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약속했던 것처럼

비가 이렇게 오는데 자전거를 끌고 왔어요.

너무 오래 빌린 거 같다네요.

난 집에 들어오라구 했어요. 근데 싫대요.

들어와서 수건으로 물기 좀 닦으라고 했는데 싫대요.

그래서 우산이라도 주겠다고 했더니 역시 싫대요. 

그 아이가 돌아가고 내 마음엔 두 시간 동안 폭우가 쏟아지네요.

어떻게 17년 동안 한결같은 아이가 

하루아침에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거죠?

나는 그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아이지만

요 며칠 나는 그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모르는 둔한 아이가 돼버렸어요.

갑자기 어렸을 때 생각이 났어요. 

내가 사내아이들한테 놀림받고 있을 때 

그 아이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던 기억,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사내아이들이 우르르 도망갔었어요. 

"난 너 아니면 숙제를 할 수도 없었고,

수학 문제 100점 맞을 수도 없었어.

난 너 아니면 운동장 다섯 바퀴 뛰는 걸 완주할 수도 없었고, 

너 없이 그 지옥 같던 사춘기는 보낼 수도 없었을 거야. 

그리고 난 너 아니면 친구도 없는데/

내 눈을 피하기 시작한 그애랑 

새로 생긴 아이스크림 가게에 갈 수 있을까요?

나랑 눈도 안 마주치는 그 아이랑 올여름 배낭여행을 갈 수 있을까요?

자꾸 비가 내리면 안되는데 

내 맘속엔 여전히 많은 비가 내리네요. 

이제 정리 

적어도 난 이 아이랑 결혼할 수 없고 

같이 살 수 없으리란 걸 잘 알아요, 이유가 분명하거든요.

우리가 안 지는 그러니까, 유치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니까 

17년 됐거든요. 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이 아이랑은 결혼 같은 거 안해요. 

엄마 아빠 두분 모두 그 아이 엄마 아빠랑 친구세요.

내 동생과 그 애 동생은 사내녀석들이긴 하지만

나처럼 14년지기 친구구요. 

우리 집은 그러니까 따로만 살 뿐

이미 같이 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아빠까 그 애 집에 들르셔서 약주 드시고 늦었다는 핑계로

그애 아버지랑 주무시는 건 엄마가 용서해주시는 정도니까 

말하면 다 했죠, 뭐.

근데, 난 왜 그런 게 무서울까요?

17년 동안 많은 시간 함께 자랐다는 사실이,

두 사람을 묶게 하는 데 첫 번째 장애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왜 손을 잡고 키스를 하거나 하는 상상만 해도 징그럽고 이상할 까요?

나, 이렇게 철이 드나 봐요.

그애랑 뭐 하는게 이젠 재미없어요.

그애를 놀리는 것도, 또 그 애한테 리포트를 부탁하고 받아내는 것까지도,

모두모두 싱겁고 밍밍하고 그래요.

엄마는 유리잔에 금가면 거기에 식물을 기르시지만,

접시에 이가 나가면 그걸 화분 받침으로 쓰시지만, 난 그런 거 안 할래요.

그애한테 빌린 자전거도, 

이제 그애 집 마당에 가져다 놓아야겠어요.

나는 하나도 대단하지 않아요--여자

며칠전, 버스에서 날 봤다고 따라온 아이예요. 

전화번호 알려 달라는데 알려줄 수도 없고,

언제 보자고 하는데 대뜸 그럴 수도 없고 해서

그냥 저는 차갑게 그 아이를 대할 뿐이었습니다.

근데 매일 밤, 집 앞에서 날 기다리네요.

나이가 어려 보이기에, 몇살이냐고 물었더니 나보다 세 살이 어려요.

내 나이를 알려줬더니 근데 자기는 나이 같은 거 상관없다구,

만나줄 때까지 매일 집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그런 지가 벌써 열흘이 넘었어요. 

근데 난 그 아이를 집 앞에서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매일 만나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요?

오늘은 제가 이런 말을 하고 말았어요.

"너 자꾸 이러면..너 다신, 안보고 싶어질 거야"

그러곤 급히 집으로 들어왔는데 세상에나 할말이 따로 있지.

그 아이한테 차갑게 대하고 나서 집으로 들어간 다음

마음이 안 편해 다시 나가봤어요

근데 그 아이가 돌아가지 않고 동네 포장마차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네요

어떡하죠? 저 뒷모습이 너무 안돼 보이는데..

앞에 가서 앉을까요? 어떻게 할까요?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려요--남자

천사가 몇초 동안 내몸 안에 들어왔다 나간 모양입니다. 

난 그냥 집앞 포장마차에 혼자 앉아 소주 한잔을 마셨을 뿐인데 

갑자기 마음은 평화로워지고, 

있지도  않던 용기가 생겨서 가슴에,

머리에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순간 이세상이 그녀 

단 한 사람으로 좁혀지기 시작합니다. 

"너 자꾸 이러면 너 다신 안 보고 싶어질 꺼야!!'

그녀의 이말은 날 싫어한단 말이 아니거든요. 

정말 나를 싫어한다면 독하게 이렇게 말해야 하는 거죠. 

너 자꾸 이러면 끝이야 끝! 이렇게요. 

내가 매일 그녀의 집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직 나는 그녀에 대해 그녀의 집밖에는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에요. 

난 제대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고, 

그래서 난 그거 하나에만 매달리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내일도 나는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릴 겁니다. 

그러고는 "너를 너무 좋아해서 미안해"라고 말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니가 싫어하는 일이.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이라서 더 미안해" 

라고도 말해야겠습니다. 

난 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여자

일주일에 한번 우리 집을 찾아와 주는 친구,

처음, 녹음 테이프에 녹음된 음성을 들으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 까?"하고 엄마한테 물었어요. 

"이상하게 이 사람 목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뛰어요."

엄마는 굉장히 잘생긴 친구라고 대답해줬고

늘 심심해하는 내 옆에 그 친구를 잡아두기 위해 

엄마는 늘 그 친구가 올 때마다 식사를 하고 가라고 권하세요.

오늘도 내 방 기다란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그 친구, 그새 잠이 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전 물어보려던 말도 참고 

그 사람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만 있었죠.

근데, 잠시 후 그 사람이 내 어깨로 기대어왔어요.

싫지 않았어요.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난 그 친구의 꿈속 주인공이 되어서 

꿈속에서만큼은 그 사람 얼굴을 볼 수 있음 참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죠. 

그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대신 

이렇게라도 오래 내 옆에 있어줬음 좋겠다.

생각해서였나 봐요. 

그녀를 생각하는 내 마음--남

우리 학교 방송국에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를 해요. 

아나운서들이 책을 읽으면 

그걸 녹음해서 필요한 장애우들한테 직접 가져다주는 일이에요. 

우리집에서 가까운 곳에 그녀가 살아서 

일주일에 한번씩 

집에 가는 길에 그녀한테 들러 테이프를 전해주거든요. 

책을 읽고 싶어도 점자책이 많이 없었는데 고맙다는 그녀, 

그녀를 처음 본 것도 벌써 몇달이 됐는데 

항상 그 집엘 가면 어머니는 저한테 뭘 먹이려고 해요. 

배 안 고프다고 해도 밥을 차려주시고, 

밥을 먹고 왔다고 해도 밥을 차려주시는데 저야, 좋죠, 뭐.. 

같이 밥 먹음 친해진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우린 친구가 된 거구요. 

오늘도 난 그녀의 집에 갔다가 뚝딱 식사를 하고나서 

그녀의 방에 들어갔는데, 

그녀의 방 소파에서 살짝 잠이 든 거예요. 

밥 얻어먹는 것도 모자라 이젠 잠까지 자다니! 

그래요. 이상하게 그 집에 가면 모든 게 편했어요. 

그녀를 생각하는 내맘도 그래요. 

32. 널 기다릴 수 있을 까? --여

니 사랑이 나를 비 맞게 한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고 

손바닥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소나기를 바라보면서 

난, 이렇게 중얼거렸어. 

그래, 넌 소나기야

맞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맞으면, 

약속 시간에 늦을 수밖에 없는 소나기, 

옷이 다 젖고 나서야 

괜히 비를 맞았네 하며 후회하는 것. 

하지만 맞지 않게 되더라도 결국은 후회하게 되는 거지. 

저 소나기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현재 

아무 사랑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난. 

생일 파티에 안 와서 조금 걱정했어. 

하지만 생일 같은 건, 나한테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 돼버렸어. 

생일이면 혼자 있기 싫어서 아는 사람들을 다 불러내서 

내 생일을 잊으려고 하거든. 그러면 금방 잊혀지고 말거든. 

하지만 니 생일은 다를 거야. 

니가 스무 살이 되는 생일은 특별할 거야. 

그리고 니 생일을 너보다 더 간절히 기다린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도 너만큼이나 특별할 거야. 빛날 거야. 

비가 많이 와. 

학원 끝나고 집으로 가는 시간이겠구나. 

우산은 잘 챙겨 가지고 다니지?

31.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날 기다려줘요. (남)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돼요? 

진짜 나이 스물이 될 때까지, 내가 달려가서 푸근하게 

안아줄 수 있을 때까지 그때까지만 기다려주면 안돼요?

아무도 만나지 말구요. 

아무도 사랑하지 말아요. 

그냥 내가 달려갈 그때, 

그날만 기다리고 있음 너무 심심할까요? 

생일에 못가서 미안해요. 

잊은 건 아닌데 그 자리에 가기가 싫었어요. 

그 자리 가면 내가 너무 초라할 것 같아서요. 

남들은 멋진 선물 준비할 텐데, 그 사람들은 날 아이 취급할 텐데,

그래서 가고 싶었지만 안 간 거예요. 

아니요, 어쩌면 어떤 멋진 형이 나타나서 

장미꽃 다발을 내밀면서 멋지게 사랑을 고백할지도 모를 일이고, 

그 사람 고백을 받아들이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게도 될까봐서 

안 갔어요. 

대신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선 채로 버스를 몇대 보내고 나서  

그냥 마구 달렸어요 

더운데,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심장은 터질 것 같은데,

날 달리면서도 그렇게 외쳤어요.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조금만 날 기다려주면 안돼요? 

이렇게요. 

30.이틀 동안의 벚꽃같은 만남--남자

친구가 배낭 여행을 간대서 아빠 차 빌려 공항까지 운전을 해줬어요. 

워낙 날 잘 챙겨주는 녀석이고, 또 혼자 보내는 것도 안쓰러워서 

기꺼이 봉사를 해줬죠. 

공항엔 처음 가봤어요. 정말 크고 멋지더라구요. 

그래서 친구 들어가고 나 혼자 여기저기 구경하는데, 

어떤 여자가 나한테 말을 시켰어요. 영어루요. 

시내까지 어떻게 가냐고 묻는 것 같았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목이 탔어요. 

왜냐하면 말은 알아들었는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될지 몰라서요. 

그래서"팔로 미!"라고 외치고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죠. 

알고 봤더니 재일교포 3세래요. 

뭐 기꺼이 시내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죠. 

그렇게 만났고, 이틀동안 서울 시내를 친절하게 안내해줬고, 

좋은 시간들을 보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우리 헤어졌죠. 

근데! 

그녀가 다시 온대요 

왠지는 모르지만 다시 온대요. 

그녀를 기다린 것도 아닌데, 

그녀가 온다니 다시 보고 싶어지네요. 

29. 너랑 연락하고 싶은데 어떡해야 돼? --남자

우리 셋이 처음 만나던 날, 

먹을 것도 먹었겠다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내가" 우리 뭐하지?" 했더니 니가 그랬지. 영화보러 가자구. 

그래서, 근처에 있는 극장에 가서 영화표를 끊는데 

우리가 보고 싶어하던 영화표가 두 장밖에 없었어. 

그런 경우 좀 그렇지? 

좀 그렇긴 하지만 당연히 다른 영화를 봐야 하거나, 

아니면 당연히 영화를 안 보고 딴 걸 하거나 그래야 하는데 니가 그랬어. 

그럼 너휘 둘이 봐, 나 몸도 안 좋고, 그냥 집에 갈래. 

넌 그건 모르지? 그렇게 말하고 휑하니 사라져버려서 

남아 있는 우리 두 사람이 얼마나 놀랐는지 

친구가 나한테 그랬어. 

니가 불편한가봐. 저렇게 휑하니 가는 거 보면... 

하는 수 없이 둘이 영화를 보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꼭 내가 싫어서 간 것만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드는 거야. 

나 원래 좀 무딘 편이지만 

누가 나 좋아하는 건 금방 알아차리는  녀석이거든. 

나, 너 좋아해, 너 싫지 않다고. 

그런데 걱정이다. 친구한테 너 연락처 알려달라면 

걘 꼬치꼬치 묻기만 하고 분명히 가르쳐주지 않을 거 뻔한데, 

그러게, 왜 그날, 그렇게 갑자기 가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