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청년을 사지로 몰아넣는 신라 귀족들의 잔인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화랑'
일제에 대항하여 전 재산을 무장투쟁에 쏟아부은 "아나키스트, 이회영"
고대와 근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시시콜콜 파헤치는 본격 역사 뒷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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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2-1 / 김부식, <삼국사기> 권4, 진흥왕 37년(576년)
봄에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미녀 두 명을 선발했는데
하나는 남모(南毛)이고, 하나는 준정(俊貞)이었다.
이에 무리 3백여 명을 모이게 하였는데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였다.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 강제로 술에 취하게 한 뒤
끌고 가서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은 이 일로 엎드려 죄를 빌었으나 목이 달아났다.
무리들도 화목을 잃고 흩어졌다.
그 후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뽑아 화장하고 장식하여
화랑(花郞)이라 부르며 받들게 하였다. 그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도(道)와 의(義)를 연마하였다. 혹은 서로 노래하고 음악을 연주하며
산수를 유람하니 먼 곳에까지 기쁨과 즐거움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것을 통해 사람됨이 사악한지 바른지를 알게 되었으므로
그 가운데 착한 자를 뽑아서 조정에 천거하였다
낭독 2-2 / 김부식, <삼국사기> 권47, 열전
관창은 신라 장군 품일의 아들이다. 용모가 우아하여 젊어서 화랑이 되었는데
다른 사람과 곧잘 사귀었다. 16세에 이미 기마와 활쏘기에 능숙하였다.
당나라 현경 5년 경신(660년)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당나라와 함께
백제를 침공하는데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 황산벌에 이르러
양쪽 군사가 대치하게 되었는데 그의 부친 품일이 관창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의기가 있다.
오늘이야말로 공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를 내지 않겠느냐?"
관창은 곧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바로 적진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 적에게 사로잡힌 채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보내졌다.
계백은 어린 관창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했다.
"신라에는 기특한 사람이 많구나. 소년도 이렇거늘 장사들은 어떻겠는가?"
계백은 곧 그를 살려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했다.
"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지 못한 것이
심히 한스럽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입하여 용감히 싸웠다.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머리를 베고는 말안장에 매어 돌려보냈다.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말했다.
"내 아들의 얼굴과 눈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능히 나라를 위하여
죽을 줄 알았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
신라군이 그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의지를 다진 다음,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면서 공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태종 대왕이 급찬의 직위를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으며,
그 가족에게 당나라 비단 30필과 이십승포 30필과 곡식 1백 섬을 하사하였다.
낭독 2-3 / 이은숙, <서간도 시종기>, 만주로 간 이회영 일가
“여러 형제분이 일시에 합력하여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 부동산을 방매하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방매를 하느라
이 얼마나 극난하리오.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 집이 예전 대가의 범절로
남종 여비가 무수하여 하인들의 입을 막을 수 없는데다 한편 조사는 심했다.
1910년 12월 드디어 여러 형제 일가족 4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넜다.
남편은 마차와 나란히 말을 타고 풍우같이 달리신다. 나는 마차 안에서
혹 얼음판에 실수하실까 조마조마했다. 6~7일 지독한 추위에
좁은 마차에서 고행했던 말을 어찌 다 적으리오.
낭독 2-4 / 이회영과 김종진의 사상담화, 1927년 9월
“나는 자유연합이 독립운동의 견지에서 가장 적절한 이론이라고 본다.
모든 단체와 조직은 단원 자신들의 자유의사에 의해 결성된 것이지
강제적 명령에 따라 결성된 것이 아니다. 강철의 조직이라는 공산당도
적색러시아처럼 정권을 잡은 후에 복종의 규율이 생겼지
그 전에는 자유합의에 의해서 행동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그 자체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오직 사람들 간의
자유합의가 있을 뿐이다. 독립 후에도 일체의 부자유,
불평등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새 나라의 정치구조는 권력의 집중을 피하여
분권적인 지방자치제를 확립해야 하고, 그 지방자치체들의 연합으로
중앙 통치기구가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는 일체 재산의 사회화를
원칙으로 하되 자유와 평등의 원리가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합리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교육은 사회 전체의 비용으로 부담하고 실시하여
가난한 집 아이들도 누구나 배울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한다.
무정부주의는 공산주의와 달라서 획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기본원리를 살려나가되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 실정에 맞게
적절히 변화를 가미하면 된다.”