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숫자이기만 했던 2021년도 절반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지나간 모든 것도 순간이나 "덧없이 사라져 가지만 완벽하게 근사한 순간들은 분명히 있"죠.
저에겐 곰을 가까이서 봤던 그 순간이 꽤 근사했습니다. 트레일로 유명한 여행지를 방문했는데 먼저 다녀온 사람들이 곰을 봤다기에 저도 멀찍이서 보고 싶었습니다. 바로 전날 곰이 나왔다는 그곳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뱅뱅 돌았는데도 다람쥐 한 마리 나오지 않아 '나와는 인연이 없나' 했는데 막 차를 몰고 모퉁이 돌아 나오는 그때 나타났습니다. 차 유리창 왼쪽 위 구석에 자그맣게 보였던 갈색 털뭉치! 그렇게 저는 그날 곰을 봤습니다. 여행에선 매번 그렇지는 않지만 일상과 딱 구분되는 그런 순간이 종종 나타나곤 하죠.
여기 무려 9년에 걸쳐 쓴 여행기가 있습니다. 2012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해 독일 아헨, 일본 오사카, 타이완 타이베이, 영국 런던까지 5곳. 조금 성기긴 하지만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해도 될 만한 이 여행기의 제목, 이번 북적북적의 선택은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입니다.
현지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 여행, 친구가 함께 가자 해서 떠난 여행, 엄마랑 같이 간 여행, 경품에 당첨돼 갔던 여행, 그리고 무려 신혼여행까지 있습니다. 첫 번째 여행은 뉴욕, 이때 2012년은 작가가 출판사 직원과 작가의 이중생활을 청산하고, 즉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회사를 관두고 전업작가의 세계로 뛰어든 그때입니다. 지금이야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걸 누구나 알지만 당시엔 인생의 큰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아무도 알 수 없던 그때, 뉴욕에서 공부 중인 친구 L을 만나러 떠나면서 이 여행기도 시작됩니다.(그 기록은 9년 뒤에 완성, 출간되고요.)
친구 집에 머물지만 주로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니며 혼자 하는 여행, 작가가 느끼고 관찰한 뉴욕은 의외로 친절하고 다정한 곳, 그러나 관광객으로서 꽁하는 순간도 생깁니다. 코로나 시국엔 그마저도 사치이지만 이 여행은 2012년이었다는 걸 감안해야 하죠. 지금 뉴욕의 관광객은 이전에 비하면 5분의 1, 혹은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 이후 여행이 본격 재개되면 뉴욕은, 또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바뀔까요.
여행에서 늘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떨 때는 행운의 연속이구나 싶기도 합니다.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오고 또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이 삶의 큰 행운이 아닐까, 요즘엔 더욱 그렇습니다. 인생은 그런 여행과 일상, 그리고 행운들이 겹겹이 쌓여서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9년 전, 7년 전 당시에 정세랑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이 책에 함께 담겨 있습니다. 작가가 다정하게 전해주는 글을 읽으면서 언젠가 다녀왔던 여행과 언제고 다시 떠날 미지의 그곳을 그려보면 어떨까요. 각 여행기에는 "( )만큼 뉴욕/아헨/오사카/타이베이/런던을 사랑할 순 없어"라고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빈칸에 들어갈 말은 뭘까요. 정세랑만큼 뉴욕..을 사랑할 순 없어? 심영구만큼/너만큼/나만큼?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일까요.
이 책을 읽고 낭독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저의 행운을 소비했습니다.
*출판사 위즈덤하우스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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