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선물이라면 망각은 축복이다', 혹은 '망각은 축복이지만 기억은 의지다'. 살면서 자의로든 타의로든 후회할 만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기가 어렵죠. 그러나 시간이, 세월이 약이 돼 준다는 것, 즉 인간의 저 서서히 잊어버리는 능력이 축복과 같은 순작용을 한다는 의미죠. '남이 베푼 것은 잊지 말고 원한은 잊어버리라'는 말도 비슷한 뜻 같습니다.
여행에 관한 책을 놓고 뚱딴지 같이 무슨 얘기냐 싶으신가요? 이 책을 읽으며 제가 갖고 있는 여행에 대한 기억과 망각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갑작스러운(모든 사건은 갑작스럽습니다) 재난에 가까운 돌발상황에 고생했던 여행(주로 출장이 그렇죠)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체로 좋은 기억으로만 윤색돼 남은 것들이 많습니다. '여행은 늘 설레고 즐겁고 신나는 것'이라는 어떤 환상을 갖게 되는 건 그래서일까요. 여행의 반대말이 '일상'이라는 의미도 그렇고요.
한편으로는, 이런 환상이 너무 없는 여행도 좀 그렇습니다. 어떤 분이 주로 가족 여행에 대해 어쩔 수 없이 가는 데 가기도 싫고 가서도 고생, 다녀와도 그냥 그랬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서 한 마디로 '멍'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니, 그럴 거면 뭐하러?... 코로나 시국에 국내 괜찮은 여행지를 재발견했다는 경험담도, 그래도 어서 해외를 자유롭게 다니고 싶다는 소망도 넘쳐납니다. 여행에 대한 환상은 어느 정도까지 여야 할까요. 오늘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고 싶은 책은, 여행작가 환타 전명윤의 [환타지 없는 여행]입니다.
환타 작가는 인도나 홍콩, 일본 오키나와, 중국 상하이 등 아시아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여행책을 찾아보신 이들에게 익숙한 이름일 겁니다. 저도 예전 기억을 떠올려보니 환타 작가의 책을 길잡이 삼았던 일이 여러 번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이름이 '환타(幻打)', 환상을 깨뜨린다는 뜻인 줄은 이번에 알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겠지만 저 또한 사회인이 된 뒤 학생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여행(출장 포함)을 다니게 됐습니다. 해외에 처음 나갔던 것도 회사 다니면서부터였고요. 자금은 어느 정도 늘어난 반면, 줄어든 건 시간, 그리고 체력이었죠. 그러다 보니 '가성비'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고 시행착오보다는 안전한 선택을, 누군가의 뒤를 쫓아 바쁘게 다니던 여행을... 그러던 걸 몇 년 전부터는 조금 내려놨습니다. 이번에 못 보면 다음에 보지 뭐, 다음에도 못 가면? 아쉬운 대로 두지 뭐.
여행에 대한 막연한 환상 외에, 좀 더 구체적인 환상도 있죠. 달리 말하면 선입견이나 얇은 지식(업데이트되지 않은)이라고도 할까요. 인도환타, 홍콩환타, 오끼나와환타 등으로 불릴 정도로 지역 전문가 반열에 오른 작가라서 가능했던 글 같습니다.
작가는 최근 <리멤버 홍콩>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처음엔 홍콩 가이드북의 새로운 버전인가 싶었지만, 부제는 '시간에 갇힌 도시와 사람들'. 2020년 7월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 이후 우리가 알던 홍콩은 사라졌다며 자신이 쓰는 마지막 홍콩에 대한 책이라고 합니다. <환타지 없는 여행>을 읽으면서 비로소 왜 환타 작가의 여행책이 다른 가이드북과 다르게 기억되는지를 새삼 느꼈는데 <리멤버 홍콩>에서는 더욱 절감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 책도 북적북적에서 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계절 출판사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진행: 심영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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