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이 호족통합을 위해 취한 방법은 바로 혼인정책입니다. 유력 호족들의 딸들과 차례차례로 혼인을 맺었기 때문에 부인은 모두 29명에 달했습니다. 이 부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25명이나 되는데요. 왕건의 뒤를 이을 후계자 후보가 무려 25명이나 됐던 것입니다. 이러니 왕건 뒤에 후계 다툼이 발생할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습니다. 왕건의 뒤를 이을 가장 강력한 후계자는 둘째 부인의 장남인 무(혜종)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 전쟁에도 참여했던 혜종은 왕위에 오르기까지 여러 번의 암살 위협을 받았고, 즉위 3년 만에 병석에 눕고 말았습니다. 결국 왕위는 혜종의 이복동생인 정종과 그의 동생인 광종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광종에 이르러서야 아버지 태조 왕건이 생각했던 고려의 국정 운영 설계에 따라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습니다.
태조 왕건이 그린 고려의 설계도
‘훈요십조(訓要十條)’는 태조 왕건이 죽기 전에 자신의 뜻을 후세의 왕들에게 전하고자 박술희에게 내린 글입니다. 훈요십조는 이전이나 이후 왕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입니다. 나라를 창건한 사람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나타난 일종의 ‘국정운영방안’이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왕건이 발표한 <훈요십조>인데요.
1. 불교를 장려하되 간신과 승려들의 사원 쟁탈은 못하게 하라.
2.도선 스님이 정해 놓은 땅 이외의 곳에 함부로 절을 짓지 마라.
3.장자가 왕위 계승을 하되, 어질지 못하면, 신망있는 자에게 전통을 잇게 하라.
4.고려의 특성에 맞게 예악을 발전시켜라.(거란의 제도는 본받지 마라.)
5.지맥의 근본인 서경을 중시하여, 서경에서 1년에 100일간 머물라.
6.연등(燃燈)과 팔관(八關) 등을 소홀히 하지 말라.
7.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라.
8.차령산맥 남쪽과 공주강(금강) 외의 지방은 산세가 거꾸로 달려 역모의 기상을 품고있으니 결코 그 지역 사람을 중히 쓰지 말라.
9.백관의 녹봉을 제도에 따라 마련했으니, 함부로 증감하지 말라.
10.경전과 역사를 널리 읽어 온고지신의 교훈으로 삼아라.
<훈요십조>는 불교뿐 아니라 풍수 사상, 유교, 고유의 사상 등 다양한 사상이 녹아 있고 왕위 상속자 선정 원칙, 외교 원칙 등 국정 운영의 몇 가지 원칙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열 가지 조항 중 후백제 지역 사람들을 중히 쓰지 말라는 여덟 번째 조항은 늘 논란이 되어왔습니다. 일각에서는 국론을 분열하고 지방을 차별한 정책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줄곧 호족통합정책을 펼쳐온 태조 왕건이 무작정 후백제 출신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맞지 않으므로 일종의 정치적 선언일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실제로 후백제 지역 부근 인물들도 등용한 예가 있어 다방면으로 살펴보아야 할 조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