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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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pisodes

  • 75회 송중기 앞을 얼쩡거리는 오징어 남편의 비애
    요즘 남편들은 ‘오징어’라는 소리를 곧잘 듣습니다. 그래서 뭐냐고 물었더니 ‘못생긴 남자’라는 뜻이랍니다. 왜 하필 ‘오징어냐’고 또 물으니 평면적이고 윤곽도 뚜렷하지 않는 오징어를 닮았으니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싸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고금을 통틀어 오징어 이미지는 좋지 않습니다. 그 어원이 ‘까마귀 도적’ 즉 오적어(烏賊魚)에서 비롯된 것부터가 그렇습니다. 게다가 먹물로 바다를 흐리게 해서 먹이를 잡는다는 비열한 이미지까지 더해졌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오징어 먹물로 글씨를 쓰면 처음엔 선명하다가 시간이 흐르면 그 흔적이 떨어져나가 나중엔 빈종이로 변한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징어 먹물은 ‘사기계약’ ‘거짓약속’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하지만 오징어는 억울합니다. 그렇게까지 폄훼될 동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선 오징어는 맛도 좋습니다. 건강에도 그만입니다. 남자의 정력에도, 여성의 월경을 통하게 하는데도 좋답니다. 대체 오징어가 인간에게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주인공인 송중기와 비교해서 ‘오징어 아닌 남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안구정화를 위해 드라마 전후 30분간은 눈앞에서 얼쩡대지 말라는 말도 있답니다. 그럴 용의는 있습니다. 다만 한가지만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오징어는 못생겼지만 씹을수록 맛이 난다는 사실을…. 이번 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주제는 ‘송중기 앞을 얼쩡거리는 오징어 남편의 비애’입니다. 오징어 이야기를 하는 김에 사람을 짐승에 비유해서 욕하고 비난하는 일을 역사적으로 더 찾아보았습니다. 악인의 대명사로 종종 인용됐던 올빼미입니다. 역사적으로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천재문인이자 풍운아인 허균, 그리고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 등이 올빼미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사연 또한 곁들이겠습니다.
    33 min
  • 74회 끔찍했던 1592년 4월15일의 전쟁기록
    지금으로부터 1424년 전 이맘 때 조선에서는 큰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임진왜란이었습니다. 당시 1592년 4월13일 30만 명으로 무장한 왜병 가운데 선봉대 2만이 700척에 분승해서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부산첨사 정발이 부산진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전사했고, 왜병은 파죽지세로 동래성을 포위했습니다. 당시 동래부사는 송상현이었습니다. 송상현은 백성들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항복을 권하는 왜병에게 송상현 부사는 “네놈들하고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백성들과 함께 전사하고 맙니다. 그 중에는 제 몸만 지키려고 빠져나온 자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이것이 동래성 전투입니다.
    이 싸움의 참상은 영조 때 동래읍성을 수축하려던 동래부사 정언섭이 왜병의 총칼에 난도당한 백골을 일부 수습함으로써 기왕에 남아있던 기록과 함께 밝혀졌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그 끔찍한 참상이 다시 한 번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부산지하철 공사를 벌이던 중에 무자비하게 살해된 조선 백성들의 유골들이 발굴된 것입니다.
    이번 주 74번째 팟캐스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주제는 ‘끔찍했던 1592년 4월15일의 전쟁기록’입니다.
    30 min
  • 73회 고려의 ‘개경 8학군’ 어디였을까
    최근 중국발로 흥미로운 뉴스가 있었습니다. 베이징 뒷골목 원창(문창·文昌) 지역의 쪽방(11.4㎡)이 10억원 가까운 가격에 팔렸다는 소식입니다. 3.3㎡당 2억8000만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집값이었습니다. 왜 일까요. 학군 때문입니다. 이 동네 이름이 우리 말로 ‘문창(文昌)’이라는 것도 ‘맹모삼천’을 부추겼습니다. 도교에서 ‘문창’은 ‘학문의 신’, ‘공부의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문창’을 모신 사당에 기도한 뒤 과거를 치렀답니다. 베이징의 문창, 강남의 대치동 같은 이른바 ‘교육특구’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습니다. 해동공자의 별명을 갖고 있는 최충의 사립학교, 즉 문헌공도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지금의 대치동처럼 고려시대 유수 학원이 있었던 동네도 있었습니다. 고려의 대문인인 이규보는 이 사설학원에 들어가려는 “선비들이 물고기 떼처럼 모여들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과연 어디였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73회 주제는 ‘고려시대 개경 8학군은 어디였을까’입니다. 블로그(http://leekihwan.khan.kr/) 기사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3 min
  • 72회 율곡 다산도 당했던 조선의 ‘신입생 환영회’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대학가가 몸살을 앓습니다. 이른바 신입생 환영회 때문이죠. 작년에도 어떤 대학에서 신입생들이 묶는 방 이름을 무슨 ‘아이 러브 유방’이니 ‘자아도 만져방’이니 짓고 이상한 춤을 추도록 강요한 일이 일어나더니 올해도 유사성행위를 묘사하는 몸동작을 제시하는 게임을 하고, 여학생을 남학생 무릎 위에 올려놓는 이상한 행동을 하다가 그 추태가 드러난 대학이 생겼습니다. 각 언론의 단골 제목은 ‘술에 찌든 대학’ 뭐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새내기들에게 술을 강제로 먹이고, 성희롱을 자행하며, 군기를 잡는 행위는 도대체 어디서 배운 버릇일까요. 뿌리가 깊습니다. 기록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고려 우왕 때 처음 생긴 신입관리 신고식이 시간이 갈수록 추태로 변했답니다. 심지어 9번이나 장원을 했던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 율곡 이이 선생과 다산 정약용 선생까지도 혹독한 신입생 환영회를 겪었다지요. 그래서 이번 주 팟캐스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72회 주제를 ‘율곡과 다산도 혹독하게 당했던 조선의 신입생 환영회’로 잡았습니다.(블로그 http://leekihwan.khan.kr/) 조선을 강타한 그 무자비한 신입생 환영회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33 min
  • 71회 선죽교 핏자국은 포은 정몽주의 피일까요?
    선죽교 하면 무엇을 연상하십니까. 아마도 만고의 충신 포은 정몽주를 떠올릴 겁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고려를 향한 충심을 버리지 않다가 결국 이방원이 보낸 자격들에게 순절한 곳으로 알려졌으니까요. 선죽교는 곧 만고충절의 성역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북한 역시 선죽교를 국보(159호)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은의 선죽교 순절설은 거짓이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포은이 선죽교에서 순절했다는 기록은 조선 중기의 정사는 물론 야사에서도 전혀 보이지 앟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선죽교에서 흘린 피가 지금도 남아있고, 그 피 때문에 혈죽, 즉 대나무가 자라 선죽교(善竹橋)란 이름을 얻었다는 것도 과장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있게 제기됐습니다.
     선죽교가 정몽주의 순절처로 자리매김하고, 혈죽과 핏자국 이야기가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전후라는 것입니다. 물론 진실은 누구도 모릅니다. 한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선죽교가 포은 정몽주의 흘린 피로 상징되는 만고충절의 성소가 되었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71회 주제는 ‘선죽교 핏자국은 포은 정몽주의 피일까요?’입니다. 블로그 기사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http://leekihwan.khan.kr/)
    33 min
  • 70회 바둑간첩, 한성백제를 멸망시키다
    오는 3월9일부터 역사적인 바둑대결이 펼쳐집니다. 구글이 개발한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와 이세돌 9단 간의 5번기입니다. 이미 1990년대 후반 체스 세계챔피언을 무릎꿇린 인공지능은 이제 경우의 수가 무한대라는 바둑에서 입신, 즉 신의 경지라는 9단, 그것도 세계최정상급 기사인 이세돌 9단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인공지능, 즉 컴퓨터가 경우의 수가 10의 180제곱, 즉 무한대라는 바둑에서 인간에게 도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감정, 직관, 통찰력이 집중되는 바둑에서조차 승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겠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번 대국에서 이세돌 9단을 열렬히 응원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마음마저 컴퓨터에게 빼앗긴다는 게 끔찍하지 않습니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http://leekihwan.khan.kr/)는 인간과 인공지능 대결을 계기로 바둑의 오묘한 세계에 한번 빠져보고자 합니다. 바둑이 얼마나 심오하기에, 바둑이 얼마나 요지경 같기에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떨쳤을까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세력을 떨쳤던 한성백제가 바둑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까요. 이번 주 주제는 ‘바둑 간첩, 한성백제를 멸망시키다’입니다. 바둑의 세계에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31 min
  • 69회 삐라, 그것은 적의 마음을 겨냥한 종이폭탄
    요즘 북한이 뿌린 삐라가 서울시내 한복판까지 떨어지고 있습니다. 50대 이상 사람들이라면 어릴적에 한 번 쯤은 비라를 주워보았을 것입니다. 삐라를 파출소가 갖다주면 연필 같은 학용품을 주었지요. 옛날 생각이 납니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삐라는 어지러웠던 신라 말기 진성여왕 때 서라벌 시내 한복판에 떨어진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진성여왕이여! 신라여! 망하리라!’하며 저주했던 삐라였습니다. 그후 47년만에 정말로 신라는 망했습니다. 한국전쟁 때도 삐라는 마치 눈처럼 뿌려졌습니다. 미군은 25억~40억장의 삐라를 뿌렸다고 합니다. 전쟁 후에도 삐라의 제작기법은 체제유지를 위한 대중홍보수단으로 사랑받았습니다. 물론 남북한 모두 상대방을 겨냥한 냉전의 수단으로 삐라를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삐라는 왜 그렇게 뿌려대는 것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69회 제목은 ‘삐라, 적의 마음을 공격하는 종이폭탄’ 입니다. 블로그 기사(http://leekihwan.khan.kr/)와 함께 들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31 min
  • 68회 박제가의 셀프디스, ‘조선은 똥덩어리다’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실학자 초정 박제가는 무던히도 ‘중국타령’을 해댔습니다. 그의 〈북학의〉에는 중국을 배우자는 뜻의 ‘학중국(學中國)’이라는 표현이 20번도 더 나옵니다. 박제가가 말하는 중국이란 당시 조선 사대부가 오랑캐라 폄훼했던 ‘청나라’였습니다.
     박제가는 대체 왜 중국, 즉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자고 노래를 불렀을까요. 반면 박제가는 조선을 똥투성이의 더럽고 지저분한 나라라 손가락질했습니다. 박제가, 그 분은 왜 그토록 자신이 태어난 조선이라는 나라를 ‘셀프디스’했을까요. 그가 조선의 버팀목이라 하는 사대부를 왜 그토록 ‘조선의 좀벌레’라 비난했을까요. 박제가는 아예 조선말을 금하고 중국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한다는 망언에 가까운 주장을 폅니다. 왜 그는 그토록 중국어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중국어를 모국어로 쓰자고 주장했을까요. 박제가가 조선을 똥덩어리라 셀프디스한 까닭은 무엇일까요.(참고기사는 http://leekihwan.khan.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68회 이야기입니다.
    29 min
  • 67회 민족반역자 연남생의 무덤을 찾은 까닭
    지난해 10월 중국 역사에서 13개 왕조가 도읍지로 정한 낙양을 방문했습니다. 강남문화원 답사팀과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소림사도, 용문석굴도, 백양사도 아니었습니다. 북망산 인근의, 옥수수 수확을 막 끝낸 들판을 찾아 헤맸습니다. 드디어 발견했습니다. 제멋대로 자란 나무가 듬성듬성한 봉분 3개였습니다. 농가 가건물에 강아지까지 묶여서 짖어대던 곳에 있던 봉분 3개의 주인공은 바로 연남생, 연헌성, 연비 등 연개소문 후손들의 무덤이었습니다. 1920년대에 비석이 출토됐고, 지난 2005년에 정확한 무덤의 위치를 찾았지만 지금은 그냥 방치된 채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답사단은 왜 이 초라한 무덤, 아니 민족반역자 연남생 일가의 무덤을 찾았을까요, 이번 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주제는 ‘민족반역자 연남생의 무덤을 찾은 이유는’입니다. 블로그(http://leekihwan.khan.kr/)에 게재한 관련기사와 함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34 min
  • 66회 선화공주님 대체 어디 계십니까
    서동(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삼국유사〉 ‘무왕조’에 등장하는 설화입니다. 서동이 경주 시내에 동요를 퍼뜨려 평소 연모했던 공주를 얻은 뒤 익산에 공주를 위한 절(미륵사)를 지었다는 설화를 의심하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2009년 1월 이 철석같은 믿음이 깨졌습니다. 미륵사지 서탑에서 ‘절을 세운 이는 좌평(16관등 중 첫번째)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왕후’라고 새긴 사리봉안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가 절의 주인공이라면 〈삼국유사〉 내용은 새빨간 거짓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역사고고학계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안타깝지만 ‘선화공주=가공인물’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소리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미륵사가 3개의 절을 합친 구조라는 점을 착안한 색다른 주장도 제기됐습니다. 동·서의 절은 백제 출신인 사택왕후가, 가운데 절은 선화공주가 세웠다는 겁니다. 요컨대 선화공주와 사택왕후는 무왕의 두 부인이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관심의 초점은 지금까지 무왕과 선화공주의 부부묘로 알려진 익산 쌍릉으로 옮겨갔습니다. 이 쌍릉에서 최근 또 한 번 학계를 ‘멘붕’에 빠뜨릴 발굴결과가 나왔습니다. 쌍릉 중에서도 무왕묘로 추정된 대왕묘에서 20~40대 성인 여성의 치아 4점이 확인된 것입니다. 일부 전문가들이 “정확히 7년 전 ‘가공인물’로 폄훼되어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던 선화공주가 부활한 것이 아니냐”며 흥분할 법도 합니다.
    31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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