선조 일행이 임진나루에 닿았을 때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임진강변의 승정(丞亭·나루터 관리 청사) 건물을 헐어 불을 피웠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임진나루 건너의 동파역에 도착하자 파주 목사와 장단 부사가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자 임금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굶었던 호위병들이 임금에게 바칠 수라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네요. 한심 스토리는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임금의 총애를 받던 사관 4인방(조존세·김선여·임취정·박정현)은 사초책을 불구덩이에 넣은 뒤 도망쳤답니다. 이것이 ‘사초 폐기’ 사건입니다. 임금의 피란길을 끝까지 수행한 자는 어의 허준을 비롯해 17명에 불과했습니다. 하기야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갔는데 어떤 신하가 임금을 지키겠습니까.
     이후 임진나루까지 진격한 왜군은 짐짓 후퇴한 척 조선군을 유인했습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던 야전사령관(도원수) 김명원이 도강을 주저했습니다. 임시 조정은 “왜 빨리 진격하지 않느냐”면서 문신인 한응인을 급파합니다.
     김명원으로부터 지휘권을 빼앗은 한응인은 단숨에 임진나루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왜군의 유인책에 말린 조선군은 추풍낙엽처럼 패합니다. 〈징비록〉은 5월17일의 ‘임진나루 전투’를 두고 “봄날 꽃놀이 하듯 군대를 다뤘으니 대패한 것이 당연하다”고 한탄했답니다.
     임진나루는 이렇듯 왜란의 수치와, 위기에 처한 인간 군상들의 온갖 행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서울~파주~개성~평양~의주를 잇는 유서깊은 ‘1번국도’의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오는 5월부터 군 보안 문제로 출입이 제한됐던 임진나루 구간(1.2㎞)이 단장돼 44년만에 개방된다고 합니다. 제가 군 부대의 허락을 얻어 답사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모쪼록 탐방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반성하고 경계하는 ‘징비(懲毖)’의 현장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늘 강조하지만 역사는 배우는 자의 몫이니까요.
    31 min
  • 22회 광해군의 장탄식과 고려의 외교
    이번 주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2회의 주제는 ‘광해군이 부러워한 고려 외교’입니다.
     조선의 광해군은 조정의 공론을 한심스러워하면서 “제발 고려의 외교 좀 배우라”고 했답니다.
     세상 돌아가는 형세도 모르면서 말로만 ‘숭명배청’이니 ‘재조지은’이니 떠들면서 주야장천 다쓰러져가던 명나라만 섬기려하는 대신들을 ‘한심한 인사들’이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왜 ‘고려의 외교를 배우라’고 했던 걸까요. 고려는 비록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피곤한 줄다리기 외교를 펼쳤답니다. 하지만 거란은 물론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원)의 애간장을 녹일만큼 능수능란한 곡예외교를 펼쳤습니다. 오죽했으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거란이 서희의 ‘세치혀’에 말려 280리나 되는 땅(강동 6주)을 떼주었겠습니까. 서희로 대표되는 고려의 외교관들은 강대국 황제들을 쥐략펴락하면서 어지간히 괴롭혔답니다.
     심지어 세계제국 원나라는 고려의 애간장 외교를 견디다 못해 재침공의 계획까지 세웠지만 끝내 포기했다네요.
     대신들이 “지금 고려가 원나라를 섬기고 있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만약 저들이 험준한 산에 기댄다면 100만 대군을 동원해도 함락시킬 수 없다”는 불가론을 펼쳤다네요.
     과연 고려의 외교가 어땠기에 송나라, 거란은 물론 원나라까지 벌벌 떨었을까요. 고려의 균형 외교가 주는 교훈, 그리고 그것을 부러워한 광해군의 장탄식…. 미국과 중국은 물론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눈터지는 균형외교를 펼쳐야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되돌아봐야 할 주제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에서 들어보십시오.
    29 min
  • 21회 백두산 화산폭발과 발해 멸망의 미스터리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1회는 좀 색다른 주제입니다.
     백두산 폭발과 발해멸망의 수수께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 백두산에서는 역사시대, 즉 2000년이라는 시간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화산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기원후 79년 폼페이 최후의 날로 악명 높은 이탈리아 베수비오 화산폭발보다 무려 50배나 큰 화산폭발이었습니다. 물론 화산폭발이 과연 어제 정확하게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첨단과학의 힘을 빌자면 아마도 930~940년 사이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문제는 발해가 926년에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발해의 멸망소식을 전한 요나라(거란) 역사서인 <요사>는 “발해는 민심의 이반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멸망했다”고 전합니다.
     이상한 일 아닙니까. 해동성국으로 일컬어졌고, 고구려의 고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발해가 왜 이렇듯 속절없이 무너졌을까요. 일부 전문가들이 화산폭발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이번 주 팟캐스트는 백두산 화산폭발, 그것이 발해멸망의 도화산이 되었을까 라는 궁금증을 던져봅니다.
    33 min
  • 20회 못말리는 조상들의 교육열
    이번 주 ‘흔적의 역사’ 팟 캐스트의 주제는 ‘고려·조선을 강타한 사교육 열풍’입니다.
     지난 주 살펴봤듯 이 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은 지독합니다. 이미 1200년 전에 남의 나라(당나라) 땅에서 신라와 발해인들이 내가 잘났니, 네가 잘났니 하는 등 서로의 우열을 다투는 볼썽 사나운 작태까지 연출하지 않았습니까. 역사에 길이 남을 문장가라는 최치원까지 가세했다니 말입니다.
     고려 조선에 들어와서도 더했으면 했지, 덜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고려시대 때는 12개 명문사학들이 과거시험에 자기 학생들을 합격시키느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답니다. 최충의 문헌공도 등은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유명한 사찰을 빌려 학생들을 50일 간이나 합숙시켰답니다. 그래놓고는 졸업생 가운데 뛰어난 선배들을 특별 강사로 초청해서 이른바 족집게 과외를 시키고, 과거시험대비용 모의고사를 치렀답니다.
     그것도 모자라 사교육 열풍에도 빠졌습니다. 명문 중 명문인 문헌공도 학생이었던 이규보는 개인과외선생까지 모셔 과거를 준비했답니다. 고려말 충렬왕 때 지금의 사설학원과 같은 서당을 차렸던 강경룡은 고려·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스타강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충렬왕 때 치른 과거시험에서 그 학원 출신 10명이 한꺼번에 합격했다니 말입니다.
     강경룡은 이 덕분에 국왕으로부터 상급을 받았고, 그의 명성은 조선조 세종 임금대까지 이어집니다.
     강경룡 뿐 아니라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이름을 날린 강사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부터 고려와 조선을 뒤흔든 사교육 열풍과, 그 열풍 속에서 명멸한 스타강사 이야기를 합니다.
    25 min
  • 19회 최치원이 발해를 향해 쌍욕을 퍼부은 까닭
    팟캐스트 19회는 ‘최치원이 발해를 향해 쌍욕을 퍼부은 까닭’입니다.
     9세기 말 만고의 명문장가라는 최치원이 막말을 퍼붓습니다.
     발해를 겨냥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갈과 모래같은 무식한 놈들’, ‘추한 오랑캐’, ‘떼강도’, ‘군더더기 같은 부락민’…. 그뿐 아니라 멸망한 고구려를 두고도 ‘고구려의 미친바람’이라고 합니다.
     최치원은 과연 왜 발해를 향해 쌍욕을 해댔을까요.
     새삼 북한이 남측 정부와 인사, 미국정부와 인사들에게 퍼붓는 막말이 떠오릅니다.
     이명박 전대통령이 회고록을 내자 ‘정치 무능아’, ‘못난이 하는 짓마다 사달’, ‘돌부처도 낯을 붉힐 노릇’, ‘역사의 시궁창에 처박힌 산송장’이라 표현했지요.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시집못간 노처녀의 술주정’ ‘유신군사깡패의 더러운 핏줄’, ‘살인마 악녀’, ‘방구석 아낙네의 근성’, ‘못돼먹은 철부지 계집’ 등의 막말을 해댔구요.
     그뿐인가요.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는 “아프리카 원시림 속의 잰내비 상통(원숭이 얼굴) 그대로다. 인류가 진화되어 수백만년 흐르도록 잰내비 모양이다.”라 했지요. 지독한 인종차별 발언이지요. 존 케리 국무장관을 겨냥해서는 “주걱턱에 움푹꺼진 눈확(눈구멍), 푸시시한 잿빛 머리털에 이르기까지 승냥이 상통인데다…”라 표현했지요.
     아무리 인종차별이자 성차별이고 인신공격이라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데 1200년 전 최치원은 왜 발해를 향해 막말외교를 펼쳤을까요.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기에 그랬을까요.
     돌이켜보니 그 때도 일종의 남북국 시대였고, 남(신라)과 북(발해)이 양립하고 있었던 시기였잖아요.
     당나라에서 펼쳐진 치열한 외교전의 세계로 한번 들어가보겠습니다.
    31 min
  • 18회 ‘국보 1호’, 과연 어찌하오리까
    팟 캐스트 18회는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겠습니다.
     국보 1호 논쟁입니다. 국보 뿐 아니라 보물 1호, 사적 1호도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논쟁은 10년마다 재연되어 왔습니다.
     1995·2005년 광복 50·60주년을 맞아 10년 주기로 불거졌지요. 광복 70주년을 맞는 올해도 재연될 것 같습니다. 문화재청이 2월 말까지 문화재에 부여되는 관리번호지정제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 용역을 발주한다니 말입니다. 여기에 광복 후 고희(古稀)를 맞는 해니만큼 ‘국보 1호(숭례문)’의 지위를 둘러싼 가열찬 논쟁이 재연되겠네요.
     사실 논쟁의 레파토리는 뻔합니다. 국보 1호 변경을 주장하는 쪽은 일제의 지정제도를 답습한 국보 1호(숭례문)가 대표문화재로서 상징성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이나 석굴암(24호)이 훨씬 가치가 크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반대하는 쪽은 ‘소모적인 논쟁은 의미없다’고 주장합니다.
     ‘국보 1호 숭례문’은 일제가 붙일 때부터 우열의 순번이 아니라 말 그대로 관리번호였다는 것입니다. 또 ‘국보 1호를 훈민정음으로 바꿨다 치자. 그런데 이후에 더 좋은 문화재가 나오면 국보 1호를 또 재지정해야 하는 것이냐.’ 그리고 뭐 그런 주장입니다.
     반대파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일제가 중요도에 따른 등급이 아니라, 지정 순으로 번호를 매겼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조선의 지정문화재를 처음으로 공포한 1934년 8월 24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제2290호)를 봅시다.
     보물 1·2호는 남대문과 동대문, 4·5호는 원각사 다층석탑과 원각사비, 6·7호는 중초사 당간지주와 중초사 삼층석탑입니다. 9·10·11호는 개성 첨성대·개성 남대문·개성 연복사입니다. 비슷한 장소에 있는 문화재들을 묶어 ‘편의상’ 관리번호를 붙였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화학습에 들어갑시다. 원래 남대문(숭례문)을 비롯한 서울의 관문은 모두 철거대상이었습니다.
     예컨대 한성순보 사장을 지낸 야다치 겐조(安達謙藏)는 1910년 “조선인을 동화시키려면 반일 기념물들을 제거해야 한다”(<조선> ‘32호’)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일제는 40~50만명을 수용할 용산 신도시 건설을 포함한 대대적인 도시개조계획을 세웠습니다. 남·동·서대문 등 조선의 상징물은 모두 파괴 대상이 됐습니다. 심지어 대포로 포격해서 파괴시키자는 의견까지 나왔답니다. 하지만 일본거류민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 등은 명쾌한 반대논리를 폈답니다.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입성한 문입니다. 파괴하는 것은 아깝습니다.”
     결국 남대문은 극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동대문 역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했다”는 사연 때문에 보전됐습니다. 1927년 일제가 펴낸 조선여행안내서(<趣味の朝鮮の旅>) 역시 “가토 기요마사가 남대문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대문에서 경성으로 쳐들어갔다고 한다.”고 소개했습니다.
     반면 일본의 임진왜란 전승기념물이 아닌 서대문(돈의문) 등은 속절없이 철거됐습니다.(1915년)
     경주 포석정을 ‘고적 1호’로 정한 까닭도 심상찮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927년 경애왕이 견훤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포석정에서 술판을 벌이다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제는 포석정을 신라 망국의 상징으로 삼았던 겁니다. 포석정을 굳이 정비하고, 고적 1호로 세운 이유가 아닐까요.
     일제가 국보 없이 보물로만 조선의 문화재를 지정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내선일체라는 거지요. 국권을 잃은 조선에는 국보가 없으며, 따라서 일본의 국보가 바로 조선의 국보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를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때 아무런 검토없이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그대로 답습했다는 겁니다. 또 하나, 북한의 국보 1호는 평양성이라는데 문화재에 일련번호가 남아있는 것은 남북한이 거의 유일하다고 하네요.
     저는 ‘국보 1호’ 논쟁에서 교체파도, 유지파도 아닙니다. 다만 ‘국보·보물·사적 1호’ 속에 묻힌 속사정을 풀어본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1·2·3호…’의 차례가 문화유산의 가치를 가르는 등급표시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사람들이 ‘숭례문=국보 1호, 동대문=보물 1호, 포석정=사적 1호’로 떠받드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교체’ 혹은 ‘유지’가 아니라 관리번호 제도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방안도 함께 논의해보면 어떨까요. 팟 캐스트를 들어보시고 판단해보십시요.
    31 min
  • 17회 색동옷 입고 재롱 떤 선비
    이번 주 팟 캐스트 주제는 부모님 이야기입니다. 설을 맞이해서 일년에 단 한 번이라도 부모님 생각 해보라는 뜻에서 마련했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농암 이현보 선생을 아시는지요. ‘어부가’로 유명하신 바로 그 분입니다.
    그런 농암 선생은 70살이 넘은 연세에, 90이 넘은 아버지를 위해 색동옷을 입고 재롱잔치를 벌였답니다. 그것도 후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그랬답니다.농암 선생이 꼬까옷을 입고 춤을 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뿐이 아닙니다. 농암 선생은 80이 넘은 고향 어른들을 모두 모아 때때마다 마을잔치를 열었답니다. 그 자리에는 양반은 물론 상인, 심지어는 천민들까지 다 모였답니다. 자, 설을 맞아 농암 선생이 전해주는 이야기, 즉 부모님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 지를 한번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25 min
  • 16회 기생 머리 위에 씌운 신라금관
    1926년 10월 10일 경주 노서동의 고분 발굴장에서 감탄사가 터졌습니다.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재위 1950~73)의 목소리였습니다.
    일제는 당시 일본을 방문 중이던 황태자 부부를 위해 이벤트를 펼쳤습니다. 마침 경주에서 봉황이 장식된 금관이 발견된 것에 착안한 것입니다. 일제는 유물 일체를 노출시켜 놓고 황태자 부부에게 발굴의 피날레를 장식하도록 한 것입니다. 경주를 방문한 구스타프 황태자는 일제가 반쯤 노출해놓은 금제 허리띠와 금제 장식 등을 조심스레 수습했습니다.
    일제는 금관까지 황태자가 수습하도록 부탁했습니다. 황태자가 금관을 들어올리자 환성과 박수가 터졌습니다.
    일제는 스웨덴의 한문 명칭인 서전(瑞典)의 ‘서(瑞)’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서봉총’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서봉총 금관은 10년 뒤인 1935년 9월 엄청난 파문을 일으킵니다.
    당시 평양박물관은 경성박물관으로부터 대여받은 서봉총 출토 금제유물을 주제로 특별전을 열었는데요.
    전시회가 끝난 뒤 뒷풀이 연회가 펼쳐졌을 때 사고가 터집니다. 당시 내로라하는 평양기생들도 충출동했습니다.
    술판이 한창 벌어졌을 무렵이었습니다. 서봉총 금관을 차릉파(車綾波)라는 기생의 머리에 씌운 것입니다. 금제 허리띠와 금 귀고리, 금목걸이까지 휘감았습니다. 당시 평양 박물관장은 서봉총 발굴에도 참여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였습니다.
    일제가 기생의 머리 위에 신라금관을 씌운 사연, 그 안타까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30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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