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좋은 본이 되고 인생의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달은 ‘멋진 어른’ 말고, ‘그냥 어른’ 말입니다.
드라마 같은 데 잘 나오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고민이나 슬픔이 있는 등장인물이 혼자서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장면입니다. 예전에는 그 장면을 ‘연출을 위한 연출’이라는 느낌으로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조금은 우습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니, 꼭 저렇게 포장마차에, 혼자 가서, 깡소주를 한 잔, 졸졸 따라야 해?’
언젠가 가족이 보고 있던 TV 앞을 지나가다가 바로 그런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TV에서 나오고 있던 드라마의 앞뒤 내용도 모르는 제가 불현듯, ‘그래… 저렇게 혼자 소주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때가 누구나 다 있지’ 끄덕이고 있다는 걸 문득 자각했습니다. 성인이, 어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아직 진짜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여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상황과 취향의 문제이고, 저를 포함해 모든 성인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의 ‘나홀로 포장마차’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 남한테 말하지 않거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말할 수 있는 것들보다 훨씬 더 많아집니다. 비교적 사소한 불평이나 불편은 가족친구와 나눌 수 있어도, 정말 가슴을 짓누르는 문제들은 혼자서 처리하거나 때로는 그냥 짓눌려진 채로 오랜 시간을 버티곤 합니다. 징징댈 수 없습니다.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이 먹고 어떻게 이런 것까지 하소연할 수 있겠어’ 어른으로서의 애매한 자각과 ‘해결되는 것도 없고, 이해 받을 수도 없고, 들어주는 사람도 없을 걸’ 상당한 체념을 오락가락하다가 ‘에휴, 나만 참으면 될 일을 누굴 괴롭히겠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배려에 이르기까지. 나중에는 그게 뭐가 됐든 혼자 삼키는 것이 익숙해져서 더 이상 고독을 자각하지도 못하는 상태에 이른 어른들은 귀갓길에 문득 나홀로 포장마차에 들르면서 살아갑니다.
‘아이가 생기면 벽장 속에서 울 줄 알아야 한다.’ [북적북적] 301회에서 함께 읽는 책, 프레드릭 배크만의 장편소설 [불안한 사람들]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 대사야말로 ‘어른이란 어떤 사람인가’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단순히 어른의 정의를 축약한 데 그친 대사가 아니라, 공감이라는 방식을 이용해 위로까지 건네고 있습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울 일이 사라진 게 아니라, 아이들이 보거나 듣지 못하도록 벽장 속에서 혼자 울고 있다는 것을 이 대사가 알아줍니다. ‘그래, 너도 그렇구나. 알아. 나도 그래.’라고 말해줍니다.
올해로 꼭 만 40세, 그 자신 어른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프레드릭 배크만은 2012년 펴낸 데뷔작 [오베라는 남자]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뒤 내놓는 작품마다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스웨덴의 인기 작가입니다. [불안한 사람들]은 그의 2020년 최신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5월에 번역 출간됐습니다. 은행강도라고 불러주기에도 2% (훨씬 넘게) 모자라는 은행강도와 은행 근처에 매물로 나온 아파트 오픈하우스*에 찾아왔다 얼떨결에 그의 인질이 된 사람들, 그리고 이 강도를 검거하기 위해 인질들을 조사하는 경찰까지 모두가 주인공인 작품입니다. 강도를 비롯한 등장인물 저마다 살아온 시간만큼 사연을 지니고 있고, 특유의 유머감각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촘촘하게 깔려 있습니다. (*오픈하우스: 매물로 나온 집의 중개를 맡은 부동산업자가 구매 희망자들에게 그 집을 개방하는 때를 정해놓고 해당 시간에 찾아온 고객들을 안내하는 행사입니다.)
인질들이 은행 강도의 탈출을 돕는 이야기가 되리라는 것은 초반부터 명백한지라 그다지 스포일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의 핵심은 줄거리가 아닙니다. 강도, 인질, 경찰 등 12명 주인공들의 사연이 하나하나 풀려나가며 서로서로 연결되는 순간들이 포인트입니다. 이기적인 악인, 주책맞은 노인, 성마른 젊은이, 쪼잔한 불평꾼… 초반부엔 그저 얄팍한 스테레오 타입으로 등장하는 이 어른들 하나하나의 깊은 이야기가 진득하게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모두에게 반전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우리가 흔히 짐작하는 어른의 소설이라기보다는 ‘동화’에 더 가깝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함께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작가 본인이 전혀 감추지 않습니다. 강도에는 어울리지 않는 강도와 인질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질들이 결국 서로서로를 돕고 달래고 공감하고 위로하면서,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들이 되어가는 전개는 ‘치밀’하다거나 ‘현실적’이라는 수사와는 거리가 멉니다. 대신, 저 하늘에 부드러운 솜사탕 모양으로 떠서 햇빛을 받아 희게 빛나고 있는 구름처럼 아련한 희망사항 같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습니다.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은 실제로 15년 전 총격 인질극에 휘말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다리에 총상까지 입었고, 당시의 충격으로 생긴 공황장애로 이후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왔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작품의 동화 같은 톤이 더더욱 새롭게 느껴집니다. 현실은 이 작품의 전개처럼 몽글몽글 아련하게 풀려나가지 못할 때가 더 많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고 아마도 작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타인의 악의와 인생의 불확실성이라는 공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왔을 끔찍한 경험의 기억으로 오랜 기간 고통을 겪은 작가가 결국 길어올린 이야기에 이처럼 위로와 희망이 담겨 있다는 것, 어른들이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동화가 탄생했다는 것이 참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어른들을 위한 소설을 동화라고 표현할 때 흔히 따라오는 ‘유치하겠거니’ 하는 선입견도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동화의 톤으로 풀어내고 있을 뿐, 이야기 구비구비마다 사회와 인생 곳곳에서 발생하는 ‘어른의 사정’들을 다각도에서 날카롭게 짚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그저 재미와 웃음에 젖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 새 묵직한 공감과 따스한 위로까지 얻도록 짜여 있는 설계가 성공적인 작품입니다. 이런 톤의 작품들에 대해 ‘불량식품 같은 가짜 위로, 손쉬운 위로’를 팔려고 한다고 의심하기 마련인 ‘어른의 시선’을 상냥하게 다독여 누그러뜨립니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갖고 있는 ‘나홀로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인다고 해서 어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어른은 없습니다. 그런데 드라마의 클리셰로 다시 돌아가본다면,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있는 드라마 주인공에게는 항상, 그가 홀로 거기서 그러고 있으리라는 걸 짐작해주는 속 깊고 넉살 좋은 친구가 한 명씩 존재합니다.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았는데도, 드라마에선 꼭 그런 친구가 나홀로 앉아있는 포장마차의 휘장을 걷고 들어와 내 곁에 앉아줍니다. 그리고 둘이서 소주 한 병을 나눕니다.
어쩌면 현실에는 그런 친구, 내가 포장마차에 혼자 앉아있다는 걸 알아주는 친구 한 명 없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책은 누구에게나 바로 그런 친구 같은 손길을 건네 주겠다고 작정한 책입니다. 믿고 볼 수 있는 재미와 위로도 작정하고 준비한, 우리를 위한 동화입니다.
혼자 기울이고 있는 소주잔 너머로 실은 친구의 그림자가 비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몰래 피어오르는 걸 어쩔 수 없을 때, 이 책을 선택해 봐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출판사 ‘다산책방’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진행: 권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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