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6.
-국제와의 연결 -때에 따라 희와 비가 엇갈리는 바다와 육지의 만남
사는 곳이 섬이거나 삼면이 바다인 곳, 또는 일부 만이라도 바다가 있는 육지라면 언젠가는 바다를 매개로 하여 외부에서 온 사람과 만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타이완을 예로 들어 역사서 속에 몇 번 등장을 하였는데 선박이 해상에서 조난을 당하며 선원들이 현지에 대한 기록을 일기로 남겨 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한국의 경우 ‘탐라문견록’과 같은 저서로 지금의 제주도와 국제와의 연결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7월 중순, 특별 취재 차 타이난을 다녀왔다. 올해 타이난은 1624년 네덜란드가 지금의 타이난 안핑구를 동인도회사 거점으로 삼으며 타이완의 국제와의 연결, 하나의 이정표로 보고 있어, 일련의 ‘타이난 400’ 관련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다.
오늘 타이베이 토크에서는 노 작가가 탐라문견록에 대해서 공유한다.
《탐라문견록》이란 1731년 9월 정운경(1699~1753)이 제주에서 듣고 본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정운경은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정필녕을 따라 제주에 와서 《탐라문견록》을 남긴 것이지요. 《탐라문견록》에는 정운경이 제주 전역을 여행하고 쓴 여행기와 제주의 특산물인 귤을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한 글도 있지만,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풍랑을 맞아 이국으로 표류한 제주도민의 이야기를 기록한 표류기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18세기 100년 동안만 하더라도 일본으로 표류해온 조선인이 공식기록으로 남은 것만 409건에 표류민의 숫자도 수천 명에 달한다고 하고, 비공식적인 것까지 합치면 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렇게나 많이!!! 이렇게 많으니 나중에 표류해온 사람이 먼저 표류해온 사람 가운데서 고향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또는 아버지와 아들이 상봉하기도 하였다
제1화: 1687년 조천관 주민 고상영의 안남국 표류기
-고상영의 안남 표류는 안남측이 인도적 견지에서 중국 상선에 부탁해 이들을 되돌려보냈고, 교류를 원하는 공문까지 보냈기 때문에 당시 크게 회자
《탐라문견록》을 보니 제일 멀리 표류한 사람은 1687년에 베트남까지 표류한 고상영 일행입니다. 이들은 베트남과 일본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하는 중국 상선을 타고 돌아왔습니다.
제2화 : 1729년 신촌 사람 윤도성의 대만 표류기
제3화 : 1729년 아전 송완의 대만 표류기
제4화 : 1679년 관노 우빈의 일본 취방도 표류기
제5화 : 1698년 성내 백성 강두추?고수경의 일본 옥구도 표류기
제6화 : 1724년 도근천 백성 이건춘의 일본 대마도 표류기
제7화 : 1723년 조천관 백성 이기득의 일본 오도 표류기
제8화 : 1723년 성내 백성 김시위의 일본 오도 표류기
제9화 : 1726년 북포 백성 김일남?부차웅의 유구국 표류기
- 조선 후기 영조 시절인 1727년 2월 제주도 북포의 백성 김일남 등 9명이 추자도 근방에서 풍랑을 만나 배의 키와 노가 부러져 한달 이상 남쪽으로 표류했다. 어느 섬에 닿았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현지 주민들에게 배 안에 있던 <언해천자문> 을 보여주면서 서로 문자에 따른 소리를 익혔다. 그러다 저쪽 주민들이 “고려! 고려!”하고 외쳤다. 김일남 등은 고려가 조선의 옛이름인줄 몰랐다. 천자문에서 조(朝)자를 짚어주고 선(仙)자를 보여주자 현지인들이 말했다. “그래 조선과 고려는 본래 한 나라야.” 현지인들은 글씨를 써서 ‘유구국’이란 세 글자를 보여주었다.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였다.
제10화 : 1704년 관노 산해의 일본 양구도 표류기
제11화 : 1701년 대정현 관리의 일본 옥구도 표류기
제12화 : 1729년 도근천 주민 고완의 일본 오도 표류기
제13화 : 1720년 대정현 백성 원구혁의 일본 신공포 표류기
제14화 : 1730년 관노 만적의 가라도 표류기
《탐라문견록》에는 모두 15건의 표류기가 실려있는데, 그 가운데 제 눈에 띄는 것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공통적인 것이 표류민들이 제주도 사람인 것을 숨기려 한다는 것입니다. 왜? 1612년에 유구국(오끼나와) 태자가 탄 상선이 제주에 표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주 목사 이가빈과 판관 문희현 등이 이 상선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그들을 죽였다는군요.
아니? 유교국가에서 어떻게 어려움에 부닥친 이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바다를 무시한 조선의 관리들 행패에 혀를 차게 되는군요. 비록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이지만 결국 인접 국가에 이런 소문은 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표류한 제주도민은 보복이 두려워 제주도민을 숨기려고 애를 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