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층의 무능함으로 인한 전쟁, 병자호란
그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 백성
인조의 치욕은 삼전도에서 끝났을지 모르지만
포로로 잡히고 첩으로 끌려가고
환영받지 못하는 포로와 환향녀가 된 백성들의 끝이 없는 고통.
핵을 볼모로 한 북한의 전쟁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북한 지배층이 꼭 들어줬으면 좋겠는 에피소드!
<인조실록> 1637년 1월 18일, 국서를 찢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국서(國書)를 수정하였는데, 예조 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리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전하를 위하는 신하들의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국서를 찢어 이미 죽을 죄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을 처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임금이 한참 동안 탄식하다가 대답하였다.
“경의 말이 정대하다는 것은 아나 실로 어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김상헌은 거듭 재고를 요청했다.
“예로부터 군사가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정강(靖康)의 변 당시 (송나라) 신하들도 황제가 나가서 금나라 왕을 보면 생명을 보전하고 종사를 편안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급기야 사막으로 잡혀가게 되자 개봉에서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인조실록> 1637년 1월 30일
사로잡힌 백성들이 왕을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병자록> 나만갑 1637년 2월 8일
“여러 해를 두고 강화도를 수리하여 백성들을 의지하게 했는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더냐? 나라의 책임을 맡은 자들이 날마다 술 마시는 것을 일삼아 백성들을 모두 죽게 했으니 이것이 누구 탓인가? 자식 넷과 남편이 모두 죽고 다만 이 몸만 남았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 이런 원통한 일이 있단 말인가.”
<인조실록> 1638년 3월 11일, 속환녀를 어찌하랴
신풍부원군 장유가 예조에 단자를 올렸다. 외아들의 처가 강화도에서 잡혀 갔다가 속환되어 와 지금은 친정에 가 있는데,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반면 전 승지 한이겸은 노복으로 하여금 격쟁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되었으나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좌의정 최명길이 의견을 내놓았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몸값을 내고 되찾으려는 사람도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으로 만드는 처사입니다.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물정으로 참작해 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인조실록> 1638년 3월 11일, 사평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사로잡혀 간 부녀들은 비록 본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개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