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노인이 있습니다. 연애소설도 있습니다. 이 노인의 취미는 연애소설 읽는 것입니다. 새삼스레 첫눈에 반하거나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말랑말랑한 풋사랑과는, 서울에서 아마존만큼이나 거리가 있을 것 같은 노인이 연애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건 봄날에 가만히 광합성하며 천천히 책 읽는 것과 비슷한 호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번 주 북적북적의 선택은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입니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칠레 출신의 작가입니다. 책 앞머리 작가 소개를 보면 "반독재 반체제 운동에 참여하다 수감되었고... 오로지 목숨을 구하기 위해 피노체트의 나라에서 도망쳐야 했다... 살해당한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바치는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발표했다"라고 합니다. 1989년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은 아마존 강 근처의 어느 마을에 사는 노인이 주인공입니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나서 자란 고향을 떠나 정부가 말한 '약속의 땅' 엘 이딜리오라는 개간지에 와 말 그대로 '개고생'합니다. 함께 고생하던 아내는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안토니오는 현지 인디오인 수아르 족과 친구가 되어 밀림의 삶에 완전히 동화해 수아르 족 아닌 수아르족으로 최고의 사냥꾼으로 거듭나죠. 책과는 꽤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삶을 살았던 그가 왜, 그것도 연애소설을 읽게 됐을까요.
명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걸 노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각한 뒤 뭔가를 읽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이유가 뭔지, 또 그게 왜 하필 연애소설이었는지...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노인의 취향이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딱딱하고 형식적인 내용'이나 '자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세상의 이야기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제외했더니 연애소설이 남았다는 데엔 묘하게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그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수색대 동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살해당한 환경운동가에게 바쳤다고 밝힌 만큼, 소설에 등장하는 밀렵꾼이나 뚱보 읍장, 살쾡이 등이 상징하는 건 꽤 분명해 보입니다. 어쩌면 '노인과 살쾡이', '노인과 아마존'이 더 어울리는 제목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책과는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았던 노인이 사랑과 연애라는 인류 보편의 주제를 나타낸 연애소설에 빠져드는 장면들,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곱씹어 읽으며 천천히 읽어나가는 과정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생각해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나 일자무식의 수색대 동료들이 노인이 읽어주는 연애소설에 몰입하는 대목도 꽤나 흥미진진합니다. 작가도 그런 마음으로 썼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결국 제목은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 됐겠죠. 처음 읽을 때보다 다시 찬찬히 읽을 때가 더 마음에 남았습니다. 노인이 연애소설 읽듯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작년 코로나19에 감염돼 투병하다 별세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바랍니다.
*출판사 열린책들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진행: 심영구 기자
ART19 개인정보 정책 및 캘리포니아주의 개인정보 통지는 https://art19.com/privacy & https://art19.com/privacy#do-not-sell-my-info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