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라는 물건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호사인가. 책장을 넘기며 문득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그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시절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범죄인 흑백 혼혈로 태어나 30대 후반이 된 2021년 현재 미국의 톱스타가 된 사람이 쓴 회고록이라니. 보통의 한국사람에게 이보다 ‘나랑 상관없는 일’인 인생역정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남의 일’이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통찰을 바로 이 책이라는 매개 덕분에 우리 집 소파에 드러누워서 몇 시간 만에 고스란히 나눠볼 수 있습니다. 이토록 ‘남의 일’이 우리 모두와 공명하는 감동으로 나의 마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오늘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는 책, [태어난 게 범죄]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새삼 했던 생각입니다.
트레버 노아는 ‘더 데일리 쇼’라는 정치풍자 토크쇼의 진행자로 지금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코미디언이자 MC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의 BTS 팬들에게는 지난 3월 그래미 시상식의 진행을 맡았던 인물로 낯이 익을 겁니다. 1984년생으로, 이제 30대 후반인데 코난 오브라이언이나 스티븐 콜베어 같은 쟁쟁한 선배들에게 벌써 견줘지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이미 이룬 것보다 가능성이 더 큰 스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이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아는 정도였던 터라, 이른 성공을 거둔 그가 당연히 미국인이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트레버 노아는 우리가 흔히 평범하거나 유복하다고 간주할 만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범죄인 아이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태어난 게 범죄]라는, 원제를 그대로 옮긴 책 제목대로입니다. Born a Crime. 출생이 곧 범죄였다는 겁니다. 흑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이른바 ‘유색인 혼혈’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아공이 온갖 종류의 흑백분리정책을 시행하던 시절, 백인과 비백인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는 것 자체가 남아공에서는 처벌해야 할 범죄, 세상에 숨겨야 하는 비밀이었습니다.
차별과 부조리에 대한 번득이는 통찰에 포복절도할 만한 유머를 곁들인 에피소드들이 가득합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히틀러! 히틀러!”를 연호하며 진행되는 인기 댄스파티 에피소드입니다. 도대체 히틀러를 연호하는 댄스파티가 어떻게 가능하며 뭘 하자는 것인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자기 인생의 비극적인 상황들을 소재로 끊임없이 웃음을 만들어내면서 트레버 노아는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 선악과 승패로 단순히 나눌 수 없는 세상의 다면적인 표정들에 대한 관찰을 곁들입니다. “비백인을 차별했겠지…” 정도로 막연히 다가오는 ‘아파르트헤이트(백인 우월주의 정책)’가 얼마나 복잡하고 세세하게 고안된 억압의 시스템이었는지를 그의 성장기를 통해 샅샅이 보여줌으로써, 소수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벌인 행각들이 그런 ‘땜질식 억압’으로나 가능한 억지였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어째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사라진 뒤에 남아공은 더 큰 혼란을 피하지 못했는지, ‘과거의 수렁’이라는 게 어떻게 현재와 미래의 발목을 잡는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상 속에서 선입견과 편견의 굴레에 갇힌 문제들을 어떻게 구별해 내야 하는지. 그저 웃고 있을 뿐인데 마음 깊이 스며들도록 설득합니다.
이 책을 읽고 트레버 노아에게 관심이 생겨 그의 코미디를 좀더 찾아보았습니다. 미국의 스탠딩 코미디는 지하철에서 휴대폰 동영상으로 보기에는 민망한 스타일이 대부분입니다. 고수위의 욕이나 성적 농담이 당연한 듯이 쉴 새 없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트레버 노아는 그 흔한 욕이나 음담패설을 동원하지 않고도 평범한 소재로 굉장히 웃기는 게 특징이었습니다. 분명히 한참 웃었는데 뒤끝도 개운한 유머, 위선이나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상큼하게 꼬집는 개그를 구사합니다. 일방적인 어느 한 쪽이나 약자, 조롱하는 게 유행인 대상들을 조롱하는 편리한 길을 택하지 않고, 일견 평범해 보이는 한 가지 현상의 여러가지 면을 두루 짚는 방식의 코미디입니다. 모든 코미디언들은 기본적으로 천재라고 저는 언제나 생각해 왔지만, 트레버 노아의 이 품위를 잃지 않는 유머감각은 그야말로 특출한 면이 있습니다. 이 회고록은 그의 이 상큼하고 지적인 코미디의 뿌리가 무엇인지 드러내 줍니다. 유달리 부조리했던 어린 시절의 환경을 헤쳐 나가면서 기른 관찰력이 그의 유머에 깊이를 부여했습니다. 인종을 분리해 차별하는 것이 통치 방식의 핵심이었던 환경에서 인종이 혼합된 사람으로 자라났다는 ‘고립’이 그에게 현상에 함몰되지 않고 그 이면들을 두루 뒤집어볼 수 있는 시선을 키워줬습니다. 유별난 불행의 무게에 질식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을 때, 그의 역경은 오히려 그의 창의성을 끌어내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선 2016년에 출간된 이 회고록은 요즘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영화의 가제는 [패트리시아의 아들]입니다. 패트리시아는 트레버 노아의 어머니 이름입니다. [태어난 게 범죄]는 트레버 노아 본인의 자서전이자 그의 ‘어머니 찬가’이기도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자신으로 살아남기를 포기하지 않은 여성을 엄마로 두는 천운을 누린 아들이 어머니로부터 배운 삶의 자세가 자신을 어떻게 일으켜 세웠는지에 대한 고백의 기록입니다.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으로 나는 오늘의 성공을 일궜다는 식의 어머니 자랑은 때로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어떻게 봐도 칭찬받는 게 당연한 그 상황에 대해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는 자식이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불행했고 얼마나 인내했는지를 강조할 때 같습니다. 본인으로서는 사무치는 이야기일 것이고 실제로 그 희생이 참 대단하긴 합니다만, 마치 어머니는 그토록 희생하고 그토록 불행하고 그토록 자기 자신은 한 줌도 남지 않아야 어머니로서의 무언가를 완수하는 것인 양 하는 태도는 어딘가 불편한 게 사실입니다.
사실 트레버 노아의 어머니도 엄청나게 헌신적입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언제나 베풀고 베풀고 또 베풀었다고 성공한 아들이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이 책에는 거부감이 들기는 커녕 그 아들의 시선을 통해 패트리시아 노아라는 여성을 만나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하게 되는 건, 트레버 노아가 들려주는 어머니의 이야기에선 여전히 패트리시아라는 한 인간의 불굴의 영혼이 우뚝 서 있는 게 뚜렷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이토록 고생하신 어머니!’는 사실 자식의 자아도취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삶에 대한 태도와 정신이 나를 이렇게 일으켜 세웠다’는 객관적인 존경입니다. 둘 사이에는 마치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강 같은 엄청난 간극이 놓여 있습니다. 비슷한 것 같아도, 전혀 다릅니다.
패트리시아 노아는 헌신하지, 희생하지 않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사라질 가망조차 꿈꿔볼 기회가 없는 상황 속에서 자라나면서도 자신의 삶을 자신의 마음이 생긴 모양대로 개척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녀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단 한 발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했던 모든 몸부림 중에 아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과 훈육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장성한 아들이 알아보고 있습니다. 미국에 와서 백만장자 스타가 되는 꿈같은 일은 그녀가 '자신에게 한계를 두지 말라'고 가르친 아들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습니다. 그녀가 날개를 달아준 아들이 감행한 것 같은 탈출이 그녀에게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끝까지 이 모든 것에 마음으로 지지 않고 내 영혼으로 버티고 서서 나아가는 것, 미국으로 건너가 백만장자 스타가 되는 데 성공하지 않더라도 내 삶을 내 뜻대로 내 발이 닿는 데까지 밀어붙이겠다는 마음의 의지라는 깨달음을 날개를 단 아들 트레버 노아가 다시 날아와 남아공에 남은 어머니의 발 아래 소중히 내려놓습니다.
이 책에는 찬란할 정도로 웃기고 감동적인 대목들이 많이 있지만, 압권은 맨 마지막에 나오는 패트리시아 노아의 말 한 마디입니다. 패트리시아 노아는 트레버의 계부로부터 지속적인 학대를 당하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찰은 가정폭력 신고 같은 건 제대로 받아주지 않습니다. 결국 그 남편과 완전히 헤어지는 데 성공한 뒤에 패트리시아는 –우려했던 대로- 전 남편이 찾아와 쏜 총에 머리를 관통 당합니다. (그런데도 그 전 남편은 집행유예로 풀려납니다. 패트리시아가 기적적으로 죽지 않았고, 남자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거짓말을 판사가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어쨌든 기적처럼 살아남은 패트리시아가 울고 있는 아들 트레버에게 던지는 한 마디가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그 한 마디는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한 마디로 이 모자와 함께 울고 웃으면서, 이들이 뿜어내는 놀라운 에너지를 당신의 삶에도 가득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출판사 ‘부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진행: 권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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